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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교회공동체생활을 하다가 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접하는 '오래되고 묵은 질문들'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용어인 worship에 대한 우리말 표현들중 '예배드리다', '예배보다', '예배하다'라는 말들중에 '어느 표현이 성경적인가?'라는 것도 바로 이런 경우들에 속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이 질문과 의문에 대한 '정확한 성경기록의 지지'를 받는 표현은, 요4장24절(등)으로 살펴볼 때, '예배하다'(worship)입니다.
국어사전을 검색하여 보면 위의 3가지 표현이 모두 다 나옵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이런 3가지 표현 모두가
성경적인 교회를 표방하는 정통기독교 신약교회공동체안에서 '모두 다 가(可)하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표현별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오늘 글에서 말하는 동사 'worship'이라는 영어표현이 우리말 한글성경들로 번역시
'예배하다 또는 경배하다'로 정확하게 잘 번역되어져 왔고,
'예배하다'와 '경배하다'는 둘다 같은 동일한 의미의 표현임을 먼저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1. ‘예배드리다’(offer,present)라는 표현에 관해서
여기서 말하는 우리말 '드리다'(offer)는 '주다'의 높임말이면서 동시에 정중한 경어표현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禮拜)드리다'라는 말은 다분히 구약의 율법에 나타난 제사법에 의한 제의적인 사고 곧 ‘해마다 계속해서 드린 그런 희생물들’( those sacrifices which they offered year by year continually)에서 파생되어진(=derived) 사고에서 잘못 출발하여 지금까지 사용되어져 온 것입니다.(왕상3:4; 히10:1,10,12,14)
'왕이 기브온에서 희생물을 드리려고 거기로 갔으니 이는 그것이 큰 산당이었기 때문이더라. 솔로몬이 그 제단 위에 번제 헌물 천 개를 드리니라.'(킹제임스흠정역성경 왕상3:4)
'And the king went to Gibeon to sacrifice there; for that [was] the great high place: a thousand burnt offerings did Solomon offer upon that altar.'(영어KJV성경 왕상3:4)
참고로, '일천번제에 대한 오해에 대한 글'은 아래의 링크를 한번은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왕상3장4절(대하1장6절), 질문) "일천번(番) 제"가 맞나요? 답)아닙니다. "천개의 번(燔)제헌물"입니다.
https://cafe.daum.net/jesusthinking/6i9s/2
구약의 때에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나 양과 같은 짐승들을 번제헌물로 반드시 ‘드리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실제로 드리는 '대상물 곧 번제헌물'이 있었기에 '드리는 것'이라는 표현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율법의 제사법이 통용되던 시대에서 '번제헌물을 드리는 것'은 표현상 적절하지만,
예수님 십자가이후인 신약시대에는 '예배를 드린다'는 표현은 성경적 의미로 비추어 잘 어울리지도 타당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말의 문법적 사전적인 의미로도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왜냐면 예배(禮拜)라는 말 안에는 이미 '드린다'라는 사전적인 뜻이 자체 내포되어 있기에,
'예배를 드린다'는 표현은 자칫 '예를 드림을 드린다'라고 '직해(直解)'될 여지도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한글성경들중 하나인 표준새번역성경은 동일한 문장과 문맥안에서 조차 요4장22절은 '예배한다.'로, 요4장21,23,24절은 '예배드린다.'로 혼용하여 번역하였고,
이는 두가지 표현의 시대적인 의미상의 차이점을 성경번역시 '분별(分別)과 숙고(熟考)없이' 간과(看過)한 결과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의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2,000년전에 이미 모든 사람들(신자와 불신자포함)의 죄들(요일2:2)을 위해서 '영원한 단번 대속죄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때문에, 지금은 구약시대의 사람들과는 달리 '드리는 대상물'이 있지도 않기에 드릴 이유도, 드릴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요4:24), 빌립(행8:27), 바울(행24:11)의 말처럼 '영과 진리로'(요4:24) 예배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번제헌물을 드리는(offer) 제사법 대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worship)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짐승등을 제사로) 드리는 것'은 구약의 율법에 의한 당시의 제사문화권내의 제의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각자의 죄들의 문제를 속하는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였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개역한글,개역개정성경 히10:1)
