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짜>는 충무로를 들었다 놨던 불세출의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 이후 최동훈 감독이 내놓은 두 번째 출사표다. 짜릿한 이야기의 묘미와 장르의 쾌감으로 만인의 주목을 받았던 이 총기 넘치는 감독의 변화, 그리고 여전한 신념.
<범죄의 재구성>(이하 <범죄>)은 신선한 도발이었다. 한국영화가 그때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완결성과 대중 영화의 쾌감을 황금비율로 조화시킨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은 잘 만든 장르 영화도 의미심장한 대중 영화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때 최동훈은 영민했다. 구라도 셌다. 2시간 길이의 영화 한 편을 두고 관객들과 벌이는 게임의 '설계자'로서 영민했고, 개성 강한 배우들이 한정된 이야기 속에서 제 역할을 하게 만드는 '연출자'로서 영리했으며, 적절한 리듬과 템포로 드라마를 조직하는 '이야기꾼'으로서 영특했다. 두 번째 영화 <타짜>를 통해 최동훈은 이 같은 심증을 확증으로 바꾸려 한다. <타짜>는 이야기의 밀도와 박진성은 전작보다 덜하고 캐릭터의 생생함으로는 전작을 능가한다. 인생을 판돈 삼아 벌이는 '꽃들의 전쟁'에 모든 걸 건 인물들과 타락한 자본주의의 꽃으로서 도박이 갖는 사회적 함의, 여전한 드라마의 재미로 판을 설계한 <타짜>는 어떤 패를 쥐고 있을까?
허영만 원작 '타짜'의 1부를 각색했다. 결과적으로는 '최동훈표 <타짜>'가 나온 것 같다. 영화는 거짓말을 못 한다. 허영만 선생이 만화대로 찍으면 누가 영화를 보나, 마음대로 하라고 하셔서 넙죽하고 많이 바꿨다. 실은 2, 3, 4부가 스토리적으로는 더 재밌다. 1부에 도박이 뭔지라는 원초적인 내용을 비롯해 모든 게 다 들어가 있는 거 같다. 1부가 도전정신이 들게 만든다. 내가 1부를 찍어야 남들이 2,3,4부를 찍지 않겠나? 4부가 스케일도 크고 재밌으니까 4부 영화화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걸로 안다.
원작의 정신세계가 워낙 방대해서 영화적으로 각색하는 것이 만만찮았을 것 같다. 사실 금방 각색할 줄 알았다. 쉬엄쉬엄 놀면서 해도 3개월이면 하겠군, 그랬는데 오래 걸렸다. 인물도 많이 나오고 로드무비 형식에 에피소드가 계속 연결된다. 영화는 샷 게임이기 때문에 그 모두를 연결시키는 게 쉽지 않았다. 화투가 굉장히 정적인 게임이라 정적으로 찍으면 재미를 못 느낄 것 같았다. 정적인 게임을 동적으로 보이기 위한 구상들을 많이 했다. 그렇다고 과격한 쇼트를 많이 쓰면 또 흥미가 떨어지니까, 각각의 화투 장면마다 컨셉이 다르고 카메라의 움직임을 다르게 갔다. 예컨대 사람들은 앉아 있는데 카메라는 계속 움직인다거나 컷을 많이 나누는 방법을 섰다. 화투를 치는 장면마다 국면이 조금씩 바뀌어 역동적으로 보이도록 했다.
기대만큼 화투기술이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 밑장빼기나 기리 하면서 쓰는 손 트릭 정도가 전부다. 그렇게 기발해 보이지도 않고 좀 싱거웠다. 기술보다 같은 패거리들끼리 작전을 짜서 호구 뒤통수를 치는 '상황'의 트릭이 더 많았다. 실제로 타짜들이 쓰는 기술은 몇 개 안 된다. 손기술이 있는 타짜를 '대마이 기술자'라고 하는데, 그들이 기술 부리는 건 티가 안 나야 한다. 자연스럽게 보이는데 그 안에 속임수가 있어야 하는 거지. 큰 기술을 쓰면 걸리니까 아주 작은 기술들을 쓴다. 사실 밑장만 뺄 줄 알면 다 된다. 타짜들은 모든 패를 다 외우고 있는데, 위에 좋은 패가 있으니 그걸 상대에게 안 주고 밑장빼기로 안 좋은 밑 패를 준다. 자기에게만 좋은 패를 주는 간단한 원리지. 그 기술이 시각적으로 보여야 하는데 그건 찍기도 어렵다. 그래서 선택한 게 화투를 돌려서 패를 보여준다거나 3단 기리를 해놓으면 가져오면서 순서를 다시 뒤바꾼다거나 하는 트릭이다.
