지은이 _ 김정란 판형 _ 신국판 쪽수 _ 274쪽
정가 _ 9,800원 ISBN _ 89-90720-13-3 04300
분노의 역류
김정란의 세 번째 산문집-문학, 문화, 시대에 관한 에세이
우리는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우리는, 「르몽드」지가 한국의 탄핵 사태를 두고 빈정거리며 논평했듯이, 참으로 ‘기괴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사이 우리가 축적한 민주적 역량을 근본부터 비웃는 이러한 작태는, 이 사회에서 상식을 가진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정말로 어쩔 것인가. 내 영혼 깊은 곳에, 생의 저 건너에서 기원하는 신성한 떨림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있다 하여도, 나는 이 땅에서 한 사람의 시민인 것이다. 그러므로 입을 열어 말해야 한다. 죽은 뼈들이 일어나 혀를 빼앗긴 채로라도 자신의 역사를 증언하듯이. 이 피곤한 나라에 나를 살게 하신 어떤 분이 참으로 원망스럽지만, 그러나 하필 이 땅에서 생을 받았으므로, 이 땅이 의미의 상실에 시달리지 않도록, 모자라는 머리와 재주 없는 입이라도 열어 진정으로 열심히 말해야 한다. 그것이 유령의 목소리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저들이 아니라 우리가 공화국의 주권자임을 저 오만한 말의 권력자들이 알게 해야 한다.
공화국의 시민들이여, 희망의 힘으로 분노하라. 그리고 그 백열의 정당한 분노의 역류를 지나 이윽고 평안하시라.
머리글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중에서
제목이 시사하듯, 이번 단행본에는 정치적 이슈에 대한 글이 많이 담겨있다. 김정란은 “우리가 축적한 민주적 역량을 근본부터 비웃는” 작태를 지켜보며, “이 사회에서 상식을 가진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다시금 확인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정말로 어쩔 것인가. 내 영혼 깊은 곳에, 생의 저 건너에서 기원하는 신성한 떨림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있다 하여도, 나는 이 땅에서 한 사람의 시민인 것이다. 그러므로 입을 열어 말해야 한다.(…)그것이 유령의 목소리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저들이 아니라 우리가 공화국의 주권자임을 저 오만한 말의 권력자들이 알게 해야 한다.”
1부에서는 아웃사이더, 서프라이즈, 중앙일보 e칼럼, 강원일보, 부산 국제신문 등에 기고한 칼럼들을 모았다. 가장 큰 화두는 역시 ‘탄핵’. 저자가 보기에, 이번 사태는 우발적이거나 조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사과 아니라 딸기를 했어도, 이 사태는 조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혹자는 대통령이 사과를 하지 않았다고 비잦하지만, 나는 원칙적으로 대통령의 태도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은 정치적 협박 수단으로 사용된 탄핵안 문제 앞에서 원칙을 훼손하고, ‘사과’라는 형식으로 정치적 딜에 응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해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17대 총선에서는 의회 폭력에 대한 분명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 외에도 여성의 정치세력화, 친일 청산, 정치 개혁 등에 관한 저자의 날카로운 견해를 읽을 수 있다.
2부는 저자의 내밀한 부분을 엿볼 수 있는 글들과 그 동안 썼던 몇 개의 서평을 엮었다.
“사춘기 시절은 고통스러웠다. 나는 책을 엄청나게 읽어댔고,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늘 혼자였다. 그것은 무리에 섞여 몰려다니기 싫어하던 내가 자청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독은 몽땅 내 몫이었다. 수학여행을 갔을 때 친구들이 있는 아이들은 먼저 뛰어가서 서로들 자리를 잡아놓고는 했다. 나는 친구가 없었으므로, 여행 내내 서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무척 아팠다.”
고독했던 성장기. 이후 여성으로서 인문학자로서의 홀로서기. 그 과정에서 만난 고정희와 이연주, 김현에 관한 기억. “부러진 칼 조각 사이의 길을 걷”고 있는 현재.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쓴다.
