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 보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끝까지 다 읽으면 분명히 불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맥을 잡을 수 있을 것이고,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알고, 교양을 쌓는데도 대단히 일조할 것이다.
내가 속한 특정종교의 입장과는 무관한 것임을 밝혀두는 바이다.
석가탄신일이 대한민국의 공휴일 이상 대한민국의 시민은 그날의 의미와 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석가탄신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순히 대단한 한 인물의 생일잔치가 아님은 분명하다. 석가모니의 중생구도의 가르침, 자비를 핵심덕목으로 삼는 주옥같은 가르침을 기념하고 그것의 실천을 독려한다는 의미가 아닐까한다.
그렇지만 의미가 좋건 나쁘건 어쨋든 그 날의 사실여부를 규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1)석가모니는 실존인물이었는가?
석가모니의 탄생과 생애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는 ‘불경’ 이외에는 없다. 그것도 ‘팔리아 정전’이라 불리는 불경에서 석가모니가 죽은지 500년이 지난 기원 1세기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석가모니 당대의 어떤 자료에서도 석가모니에 대한 기록은 없다.
석가모니가 실존인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증거가 희박하다고 말할 뿐이다. 전세계 3억명의 불교신자가 그의 실존여부를 판단하는 근거다라고 주장할 사람은 없겠지...
2)석가모니가 태어난 연도와 날자는?
석가모니의 탄생연도는 기원전 560년, 563년, 567년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대부분의 권위자는 560년을 받아들인다.
한국에서는 기원전 563년으로 잡고있다. 태어난 날자는 음력 2월 8일, 양력5월 15일, 양력 5월중 보름달이 뜬날등이 거론되고 집행된다. 한국이 음력 4월 8일로 정한 이유는 불교의 종주국인 인도의 오랜 관행을 따랐기 때문이다.
3)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이 된 유래.
미군정시기에 미군들이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정한 이후, 불교계의 강력한 요구로 형평성에 의거 석가탄신일도 제정됨.
4) 석가모니의 생애
출생
- 출생직후 북쪽으로 일곱 걸음 걸어서 큰소리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라 외침
16세: 결혼
29세: 출가
29세-35세: 브라만교(구 흰두교)에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정진함.
35세: 힌두교가 아닌 자신 스스로의 의식의 힘에 의해 깨달음을 얻게 됨.
-깨달음을 얻기 직전 우유죽을 끓이다가 죽위에 만(卍)자를 보게됨.
(은석이가 저었어도 나타났을 것이다. 왼손잡이 저었으면 만자가 거꾸로 뒤집혔을 것이다.)
35-80세: 포교활동
80세: 사망
5)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요지
-사성제: 고통은 욕망에서 온다. 욕망을 끊으라.
-카르마(윤회설): 현재 자신의 행동의 결과로 내세에서도 영향받는다.(윤회설)
-니르바나(열반): 선한 행실과 올바른 생각을 통해 사람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안에서 이루어 지는 깨달음의 상태.
-신에 대한 관점: 신은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기본 개념: 지식과 이해로 깨달음과 구원을 이루자.
6) 불교 성립과정의 정치사회적 요인
알려진 자료에 의한 불교의 성립과정의 요지는 이러하다.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출가한 석가모니는 자신의 정신적욕구를 브라만교(구 흰두교)에서 충족시키지 못해서 자기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것이 불교의 시작이다.
깨달음을 얻은 직후 석가모니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어느정도 교세를 확장하였다. 석가모니가 죽은후 200년이 지난 후에 아소카왕에 의한 국가적인 후원사업에 힘입어 체계화된 세계종교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 내용을 이제부터 나의 관점에서 다시 쓰고자 한다.
인도에서 흰두교(구 브라만교)가 불교보다 먼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종교가 못 되고 인도인의들만의 민족종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두가지 있다. 카스트제도와 다신신앙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명목상으로라도 만민평등을 주장하여 대중들의 인기를 얻는 반면 흰두교는 교리 자체에서 카스트제도를 통해 신분차별을 옹호한다.
또 하나 흰두교에는 3억3천이나 되는 신(神)의 수가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이러니 다른나라에서 받아들이겠는가? 반면 불교는 카스트제도를 반대하고 석가모니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힌두교에는 그렇게 많은 신이 불교에는 하나도 없다. 나 스스로의 의식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점이 흰두교와의 차이점이면서 불교를 성장시키게 한 불교의 ‘원초적 매력’이다.
석가모니가 출현할 당시에는 갠지즈강 유역의 상업발달로 경제력이 향상되어 마치 그리이스의 철학이 융성했던 시대 상황과 비슷한 기류가 형성되어 자유롭게 사상과 철학을 꽃피울수 있는 분위기 만들어 졌다. 그로 인해 그 당시에는 그리이스의 소피스트들처럼 ‘사문’이라는 자유혁신 사상가들이 나타나서 활동했다.
석가모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의 독특한 점을 이해해야 한다. 가장 독특한 점중에 하나는 왕족과 귀족이 제2계급인 크샤트리아이고 흰두교의 제사장과 성직임무를 맡은 브라만계급이 최고의 계급인 것이다. 중세유럽시대에 교황권이 황제권을 능가했을때의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계급적 차원에서, 완전히 차별화가 된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당시에도 왕권은 끊임없이 브라만계급에게 견제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가모니는 샤카족(석가족)의 왕자로 태어났다. 석가족은 작은 부족국가였고 이웃의 코살라국에 예속되어 있는 나라여서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그는 왕족인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으므로 그는 제1계급인 브라만계급에 의해 끊임없이 간섭을 받았을 것이다.
