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포면 송천리 숭림사보광전(보물 제825호),
이리여자고등학교 내에 삼기리(三奇里) 5층석탑,
금강동에 관음사, 석왕동 백제시대 말기 익산쌍릉
금마면 서고도리의 익산토성(益山土城:사적 제92호),
동산동에 단군의 영정을 모신 단군성묘(檀君聖廟),
모현동에 김근배(金根培) 항일정신을 기리는 매곡사
한편 여산면 호산리 천호산 북서쪽 기슭에 천호동굴
총길이 약 600m, 주굴의 길이는 250m인 석회동굴로
여름에 바람귀신이 살고 있는 '바람굴'이라고도 한다.
금마면 신룡리 용화산 서쪽 기슭에 있는 황각동계곡
기암괴석과 왕궁면 동룡리 왕궁저수지에 있는 함벽정
익산왕궁리5층석탑(고려), 국보 제289호, 높이 850cm
익산연동리석불좌상(백제), 보물 제45호, 높이 156cm,
익산고도리석불입상(2구), 보물 제46호, 높이 424cm,
익산쌍릉(백제), 사적 제87호, 전북 익산시 석왕동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당간지주(통일신라)
삼기면 오룡리 농요(農謠) 마을로 널리 알려졌는데,
지게의 목발을 작대기로 치면서 부르는 〈목발노래〉
외〈산타령〉〈등짐노래〉〈둥당기타령〉〈상사소리〉
금마면의 기세배놀이는 삼한시대의 소도에서 비롯된듯.
'솟대놀이'는 새해 풍년을 빌며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간짓대에 매달아 마당에 세우고 정월 보름날 풍물놀이
안동(고령).
삼국시대 지리산 일대에 큰 영향을 끼친 가야 역사.
경북 안동군과 통합시를 이룬., 옛 고령 대가야 영역.
삼국시대에 한반도에 동아시아 선진문명이 유입된 곳.
이조시대 유교문화 본 고장이며,
전통문화 유산들이 풍부한 고장
안동댐 건설로 영남 문화 관광지역.
풍산읍·와룡면·북후면·서후면·풍천면·
일직면·남후면·남선면·임하면·길안면·
임동면·예안면·도산면·녹전면·북문동·
서부동·삼산동·목성동·화성동·명륜동·
신안동·율세동·옥정동·법흥동·신세동·
상아동·용상동·성곡동·석동동·동부동
운홍동·동문동·남문동·남부동·천리동·
안흥동·대석동·옥야동·광석동·당북동·
태화동·법상동·금곡동·평화동·안기동·
운안동·이천동·안막동·옥동·송현동·
노하동·송천동·수상동·수하동·정상동·
정하동 등 1개읍 13개면 42개동이 있다.
시청소재지는 명륜동 면적 1,517.77㎢,
인구 176,094(2003), 인구밀도 115.8명/㎢.
삼국시대 이전에 창녕국 등 소국이 있던 곳
신라가 이곳에 진출하여 고타야군을 설치했다.
757년(경덕왕 16)에 고창군으로 개칭하고,
직령현·일계현·고구현을 영현으로 관할.
후삼국시대에 고려와 후백제 각축지.
이 고을 호족인 김선평·김행·장길 등이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승리해 안동부로 승격.
후에 영가군으로 강등되고,
995년(성종 14) 길주로 승격.
그뒤에도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1030년(현종 21)에 안동부로 개칭.
이때 안동부는 임하군·예안군·의흥군 등
3개의 속군과 일직현(一直縣)·은풍현(殷豊縣)·
감천현(甘泉縣)·봉화현(奉化縣)·안덕현(安德縣)·
풍산현(豊山縣)·기주현(基州縣)·흥주현(興州縣)·
순안현(順安縣)·의성현(義城縣)·기양현(基陽縣) 등
11개의 속현을 관할하는 대읍이었다.
중요 유물로는 하회탈 중 9개가 국보 제121호
임진왜란 때의 기록을 담은 징비록(국보 제132호)·
운천호종일기·안동권주종가문서가 있다.
그밖에 고려의 개국공신들인
김선평·권행·장길을 모신
북문동의 안동태사묘3공신유물
월영대 암벽에 새긴 해서체 글씨
성곡동의 이육사시비 등이 있다.
하회마을은 중요민속자료 제122호.
[교육·문화]
도산서원, 안동민속박물관
이황·유성룡을 배출된 안동
예로부터 예안향교·도산서원·
호계서원·병산서원·역동서원·
고산서원 등 향교와 서원이 발달
민속놀이로는 별신굿놀이·풋굿·지신밟기·
놋다리밟기·편싸움·화전놀이 등이 있으며,
매년 열리는 안동민속축제 때 동신제를 지낸다.
설화로는 견훤에 관한 〈합전교전설〉·〈제비원미륵불전설〉·
〈상아동의 진모래설화〉·〈열녀서씨설화〉·〈아기장수설화〉·
〈공민왕설화〉·〈시정잡배갈로덕섭이설화〉등이 전해진다.
민요로는 놋다리밟기에 부수된 노래들
둥둥헤이노래〉〈실감기노래〉〈놋다리노래〉
저포송〉·〈어사용〉·〈덜구소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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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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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민속마을.
옛부터 유림의 고장이었던 이곳은 대표적 동족부락
국보를 비롯 보물·중요민속자료·중요무형문화재 등
값진 문화유산이 많아 1984년 1월 민속보존마을로 지정
동쪽은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321m)이 감싸고 있으며,
낙동강이 마을 전체를 태극형으로 감싸 흐르는 곳이다.
