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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충절이 빛나는 금산여행(0.11.13)
숲길(吉) 추천 0 조회 46 10.11.16 20:3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충절이 빛나는 금산여행(0.11.13)

 

여행스케치에서 파격적인 상품을 출시하였다.

무주구천동, 금산 인삼시장, 보석사, 칠백의총 일정으로 9,900원에 모객을 하는 것이다.

여행스케치는 가끔 여행 매니아들을 위해 이런 좋은 상품을 내놓기 때문에 수시로 홈페이지를 가볼 필요가 있다.

 

이번 가이드는 이연주가이드라고 문자가 왔다.

무주구천동은 예전에도 가본적이 있어 별로 매력이 없었지만 보석사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주가는 길이 많이 막혔다.

원래 10시 30분경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11시경에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이연주가이드는 고객들에게 항상 미소를 짓고 이야기하는 상냥하고 친절한 가이드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정보를 아주 자상하게 잘 설명해 주어 모두들 좋아라 했다.

기사님도 나이가 지긋하시고 안전하게 운행을 해주셔서 차에서 쉬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차량은 2대였는데 우리가 1호차고 다른 2호차도 있었다.

이연주가이드 말로는 여행스케치가 금년에 성적이 제일 좋아서 사장님이 특별히 초특가상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성적이 더 좋아져서 더 많은 좋은 상품을 출시하였으면 좋겠다.

사실 말이지만 여행스케치의 가이드들은 무엇인가 개개인의 나름대로 능력이 있어 보이는 것이 매력이다.

 

지난 여름인가에 무주구천동에 왔으니 이번에는 조용히 가이드 시키는대로 월하탄까지만 다녀왔는데 월화탄도 자세히 보니 경치가 아주 좋은 폭포였다.

좌측에는 폭포가 3갈래로 내려오고 오른쪽에는 한갈래의 폭포였다.

 

주차장에서 계곡 가는 길에는 예나 다름없이 노점상 아주머니가 여러 가지 특산품을 팔고 있어서 돌아오는 길에 호두를 2만원어치를 샀다.

 

단풍은 이미 졌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같아서 간혹 단풍이 있었다.

 

여기 구천동계곡 가는 길은 전주식당이 아주 많았다.

생각같아서는 여기서 점심을 먹으면 좋겠지만 금산에서 지원을 해서 금산가서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본 스키타는 곰돌이 조형물은 아직도 건재하였다.

가는 길에 320년된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겨우살이가 아주 많이 달려 있었다.

이 나무만 보아도 본전은 뽑은 것처럼 멋지게 생겼다.

 

전에는 급해서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이번에 보니 여기 숲길도 독일가문비 나무와 전나무가 많이 있었다.

낙옆이 있는 계절에도 침엽수가 있으니 푸르러서 보기 좋았다.

 

가다가 오갈피나무 열매도 발견을 했다.

벚나무는 잎을 모두 떨구었고 산철쭉은 아직도 빨간 잎을 자랑하고 있었다.

가다보니 돌탑도 있고 계곡 건너에는 지난번에 보지 못한 야영장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월화탄 갔다 오다가 모감주나무를 보았는데 열매도 시들어 가는 것같았고 모과나무의 열매는 아주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으며 섬잣나무도 하나 심어져 있었다.

 

금산으로 갔는데 금산인삼박물관 앞에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박물관 구경을 먼저 하라고 했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 배가 아팠으므로 먼저 식사를 하기로 했다.

 

삼계탕 집은 더러 보이는데 일반 식당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장사하시는 분에게 물으니 저기 버섯전골집도 있고 백반집도 있다는 것이다.

전골 먹기 그래서 백반집을 찾아갔는데 6시내고향에 나온 집이라고 현수막이 있었다.

 

집에 들어갔는데 다소 지저분했지만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어 괜찮겠지 했는데 사방에 파리가 날아다리고 천정에 보니 파리잡는 끈끈이이 메달렸는데 그 곳에도 파리가 수없이 붙어 있었다.

 

인삼국밥을 시켰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인삼삼계탕을 시켰는데 삼계탕에서 파리와 바퀴벌레 새끼도 나왔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들으니 밥 생각이 가시는데 고기를 하나 먹으니 맛이 좀 간 것같았다.

겨우 국물만 먹고 그 집을 나왔다.