<범죄>에 이어 <타짜> 역시 군집형 캐릭터 영화다. 군상형이기도 하고. 주인공이 많은 이야기를 짜는 건 개인 취향인가? 작정한 건 아니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같은 영화를 보면 주인공 세 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끌고 가는데 훌륭하다. 그런 이야기를 아직 못 찾았다고 보는 게 맞다. 주인공이 많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것 때문에 특별히 부대껴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인물들이 얽히고 얽혀서 드라마가 전개되는 걸 바란다. 아직까지는 다양한 인물들의 개성이 충돌하는 걸 보는 게 재밌다. 드라마적 취향에 따라 주 인물과 보조 인물을 나누고 보조 인물의 캐릭터를 약하게 놓을 수도 있다. 난 그걸 못 참는 성격이다. 그냥 넘겨도 되는 인물까지 깊이 생각하는 편이다. 이 사람이 어떻게 하면 주인공의 영역에 쓱 들어올까를 고민한다. , 이런 영화 좋아하니까.(웃음)
<타짜>는 주인공은 고니지만 평경장, 정마담, 고광렬, 박무석, 곽철용, 아귀, 짝귀 등 고니를 거쳐가는 인물들이 서로를 반영하는 '거울' 같다. 도박판에서 엮이는 이들은 모종의 동류의식을 나눈다. 예컨대 평경장이 첫 만남에서 고니에게 '은혜'를 베푸는 건 드라마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고니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본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면 말이 된다. 난 영화의 주제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주제를 전면에 드러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타짜>도 어떤 드라마적 태도를 가지고 갈까를 먼저 고민했는데, 이 영화는 주인공이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 사람들로 인해 주인공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고. 드라마적인 흐름을 가지려면 고니의 인생에 계속 새로운 인물들이 등,퇴장해야 한다. 고니는 계속 사람을 만나고 중반 이후부터 그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특히 이런 영화는 주인공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설명을 줄 수 없다. 그들이 등장할 때 관객들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도록 인상적인 등장을 줘야 한다. 그게 힘들었다. 평경장, 정마담, 고광렬, 아귀, 짝귀 모두 첫 등장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일단 등장하면 퇴장은 쉽다. 죽으면 되니까.(웃음) <타짜>에서 제일 중요한 대사가 있다면 "어차피 겁날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죽거나 다쳤다"이다. <타짜>의 드라마를 한 줄로 요약한다면 이 대사 안에 있다. 쓸 땐 엄청 고생했는데 얘기하고 나니까 쉽네. 이걸 미리 알았으면 더 빨리 썼을 텐데.(웃음)
정마담을 내레이터로 쓴 이유는 뭔가? 고니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그의 삶을 가장 좌지우지한 인물이 정마담이다. 아주 옛날부터 장르 영화에 있었던 규칙이기도 한데, 일종의 '살인자의 내레이션'이다. 죄지은 자의 내레이션. 정마담의 첫 등장이 영화가 시작되고 38분 정도 뒤다. 정마담을 언제 만나느냐를 가지고도 고민이 컸다. 정마담과의 만남이 가장 큰 사건이다. 고니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동기가 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못 느낄 수도 있지만 플래시백을 쓴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썼다. 고니가 길을 떠나는 첫 번째 동기 제공자가 박무석이 돼야 한다. 박무석을 해결하고 아귀가 등장해야 한다. 그래야 고니가 천천히 새로운 맞상대를 만날 수 있다. 플래시백은 박무석을 처리하기 위해 써야 했다. 이 구조가 좋으니 그것대로 가야지라는 욕망은 내게 없다. 언제나 드라마가 우선이다. 드라마가 간결하게 기능하는 방법을 찾는다. 물론, 영화는 2시간 20분으로 길지만.(웃음)