임진왜란 전화를 입지 않았던 유씨 동족마을이었던 곳
일찍이 허씨(許氏)들이 자리를 잡았다가
나중에는 안씨, 그 다음에는 풍산 유씨
이조 초 이미 유씨들의 기반을 잡았던 곳으로
이조 중엽 유운룡·유성룡 형제를 배출한 고장.
하회마을의 대표적 가옥으로는 북촌택·양진당·
충효당·남촌택의 네 가옥은 ㅁ자 형태가 기본
몸채의 한 편을 연장해 사랑채로 쓰기도 했다.
전승놀이로 하회별신굿탈놀이 줄불놀이.
하회탈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북쪽으로는 울창한 노송림대가 있으며,
마을 중앙에 600년 느티나무 '삼신당 나무.'
강 건너의 부용대는 천연의 병풍과 같은 형태
이 일대는 백사청송(白沙靑松)이 어울려 경승.
이곳 강은 대략 최대 폭 300m, 최대수심 5m에 이르며
하회도선장 나룻배를 이용해 주변지역과의 왕래를 한다.
마을길의 북쪽을 북촌이라 하고 남쪽을 남촌
1990년 현재 남촌·북촌 총가구수는 102가구.
산업화에 따른 이농현상과 그로 인한 인구감소
빈집이 늘고 가옥의 유지·관리가 소홀해지면서
가옥들이 퇴락해가고 있어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방한했을때 탐방한 곳.
신도안.
신도안은 청학동과 아울러 이상향으로 알려진 곳.
신도안은 이조 창건 때 신 도읍 후보지로 거론된 곳.
신도안은 계룡산 유래에서도 도읍지로 언급된 바 있다.
..........................계룡산 유래............................................
충남 공주시 계룡면(鷄龍面)과 반포면(反浦面)에 걸친 계룡산.
차령산맥의 연봉으로 논산시(論山市) 대전광역시에 걸쳐 있다.
동경 127˚7′∼127˚19′, 북위 36˚16′∼36˚28′, 총면적은 60.98㎞².
천황봉(天皇峰, 845m), 연천봉(連天峰, 740m), ·삼불봉(三佛峰, 750m)
계룡산은 능선이 마치 닭벼슬을 쓴 용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지리산 줄기가 덕유산에서 갈라져 3백리를 거슬러 공주 동쪽에서 감아돈 곳.
반달 모양의 산세는 쥬라기(백악기) 화강암으로 덮혔고 차령산맥에 속한다.
차령산맥이 금강에 깎이며 천황봉·연천봉·삼불봉 외에도
쌀개봉(828m)·문필봉(文筆峰, 796m)·관음봉(觀音峰, 816m)·
막적봉(莫積峰, 664m)·수정봉(水晶峰, 662m) 등 20 여개의 봉.
이조 시대에 신도읍 예정지로 크게 각광받던 곳이 현재의 신도안이다.
특히, 참서, 정감록이 언급한 큰 변란도 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신도안.
이런 도참사상으로 신흥 종교들이 성행했으나 1984년 모두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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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안은 1950. 6.25 전란 사실을 몰랐을 만큼 오지마을.
하여,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이상향으로 소문났던 신도안.
정감록 신봉자들에게 십상지 이상향으로 알려졌던 신도안.
1960년대까지만해도 가난한 생활로 뒷간마다 피똥 흔적.
올이 거친 나물로만 보릿고개 굶주린 허기를 채웠던 때문.
신도안이 도읍지가 되길 기다리는 주민들에게 미래의 이상향.
'여기가 수도가 되는 날 명동 땅부자 부럽지 않을텐데.'
정감록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유일한 희망.
나는 어릴 때 유성 중동골의 할아버지 댁에 자주 갔다.
1950년대 말까지 초등학교 여름방학은 중동골에서 보냈다.
서울에서 대전행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서 유성행 버스를 타고
유성에서 중동골까지는 걸어갔다.
유성에서 개울 건너 재 넘어 십리를 들어가야 중동골.
마을 길목 재를 넘을 때에는 행인들을 기다려 함께 동행.
당시 호랑이가 출몰한다고 할만큼 으슥한 도깨비 고개마루.
해저물면, 소나무 숲속 고목 옹이마다 도깨비불.
숲속에 숨어있는 호랑이의 눈과 같이 번쩍거렸다.
더구나 궂은 비 내리는 날이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
한번은 유성장 구경나갔다가 늦어진 귀가시간.
고기잡이 어항을 사갖고 오다가 해가 저물었다.
고기잡이 유리 어항 깨질까봐 조심조심 걸었던 탓.
'결국, 고갯마루 넘다가 무서워 바지에 오줌.'
그 유리 어항에 된장을 넣고 개울에서 고기잡이.
유난히도 긴 여름밤 모기에 뜯기며 별빛 헤아리기.
낮이면 논두렁을 쏘다니며 벼메뚜기 잡아 구워먹기.
중동골에서 보내는 나의 여름방학은 길고 또 길었다.
심심해하는 나에게 좋은 곳 구경시켜 주신다는 할아버지.
어린 나를 데리고 더욱 오지마을 신도안을 구경시켜 주셨다.
수십리 산길을 걸어 발바닥이 부르틀 무렵 도착한 신도안.
유성에서 십리나 떨어진 중둥골보다 더욱 더 시골인 신도안.