다시는 지저분하게 생긴 집은 가지 말아야지 결심을 했다.

 

나중에 보니 금산시내는 다른 곳에 있고 거기 약초시장은 인삼만 주로 파는 곳이었다.

배가 허전하여 인삼튀김을 하나 사먹고 차로 돌아와 박물관 구경을 했다.

 

박물관에는 산삼도 병에 보전되어 있었고 인삼왕, 특이모형, 동자인삼, 미스터인삼, 미스인삼 등이 선발되어 있었다.

 

박물관 안을 돌아다녀 보니 인삼 재배하는 과정이 모형화 되었는데 공정이 아주 복잡하게 보였는데 심지어는 제까지 지내고 있었다.

안에는 인삼제품도 전시되어 있어 인삼에 관한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연주가이드말로는 인삼은 여기 금산제품이 제일 좋다고 한다는 것이다.

체질이 소양인이라 인삼이 받지 않아 인삼은 사지 못했는데 인삼을 살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여정은 보석사였는데 여기도 주차장은 있었고 들어가는 길이 아주 멋지었다.

일주문은 아주 아담하게 보였는데 단청이 깔끔한 것을 보니 단청한 지 오래되지는 않는 것같았다.

 

올라가는 길에 전나무가 있었는데 아주 수령이 오래되어 운치가 있어 좋았고 좌측에는 의병승장비라고 영규대사의 순절사적비가 있었는데 이 비를 일본놈들이 자획을 훼손하여 묻은 것을 다시 세웠다는 것이다.

 

보석사 가는 길은 오른쪽은 전나무 왼쪽은 은행나무인데 은행나무가 잎이 떨어져 좀 아쉬웠다.

전나무 길이 끝나는 지점에 아직은 떨어지지 않은 단풍이 있어 가을의 정취를 맛보게 해주었다.

 

드디어 은행나무를 만났는데 잎은 떨어졌지만 그 자태가 너무 웅장하고 대단하게 보였다.

밑부분에는 제를 지내는 표식이 둘러있어 이 나무의 역사와 가치의 인식이 상상이 되었다.

 

그곳에서 아치형 다리를 건너 보석사로 진입을 하였다.

이연주가이드 말로는 여기는 교종 사찰이라고 하는 것같았다.

다리를 건너면 계곡을 보니 그곳의 단풍나무가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뒤돌아 보며 사람과 은행나무를 비교해 보니 새삼 사람의 존재가 작게 보였다.

 

절에 다니다 보면 소각장도 나름대로 멋지게 꾸몄고 샘물도 잘은 모르지만 극락조 형태로 만들어서 흥미를 자아내고 있었다.

대웅전은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아담하게 지어져 있었고 그 앞에는 변함없이 석등이 있었다.

 

범종루를 보았는데 천정에 연잎과 연꽃이 장식되어 있는 것같이 보였다.

대웅전 옆에 의선각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어쩐 일인 지 안보였는데 다시 지을려고 하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종무소의 편액은 등운선원으로 편액이 쓰여 있었다.

 

대웅전 앞에는 요사채로 보이는데 그 측면 벽의 모습이 아주 단아하고 멋져 보였고 그 앞에 있는 굴뚝도 멋스러웠다.

대웅전의 외벽에는 심우도도 팔상도도 아닌 선승같은 분이 그려져 있는데 고사와 관계 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대웅전 편액은 완산 이삼만이라고 쓰여 있어 창암 선생의 다른 호인가 했는데 찾아보니 과연 다른 호로 같은 분이었다.

이 곳에서 창암 이삼만 선생님의 글을 대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대웅전 삼존불은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그리고 보현보살이라는 것이다.

대웅전 내부 좌우벽에는 지장탱과 신중탱이 있었다.

 

신중탱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서 신중들을 배치하고 있는데, 무장한 신장과 사천왕을 화면의 가장 아랫부분에, 중간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주악비천들을 배치했다. 화면의 맨 윗부분에는 3면6비의 아수라가 뱀을 몸에 두른 모습으로 금강저 등을 지물로 갖고 중앙에 크게 그려져 있고 그 주위로 팔부중이 배치되어 있다.45년 임자(壬子)2월이라는 화기(畵記)가 있어 근래 작으로 1912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지장보살탱이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좌우로 있으며, 천관 등이 호위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의선각은 영규대사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갑사에서도 뵌 것같은데 이 절과 갑사를 왕래하면서 수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임진왜란때 승병을 모집하여 조헌선생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에 주둔중인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하였다는 것이다.

