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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 당시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였다. 남쪽은 진(晉) 나라가 동진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다가 망하고 그 자리에는 송(宋)이 세워졌다. 420년의 일이었다. 중국의 한족이 북쪽의 오랑캐에게 쫓겨 본토를 내주기로는 역사상 이때가 처음이었다. 북쪽은 바야흐로 북위(北魏)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오랑캐가 세운 여러 나라가 쟁패를 벌이다 마지막에 북연(北燕)과 북위가 패권을 다투었다. 435년, 북위의 공격에 시달리던 북연은 송나라에 신하의 지위에서 섬기겠다고 하며 원병을 청한다. 아울러 고구려에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장수왕은 고민에 빠졌다. 북위는 한참 기세를 올리며 새로 일어나는 나라, 북연은 그동안의 관계도 관계려니와, 중간에서 북위의 위협을 막아 줄 방패이기도 했다.
사실 북연은 고구려와 깊은 연관관계가 있었다. 북연의 앞은 후연(後燕)인데, 이 나라는 고운(高雲)이 세웠으며, 광개토왕이 사신을 보내 ‘종족(宗族)의 의(誼)를 표할 만큼, 고구려와 후연은 한 집안과 같았다. 고운이 피살된 후 그의 부하였던 풍발(馮跋)이 나라를 이어 북연이라 하였다. 고구려는 북연을 후연과 같은 태도로 대하였다.
그러나 북연의 요청이 있던 해 고구려는 도리어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해가 장수왕 23년이었다. 그의 나이 41세, 깊이 경륜을 쌓은 장수왕의 판단에 북위의 존재가 결코 가볍게 보이지 않았을 터이다. 물론 사신을 파견한 장수왕의 입장이 북위에 대한 항복은 아니었다. 이듬해인 436년, 북연의 수도인 화룡성에서 북위와 맞붙어 무력시위를 벌였고, 북연의 왕과 백성 다수를 데리고 회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북위에 다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현란한 양동책이었다.
이 같은 양동책은 남조의 송을 두고도 마찬가지였다. 북연이 고구려에 배신감을 느끼고 송과 관계를 맺자 이에 단호히 대처하였다. 고구려는 북연을 도와주러 출동한 송의 장군 왕백구(王白駒)를 사로잡아 들였다. 438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더 큰 분쟁을 막기 위해 왕백구를 송환하고 송과 관계를 회복하였다. 이는 북위를 견제하는 데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송은 한족의 본토수복을 위해 북위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그런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미묘하게 이용하는 것이었다.
5세기 중반의 동아시아는 국가간의 직접적인 당사국의 분쟁에 그치지 않고 열강이 개입하여 국제적인 차원에서 밀고 당기기가 이어졌다. 그 한 축에 고구려가 놓여 있었다. 고구려는 이 복잡한 국제관계의 톱니바퀴를 현명하게 물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힘이 필요하면 힘으로, 조정이 필요하면 조정으로 장수왕은 절묘하게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지켜나간 현실정치의 달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