산나물로만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목이 메였던 어린시절 기억.
'신도안 과수원 부자집의 푸짐한 식사대접.'
간장에 졸인 멸치반찬과 수북히 쌓아올린 보리밥.
신도안에서 고기 반찬에 밥을 먹었던 유일한 한 끼니.
그외엔 씀바귀 및 각종 나물로 하루 세 끼니 채운 식사.
그 거친 나물이 어린 내 똥구멍마져 찢어놨던 신도안.
새끼 꼬을 볏짚이 아까워 보리 짚으로 밑을 씻던 마을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 뜻을 알게 해준 신도안'
어린 내 기억으로는 정말로 한심했던 오지마을 신도안이었다.
그러나, 수십년 세월이 흘러 지금은 수도 후보지로 떠오른 곳.
우리나라의 삼군 사령부는 이미 그곳으로 이전을 완료한 상태.
'과연, 정감록 예언 대로 도읍 후보지가 될것인가?'
..................계룡시 (신도안)의 유래....................................
현재 계룡시(신도안)는 면적 60.68㎢. 인구 3만 1340(2003) 명.
동쪽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서쪽은 논산시 공주시 남쪽은 논산시
북쪽은 공주시와 인접하고 시청 소재지는 금암동에 위치해 있다.
마한시대에는 진령지방 소국인 신흔국에 속하는 작은 씨족 부락.
마한이 백제(근초고왕)에 합병된 후에 황등야산군에 예속되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황산군으로 고려시대에 하남도 연산현에 소속
이조 인조 24년에 은진현으로 1895년 연산군 식한면 지역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연산현 식한면 30개리, 연산군 두마면 14개리,
진령군 남면 우명리, 남면 월저리를 병합 두마면으로 개칭(논산군에 편입).
1962년 두마면에 신도안출장소가 설치되었으나 1983년 폐지되었다.
1989년 대덕군 남선리가 논산군 두마면에 편입되어 남선출장소 개소.
1980년 육군본부와 공군본부가 들어서고
1993년 해군본부가 입주하게 되었다.
1990년 충청남도 계룡출장소가 되었고,
2003년 9월 계룡시로 승격되었다.
2003년 두마면·남선면과 금암동을 관할.
자연
계룡산(854m)을 중심으로 하천과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계룡산 남쪽 신도안으로 흘러 대전천과 유성천에 와 닿는 갑천
계룡산의 북쪽에서 흐르는 노천 중심 내가 주요 하천을 이루는 곳.
이 하천은 논산시 상월면과 노성면을 지나 금강으로 흘러들어간다.
2002년 임야면적은 4143ha(국유림 1541ha, 공유림 21ha, 사유림 2582ha.
계룡산에 있는 수목의 54%(2003)이상이 침엽수로 시 전체에 푸른 인상.
2002년도 연평균기온은 11.7℃, 연강수량은 1476.8mm이다.
산업·교통
신도안 지역에 국방의 중추 기능을 담당하는 육·해·공 3군 본부가 이전
신도안은 군산과 대전 사이에 있어 군인 등 유동 인구의 비율이 높은 편
군가족이 인구의 47%(2002)이고 주민의 대부분이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사회·문화
교육기관으로 2002년 현재 초등학교 3개교,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1개교
의료기관으로는 의원 9개소, 한방병(의)원 6개소, 보건지소 1개소가 있다.
관광명소로는 196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계룡산이 가장 유명하며,
그 밖에 동학사·신원사·갑사 등의 사찰과 주민들의 휴식처인 괴목정,
신도안 부근의 계곡에 있는 암용추·숫용추 등이 유명하다.
문화재
2002년 현재 천연기념물 1점, 유형문화재 2점, 문화재자료 5점이 있다.
계룡산 신도안 주초석 및 석재 유형문화재 66), 은농재(유형문화재 134),
신원재 12평(문화재자료 379), 모원재(문화재자료 308), 염선재 12평(문화재자료 316)
............................................................................................................................
..................2004.12.31 (금) 중앙일보.....................
충남 계룡시 금암동, 두마면 농소리 일대 계룡 대실지구
46만 3천평을 전원도시 개발예정이라는 건설교통부 발표.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된 계룡 대실지구는 계룡대.계룡시청과 가깝고
지구 주변에 호남 고속도로, 국도 1호선 및 4호선 등이 지나는 곳이다.
이곳에는 임대주택 1900가구를 비롯해 총 7400가구가 들어설 예정이다.
2008년 첫 입주를 목표로 2006년까지 개발계획 및 실시계획이 세워진다.
건설교통부는 '선계획 후개발' 시스템을 적용 난개발을 방지하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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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신도안은 38선 이남 한반도에서 중심부에 있다.
그러나, 수도권 이전계획을 거론하기에 시기상조인 듯.
한 나라의 수도 이전은 국가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
하여, 수도권 이전계획 발표는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듯.
도올 김용옥은 '경복궁 터' 정도전 설에 극찬하고
무학의 '한양 500 년 도읍지 예언'을 독설로 표현.
그가 석학이긴 하지만, 무학에 대하여 잘못된 편견.
아는 것이 없다 하여, 저서를 남기지 않은 무학대사.
'당대의 석학' 도올도 사람인지라 실수할 수 있는 법.
정도전을 극찬하며 '수도권 이전' 찬성은 앞뒤가 맞지않는다.
결국, 도올의 '수도권 이전'을 찬성하는 주장은 개인적인 견해.
석학 답게 설득력 있는 논리를 내놓은 후 소신을 펴는 것이 순서.