“내 두 마리 강아지 또또와 쫄래, 또는 두 마리 신성한 단순함들이, 제 몸에 완전히 동화된 채로 꿀 같은 잠을 즐기고 있다.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난다. 나도 이제 어쨌든 자리에 누워 보아야겠다. 잠이 깃털이불처럼 몸 위에 부드럽게 내려와 덮이면 좋으련만…”
3부는 김정란의 시와 문학에 관한 글을 묶었다. 시창작론, 신화와 문학의 관계, 문학의 미래, 문학과 문화. 여기에 묶인 글들은 어떤 연구결과라기보다는 어떤 고백이다.
“문학이라는 배를 타고 오래 향해한 한 여자 오디세우스의 회한 같은 것. 이제 귀향을 눈 앞에 두고 있는 뱃사공이 남은 여행에 대해 품고 있는 소박한 기대 같은 것. 화려한 문화의 바다 위에 초라한 일엽편주를 띄워놓고,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는 문학의 몫에 성실하려고 하는 자의 미련한 사랑 같은 것”
그리고 저자에게 남겨진 고민.
“어떻게 ‘스스로 있음’의 의미를 좀더 평이한 언어로 풀어내어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것을 고민중이다. 아직은 분명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진정한 가슴으로 애쓰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운명이 나에게 충분한 시간을 마련해 두었기를 바랄 뿐이다.”
편집자가 말하는 김정란 _ 꿈꾸는 방식으로 존재하기
5년째 서울대와 싸우고 있는 김민수 교수가 천막농성을 막 시작했을 때다. 하루는 김정란 시인이 격려차 천막을 방문했다. 날씨는 을씨년스러웠고, 천막은 옹색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김정란은 울컥 눈물을 쏟아냈다. 응원하러 온 김정란을 외려 김민수 교수가 위로해야 했다. 편집회의에서 누군가 베트남 여성들이 결혼을 빌미로 윤락을 강요당한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행여 대한민국이 못 살았으면, 이라고 했던가. 이내 굵은 눈물방울을 떨군다.
김정란은 울보다. 폭력에 노출된 소수자들과 지독하게 왜곡된 현실을 마주할 때…… 운다. 아무리 미세한 사안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곤 마주보는 상대에게 감정이입. O양이 됐다가, 베트남 여성이 됐다가, 노무현이 된다. 글쎄. 그건 과거 체험에 대한 기억의 축적이 빚은 소산이 아닐까 생각했다. 무슨 소리냐. 스스로 바깥에 섰던 체험 덕분에 아웃사이더의 시선을 가지게 됐다는 말이다. 몇몇 글에서 김정란은 이렇게 적었다.
“유약했던 유년시절. 늘 힘센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리며 살았다. 비겁했고, 늘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자기 완결성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사춘기 시절은 고통스러웠다. 나는 책을 엄청나게 읽어댔고,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늘 혼자였다. 그것은 무리에 섞여 몰려다니기 싫어하던 내가 자청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독은 몽땅 내 몫이었다.”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마주했다. 김정란은 겁난다고 모른 척 외면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그 과정에서 깨지고 상처도 입었다. 개의치 않았다. 아니다.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화살을 맞고 온전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 정도의 상처는 극복하고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리라. 그간 쌓아온 문학적 기반도 깡그리 잃어버렸다. 물론 스스로도 알고 시작한 일이다. 후회는 없다. 다만 김정란의 문학은 그대로인데 갑자기 생긴 미움 때문에 쓸쓸할 뿐이다. 권력? 차라리 그런 거라도 있었으면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덜 안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김정란은 시인이다. 팔자에 없는 사회 비평을 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시인이다. 과연 언제쯤이면 모두들 자신이 꿈꾸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시인은 시인으로 공화국의 시민은 공화국의 시민으로 말이다. 사람들이, 그 동안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들을 김정란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을 때, 아마 그때가 아닐까?
“저야 시인으로 불리는 것이 제일 좋고, 시를 쓸 때 가장 행복하죠. 제 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론가로서 더 재능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더러 계신데, 정말 문학을 잘 아시는 분은 ‘김정란의 시는 김정란의 평론과는 비교가 안 된다’고 말씀하세요(웃음).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인인데, 시인들은 어쨌든 논리적으로 설명은 못해도 시를 아니까요. 제 시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결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이해하는 거죠. 시를 쓸 때, 나는 가장 나다워요. 그래서 그때 가장 행복하고요.”
<김홍민 _「아웃사이더」 편집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