 

대웅전 옆 기허당에 영규대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다.

기허당 내에도 벽화가 있었는데 아마도 영규대사의 모습이리라.

기허당 천정은 우물천정으로 그 문양이 연꽃을 형상화 한 것인 지 몰라도 이뻤다.

 

기허당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산신각이 있는데 정면에 산신이 모셔져 있고 왼쪽에 치성과여래의 탱화가 있었다.

산신각에서 풍경과 함께 절의 전경을 보았는데 그럴 듯 했다.

 

해우소 가는 길에 연못이 있었는데 나름대로 괜찮게 보였다.

멀리에는 모과나무가 열매만 달려 있어 가을이 가는 것이 실감이 났다.

종무소에 멋진 고양이가 있다고 해서 가 보았는데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늦가을의 보석사의 모습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고 멋진 모습이었다.

 

다음에 가본 곳은 칠백의총이었다.

칠백의총은 일본에 의해 파괴된 것을 해방후에 복원한 것이다.

입구를 들어가자 오른쪽에 연못이 있었고 모과나무에는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다.

 

의총문을 들어가자 오른쪽에 순의비각이 있었고 좌측에는 기념관이 있었으며 취의문을 들어가니 종용사가 있고 그 뒤에 의총이 있었다.

 

아쉬운 것은 종용사 왼쪽에 박정희 대통령이 식수를 하였다는데 하필이면 금송이었다.

금송은 일본의 상징인데 누가 그 이야기를 못한 것같았다.

관리하는 직원도 금송에 대하여 알고 있었는데 누가 정리를 못하는 것같았다.

 

의총의 혼유석 밑에는 고석이 2개 있었고 의총은 커다랗게 하나의 봉분이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받친 의병과 승병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할 뿐이었다.

 

기념관에 가니 조헌선생님의 영정과 전투에서의 승리와 순절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사용하시던 유물도 전시되어 있었다.

사실은 의병 700명에 승병이 800명으로 모두 1500이었다고 하는데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이런 유물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기념관의 편액은 세독충정이었는데 고경명장군의 선생의 충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연못 이름이 숭의지였는데 숭의지의 가을도 아주 멋진 풍경이었다.

칠백의총을 끝으로 서울로 돌아왔는데 기사님이 안전 운행을 해주셔서 그리 늦지 않게 편안하게 서울로 돌아왔다.

이 좋은 프로그램을 운영한 여행스케치 임직원 여러분과 이연주 가이드님, 기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좋은 여행 부탁드립니다.

행보하셔요 ^^

 

 

아래 내용은 참고 하셔요 ^^

 

무주구천동 33경

 

라제통문부터 ~ 32경 백련사 - 33경 향적봉까지

 

구천동계곡의 33경은 라제통문을 관문으로 시작하여 32경인 백련사까지 70리가량이 아름다운 계곡으로 이어져 있으며 32경인 백련사에서 33경인 향적봉까지는 2.5km의 등산로로 되어 있다.

 

1경부터 14경인 수경대까지는 자가용으로 드라이브하면서 접근이 가능하다.

 

1경인 라제통문에서 4km 가량이 벚꽃길이 형성되어 있어 봄이면 아름다운 국립공원의 맑은 물과 수림이 벚꽃과 어우러져 색다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는 곳이다.

 

라제통문에서 무주리조트입구까지 구천동계곡 1경부터 12경이 연결되어 있으며 리조트삼거리에서 구천동방향으로 약간 이동하면 13경인 세심대가 있으며 삼공리 삼거리에서 구천동방향으로 우회전하여 오른쪽 계곡에 14경인 수경대가 위치하고 있다.

 

구천동관광단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숙박단지와 식당단지를 지나면 구)삼공매표소 자리가 나오며 계곡 길을 산보하면 오른쪽에 오토캠핑장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어서 15경인 월하탄이 오른쪽으로 보인다.

 

월하탄을 조금 오르면 오른쪽에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덕유대야영장 입구가 오른쪽에 있으며 구천동정수장을 비롯하여 구천동호국비와 구국 항일 투쟁을 벌였던 문태서비, 구천동을 세상에 알린 김남관 선생의 비 등이 있으며 이어서 인월담이 보인다.