'수도권 이전 찬반논쟁이 500년 만에 재연된 듯.'
'이조 500 년 역사가 흐른 후, 서울 도심은 현재 어디일까?'
무학대사가 주장했던 인왕산 아래 한강 기슭 방향이 아닌가?
무학은 한강 마포나루의 상권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아닐까?
지리산 아래 화개장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상권을 형성했던 곳.
민심은 곧 천심이다. 장터에서 가까운 곳은 민심을 알 수 있는 곳.
무학은 지리산에서 풍수지리학을 터득했고 화개장터를 잘 아는 인물.
정도전이 주장한 경복궁터는 현재 서울 도심에서 벗어난 위치.
권력의 중심에 위치한 경복궁터는 민간 경제와는 거리가 먼 곳.
백성을 잘 살게 하려는 경제에 역점을 둔 무학의 혜안이 놀랍다.
'한양에 왕궁터를 잡을 당시 상권 중심은 마포나루.'
서해(인천)에서 큰배들이 올라올 수 있는 한계선이 마포나루.
한강 상류에서 작은 배들이 도달할 수 있는 곳 역시 마포나루.
그 상권에서 가까운 곳에 궁궐터를 두려했던 무학의 선견지명.
국가 위기에서는 인왕산을 거쳐 탕춘대 능선을 통해 북한산성 피신.
궁궐터를 인왕산 아래 잡아 왕의 안위까지 고려했던 무학의 숨은 뜻.
무학이 주장한 궁터가 받아들여졌다면 서울은 균형있게 발전했을 듯.
결국, 이조는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 사대문 정치를 편다.
그것은 곧 양반 지배계층 중심이고 민심에서 벗어난 정치.
이조는 대원군 쇄국정치로 국운이 다하도록 민심을 몰랐다.
이조가 국운을 다하고 구한말에 이어 오늘날에는 청와대.
역대 대통령들 역시 그곳에 들어가면 민심과는 멀어졌다.
요즘, 첨단통신의 발달로 그 폐단이 사라져가고는 있지만.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은 역시 시장경제에서 벗어나 있는 듯.
현재, 서울의 지도를 살펴보면 한송이의 무궁화 같다.
서울을 꽃 한송이로 표현한 실세 정치인은 누구일까?
석유 한방울도 나오지 않는 나라에서 기름 값이 아깝다.
500년 역사가 담긴 서울을 무궁화 꽃으로.. 표현한 도시계획.
낭만적 발상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차라리 바둑판이 낳을 듯.
서울의 미궁같은 도로에 갇혀 방향감각을 잃으면 화가 치민다.
서울 시청을 축으로 펼쳐진, 천만 인구의 세계적인 도시.
북한산을 중심축으로 하면, 불균형이 바로 잡히지 않을까?
태극무늬 한강을 중심으로 한 서울의 <원형 도시계획 구도>.
서울의 원형 밖은 4각 태극기 형태의 위성도시
전 국토를 바둑판 처럼 발전시켜 나가도 좋을 듯.
'서울의 중심에서 위성도시를 향해 뻗는 8 방향 도로'
'위성도시로 뻗어나가 전 국토와 만나는 바둑판 도로'
수도권 이전은 국가의 미래가 걸려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수도권이 품은 문제점을 풀 해법을 찾는 것이 최우선이다.
경제가 어려운 시점에 국론의 분열은 국력이 낭비되기 쉽다.
'서울의 문제점은 도시계획 전문가에게 맡겨도 될 사안.'
현재, 서울 형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웠던 도시계획이 골격.
프랑스 파리 도시계획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 그린벨트를 지정.
현재 서울은 국제도시로 성장후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많은 도시.
파리는 개선문 중심으로 팔방도로가 뻗고 그린벨트가 감싼 도시.
역사의 도시 파리를 재개발할 수 없어 조성한 신 파리가 라데팡스.
구 파리 전통건물들과 신파리 첨단 빌딩들은 이상적 조화를 이룬다.
'옛 전통을 부수지 않고도 첨단 도시화에 성공한 파리.'
파리 시내 원형 순환도로 안에 사는 사람들을 <파리 장>이라고도 한다.
파리 외곽의 그린 벨트 주변은 시민들의 휴식처이고 시민들 편의 시설.
파리의 그린 벨트 운영방법, 도로개통, 도시계획 등등은 본받을만 하다.
한양(漢陽)
한수(漢水 : 한강) 북쪽이라는 뜻을 지닌 지명.
삼국시대부터 고대 국가 간의 쟁취의 대상지역.
한양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충렬왕 때
양주(楊州)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곳을
한양부로 고치며 공식적인 지명으로 부여.
1394년(태조 3) 이조가 도읍을 한양에 정하고
한성부를 설치해 정치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리산에서 풍수지리설을 터득한 무학대사.
이조 개국 때 한양천도설을 주장한 무학대사.
옛 도읍 한양은 그후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자.
......
서울.
.......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의 행정구역 이름.
서울은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하는 고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세계적인 도시이다.
동서간 거리 36.78km, 남북간 거리 30.30km.
사방으로 과천·광명·안양·시흥·성남·구리·
남양주·의정부·부천·군포·의왕·의정부 등
위성도시들이 있고, 수원·안산·인천도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수도권역 도시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 천안·아산·진천 등 충청도 북부까지도 확대.
서울은 14세기말 이조 건국과 더불어 도읍지로 건설
그 이후 지금까지 600년간 줄곧 우리나라의 수도였다.
