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 카사노바의 삶
“나는 여자들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그러나 자유를 더 사랑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이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1725-1798)가 73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곳은 체코 프라하에 둑스성이었다.
자서전 “내 인생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후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알렸던 기이한 인물 카사노바.
그는 많은 여성의 체취를 탐닉한 감각파였고 낭만파였지만 그가 추구했던 지향 점은 여성이 아니었다. 그의 삶을 관통한 이데아는 언제나 자유였다.
카사노바는 18세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40여권의 저서를 남긴 명석하고 박식한 사람이었다. 신학 자연과학 예능 등 다방면에 걸친 재능은 언제나 방랑벽을 부추겼다. 한 여성의 남자가 되기를 거부했던 것처럼 그는 어디에도 붙박이지 않은 채 늘 유럽전역을 떠돌아 다녔다.
39세에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났을 때 왕의 직설적인 태도에 압도되어
대답도 변변히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왕이 그의 외모가 아름답다고 칭찬하자 왕의 동성애적 기질을 꼬집으며
“저에게서 발견하신 유일하고도 미미한 자질이 그 뿐인가요?”라고 대답했다.
후에 러시아의 카타린느 여제를 만났을 때 유럽에서 통용되는 그레고리력을
사용할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하여 다른 나라와
10일이나 차이가 나서 경제적 외교적 많은 손실을 겪고 있었다.
그는 여왕의 초상화도 그렸다.
계몽사상가 볼테르를 만난 자리에서는 그의 사상을 반박하기도 했다.
넘치는 재능과 해박한 지식은 신분상승을 위해 상류사회를 기웃거릴 때도 활용되었지만 여성을 탐할 때도 동원되었다.
그는 낯선 곳에 가도 이방인이 아니었다. 카사노바 연구가인 에블린
하메그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기처럼 자유롭고 모든 민족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터키의 석학이나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선주 등 어느 누구와도 공개적으로 토론을 벌였다.” 그가 속한 드넓은 나라에는 국경이 없었다.
그의 자서전은 무려 122명의 여인과 벌인 흥미로운 연애담과 18세기 풍습, 생활을 상세히 묘사해 귀중한 문학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카사노바는 베네치아에서 희극배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그의 작품
“사랑도 싫고 여자도 싫다”에서 아버지가 극장 소유주였던 귀족 미켈레 그리마니라고 거짓 주장을 했지만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6남매를 남기고 36세에 죽은 평범한 배우였다.
카사노바는 파도바에서 젊은 날을 보냈다. 훗날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과 교류하는 지적인 자본도 파도바 대학의 법학박사과정에서 얻은 것이다. 그의 첫째 직업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성직자였다.
카사노바는 신분상승을 위하여 처절하게 투쟁한 인물로 사제가 되려고도
했고 군 입대도 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당시 신분상승을 위한 길은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1746년 21세 때 심장발작을 일으킨 베네치아귀족 브라가딘을
구해줌으로써 그의 양자가 되어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사노바의 자유분방한 사생활과 개성으로 베네치아정부 관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1755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파니온 감옥에 투옥
되었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감옥으로 두칼레궁 안에 있었는데
천장이 납으로 되어 있어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몹시 더워 납감옥이라
불렀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감옥을 1756년에 탈출하면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가둘 때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듯이 이제
나도 자유를 찾아 떠나며 당신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겠다.”
탈출하여 파리로 가서 계급과 신분평등을 주장하던 계몽주의자는
귀족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759년 파리에서 루이15세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으로 사교계에 진출
하였다. 당시 32세의 나이로 재정난을 겪고 있는 파리시의 애로점을 파악
하고 루이 15세에게 복권사업을 건의하여 200만 프랑의 매출을 올려 60만 프랑의 수익을 남겨주었다.
1759년 복권사업의 수익을 염직물에 투자하여 번창하였으나 종업원이 공장
설비를 훔쳐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업 파트너와 후원자는 카사노바를 의심하여 고발까지 하였다.
그래서 파리를 떠나 오랜 도피생활을 끝내고 50세에 베네치아로 돌아와
출판사업에 열중하였다.
체코는 카사노바의 마지막 여행지였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유럽 전역을 떠돌던 그는 보헤미아(체코)의 둑스성에서 요제프 칼 에마누엘 폰 발트슈타인 백작의 도서관 사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성주 발트슈타인 백작의 도움으로 둑스성에
머물면서 공상과학 소설인 제이코사메론을 집필하였다.
그곳에서 말년을 보내며 많은 글을 썼는데 자서전 “내 인생의 이야기”도
1790년 초부터 쓰기 시작해 1792년에 초고를 완성했다.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기독교도로 죽는다”는 말을 남겼던 카사노바.
지금도 프라하에 가면 그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카사노바는 그곳에서 모짜르트를 만나 그가 오페라 돈죠반니의 가사를 개작하는 것을 도왔다. 그곳에 있는 모짜르트 박물관에는 악보 필사본과 카사노바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카사노바와 모짜르트는 모두 프리메이슨의 단원으로 감각적 쾌락을 즐겼던 두 사람의 공감대는 각자의 예술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카사노바가 살았던 둑스성에는 카사노바의 밀랍인형이 보존되어 있고
그가 실제 살았던 방과 그의 편지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의 시신은 둑스성 근처 세인트 바바라 교회 포도밭에 안치 됐지만 훗날
성을 재정비할 때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