 

인월담에서 철교을 지나 400m를 오르면 한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아담한 암자인 인월암이 자리하고 있다.

 

관광단지 안에 위치한 구천동계곡은 15경부터 32경인 백련사까지 삼림욕하기에 알맞게 완만한 코스로서 맑은 물과 울창한 수림이 우거져 있어서 사시사철 많은 등산객과 산악인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32경인 백련사에서 2.5km의 등산로는 가파르게 경사가 되어 있으며 백련사를 돌아 오르막 길에 대찰에만 있었다는 금강계단이 있어서 천년고찰 백련사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며 오르는 내내 수목의 이름과 아름다운 조망이 이 곳을 오르는 이 들에게 위안을 주며 가파른 등산 끝에 탁 트인 향적봉 정상의 전망은 멀리 보이는 장쾌한 백두대간의 능선과 함께 가슴 벅찬 감동을 준다.

 

정상인 향적봉에서 능선을 따라 1.1km를 이동하면 백두대간인 중봉이 보이며 중봉부근은 봄이되면 진달래, 철쭉, 원추리가 군락을 이루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곳으로 시원한 조망과 함께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가을에는 단풍과 겨울 눈꽃과 설경, 상고대가 아름다워 많은 산악인에 사랑을 받는 곳이다.

 

구천동계곡33경 여행의 tip

 

15경인 월하탄부터 32경인 백련사까지 6km의 삼림욕코스는 사랑하는 가족, 연인 , 친구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울창한 수림과 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을 나누기에 알맞은 산책코스이다.

 

금산 인삼약초시장 관련 기사

 

충남 금산약초시장을 찾는 관광객들을 태우고 온 관광버스들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본격적인 가을 보약철을 맞은 데다 신종플루 바이러스 증식억제 효과 등 인삼의 효능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결과들이 속속 발표되면서 인지도가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금산군은 올 들어 10월말 현재 금산인삼약초시장을 다녀간 관광버스는 총 6500여대. 9월과 10월이 가장 많아 총 3250여대가 다녀갔다. 하루 평균 54대가 넘는 꼴이라고 4일 밝혔다.

증가추세에 있는 자가용 내방객까지 합하면 가을철 하루 5000여명이 시장을 찾는 것으로 금산군은 추산되고 있다.

 

지역별 버스연고를 살펴보면 경상남도와 경기도가 가장 많고 부산, 충남, 대구, 전남, 서울, 울산, 광주 등이 뒤를 이었다.

이 중 경남, 부산, 울산 지역이 절반을 넘게 차지해 영남지역의 선호가 높게 나타났다.

지난해 금산시장을 찾은 관광버스가 9114대 (버스 1대당 35명 기준) 인 점을 감안할 때 관광버스로 인한 경제효과(1인당 쇼핑금액 7만원 추정)는 연 223억원을 넘는다. 승용차 내방객까지 합산하면 경제효과는 상당하다.

 

인삼약초시장 활성화 요인은 인삼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가 높아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속적인 유통 투명성 확보 노력, 신종플루 면역효과 등 인삼의 과학적 효능 입증, 국제우수농산물관리 제도 GAP 인삼생산농가 및 무균가공시설 GMP 확대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특히 2006금산세계인삼엑스포 성공개최와 함께 금산인삼축제의 전략적 홍보효과, 인삼열차 운행, 시장다변화에 따른 상인들의 서비스 향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금산군은 방문객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인근 지자체 및 금산인삼약초시장 관련 단체와의 협의를 바탕으로 전략화된 관광패키지를 구성하는 등 관광쇼핑의 명소로 차별화 시켜 나갈 계획이다

 

 

보석사

 

백두대간과 금남정맥 사이로 금강이 굽이쳐 흐르는 금산은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줄여 붙인 이름. 그만큼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이처럼 금산이 아름다운 이름을 얻은 데는 ‘보석사’도 한몫했을 것 같다.

 

금산의 진산인 진악산(해발 732m)에 자리한 보석사는 웅장하기보다는 아담한 절이다. 하지만 신라 헌강왕 11년(885년)에 조구대사가 창건했으니 역사의 무게는 만만찮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명성황후가 중창해 원당으로 삼았고,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로 전라북도 일원의 33개 말사를 거느렸다.