한양 한성으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에 경성으로 개칭.
해방 후 1945년 지금의 '서울'로 다시 바뀌었고,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다시 행정수도가 되었다.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옛 경무대)를 비롯하여
3부를 대표하는 국회·대법원 및 정부종합청사
(제 2 정부종합청사는 과천시)가 자리잡고 있다.
서울이란 신라 수도 서라벌 또는 서벌에서 유래
수도를 지칭하는 명사인 동시에 고유명사로 사용
서울은 우리나라 도시 이름 중 유일한 우리말 지명
오늘날 서울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면에서 중심지
도로·철도·항공 교통의 구심점이자 우리나라 상징.
향후 통일이 되고 동북아시아 경제권이 형성되면,
서울은 동북 아시아 지역에서의 최고 중심지 위치.
일본 도쿄(東京) 및 중국 베이징(北京)과 경쟁 위치.
행정구역 상 종로구·강남구 등 25개 구,
469개 법정동, 528개 행정동으로서 구성
시청은 중구 태평로1가동 31 번지에 있다.
면적은 전국토의 0.28%에 지나지 않으나,
인구는 남한 인구 4 명 당 1명이 사는 셈
서울은 인구밀도 또한 세계에서 가장 높다.
면적 605.78㎢,
인구 10,276,968(2003),
인구밀도 16,975.2/㎢(2003).
[연혁]
서울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선사시대.
암사동 선사주거지는 신석기시대 대표 유적.
한사군(漢四郡) 진번군에 속했고,
이어 마한(馬韓)이 이 지역을 지배.
백제 하북위례성은 지금 도봉구 미아동 근처로 추정.
삼국사기 기록 '근초고왕이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그곳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지금 경기도 광주
신라 백제 고구려는 전략적 요충지라 서로 쟁탈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한때 이 지역을 점령했고(392),
장수왕은 다시 백제를 물리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여
위례성을 남평양(南平壤)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475).
551년 나제 연합군이 한강 유역 고구려군을 밀어냈으나,
뒤이은 양국간의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해 이 지역을 차지
신라는 북한산주(北漢山州) 또는 남천주(南川州)로 삼았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점령 중국 해상교통로를 확보
삼국통일을 위한 주요한 고지를 점령한 셈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9주 중 한산주(漢山州)에 속했고,
경덕왕 때 한주(漢州)라 개칭 한양군(漢陽郡)으로 했다.
고려 성종 때는 12목의 하나인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
문종 21년(1067)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이 되었다.
이때부터 서울은 중요한 정치적 기능을 갖게 되었다.
궁궐이 지어지고 주민이 이주해 도시적 면모를 형성.
몽골 침략으로 고려가 강화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잠시 몽골군 주둔지가 되기도 했다.
충렬왕 때는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가
공민왕 때 3경이 부활되며 남경 지위를 회복.
이후 여러 번 한양 천도가 논의되기도 했었다.
1392년 이성계는 민심을 일신하고
국기를 튼튼히 하고자 천도를 결심.
처음에는 계룡산이 수도로 거론되었으나
하륜, 정도전, 무학대사 건의를 받아들여
1394년(태조 3) 이조는 한양으로 천도했다.
한양을 새 왕조 수도로 정하는데는
한양이 우리나라의 중앙에 위치하고,
한강이 있어 교통상 편리한 점이 고려.
또한 당시 풍수설(風水說)도 큰 몫.
백악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낙산과 인왕산이 좌우로 있고,
남산이 알맞게 앞에 놓여 있으며,
굽이쳐 흐르는 한강 너머로
멀리 관악산이 조아리는 한양
능히 왕도가 자리잡을 만한 명당
이러한 생각은 도성·궁궐·종묘·문묘·사직단·
조정청사·주거지 및 시전의 배치와 가로 건설 등
한양의 도시 내부구조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395년에는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도성을 중심으로 성저 10리에 이르는 5부
(東部·西部·南部·北部·中部) 52방 확정.
옛 남경의 이궁 터에 경복궁을 짓고 전각을 배치.
좌묘우사의 원칙에 따라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고
궁궐 남쪽으로 대로(세종로)를 내어
양쪽에 육조와 중추부·사헌부 관청.
1396년에는 백악산-인왕산-목멱산-낙산을 잇는,
길이 5만 9,500자(약 17km)의 도성이 축조되었고,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4 대문과 4 소문이 뚫렸다.
동대문과 남대문은 1396년에 각각 준공되었다.
지금도 4대문안, 또는 문안(城內)이 통용된다.
종로를 중심으로 행랑과 시전이 배치,
이를 중심으로 상업지역이 형성되었다.
종로 북쪽은 궁궐·종묘·사직이 자리한 '명당'
그 부근에는 양반계급의 주거지역인 북촌(北村),
그리고 상업지역을 지나 남산 기슭엔 하급관리와
세도가 없는 양반들이 사는 남촌(南村)이 이뤄졌다.
1399년(정종 1)에는 수도를 개성으로 옮겼다가
6년후인 1405년(태종 5)에 한성으로 다시 환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의주에 파천했다가
그 이듬해에 환도해 개국 후 약 2세기 동안 태평성대
이조는 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호란·병자호란 등
전란에 시달려 한성부는 거의 모든 시설이 파괴된다.
궁궐 건축물 중 남대문, 돈화문,
창경궁의 홍화문·명정전·명정문
경복궁 경회루의 돌기둥만 남았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조는 재도약.