‘율법은 다가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는 가지고 있으나 그 일들의 형상 그 자체는 아니므로 그들이 해마다 계속해서 드린 그런 희생물들로는 거기로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완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킹제임스흠정역성경 히10:1)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개역한글,개역개정성경 히10:10)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영원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킹제임스흠정역성경 히10:10)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개역한글,개역개정성경 히10:12)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킹제임스흠정역성경 히10:12)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 헌물을 드림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킹제임스흠정역성경 히10:14)
이처럼 왕상3:4절과 히10:1,10,12,14절등의 표현은
구약시대의 제사('번제헌물로')와 신약시대의 예배('영과 진리로',요4:24)의 차이점을 성경독자들에게 분명하게 기록으로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약시대(=예수님의 십자가이후~)인 지금도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죄들의 문제로 드려져야 하는 것
곧 짐승번제라는 대상물의 드림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래서 그것(번제물에 의한 제사법)이 '예배'라는 말로 그대로 여전히 대치되었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히10장 저자의 성경진술이 말하는 바와는 달리
지금도 짐승번제제사의 드림이 매년 계속해서 우리의 신약교회공동체안에서도 여전히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사건이후 '죄헌물'로 인한 '제사를 드리는 것은 더 이상 다시는 없다'라고 성경기록 히10장18절에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개역한글,개역개정성경 히10:18)
'이제 이것들의 사면이 있는 곳에서는 다시는 죄로 인한 헌물이 없느니라.' (킹제임스흠정역성경 히10:18)
2. ‘예배보다’라는 표현에 관해서
이 말은 우리나라 조선시대말경 선교초창기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당시의 유교적인 문화권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상황에서,
서양문물로 배척되었던 예배행위의 모습들이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마치 구경꾼의 입장에서라도 보듯이) ‘예배보러 가자’라는 말들로 자연스럽게 통용되어졌었고
이런 민족적인 정서안에 깊이 뿌리박혀진 말표현과 습관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말속에 관습과 풍습처럼 굳어져 일상의 용어가 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양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예배행위가 당시의 조선인들에게는 신기하게만 느껴졌고,
이는 마치 시장장터에 하는 순회공연단의 재미난 구경을 보러 가는 것처럼 당시의 생활상과 잘 맛물려진 표현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에서 오랜 세월동안 이해되어져 왔고 이러한 민족적 배경하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이였습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오랜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해 온 이 말이 단순히 그렇게 쉽게만 사용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한가지 참고 예로, '시장보러 간다'라는 등의 또 다른 성경밖의 용례의 말로도 사용되어 왔었기 때문입니다.
이 용례의 표현에는
가) 단순히 시장에 사람들과 새로운 상품들을 구경하러 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나) 더 중요한 목적은 시장에 가서 정작 각자의 목적대로 생필품거래에 참여하고 체험하면서 좋은 것을 사고 받아 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이 '예배보다'라는 말이 현대 신약교회에서 낭독하는 신약성경기록에 잘 어울리는 말이라고 볼 수 없고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에 계속되는 '예배하다'라는 성경에 근거한 표현을 통해서 잘 확인되어 질 수가 있습니다.
3. ‘예배하다’라는 표현에 관해서
위의 2가지 표현들 곧 '예배드리다'(offer), '예배보다'라는 말들과는 달리 다행히도
"우리말 한글성경들(개역한글,개역개정성경등...)과 각종 영어성경들(영어KJV,영어ASV,영어NIV,영어RSV성경등...)"에서도 '예배하다 (worship)'로 그 뜻을 살려서 정확히 잘 번역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번역초기인 1890년대에 성경번역자들이 출간하여 낸 것들을 1900년에 함께 묶어 발행한 신약젼셔에서도 일률적으로 '예배하다'로 번역기록되어져 있으며,
1938년 개역된 개역성경에서도 '예배하다'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한국 교회의 대부분의 교단들이 사용하고 있는 <개역한글성경>과 <개역개정성경>의 신약성경에 똑같이 '예배하다'라는 용어로 잘 번역하여 기록되어진 것도 이를 잘 뒷받침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요4:20-24,행8:27,행24:11).
우리 신약성도들이 읽고 보고 소리내어 낭독하고 있는 신약성경 구절들중 어느 구절들을 보더라도 한결같이 모두 '예배하다'로 번역,기록되어져 있을 뿐, '예배드리다'로 기록된 곳은 거의 없습니다.