‘왕자’ 석가모니는 이러한 이중적 압력을 받고있는 괴로운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방안을 늘 생각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나라를 어렵게 만드는 근본요인이 민족모순이 아닌 계급모순임을 깨닫게 된다.(석가모니도 NL이 아닌 PD였나 보다.)
코살라왕국과의 마찰은 단지 정치적인 권력싸움이기 때문에 한쪽의 권력자가 양보해서 부족이 통합되면 자신의 부족이 차별대접을 받지는 않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카스트제도의 신분차별문제는 인도민족 전체의 문제이고 종교, 사상적 문제이기 때문에 지난한 사상투쟁없이는 쉽사리 해결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늙은 아버지 정반왕의 권력이 어느정도 자신에게 넘어온 29살에 그는 정치적 결단을 내리게 된다. 자기부족과 코살라국을 통합시키는 조건-실제로 석가모니 출가직후 석가족과 코살라국은 통합됨-으로 안정적인 사문(자유 혁신사상가)의 길을 코살라국의 집권자들로부터 보장받게 된다. 왜냐하면 자유사상가로의 길은 최고 계급인 브라만계급에 대항하는 것이기 상당히 위험한 행로였다.
코살라정권의 비호와 권력욕을 잠재울 정도의 놀라운 지적욕구에 힘입어, 석가모니는 브라만교(흰두교)에 반하는 독특한 사상을 창시하여 엄청난 세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6사외도라 불리는 그 당시 유명한 6명의 사문의 반열에 서게 된다. 이 때까지는 종교의 색깔을 띠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석가모니 자신이 한번도 ‘신’을 찾은적이 없었고 인간자신의 힘으로 도를 깨닫자고 했으니까.(주체사상과 비슷한 것 같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지적욕구를 마음껏 충족시키고 고대 인도역사의 사상계에 한획을 긋고 사람이면 누구나 죽듯이 그도 죽었다.그는 신도 아니고 교주도 아니었다. 그는 철학자이자 사상가로서의 삶을 살고 죽은 것이다.
석가모니가 죽은후, 정치적 격변기를 겪은 인도는 기원전 4세기 마우리왕조에 의해 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형성했다. 석가모니 사후 200년이 지난 시점인 아소카왕에 이르러 마우리왕조는 최전성기를 누린다.
왕권의 안정적 강화를 원했던 아소카왕은 최고의 계급인 브라만을 견제할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런 그에게 200년전의 석가모니 사상은 안성마춤이었다. 자신들의 정적인 브라만을 필두로한 카스트제도를 반대하고 있었고, 헷갈리는 ‘신’들도 없었다.
그러나, 브라만계급의 브마만교(흰두교)에 필적하기 위해서는 종교적모습을 띄어야만 했다. 그래서 석가모니 사상에 종교의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흰두교처럼 석가모니 탄생과 성장시절에 대해 신화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깨달음의 과정에 신비적인 요소를 집어넣었다. 죽끓이다 발견한 만(卍)자를 불교의 상징으로 했다. 마지막으로, 종교는 신이 있어야 하기에 신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원래의 석가모니 사상자체에서 신을 거부하고 있어서 신을 만들기가 곤란했다. 신이없는 교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신을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사상을 만든 석가모니 자신을 신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기막힌 발상이었고 그것은 그대로 적중했다.
흰두교에 지겨워했던 인도 하층민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외세의 지지가 필요했던 아소카왕은 불교를 다른나라에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기는 동양권에서 고대왕국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왕국민들을 통합할 수 있는 체계화된 종교가 필요했으므로 아소카왕이 전해준 불교가 아주 시기적절했다. 불교는 이래서 전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엄밀한 의미로 불교의 창시자는 아소카왕이다.
7) 종교로서의 불교의 문제점
가) 신, 경전, 숭배의식(崇拜儀式)을 종교의 3요소라 한다. 동네 무당들이 신봉하는 이름없는 신들은 경전이 없기에 일개 미신에 머문다. 하나만 빠져도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
불교의 교리에는 앞서 설명하였듯이 신이 없다. 그런데 그 교리를 만든 자가 신이 되었다. 이것은 모순이다.
나) ‘신’을 비롯하여 불교의 체계화는 정치사회적 요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유물론자들은 이것을 당연하다고 보겠지만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 아닌 만들어진 신에 불과하다. 우상에 불과하다.
다)원래의 취지 "도를 깨닫기 위한 자기 수행"의 모습은 퇴색됐고 "기복적"인 모습만 부각되어 나타난다. 입시철, 연등행사등에 나타나는 모습은 가관이다. 석가모니가 보면 이게 웬일인가 싶을 것이다.
불교계 내부의 분열과 부패는 거론하지 않겠다.
석가모니가 탄생한 날이면 석가모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알고 기념해야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가 실존인물인지도 생각해 볼일이다. 몇천년동안 해온거니까 한다는 생각은 젊은이답지 못한 생각이다.
석가탄신일의 의미는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