18세기 이후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해
도시의 기능과 형태도 이전과 달라졌다.
19세기 후반 한반도에서 열강들의 세력다툼
한성부는 외세의 치열한 격변 현장이 되었다.
임오군란·갑신정변을 거치며 개화의 거센 물결
철도·전신·전화·학교·병원·상수도 등 시설들
지방제도 개편으로 1895년 한성부는 한성군으로 격하
1896년 다시 한성부로 개칭되었고,
1906년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뀌면서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바뀌고,
성내 5부, 성외 8면 행정구역 개편.
경성부에는 조선총독부 이외에도 조선군사령부·
조선은행·동양 척식주식회사 기관이 들어섰다.
경인선·경부선·경의선·경원선·중앙선 철도 부설
용산·영등포·청량리 철도역을 중심으로 도시 발달
영등포 일대에 소비재 공업이 이루어졌고,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해 각종 전문학교가 설립,
남산 중턱의 조선신궁 신사(神社) 참배 시설들
경복궁을 가로막고 선 조선총독부.
남산 아래 용산 일대 조선군 사령부
(예전의 미 8 군 사령부 자리에 위치).
경성부 한인들은 주로 북촌 종로 청계천 이북에 살았고,
남촌과 용산의 군사시설 주위에는 일인들이 모여 살았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일제가 물러가고,
경성은 '서울'이 되어 미군정 치하에 들어갔다.
1946년 9월 '서울시'로 되어 경기도에서 분리,
10월에는 일본식 지명을 우리 것으로 바꾸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수도로 결정,
1949년 136.06㎢였던 서울시 지역을 268.35㎢로 확장
성북구를 신설하고, 9개구를 가진 대도시로 새출발했다.
6·25전쟁 때는 임시 수도가 부산으로 이전했고,
1953년 환도했을 때 서울은 전쟁이 남긴 폐허였다.
복구사업 착수로 제 모습을 갖출 무렵 군사 쿠테타
군사정부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착수
대도시 중심 성장전략으로 서울은 거대 도시로서 성장.
1962년 내무부장관 감독을 벗어나 국무총리에 직속
다른 지방 행정구역과 구별되는 서울특별시로 승격
1963년 한강 이남과 동북부 시역이 확장되었다.
10년 뒤인 1973년에는 도봉구와 관악구가 신설
경기도 지역의 일부가 편입되어 시역이 또 팽창
1975년 강남구, 1977년 강서구,
1979년 은평구·강동구·동작구·구로구 신설
1988년 송파구·중랑구·노원구·서초구·양천구 신설
1991년 지방의회가 구성되었고,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로 지방자치 시대.
[자연환경]
서울의 지반은 주로 화강암과 화강편마암.
뚝섬 - 한남동- 남산 서사면 - 북아현동 - 신촌
남서부는 화강편마암, 동북부와 관악산 일대는 화강암.
천도 당시 한양은 북으로 북악산(342m), 동으로 낙산,
서로 인왕산, 그리고 남으로 목멱산(또는 남산, 262m)
한양은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잡았다
이조시대 이들 내사산의 능선을 연결하는 도성을 축조.
북으로 북한산(837m), 동으로 용마봉(龍馬峰:348m),
서로 덕양산(德陽山:125m), 남으로 관악산(629m)
외사산(外四山)에 둘러싸여 외침을 방어하는데 유리.
북쪽으로 도봉산(717m)·남장대(716m)·인수봉(811m)
동쪽으로는 불암산(佛岩山)·수락산(水落山:638m) 등
따라서 동북부가 대체로 높고 서남부는 구릉지와 평야
이러한 지세는 1970년대 이후 도시발달 방향에 큰 영향.
도시의 한가운데를 한강이 동에서 서로 관류하면서
인구 1,000만 명이 넘는 거대도시에 각종 용수 공급
하운이 성했던 예전에는 뚝섬과 삼개(마포)에 하항
곡물, 생선과 소금 등 해산물을 실어 나르며 번창했고
육로 발달로 쇠퇴했고, 국토 분단 때문에 운하도 끊겼다.
광나루 노량·양화·한남·송파 나루터는
다리가 여럿 놓이면서 역시 자취를 감췄고,
지금은 유람선이 여의도-잠실 간을 운행할 뿐.
청계천(淸溪川)·중랑천(中浪川)·탄천(炭川)·
양재천(良才川)·안양천(安養川) 등의 지류가
한강으로 흘러들지만, 용수를 공급하지는 못하고
빗물과 하수를 배출해내는 통로의 역할만 하고 있다.
한강은 팔당 하류부터 하천 양쪽에 다양한 지형을 펼친다.
워커힐·옥수동·노량진·절두산 부근에는 깎아지른 절벽,
미사·토평·신사·반포·행주 등지에는 범람원
뚝섬·잠실·여의도·난지도에는 하중도를 형성.
1970년대 강남 개발로 범람원은 대부분 아파트 단지
1980년대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한강 고수부지 형성.
뚝섬·잠실·여의도는 모두 주거지역 또는 상업지대
난지도는 20년간 쓰레기 매립장이었다가 재활용 중
밤섬이 하중도 중 유일하게 철새도래지로 옛 모습.
서울의 도로망이 골격을 잡기 시작한 시기는
이조 도읍지로서 도시 건설과 때를 같이한다.
당시 종로·광화문·남대문을 잇는 간선도로 중심으로
궁궐과 종묘, 사직을 잇는 길을 내는 것이 기본이었다.