또한 현존하는 대부분의 공인기독교 교리서들도 '예배하다'로 이견없이 통일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여인이 오랜세월 익숙했을 자신의 조상들의 관습(예배드림,offer)에도 불구하고 요4:20절에서 '예배한다(worship)'라고 바꾸어 말하고,
이를 그대로 인정하시고 예수님도 결정적으로 요4:21-24절에서 '예배할지니라(worship)'라고 최종선언하시는 대화장면을 잘 살펴보세요.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개역한글,개역개정성경 요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경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이르기를, 사람들이 마땅히 경배해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나이다, 하매’(킹제임스흠정역성경 요4:20)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개역한글,개역개정성경 요4:21)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너희가 이 산에서도 [아버지]께 경배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서도 경배하지 아니할 때가 이르느니라.’(킹제임스흠정역성경 요4:21)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개역한글,개역개정성경 요4:22)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에게 경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이라.’(킹제임스흠정역성경 요4:22)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개역한글,개역개정성경 요4:23)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그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킹제임스흠정역성경 요4:2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개역한글,개역개정성경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킹제임스흠정역성경 요4:24)
나) 행8:27절에서 이방인인 에디오피아내시가 예루살렘에 온 목적이 '예배하러'라고 합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개역한글,개역개정성경 행8:27)
‘그가 일어나 가는데, 보라, 에티오피아 사람 곧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여왕 간다게 밑에서 그녀의 모든 국고를 맡아 큰 권세를 가진 내시가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킹제임스흠정역성경 행8:27)
다) 행24:11절에서 벨릭스총독앞에서 바울(이방인의 사도)이 자신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한 말도 '예배하러'였음을 확인해 보세요.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개역한글,개역개정성경 행24:11)
‘각하께서 이해하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이제 겨우 열이틀밖에 되지 않았나이다.’(킹제임스흠정역성경 행24: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킹제임스흠정역성경 롬12:1)
'I beseech you therefore,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hat ye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sacrifice, holy, acceptable unto God, [which is] your reasonable service.'(영어KJV성경 롬12:1)
* 롬12:1절을 통하여 바울이 말한 것도,
죽여서 드려지는 제사법인 구약의 때와는 달리 예배하는 지금의 신약시대에는
우리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각자의 거룩한 몸의 열매와 삶 곧 '살아 있는 희생물'(living sacrifice)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합당한 섬김'(reasonable service)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개역한글성경의 경우 롬12:1절에서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는 말에서 '드릴'이라는 표현은 번역상 없습니다.
* 게다가 롬12:1절은 영적예배가 아니고 '합당한 섬김'(영어kjv, reasonable service) , '영적 섬김'(영어asv, spiritual service)임이 맞습니다.
결론적으로,
현대사회 대중문화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 변모하게 되며 그에 따라 언어들도 추가, 생성되고 소멸을 반복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교회공동체밖에서의 현상으로는 너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공동체안에서 사용하게 되는 용어와 단어들은 무엇보다 성경적 기록에 의한 교리적인 근거가 있어야만 마음의 열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성경기록에 의한 성경언어의 습득'이라는 방법으로 우리가 영의 아버지로 섬기는 하나님의 성품과 뜻도 '분명 더 정확하게 그리고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방법으로 성경을 보고 연구하고 이해하는 선량한 독자들을 ''마치 하나님을 책 속에만 가두어서 믿는 사람들'이라고 폄훼(貶毁)하며 '황당한 오해와 치부'를 하는 분들을 우리 주변에서 쉽지 않게 보게 됩니다.
이런 오해의 생각들은 아주 위험한 생각들이며, 누구보다 책임있게 어린 후대세대를 잘 가르쳐야 할 기성세대로써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말들와 왜곡된 주장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기록이 전달해 주려 하는 의미를 부지런히 힘써 이해하려고 수고하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중적인 세상문화나 언어 그리고 그 가치를 성경기록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분별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참으로 신중하고 조심해야 할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예배(禮拜)' 자체가 그리스도안에서(=in Christ) 하나님과의 거룩한 영적인 만남과 실제적인 교제, 동행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살아 움직이는 믿음'의 표현이며,
"개인과 공동체를 향한 부르심에 대한 역동적인 응답"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가) ‘예배드리다’라는 구약시대의 동물제사법에 의한 말의 단순한 차용이나,
나) '예배보다'라는 우리 민족의 정서에서 굳어져 '성경밖에서 아무런 저항없이' 오랜동안 이어져 온 표현의 무분별한 차용보다는
다) ‘예배하다’라는 신약성경의 정확한 기록에 의한 근거를 가진 말로 우리 성경신자들 모두의 입에 잘 붙여서, 어린 후대세대들에게까지도 잘 이어져 사용되어지도록 지금의 우리 세대가 성경용어들에 대해서 같이 수고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그레삼의 법칙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는 경제 논리가 우리 모든 성경신자들의 성경언어의 사용습관영역에도 분명 해당되어 진다는 사실을 잘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공동체안에도 '비성경적인 언어가 좋은 성경언어들을 쫓아낸 경우'가 참으로 많음을 봅니다.
끝으로 호6:6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드려지는 번제(헌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하나님 알아가는 것을 원하시는 것"임을 전해드리면서 오늘의 글을 이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한글개역성경 호6:6)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며 번제 헌물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더 원하였으나'(킹제임스흠정역성경 호6:6)
이제라도 건전한 신약성경교회를 부르짖는 모든 공동체안에서 만이라도 가급적 좋은 성경용어들이 우리 성도들의 입에 더 많이 잘 자리잡아 애용(愛用)되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끝-
첫댓글 대한성서공회에 가보면 '공인역 새한글성경'이 나왔습니다.
요4장24절을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래서 그분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성령님에 이끌려 진리를 따라 예배드려야 합니다.'라고 다시 번역하였습니다.
성경용어를 잘 잡아 주었던 이전의 성경들인 '개역한글성경'과 '개역개정성경'들에 비하여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번역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