그렇게 보면, <타짜>는 서부영화에서 총잡이들이 새로운 상대를 찾아서 차례로 처치하고 더 강한 상대로 나아가는 구조와 비슷하다. 서부극은 드라마적으로 '대결'의 쾌감을 극대화시키는 장르인데, 그런 구조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타짜>는 도박영화가 아니라 서부극이다. 동양으로 치자면 무협이고. 준비하면서도 도박영화를 거의 안 봤다. 시나리오 쓸 때 계속 서부극을 봤다. 서부극은 '대결'의 영화고 '승부'를 다룬다. 마을이든, 땅이든, 납치된 조카를 찾기 위해서든, 누군가를 추적해서 그와 싸워야 하는 숙명에 대한 이야기다. 화투가 소재인 영화를 찍기 위해서 도박영화를 찾아본 건 거의 시나리오가 다 끝났을 때쯤이다. 사실 도박영화가 별로 없다. 홍콩영화는 일부러 안 봤다. 도박영화로는 노만 주이슨의 <신시내티 키드>를 봤다. 그 영화의 마지막 포커 장면이 40분이다. 그걸 보고 승부 신이 잘만 연출되면 40분도 지루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화투치는 장면 열심히 찍어야지, 라는 자신감을 일깨워준 영화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바둑을 좋아하지만 두지는 못한다. 바둑을 좋아한다는 것과 바둑을 못 둔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바둑이야말로 마지막 남은 정신적 승부의 세계인 것 같다. 바둑은 게임이 아니다. 아주 고상하고 신사적이고 정적인 승부인데,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 엄청난 눈빛의 대결, 수의 대결, 기의 대결이 있다. 고수들이 두는 바둑은 왜 이런 수를 써야 하는지 '이유를 알고 하는 게임'이다.
서부극의 총잡이들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이자 장인들이다. 전문가는 이 냉혹한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완숙한 인간이라고 말한 영화감독도 있다. 타짜들 역시 윤리적 잣대를 벗겨내면 그런 인간으로 보이나. 특히 영화 속 평경장이 그렇다. 승부라고 하는 건 캐릭터의 '기질' 문제인 거 같다. 세상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밀어붙이는 사람과 밀어붙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세르지오 레오네 서부극의 주인공들은 '이유'와 '기질'만 가지고 밀어붙이는 사람들이다. 거기 엄청난 배경이나 사명감은 없다. 아주 심플한 세계다. <타짜>의 주인공들도 당위성도 아닌 이유와 기질로 계속 전진한다. 타짜들은 타짜끼리 안 한다. 서로 피한다. 그들은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이다. 영화에 보면 고니가 부산에 미군부대 카지노에서 화투를 치는데 타짜가 돈 주면서 가라고 한다. 타짜끼리는 붙으면 안 되는데 고니는 그 룰을 안 지킨다. 타짜를 만나서 해보고 싶은 거다. 그의 이런 기질이 드라마를 만들어간다. 정말 재밌는 건 이 영화에서 고니만 진정한 타짜가 아니다. 그는 타짜의 룰에서 벗어난 인간이다.
<범죄>와 <타짜> 모두 범죄세계를 다룬다. 범죄적 세계에 대한 관심은 그런 기질의 인물들이 그 세계에 있기 때문인가? 영화아카데미에서 단편영화 찍을 때는 예술영화스러운 걸 많이 찍었지만 그때도 시나리오에는 항상 범죄가 있었다. 범죄물은 이야기꾼으로서 즐거움이 크다. 일단 드라마가 강하다. <범죄> 찍기 전에는 범죄물을 많이 안 봤다. 그때는 DVD가 별로 없었다. 나중에 <살인자의 키스> <킬러> <리피피> 같은 영화들을 봤다. <범죄> 하고 똑같아서 놀랐다. 사실 난 책이 더 중요하다. 이를테면, <루팡>. 롤 모델은 히치콕이다. '내 영화는 한 조각의 케이크'라는 히치콕의 말을 신봉한다. 맛있다면 드시고, 너무 달다고 생각하면 반만 드시고, 다이어트를 하고 싶다면 먹지 말고.