 

사찰로 들어서기 전 전나무숲길과 수령 1,100년의 은행나무가 운치를 더해주는 보석사는 이맘때 찾으면 고즈넉한 가을 숲, 가을 산사를 만끽할 수 있는 천년고찰이다

 

보석사는 금산읍에서 10여㎞ 떨어진 진악산 남동쪽 기슭에 터를 잡았다. 사찰치고는 이름이 독특하다. 당시 절 앞산 기슭에서 캐낸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 ‘보석사(寶石寺)’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창 전성기 때는 500여명의 승려와 3,000여명의 신도가 북적댔고, 임진왜란 때 의승장이었던 영규 대사가 이 절에서 수도했다고 전해진다.

 

주차장을 지나면 코앞이 일주문. 특이하게도 단청이 없는 일주문은 거무튀튀한 때깔이 오히려 무게를 더해준다.

 

일주문을 지나자 딴 세상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전나무가 길 양쪽으로 도열해 나무터널을 만들었다. 하늘 한점 보기가 쉽지 않다. 절까지 이르는 이 길은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향하는 첫 관문. 그런 연유 때문일까. 절집을 찾아가는 길은 나무 하나 돌 하나가 새롭다.

 

200여m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은 한석규가 등장하는 TV CF 촬영지로 한차례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길을 따라 오른쪽에 맑은 계곡물이 흐르니 물소리를 들으며 옮기는 발걸음이 가볍다.

 

그 길끝 좌측에 1,10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안은 채 위엄을 자랑하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65호)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높이 40m, 둘레 10.4m의 은행나무는 조구 대사가 제자 5명과 함께 6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들이 하나가 됐다고 한다.

 

땅속으로 뻗어 내린 뿌리만 100여평. 위로 뻗은 가지가 땅으로 내려와 다시 하늘로 치솟은 형상이 이채로운 은행나무는 마을이나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큰소리로 울어 재난을 예비토록 했다고 전해진다.

 

절 인근에는 대개 물이 흐르기 마련. 부처의 세계와 속세를 물이 갈라놓으니 이를 연결시켜 주는 게 다리다. 보석사로 향하는 다리는 두개. 하나는 돌다리요, 다른 하나는 나무다리다. 나무다리에 올라서니 진악산 깊은 계곡에서 숲향기를 실은 한줄기 바람이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적셔주고, 발밑 계곡물에 속세의 티끌이 쓸려가는 느낌이다.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자 좌측에 고종 때 다시 지어진 대웅전이 눈에 들어온다. 요란하거나 들뜨지 않은 자태로 속세를 굽어보고 있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다포식 건물로 지어졌다. 그 안에는 석가모니불, 관세음불, 대세지보살 등 3기의 불상이 봉안돼 있다.

 

대웅전 오른편에는 영규 대사가 머물며 수도했다는 의선각이 있다. 창녕위 김병주가 쓴 ‘의선각(毅禪閣)’이라는 현판이 뚜렷하다. 이외에 산신각, 조사장, 응향각, 기허당, 요사채 등이 병풍처럼 둘러싼 진악산 자락에 단아하고 차분하게 들어앉아 있다. 사찰은 규모가 크거나 드나드는 이가 많지 않지만 옛 품위와 아름다움은 곳곳에 남아 있다.

 

대웅전을 돌아나오면 오른편으로 마당이 넓게 펼쳐진다. 마당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들의 모습이 정겹다.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이, 가을이면 오색단풍이 운치를 더해주는 보석사는 마음의 안식처와 같은 곳이다.

 

예까지 왔으니 인근 12폭포와 관음봉·개삼터도 둘러보자. 눈이 황홀해지는 절경과 인삼의 전설이 깃든 곳이라 놓치면 아쉽다.

 

 

보석사(寶石寺)는 충청남도 금산군에 위치한 사찰이다.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의 진악산 기슭에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31본산 중 하나였으나 조계종에서는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편성되어 있다. 당시에는 금산군이 전라북도에 속해 있어 전북 지역의 여러 말사를 관리했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금산에서 진안 방향으로 가는 길에 있고 일주문에 들어서면 운치 있는 전나무 길이 나온다. 절 안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인 대웅전과 승병장 영규가 머물던 의선각이 남아 있다.

