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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강원도의 명물중 하나는 오징어입니다. 그런데 오징어와 짱구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징어는 말릴 수 있지만, 짱구는 못 말린다는 점입니다. 못 말리는 짱구가 유명해진 것을 보면 어떤 일이든 남이 말리지 못할 만큼 열정을 품고 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웁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 사도바울 역시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그가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쓰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가려할 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말렸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바울을 말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예루살렘으로 갔는데 거기서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 지경이 되면 대부분 ‘아, 사람들이 말릴 때 오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 때 그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하며 후회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로마로 가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사도 바울의 열정을 그 무엇으로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요즈음 복음전파의 열매가 참으로 적습니다. 힘을 다해 수고해도 열매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열정과 믿음은 마치 햇빛에 마르는 오징어처럼 말라 버리기 쉽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바울에게 있었던 그 열정과 그 확신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2010년이 ‘못 말리는’ 한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한절씩 다 풀어 설명하기보다 빚진 자의 심정과 복음의 능력에 대한 바울의 믿음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빚 진자의 심정과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야 말로 바울이 가졌던 열정의 원동력이고 그의 믿음의 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 빚 진자의 심정(14,15)
14,15절을 봅시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이 말씀은 바울이 그토록 로마로 가고자 했고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동기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빚진 자의 심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빚진 자의 심정 때문에 로마로 가고자 했고, 빚진 자의 심정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빚진 자의 심정’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복음 전파에 대한 다급하고 절박한 의무감입니다. 빚을 진 사람은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항상 마음이 편치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빚을 갚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에 대해서 이런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고전 9:16에서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고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에게는 복음 전파에 대해 빚진 사람만큼이나 다급하고 절박한 의무감이 있었습니다. 다급하고 절박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늘 깨어 있었고 촌음(寸陰)을 다투어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를 쳐서 복종시켰고 자기를 극복했습니다(고전9:25,26).
‘알바의 달인’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IMF때 1억의 빚을 졌습니다. 그 빚이 10년간 불어서 3억이 되었습니다. 나날이 늘어가는 빚을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다급했을까요? 빚을 지면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 모두에게 화가 미칠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도망을 다녔고, 주민등록증이 말소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빚을 갚기로 결심했습니다. 빚진 자로 도망 다니기보다 빚진 자로 살자고 결심했습니다.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정식 직장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새벽2시에 신문 배달로 시작해서 떡 배달, 장애우 도우미, 목욕탕 청소 등 7개에서 10개의 알바를 했고, 잠은 토막잠을 잤습니다. 하나의 알바가 끝나면 다음 알바로 물 흐르듯 이어지도록 시간을 관리했고, 계절별‧시기별로 적당한 알바를 구하기 위해 벼룩시장을 늘 뒤졌습니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눈에 띄는 폐지를 모아 팔았고, 그것으로 배달에 소요되는 기름 값을 충당했습니다. 그렇게 일해서 그는 10년 만에 빚을 다 갚았고 전셋집을 구했고 이제는 어려운 친척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빚을 갚지 않았다면 도박에 빠져 있거나 술에 빠져 있었겠지. 빚을 갚으며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얻었고 가족의 소중함도 깨달았어. 일하는 재미와 휴식의 달콤함도 느끼게 됐어. 이렇게 고마운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이유가 없지…. 다시 10년이야. 지금 살았던 모습 흐트러짐 없이 다시 10년을 아르바이트 하며 살 계획이야" 그는 현재 48세입니다. 그는 58세까지 다시 그렇게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이 그로 자기를 이기는 삶을 살게 했고, 알바의 달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 빚진 자의 심정이 있다면 우리도 자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대일의 달인이 될 수 있고 복음전파의 달인이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둘째, 복음 전파자로서의 순수한 자세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수고한 것은 자신의 도덕심이나 봉사정신, 또는 애국심이나 인류애의 발로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동기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동기로 출발하는 사람들은 자칫 자신의 이념이나 이상, 또는 자신의 보람이나 명예를 위해서 복음을 이용하게 됩니다. 바울은 인간적인 동기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 곧 예수님에게 입은 은혜의 빚을 갚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는 딤전 1:15b,16에서 말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그는 자기를 본 삼아서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참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입은 은혜의 빚을 갚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위해서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다만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빚을 조금 갚은 것일 뿐, 자랑하거나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복음을 전파하는 그 찬란한 사도의 직분을 맡았다는 자체가 보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을 위해 수고하되 순수한 마음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건대, 바울은 약소국 이스라엘 백성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또 그는 키도 작고 볼품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빚진 자의 심정을 가졌을 때, 그는 결코 작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고자 했고(11), 심지어 당시의 초대강국이었던 로마 사람들까지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을 때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였고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할 수 있는 길을 뚫었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은 이렇게 사람을 넓게 하며 능력 있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빚진 것은 잘 잊는데 빚을 준 일은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졸업식 3일 전에 어떤 친구가 200원을 빌려가고 갚지 않은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러나 철없던 그 시절에 친구들을 놀려주며 상처준 일은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남자들은 직장에서 가족들을 위해 밤낮 고생한다고 인상을 씁니다. 