'꽃들의 전쟁'이라는 '화투'의 풀이말 자체가 묘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꽃은 아름다운데 그들의 전쟁은 치졸하고 비극적이다. 정마담 역시 아름다운 꽃이지만 위험한 꽃이고, 고니 역시 성공을 갈망하지만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진 인물이다. 올인 당한 대학 교수에게 개평이나 주고. 고니는 진짜 타짜가 아니라서 그런다. 진짜 타짜는 국물도 없다.(웃음) 드라마는 등장인물의 겉과 속을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즉, 겉을 보여주고 나서 속을 적절한 시점에 어떻게 보여주는가가 중요하다. 겉을 알고 나서 속을 아는 게 재밌다. 인물의 속내가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관심이 많다. 정마담은 사람들마다 대하는 태도가 다른데 그녀의 속내는 아마 혼자 있는 장면에서 나올 것이다. 영화상에서 정마담이 혼자 있는 장면은 한 번이지만 그 장면이 그래서 중요하다. 그때는 배우들과 이야기를 많이 한다.
모든 인물들을 관통하는 연출자의 정서는 기본적으로 '연민'이다. 심지어 가장 극악하게 묘사되는 아귀조차도 마지막 고니와의 승부에서 실족한 뒤 측은할 정도로 절규한다. 정마담도 고니에게 총을 겨누면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아주 극악한 짓을 하든, 아니면 천사 같은 선행을 베풀든, 관객이 그 인물을 좋아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영화에서 제일 나쁜 인간은 정마담인데, 관객들이 정마담을 좋아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녀를 미워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려면 관객들이 정마담의 속에 한번 쓱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 그렇게 그 인물을 한번 이해했다고 느끼면 전적으로 미워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악독한 악역을 한 배우는 식당에 가면 내쫓긴다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
장르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한국의 영화감독들이 별로 가지고 있지 않은 희귀한 자세다. 최근 한국 장르 영화들은 전통적인 장르를 파괴나 극복해야 할 '아버지'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를 넘어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겠다는 욕망이 팽배한데, 당신은 오직 장르적 재미에 충실한 영화만 만들었다. 언제나 외줄타기다. '재기발랄하다 이거지, 그래봤자야', 이런 평가를 들으면 깨갱 하는 수밖에 없지만.(웃음) 그런 평가는 겁나지 않고 정말 두려운 건 다른 말들이다. 그런 거 말고 내가 만든 이야기가 재미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재미없다면 큰일이다. 지루한 것을 계속 붙여놨는데 전체로서 지루하지 않다면 그건 대단한 경지일 것이다. 재밌는 걸 죄 붙여놨는데 재미없을 수도 있다. 오히려 한국영화에 없는 태도는 문학적인 태도인 거 같다. 이를테면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지금 영화로 못 찍는다. 그 소설은 문학적인 내용이고 촘촘히 잘 써졌지만 영화적으로 재밌을지에 대해 회의가 크기 때문이다. 난 그걸 영화적으로 재밌게 찍은 사람을 보고 싶다. 아주 도도한 서사를 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보고 싶으면 지가 찍으면 되지.(웃음) 그런 영화를 찍고 싶다. <범죄>를 찍은 뒤에는 탈진감 같은 게 있었다. 나중에 보니 실수도 많았고 성에 안 차는 부분이 많았다. <타짜>는 <범죄>보다는 잘 찍어야지 라는 생각이 있었다. <범죄>에서 못 했던 걸 <타짜>에서 해야 어디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범죄>에서 못한 게 뭔가? 캐릭터가 더 살아 있는 영화. <타짜>도 <범죄>와 비슷한데 더 좋아진 게 있다면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타짜> 한다고 했을 때 "병신 너 왜 했니?"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원작이 너무 재밌고 잘 짜여 있기 때문에 만화를 뛰어넘을 수 없을 뿐더러 만화가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실망할 가능성이 높다. 우려이기도 하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다. 난 또 그런 게 있어야 재밌다. 불가능해 보이는 산이 앞에 버티고 있어야 오를 기분이 나는 거잖아. 영화를 만들면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좋아하는 걸 해야지가 아니라 싫은 건 하지 말아야지다. 단선적으로 드라마를 짜지 말아야지, 사람을 흰 벽 앞에 세우지 말아야지, 아파트 이런 덴 절대 안 들어가, 가옥 구조 후진 데는 안 가, 형광등 밑에선 못 찍어, 대충 찍는 투 샷은 안 찍어 등등. 기존 한국영화에서 보면서 싫었던 것들은 안 한다. 한 장면도 허투루 안 찍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간이 없다고 편안하게 찍지는 않는다.