도시건설 자체가 길(線)보다는 구역(面)을 중시했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요건물의 위치와 좌향을 정하고
차츰 빈 곳을 채워 지선 도로는 골목길 형태가 되었다.
유럽의 도시들이 일찌기 수레 교통에 적응해 도로 체계
이조는 소달구지 정도를 사용했기에 도로 정비는 뒤졌다.
1903년 도입된 자동차는 10년후 일반 교통수단으로 이용
서울의 도로 개수공사는 일제 강점기에 시작.
1936년의 '경성 시가지 계획령'이 체계적 도시계획
이 계획에 의해 노폭 12m 이상 도로 총길이가 220개
노선에 7.72km로 늘어났고, 오늘날까지 시가지 도로망
1928년부터 버스가 운행되다가 시외노선에 투입
1932년부터 서울 시내교통 주역은 전차로 바뀐다.
1968년 시내 대중교통 수단의 역할은 대부분 버스
사라진 전차는 서울 역사이자 시민들의 옛 향수.
서울의 교통망은 1970년대 강남 개발로 크게 확대.
6·25 때 한강철교를 빼고는 하나뿐이던 한강 인도교
일찍 폭파되어 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피난길을 막았다.
지금은 남산에 3개의 터널이 뚫렸고,
청계천 고가도로를 제거하고 공원화
서울역 앞 입체교차로와 육교도 제거.
한강변 따라 강변도로가 개통되어 동서 대동맥
3겹의 순환도로와 외곽도로가 도로교통망 입체화
최근 도심과 외곽을 연결하는 지하도로 건설 검토
서울 교통체계를 혁명적으로 바꾼 것은
1970년대에 도입되기 시작한 지하철이다.
1971년 4월 착공해 1974년 8월에 개통된
청량리-서울역 간 지하철 제1호선에 이어,
시청-신촌-강남-뚝섬 간을 순환연결하는 2호선,
수서-지축 간 3호선, 남태령-당고개 간의 4호선,
상일동·마천-방화 간의 5호선이 경부선·경인선·
경의선·경춘선·일산선·안산선·분당선 국철 연계
6호선(역촌-봉화산) 7호선(장암-온수), 8호선(암사-모란)
1999년 현재 서울의 여객 운송 분담률은 버스 28.8%,
지하철 33.8%, 택시 9.2%, 승용차 19.6%, 기타 8.6%
[교육·문화·관광]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 있는 선사시대 주거지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대학로
고궁과 현대식 건물이 어우러진 서울 시청 앞 광장
서울 종로구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에 있는 인사갤러리
서울 중구 필동 일대에 있는 한옥마을
서울의 신촌 번화가
서울에는 국립 서울대학교를 비롯하여
고려대학교·서강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한양대학교 등
......
한강.
......
태백산맥에서 발원해 강원도 충청북도 경기도·
서울을 거쳐 경기만으로 흘러드는 중부지역 강.
유량으로 남한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중상류는 산지라 연강수량 1,200~1,300㎜
비가 많이 오는 산지가 많아 강물이 풍부.
한반도에서 압록강 두만강 다음으로 넓고,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 다음 순서로 긴 한강.
양평군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
남한강은 태백시 금대봉 북쪽 계곡에서 발원
골지천(骨只川)을 이루고 북쪽으로 흐르다가
오대산의 오대천과 정선군 북쪽에서 합류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남한강 본류를 이룬다.
남한강은 영월군에 이르러 평창강과 합류하고
단양 지나지 북서쪽으로 틀어 충주시에서 달천,
강원도와 경기도 사이 섬강 등 지류와 합류한다.
북한강은 북한 강원도 금강군 玉田峰에서 발원
금강산 비로봉 부근에서 발원하는 금강천(金剛川)
사동천(泗東川) 등과 합쳐 북한강 본류를 이루고
남한의 춘천 소양강, 가평 남쪽 홍천강 등과 합류.
양수리 한강은 북서쪽으로 흘러 왕숙천·탄천·
중랑천·안양천·굴포천 등 작은 지류과 합류.
하구에서 임진강과 만나 경기만으로 흘러든다.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대수(帶水),
광개토왕릉비에는 아리수(阿利水),
삼국사기 백제건국 설화에는 한수(寒水)
'漢'은 중국문화가 도입된 이후 붙여졌다.
한강 하류에 김포평야 일산평야 등 평야
한강은 삼국시대부터 분쟁 대상이 되어왔다.
한성이 수도로 정해진 이조때 경제적인 기능
남한강은 영월까지,
북한강은 춘천까지.
선박이 운행되었다.
하구에서 마포(麻浦)까지는
밀물 썰물 영향이 나타나며
수심이 깊어 큰 배도 다녔다.
가항구간 내에서도
상류 쪽은 수심이 얕아
여울을 거슬러 올라갈 때
인력으로 선박을 끌어올렸다.
용산을 기점으로
선박이 다니는 시기는
계절따라 일정치 않았다.
대체로 충주까지는 7일,
영월까지는 15일 걸렸다.
영월에서 서울까지 평상시에 6~8일,
여름철 증수기에 2일 정도 걸렸으며,
물이 불어나는 여름철에 많이 다녔다.
한강을 오르내리던 선박들은
모두 바닥이 평평한 작은 범선
한강은 일반 농산물의 수송에 중요하게 이용
특히, 세곡(稅穀) 수송로, 즉 조운로(漕運路)
남한강 유역의 세곡은 용산 강창(江倉)으로 모였고,
경기도 남쪽 세곡은 바다로 돌아 김포와 강화도 사이
염하(鹽河)를 거쳐 서강(西江)의 강창으로 모였다.