 

남북국 시대 헌강왕 11년인 886년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창건자는 조구이며, 산에서 금을 캐어 불상을 만들고 봉헌했기 때문에 보석사라고 명명했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의 대웅전 건물은 임진왜란 중에 소실된 것을 대한제국 고종때 명성황후가 다시 짓도록 한 것이다. 명성황후는 이 절을 중창해 왕실의 원당으로 지정했다.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금산 보석사의 은행나무가 유명하다. 이 은행나무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울음소리를 낸다는 전설이 있다

 

금산읍에서 약 6km 떨어진 진악산 (732m)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보석사는 신라 헌강왕 12년(866년)에 조구대사가 창건한 역사깊은 절이다.

 

교종의 대본산이며 한국불교 31본산의 하나로 지난 날 전라북도 불교의 이사중추기관이었고 현재는 충남 교구 산하로 되었다. 보석사라는 이름은 절 앞산 중허리의 암석에서 금을 캐내어 불상을 주조하였다는 데서 이름지어졌다.

 

사찰에 들면, 울창한 숲과 암석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있어서, 속세를 떠난 듯하다. 절 안에는 대웅전, 기허당, 의선각, 산신각 등의 건물과 부속암자가 있으며, 인근에는 절경의 12폭포가 있다.

 

특히 높이 40m, 둘레가 10.4m나 되는 1,100년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65호)가 있어 좋은 휴식처를 제공해 주며, 200~300미터 정도의 전나무길이 나 있어 호젓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보석사는 금산읍 동쪽으로 2리쯤 떨어진곳에 있는절로서, 신라 헌강왕11년(885)에 조구대사가 창건하였다.

 

조구는 담양사람으로서. 원각.원순 두스님과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종남산의 지공화상에게 심오한 이치를 배우고 돌아온 뒤,이절을 창설하니,이절에는 12정사가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말로는 "그사적은 옥천군 지륵사:지금의 비석과 황간군 심묘사의 비석에 실려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륵사는 절은 있으나,비석이 없으며.심묘사는 절도없고. 비석도없다. 고찰할곳이 없으니, 앞뒤의 흥패에 관한일은 모두알길이 없다.

 

조선선조때 임진난으로 화재를 당하여 페허로 남아있다가 8년이지난 (1599)년에그절의 승려 三印이 다시 창건하였고, 인조6년(1628)에 그절의 승려印海가 중수하였으며, 그 뒤 어느 해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火神의 시기를 받아 다불에 타버린가운데, 대웅전만이 홀로 화를 면했다고 한다. 고종18년(1881)에 보명거사 유천혁이 왕의 뜻을 받들어 중창하였으니,중창에 드는 비용은 판서 민태호가 보시하고. 석덕용은 스님은 그 일을 주관하여,그 다음해인 임오년 봄에 功을 마쳤다.

 

이보석사에는 영규대사의 비석이 세워져있다. 영규는 임진왜란때, 의승군을 일으켜서 의병장 중봉조헌과 함께 나라를 위해 전사한 분이다.

 

 

* 의선각

 

보석사 대웅전 앞에 있는 건물로 의병승장 영규대사가 머물러 수도하던 곳이다. 영규대사는 공주 계룡산의 갑사와 보석사를 내왕하며 도를 닦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집하여 중봉의 의병과 합세하여 금산이 왜적을 격퇴하려다가 700 의사와 함께 전사한 분으로 그 용맹과 담력은 출중하여 싸움마다 크게 공을 세웠던 것이다. 의선각은 영규대사가 보석사에 계실때 우거하던 곳으로 창녕위 김병주의 글씨로 된 의선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보석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인 보석사 은행나무는 높이가 40m 둘레가 10m로 나무가 오래되어 하늘로 뻗은 가지가 땅으로 뻗었고, 다시 그곳에서 가지가 자라 오르고 있으며, 뿌리가 100여 평에 걸쳐 땅속에 퍼져 있다. 천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중심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남아 있어 높이를 자랑하고 있다. 일주문에서 천년 은행나무까지 길도 아름답다. 2~3분 도보거리에 오른쪽에는 전나무가 왼쪽에는 은행나무와 그 뒤로 단풍나무가 나란히 서있다.