<범죄>와 <타짜>, 모두 범죄적 세계를 다루지만 <범죄>는 순수한 장르 영화의 쾌감에 충실했다. 이야기를 따라잡지 못하면 낙오될지 모른다는 조바심으로 드라마를 쫓아가는 영화였던 반면, <타짜>에는 중간 중간 생각의 여지를 준다. 배경을 1994년으로 옮겨왔는데 다분히 사회적인 분위기를 의식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TV에서 성수대교 무너지는 장면에서 보이는 '붕괴의 이미지'라든가, 같은 장면에서 평경장이 '세상이 평등한 거 같니?'라고 고니에게 묻는 대목 등등에서. 10개로 장을 나눈 구성도 그렇고 '도박'의 뒤에 버티고 선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도 만든다. <타짜>는 드라마적으로는 <범죄>보다 느슨하다. <범죄>에서는 한 순간도 꼬인 드라마가 풀리면 내게는 큰일 날 일이었다. 편집도 대사 끝나면 바로 컷이었다. <타짜>는 느슨하지만 실은 더 느슨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범죄> 끝나고 느슨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책상 앞에 써 놨다. 원작이 50~60년대까지인데 원작에는 그런 함의가 더욱 분명하다. 이 엄혹한 시절에 벌어지는 도박하는 인간들. 한쪽에서는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고 군인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사회악을 일소한다며 깡패들을 잡아들이고 있는데, 시발 자동차 타고 다니면서 도박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시대적 배경을 1994년으로 끌어온 이유도 그런 시선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의식적이지만 짧게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성수대교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 내내 10년 전 차를 써야 되고 신경 쓸 일이 많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범죄>와 <타짜>에서 연출의 공통점은 '속도감'이다. 드라마의 속도도 빠르고, 편집도 빠르고, 대사도 빠르다. 이 엄청난 스피드는 범죄물이라는 장르적 특성 때문인가? 영화에서 템포는 진짜 중요하다. '필름 아트'에 보면 영화는 시간과 공간의 사슬로 창조된다는 말이 나오는데 영화 만들면서 그것만큼 정확한 진리가 없다고 느낀다. 영화는 시간과의 게임이다. 할리우드영화는 시간을 잊게 만든다. 시간에 대한 감각을 못 느끼게 만든다. 지금 난 할리우드영화처럼 하고 있는 셈이다. 아주 느린 데도 관객들이 템포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아직은 내공이 딸린다. 지금은 영화가 1시간 30분인지, 2시간 30분인지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한다.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는 건 결국 '스피드'다. 데뷔할 때부터 템포를 빠르게 가야지, 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원초적 본능>을 틀어 놓고 신별로 시간 다 적어놓고 한 시간 동안 그것만 들여다봤다. 첫 쇼트부터 마지막까지, 신의 시작과 끝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영화를 재구성하는 거다. 남들이 보면 뭐하나 싶겠지만 되게 재밌다.
특히 쇼트와 쇼트 사이의 연결이 특별하다. 시간의 점프나 공간의 이동을 쇼트 간의 브릿지로 처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타짜>의 플래시백 장면에서도 몇 번 등장한다. 내 영화는 드라마의 양이 많기 때문에 그런 장치가 꼭 필요하다. 이 많은 걸 체하지 않고 먹어야 되는데 그걸 다 주면 영화는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충격요법, 사운드, 디졸브 등 다양한 형식적 장치들을 동원해 신과 신의 연결에 신경을 많이 쓴다. 화투 장면도 처음에는 화투장 모양으로 화면분할이 되면서 빠르게 넘어가지만 마지막 화투 신은 아주 느리다. 처음 화투판은 아무리 빨라도 느려 보이지만, 마지막에 가면 카메라는 느리지만 빠르게 느껴지는 상황이다. 그런 걸 만드는 게 재밌다.