그러나 아내가 집안에서 허드렛일 하며 얼마나 고달픈지는 모르고, 아빠의 허물과 약점 때문에 자식이 얼마나 참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깁니다. 그래서 늘 빚을 준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목자생활에는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그래서 빚을 준 심정에 자주 빠집니다. 대학시절에 제대로 한번 놀아보지도 못하고, 장래준비도 못하고 복음역사에 청춘을 다 바친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는 맞벌이가 상식인데 놀이방 비용 들여 자녀를 맡기고 캠퍼스 양들을 도우려니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한 주일간의 힘든 직장생활을 마치고 맞이하는 금쪽같은 휴일마저 복음역사를 위해 희생하는 것 같을 때 고달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양들을 돕다가 건강이 상하고 마음에 상처까지 받으면 어떠합니까? 이런 희생들 때문에 우리는 빚준 자의 심정으로 삽니다. 갚으려 하기보다 보상 받고자 합니다. 1년 동안 열심히 수고하고 연말이 되면 우리 마음에는 섭섭한 심정, 괘씸한 심정, 미운 심정이 듭니다. 심지어 복수심이 불타오를 때도 있습니다. 이런 빚 준 자의 심정은 우리를 편협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합니다. 빚 준 자의 심정은 결코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닙니다. 빚 준 자의 심정은 파괴적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감동시키셔서 빚 준 자의 심정을 버리게 하시고, 빚진 자의 심정을 품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의 지성인들을 감동시키셔서 빚진 자의 심정, 곧 이 땅과 세계를 향한 목자의 심정을 갖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 복음의 능력 (16,17)
그러면 바울이 빚진 자의 심정으로 또는 절박한 마음으로 전하고자 했던 복음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합니다. 16절을 봅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사도 바울 당시에는 복음을 믿고 산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복음은 헬라 철학이나 동양의 신비 종교들에 비해 너무 단순했고, 종교의식도 밋밋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구주로 믿는 예수님은 식민지의 목수 출신이었고 로마 군병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소수였고 또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도 보잘 것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유대교에서 볼 때는 배교자들이었고,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로마 사회에서는 반사회적인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창피하고 부끄럽고 또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까? 복음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마가 5:34을 보면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써 나음을 얻었는데, 이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귀신들린 자가 온전하게 된 것도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육체적 정신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두움과 절망에서 벗어나 빛과 희망을 찾게 되는 것이 구원이요, 슬픔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무엇보다도 죄와 죄의식과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영혼과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이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철학이나, 어떤 신비한 주술이나, 어떤 제사도,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없는 것은 거기에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지식이나 의식(儀式)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입니다. 오직 복음의 능력만이 죄의 힘을 무찌르고 그로부터 인간을 구원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 얻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더 나아가서 14,16b를 봅시다.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야만인에게나, 어떤 사람에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가끔 저 사람은 너무 훌륭해서 복음이 필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구세대나 신세대나,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강릉 사람이나 수원 사람이나,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이나,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사람이나 그저 소박하게 생긴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스리랑카 사람이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에게든지 복음은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우리도 이 시대에서 자칫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쉽습니다. 시대가 다양하고 문제도 복잡한데 복음은 너무 단순하고 구태의연한 것 같습니다. 또 멋있는 것이 많고 편리한 것이 많은 시대에서 복음을 믿고 산다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아 좀 창피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복잡해도 그 근본적인 문제는 죄 문제요, 사람들이 겉으로 멋있게 사는 것 같아도 홀로 있을 때에는 영혼의 곤고함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믿고 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17절을 봅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로마서 전체의 내용을 요약한 말씀입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복음’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義)’란 좀 어려운 말입니다. 이 말의 원래의 뜻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번역이나 공동번역에는 “이 기쁜 소식에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사람이 죄에 빠지고, 인간 세상에 많은 문제가 생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복음에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이 나타나 있다는 뜻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길이 나타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복음에 나타난 구원의 길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을 NIV 성경은 “by faith from first to last”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구원은 인간적인 지식이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나중에 좀 더 깊은 지식이나 엄격한 율법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또 어지간한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죄가 심한 사람이나 마음이 완악한 사람은 다른 방법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세대가 달라지고 문화가 바뀌어도 오직 믿음,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와 평화를 맛봅니다. 