 

조구대사 심은 6그루, 하나의 나무로

 

보석사 은행나무는 충남 금산의 대표적 자연유산이자, 우리나라의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온 나무다. 무려 1100살이나 된 이 나무는 보석사를 처음 지었을 때 이곳에 자리 잡고 절집의 역사와 이 나라의 역사를 지켜온 유서 깊은 나무다.

 

보석사는 통일신라 때 활동하던 조구대사가 885년(헌강왕 11)에 처음 지은 천년고찰이다. 금산 지역에 큰 가뭄이 든 해였다. 백성들의 고통이 심해지자, 조구대사는 가뭄을 해갈할 샘을 찾아 진악산에 올랐다. 대사는 산 기슭에서 커다란 바위를 찾아내고는 주장자(柱杖子)로 바위를 내리쳤다. 그러자 바위 아래에서 맑은 샘이 콸콸 솟아나왔고 이내 샘물은 금산 지방의 논과 밭으로 흘러들어 가뭄을 이겨낼 수 있게 했다.

 

대사는 그 영험한 바위를 지키고자 바위 옆에 암자를 짓고, 영원한 샘이 있는 암자라는 뜻으로 ‘영천암(永泉庵)’이라 했다. 제자들과 함께 수행하던 조구대사는 얼마 뒤, 암자 앞을 흐르는 개울을 건너편 산기슭에서 금을 캐내어 불상을 만들고, 절을 세웠다. 보석으로 지은 절이라는 뜻의 절집 이름 보석사(寶石寺)는 그렇게 지어졌다.

 

큰일을 이룬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보석사를 지은 조구대사도 나무를 심었다. 그는 다섯 제자와 함께 각각 한 그루씩, 모두 여섯 그루의 은행나무를 절집 앞의 언덕에 심었다. 여섯 그루는 불가에서 수행해야 하는 여섯 가지 덕목인 육바라밀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었다.

 

무럭무럭 자라난 여섯 그루의 은행나무는 세월이 지나자, 한데 모여 한 그루의 나무로 합쳐졌다고 한다. 이는 굵게 자란 나무의 줄기를 놓고 사람들이 나중에 지어낸 이야기지 싶다. 실제로 두 그루의 나무가 한 그루의 나무로 붙어서 자라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연리목, 연리지가 그런 경우다. 하지만 여섯 그루가 한 그루로 합쳐졌다는 건 믿기 어렵다. 다만 천년의 세월 동안 나무가 겪었을 생로병사의 속내를 일일이 짚어낼 수 없는 사람으로서는 그 전설을 믿는 수밖에.

 

키 34m·둘레 10.7m·가지 길이 24m

 

세월의 깊이는 크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무의 키가 34m나 되는데, 이는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 다음으로 가장 큰 키의 은행나무라는 증거다. 말이 34m이지, 하나의 생명체가 이리 크게 자라났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층건물 11층과 맞먹는 크기다.

 

여섯 그루의 나무가 하나로 합쳐졌다는 줄기 또한 엄청난 규모다. 사람 가슴 높이에서 잰 줄기의 둘레는 무려 10.7m. 어른 여섯 명이 팔을 펼쳐야 겨우 맞잡을 수 있을 만큼 큰 것이다. 게다가 사방으로 펼친 가지는 동서 방향으로 24m, 남북으로는 21m나 된다.

 

천년을 넘는 세월 동안 나무는 모진 바람과 눈보라를 다 이겨냈다. 더 믿어지지 않는 건 왕성한 생식력이다. 암나무인 보석사 은행나무는 여전히 엄청난 양의 열매를 맺는다. 천년에 걸쳐 그는 이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의 씨앗을 남겼고, 지금도 여전히 엄청난 양의 씨앗을 맺으며 생명체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이 천년 은행나무의 열매인 은행을 몸에 지니면, 무병장수의 덕을 얻게 된다고도 한다.

 

금산군에서는 해마다 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대신제를 지낸다. ‘천년의 바람, 천년의 울림’이란 주제로 열리는 은행나무 대신제는 산신제, 목신제, 당산굿으로 펼쳐진다. 산신제와 목신제는 물론이고, 원형을 재현하여 보여주는 당산굿은 볼거리일 뿐 아니라, 오래도록 지켰으면 하는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이다.