경상도 세곡은 소백산맥 새재 넘어
충주까지는 육로, 용산까지는 한강
즉, 육로와 한강을 통해 수송되었다.
한강 상류 지방에서는 서울사람들에게
각종 식량·땔나무·목재 등이 내려가고,
한강 하류지방에서는 한강 상류지방으로
소금·새우젓·어물·잡화·옹기 등이 갔다.
마포는 서해 수산물이 들어오는 하항(下港)
뚝섬은 상류지방 목재와 땔나무 등의 양륙지
마포는 6·25전쟁 전까지 기선이 들어왔으나,
휴전 후 하구 일대의 수로가 군사분계선이 되어
선박 통행이 불가능해져 요즘 경인운하 추진 중
인천 굴포천 거쳐 김포 한강으로 통하는 운하
이조 때에도 김포 굴포 운하공사가 시도되었다.
한강은 서울지방으로 통하는 중요 전략적 수로
영춘 온달산성, 양평 파파산성 등은 남한강,
인제 한계산성, 춘천 봉의산성 등은 북한강을
김포 문수산성은 서해 외적을 막기 위한 축성.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搖) 때
프랑스 해군을 물리친 격전지 문수산성.
한강은 세곡이나 농산물을 수송하는 수로
그러나, 건너야 할 때는 불편한 존재였다.
한강을 건너가는 길목에는 진(津)이나 도(渡)를 설치
국왕이 한강을 건널때 선박을 엮어 주교(舟橋)를 가설
하여, 진이나 도에는 자연히 상업이 활기 띠게 되었다.
서강 마포 동작 서빙고 뚝섬 송파 등지는
이른바 경강상인(京江商人) 활동무대였다.
한강 송파(松波)는 광주 이천 등지로 가는 길목
각종 산물을 집산하는 도진취락(渡津聚落)이었다.
한강에 최초로 건설된 다리는 한강철교.
경인선 부설을 위해 1900년 완공되었고,
현재 한강대교가 건설된 시기는 1936년
서울의 성장과 더불어 시역(市域)이 넓어져
한강은 서울의 중앙부를 동서 방향으로 흘러
강북 지역과 강남 지역으로 크게 나누어졌다.
......
파리.
......
프랑스 수도이며, 유럽 최대 도시 가운데 하나
약 2,000년 전 세느강 시테섬에 세워졌던 파리.
세느강(Seine River)은 파리 한가운데로 흐른다.
세느강 북쪽과 남쪽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북쪽은 상업이 성하고, 남쪽에는 소르본 대학교
등등 교육 기관이 많아 문화 활동이 활발한 도시.
파리는 세느강 하구로부터 약 375㎞ 지점에 위치.
세느강 하구는 영국 해협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다.
파리는 분지 형태로 7개 언덕으로 애워싸여 있는듯.
북쪽에 몽마르트르 언덕,
남쪽에 생트 쥰비에브 및 까이유 언덕,
서쪽에 샤이오 언덕,
동쪽에는 벨빌, 메닐몽땅, 샤론 언덕.
파리 외곽은 '파리의 허파' 그린벨트
너도 밤나무, 참나무 등등 울창한 산림.
수세기 동안 파리는 가장 매력적인 도시.
현재도 세계의 예술, 패션, 유행 등을 선도
'예술의 도시', '패션의 도시', '빛의 도시'
낭만과 고독이 숨쉬는 도시, 꿈과 사랑의 도시.
파리는 유럽의 교통망 교차점에 있어 성장을 계속해왔다.
파리시는 시테섬과 세느강 중심으로 좌안과 우안으로 구분
파리는 각구마다 특색을 가지고 있는 총 20개의 구로 구성
각 구들은 파리 심장부에서부터 달팽이 소용돌이꼴 번호
제1구, 제2구 등으로 부르며 파리는 특히 밤이 아름답다
연인들이 밤새워 얘기를 나누는 세느강변, 샹젤리제 거리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숲이 우거져 있는 도시 중 하나
역사적인 건축물들과 현대식 빌딩 사이로 수많은 정원
공원 녹지대가 조성되어 있고 수많은 역사적인 건축물
기념물, 박물관, 초현대식 패션 및 예술이 어우러진 곳.
파리는 누구나 한 번쯤 가봐야 하는 도시.
구 파리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신 파리
라데팡스는 세계 첨단을 달리는 신도시.
1958년 시작된 파리의 부도심 지역 개발
예술적인 빌딩을 만들기 시작한 라데팡스.
1200m 인공지반 광장, 대형 쇼핑센터,
중앙 보도를 꾸미는 조각등, 라데팡스.
이탈리아산 대리석 높이110m, 폭106m 신개선문,
덴마크 건축가 스프레케르센 작품.
1989년 혁명200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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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 궁전, 오페라 하우스, 루브르 박물관,
노틀담 사원, 몽마르트 언덕, 세느강 유람선 등
샹제리제 거리, 개선문, 에펠탑, 샤요이궁 등
라데빵스, 퐁퓌드 센타, 오르쎄 미술관 등
파리는 발걸음마다 시선을 사로잡는 관광명소.
파리 시내 연인들의 다정한 모습까지도 볼거리.
몽마르트 언덕 위 화가들의 거리도 참 볼만하다.
첫댓글 계룡산의 눈 덮힌 소나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