그런데 그런 자유와 평화가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고 나면 예상치 못한 문제와 갈등이 다시 생깁니다. 가정에서 핍박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고, 예수님을 믿기 전의 친구들과의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또 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문제와 씨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와 한동안 씨름하다보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나의 힘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문제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한번 구원을 받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즉 우리에게는 계속해서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양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늘 노력합니다. 그런데 지난 연말 성탄말씀을 공부하면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바로 구주 탄생의 소식이라는 메시지가 새로웠습니다(눅2:10,11). 즉 양들만이 아니라 목자인 나에게도 구원이 필요하며 항상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내가 겪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라 구주되신 예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절감했습니다. 일례로 저는 2010년 경기센터 신년수양회를 위한 장소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장소를 구해야 프로그램도 정하고 수양회 준비를 하는데 장소를 구하지 못하니 계획을 세우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저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는데 지난여름 최이삭 목자님에게 ‘목자님, 강릉센터에 한번 놀러 가도 되지요?’라고 물었던 일이 기억났습니다. 그리고 그때 목자님께서 ‘아, 언제든지 연락하고 오세요’라고 선명하게 대답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막상 스텝수양회 때 말씀을 드리려니 미안하기도해서 망설였습니다. 결국 믿음으로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최이삭 목자님께서 흔쾌히 허락하셨고 바로 그 순간 저는 장소문제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일예배를 강릉센터에서 함께 드리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최이삭 목자님께서 제가 주일메시지를 전하면 이번 수양회 장소 문제를 좀 더 확실하게 밀어주겠다고 제안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혹을 떼려다가 더 큰 혹을 붙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문제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그 모든 문제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UBF의 목자님들은 양들이 센터에 오지 않거나 센터에 와도 변화가 적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들이 많이 온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될까요? UBF에 수많은 양들이 오고 제자요 선교사로 자라서 10만의 선교사로 파송하고 나면 문제가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아지고 조직이 커지다보면 문제는 더 커지고 그 짐은 더 무거워질 뿐입니다. 우리는 역사가 크던 작던 역사가 잘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항상 문제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구원이 필요하고 구원의 능력은 복음에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제가 UBF에 처음 나왔던 88년은 우리 모임에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때는 복음의 능력을 눈으로 볼 수 있었고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이 영광스럽게만 보였고 목자로 산다는 것이 대통령도 부럽지 않다는 말에 공감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역사가 어려워지자 믿음도 약해지고 갈등이 늘어갔습니다. 때론 ‘목자로 살지 말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의 심정마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역사의 부흥기에는 한 사람의 소중함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숫자만 늘리려는 사업적인 생각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고난의 길을 사모하기 보다는 영광에 도취되었고, 사람들의 인정에 매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역사에 기근이 들어 어려운 시기를 보내면서 한 사람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순수해지지 않으면 더 이상 복음역사를 섬길 수 없기 때문에 순수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사람을 보상 없이 순수하게 사랑하려 했고, 세상의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만을 순수하게 사랑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이해타산에 밝은 사람이어서 빚진 자의 심정이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은혜에 빚을 졌다는 사실이 점점 사무쳐 옵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바라기보다는 자신의 성실이나 노력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는데, 순간마다 주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심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 즉 성경 말씀이 전보다 좀 더 깨달아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동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마음이 뜨거워지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열정에 불이 붙곤 합니다. 기근의 때에 저를 오징어처럼 마르게 하시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오징어처럼 팔딱 거리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바로 이 순간도 구원을 주시는 복음의 능력이 제 안에 또한 우리 안에 역사함을 믿습니다.
맺는 말 : 어제는 경포대에 해돋이를 보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흐려서 떠오르는 해를 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안개 뒤에서는 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안개 뒤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그 해를 바라보는 자에게는 치료하는 광선이 비추어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가 뛰듯이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말4:2).
오늘날 복음역사를 이루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부딪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빚진 자의 심정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2010년 한해에는 더욱 열정적으로 살고 더욱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게 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