실제 타짜들 취재도 많이 한 걸로 안다. 화투판 꽁지(화투판에서 뒷돈을 대는 사람)하고 장병윤 선생이라고 실제 타짜분이 계신데, 그분 이야기를 들었다. 혼자서, 이렇게 하겠지, 라고 상상한 부분도 많다. 엄청 취재 많이 한 줄 아는데 많이 안 했다.(웃음) 알려진 것과 다르게 깊이 취재 안 한다. 취재 많이 하면 쓰는 데 방해된다. 취재를 조금 해도 빨리 끝낸다. 취재를 너무 많이 하면 내가 무슨 영화를 해야 되는지 감을 잃을 때가 있다. 그래서 <타짜> 하면서 만난 사람도 두 분밖에 없다. 취재도 이런 식이다. 화투판 실제로 이렇게 하나요? 예,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 넘어가고. 타짜는 타짜를 보면 아나요? 예, 압니다. 그러면 또 넘어가고. 이런 식이다. 그 말 자체가 내게 수많은 드라마를 준다. 그 정도 취재만 하면 된다. 화투칠 때 어떻게 앉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앉고 싶은 사람 마음대로 앉으면 된다. 상상력을 갖기 위해 취재를 하는 거지 뭘 가져오려고 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면 CIA를 찍는다고 치자. 아무 건물이나 찍고 '버지니아 주 CIA'라고 자막을 넣으면 관객들은 다 믿는다. CIA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 거의 없거든. <범죄>에서 한탕 하러 가는 한국은행,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모른다. 들여보내주지도 않지만 난 안 간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상식의 선을 유지하면서 한국은행처럼 세팅을 해 찍으면 된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적인 선 위의 것들을 조금 가미하면 된다. <범죄>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사기꾼의 모습도 있다. 그런 걸 줘야 '뭘 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드시 해야 될 건 해야 된다. 그래야 그걸 담보로 다른 걸 할 수 있다. 관객이 어떤 기대감을 갖고 있는지를 명확히 아는 것, 내겐 그게 가장 중요하다.
영화를 보니까 도박꾼들은 그 많은 돈을 가방에 넣어 들고 다니더라. 도박판에서는 무조건 현찰박치기니까 그렇게 다니겠지만, 커다란 가방을 양손에 들고 다니는 모습이 되게 이상해 보였다. "나 도박꾼이요"라고 티내는 거 같기도 하고. 현찰 줘야하니까 무조건 가방 들어야 한다. <타짜>는 가방과의 싸움이었다.(웃음) 고니가 두 손에 가방을 들고 있으니까 뭘 할 수가 없다. 액션을 찍어도 반드시 가방 놓는 샷을 처음에 찍어야 한다. 또 하나는 돈과의 싸움이었다. "오케이 삼천 받고, 오천"이라고 하면 삼천 세야 된다.(웃음) 나중에는 5억 받고 어쩌고 하니까 감당이 안 돼서 칩으로 바꿨다.(웃음)
정마담은 과거가 있지만 밝혀지지 않는다. 평경장과의 관계나. 정마담을 비롯해 모든 인물들은 자태, 표정, 카메라의 앵글, 쇼트의 지속시간, 그 쇼트가 들어가는 타이밍 따위가 더 중요했다. 그런 조합으로 미세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그렇게 안 해도 되지만 그렇게 하는 게 영화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말하는 방법이나 자세, 눈빛 같은 걸 두고 배우와 많이 이야기했다. 감독은 설득하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다. 다 설득해야 된다. 인정하면 하게 된다.
평경장 말에 따르면 도박은 드라마고 예술인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타짜의 세계는 전부 구라와 사기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 타짜 세계의 진수는 정말 구라인가? 가치 판단이 뒤섞여 있다. 고니는 가장 낭만적인 사람을 처음 만나고 점점 더 악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도박은 사기와 좀 다르다. 사기에는 판타지가 있다. 김선달 같은 사기꾼 보면 묘한 쾌감이 있다. 그가 악한인지 기발한 사람인지에 대한 헷갈림이 있다. 도박은 그런 게 없다. 도박은 광기와 연결된다. 사실 사기꾼보다 도박꾼들의 인생이 더 비참하다. 도박으로 딴 돈은 도박으로 다 날리고 마약 많이 하고. 도박은 섹스보다 더 쾌락적이다. 도박은 돈을 잃든 따든 본전을 찾든 계속 하게 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희망의 결정체.(웃음) 내일은 딸 거야. 도박만큼 희망적인 게임이 없다. 경마장에 일요일에 10만 명이 모인다고 한다. 그 10만 명의 꿈은 똑같다. 오로지 돈을 따기 위해. 그리고 난 세상 살아가면서 구라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과묵한 것도 난 일종의 구라라고 봐.(웃음) 어쨌든 구라는 좋아한다. 그 어떤 직업이든 구라 없는 직업 있나? 영화감독도 구라, 기자도 구라. 아닌가?
사진 한상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