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신성분 | 대표 인물(지역) |
몰락 진골 | *김순식(강릉), *김헌창 |
해상 세력 | *왕건(송악), *왕봉규(진주), *장보고(청해진) |
군진 세력 | *견훤(무진주) |
초적 | *궁예*철원), *양길(원주), *기훤, *원종, *애노 |
촌주 | *공직(연산), *이재, *소율희(김해) |
2.후백제와 후고구려 건국
(1)후백제 건국
-이 때 신라는 임금 곁에서 총애를 받는 무리들이 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질서가 무너지고 흉년까지 덮쳐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반란군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 때 견훤이 마음속으로 야심을 품고 무리들을 모아 경주 서남쪽 주현에 나타났다.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무리들이 5천 명이 되었다. 드디어 무진주(광주)를 차지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드러내놓고 왕이라고는 하지 못하였다.
견훤이 서쪽으로 돌아 다니다가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이르렀다. 백성들이 견훤을 맞아서 위로하였다. 견훤은 기뻐하며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삼국의 역사를 돌이켜 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뒤에 혁거세가 나타났다. 백제는 금마산에서 나라를 세워 역사가 6백 여 년이 되었다. 총장년간(660-668)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여 창군 소정방과 병사 13만을 보냈다.
신라 김유신도 군사를 다시 정비하여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서울을 완산에 정하였다. 반드시 의자왕의 오랜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마침내 스스로 후백제의 왕이라 일컬으며 관부를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었다. [삼국사기]
(2)후고구려 건국
-경복 원년(892) 임자에 궁예는 북원의 반란군 양길에게로 갔다. 양길이 그를 잘 대우하고 일을 맡겼다. 군사를 나눠주어 동쪽으로 신라 영토를 침략하게 했다.
궁예는 군사들과 함께 고생과 즐거움을 같이 하였다. 주고 빼앗는 일도 공평무사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궁예는 인제, 화천, 금화, 철원 등 여러 성을 격파하고 세력을 떨쳤다. 예성강 북쪽 반란군이 와서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 궁예는 '따르는 사람이 많으니 나라를 세우고 임금 노릇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내외 관직을 설치하였다. 우리 태조가 송악으로부터 와서 신하가 되자 바로 철원 태수로 삼았다. [삼국사기]
견훤(후백제) | 궁예(태봉) | ||
출신성분 | *상주 가은현 농민 출신 *신라군 비장으로 활동하다가 독립 | *신라 왕족 출신으로 추정-승려 생활 *기훤, 양길 휘하에서 활동하다 독립 | |
근거지 | *충청도, 전라도 지역-완산주에 도읍 | *강원도(원주, 강릉), 경기도(철원) *황해도(왕건의 근거지) | |
지지 세력 | 6두품 | 최승우 | *박유, 최응 |
선종 | 동리산문 - 경포 선사(전라도) | *굴산사문 - 개경, 행적(강원도) |
3.왕건의 등장
(1)궁예가 흉포한 일을 제 멋대로 하니 부하 관리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장군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네 사람이 은밀히 의논하고 밤에 왕건의 집에 와서 말하였다.
‘지금 임금이 제 마음대로 형벌을 남용하여 아내와 아들, 신하들을 마구 죽이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도저히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암둔한 임금을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큰 의리입니다. 공은 은왕과 주 무왕의 일을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부인 유씨가 자기 손으로 갑옷을 들어다가 왕건에게 바쳤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받들고 대문으로 가면서 외쳤다. ‘왕건이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 궁예가 이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평상복으로 산림 속에 들어 갔다. 얼마 안 가서 평강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
(2)공직의 귀부 : 공직은 연산 매곡 사람으로 신라 말기에 본읍 장군이었다. 그 때 난리가 나서 견훤의 심복이 되어 큰아들 직달, 둘째 아들 금서 및 딸 하나를 후백제에 볼모도 두었다. 공직은 일찍이 후백제에 입조하였다가 그의 잔인 무도한 것을 보고 직달에게 물었다. “지금 이 나라를 보니 사치하고 무도하구나. 나는 비록 심복이었지만 다시는 여기로 오지 않겠다. 듣건대 고려 왕건은 文은 백성을 안정시킬 만하고 武는 난폭한 자를 억누를 수 있다고 한다. 사방에서 그의 위엄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그의 덕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귀순하려는데 네 뜻은 어떠하냐?” [고려사]
4.신라의 항복과 후백제 멸망
(1)신검의 등장 : 견훤은 아내를 많이 얻어서 아들 10여 명을 두었다.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이 특별히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형인 신검, 양검, 용검 등이 이를 알고 번민하였다. 이찬 능환이 사람을 시켜 강주와 무주에 가서 양검 등과 함께 음모를 꾸몄다.
청태 2년(935) 3월에 파진찬 신덕, 영순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고하여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금강을 죽였다. [삼국사기]
(2)경순왕의 항복 : 경순왕이 말하였다. “이와 같이 고립되고 위급한 형세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 강하지도 못하면서 겸허하지도 못하여 죄없는 백성들을 죽도혹 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 곧 시랑 김봉휴를 시켜 왕건에게 편지를 보내어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3)후백제 멸망 : 천복 원년(936) 6월 견훤이 왕건에게 아뢰었다. “늙은 몸이 전하에게 의탁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 자식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강한 군사로 난신 적자를 없애 주시면 제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그 말을 좇아 먼저 태자 무와 장군 박술희에게 보병, 기병 1만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 태조가 친히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군사를 합하여 일선에 주둔하였다. 신검은 무력으로써 대항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훤을 시켜 바로 중군을 치라 하고 모든 군사가 함께 나가 양쪽에서 들여 치니 백제 군사가 흩어져 달아 났다.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 능환 등 40여 명을 데리고 나와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5.고려 건국 과정 일지
907년 | *당 멸망, 5대 10국 시작 |
916 | *거란 건국 |
918.6 | *왕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름 -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 |
919.1 | *고려 송악으로 천도 |
926.1 | *발해, 거란에 멸망 |
927.11 | *후백제 견훤,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움 *신라를 돕기 위해 내려온 고려군을 팔공산에서 크게 무찌름 |
934.7 |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에 귀부함 |
935.3 | *후백제 신검,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고 왕이 됨 |
935.6 | *후백제 견훤, 나주로 도망하여 고려에 항복함 |
935.11 | *신라 경순왕, 고려에 항복함(신라 멸망) |
936.9 | *고려 태조, 일리천(선산)에서 후백제 신검을 대파 *후백제 멸망하고 후삼국 통일 |
<출처> by | 역사 사료 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