 

처음에는 음력 2월 15일인 경칩에 대신제를 열었는데, 요즘은 오월 단오 즈음에 날을 잡아 금산군의 축제로 행사를 벌이고 있다. 이 대신제에 참가해 소원을 빌면 반드시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은 제가끔 정성껏 적어넣은 소원지가 되어 나무 줄기에 맨 금줄에 매달린다. 이 형형색색의 소원지는 이듬해 다시 대신제를 올릴 때까지 금줄에 매달려 휘날리며 나무의 영험함을 나타내는 표지가 된다.

 

1945년 광복 때와 1950년 전란 때, 1992년 극심한 가뭄 때 소리내어 울었다고 전해 진다

 

칠백의총

 

사적 제105호.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다. 1592년(선조 25) 8월 18일 조헌(趙憲)이 이끄는 의병과 승장 영규(靈圭)가 거느리고 있던 승병이 합군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금산성(錦山城)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했다.

 

뒤에 조헌의 문인인 박정량(朴廷亮)과 김승절(金承節:또는 全承業)이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사총이라 했다. 1603년(선조 36)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峰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지고, 1634년(인조 12)에는 순의단(殉義壇)이 설치되어 해마다 제향을 올렸다.

 

1647년(인조 25) 종용사(從容祠)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1663년(현종 4) '종용사'(從容祠)라는 사액(賜額)과 4결(結)의 토지를 내려 춘추제향에 쓰게 했다. 그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사우(祠宇)와 의총을 허물고 일군순의비를 파괴한 것을 8·15해방 후 군민이 의총과 종용사를 재건하고, 국가에서 기념관·칠백의사순의탑 등을 새로 짓고 묘역을 조경하여 사적으로 지정했다

 

이 여행은 이 사진 한장으로 대신하고 싶다.

1100년된 보석사의 영험한 은행나무이다. ^^

 

 

 

저 스키타는 곰돌이는 무주구천동의 상징인가?

 

 

320년된 느티나무이다.

 

 

독일가문비나무가 길가에 늘어서 있다.

 

 

산철쭉이 빨갛게 물들었다.

 

 

월하탄이다.

 

 

계곡 건너에는 야영장이다.

 

 

여기는 전나무가 쭉쭉 벋어있다.

 

 

금산의 인삼박물관이다.

 

 

금산 약초인삼시장의 풍경이다.

 

 

 

 

박물관은 인삼재배과정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인삼 품평회 수상 인삼들이다.

 

 

인삼제품들이다.

 

 

일주문에 진악산보석사라 쓰여 있다.

 

 

의병승장비이다.

 

 

오른쪽은 전나무, 왼쪽은 은행나무이다.

 

 

드디어 은행나무이다.

 

 

은행나무 밑부분을 보니 은행나무의 역사가 보여진다.

 

 

이런 바위에 글이 새겨져 있다.

 

 

보석사 가는 무지개다리이다.

 

 

기허당, 대웅전 등 전각의 모습이다.

 

 

기허당이다.

 

 

대웅전의 모습이다.

 

 

범종루이다.

 

 

범종루 천정이 화려하다.

 

 

종무소로 사용되는 곳인데 승운선원인가?

 

 

대웅전의 옆모습이다.

 

 

저 요사채의 옆모습이 너무 멋지다.

 

 

대웅전 외벽의 벽화인데 지팡이를 들고 험한 파도를 건너는가?

 

 

기허당 외벽의 벽화인데 영규대사관련 내용일 것이다.

 

 

대웅전의 편액인데 완산 이삼만 선생의 글씨이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보현보살이시다.

 

 

기허당 내부의 영규대사 진영이다.

 

 

산신각의 모습이다.

 

 

산신각 내부 모습이다.

 

 

 

산신각 풍경 너머로 보석사의 전각들을 본다.

 

 

보석사의 마지막 단풍으로 보인다.

 

 

칠백의총의 의총문이다.

 

 

순의비각이다.

 

 

저기 보이는 것이 종용사이다.

 

 

종용사 내부 모습이다.

 

 

칠백의총의 모습이다.

 

 

전시관에는 세독충정이라는 편액이 쓰여 있다.

 

 

조헌선생 영정이다.

 

 

내부 모습이다.

 

 

 

 

 

 

우리의 이연주 가이드도 그림을 보고 있다.

 

 

기념관 안내판이다.

 

 

숭의지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버스를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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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1.18 23:31

    첫댓글 여섯 그루가 합쳐졌다는 은행나무가 신기하네요^^

  • 작성자 10.11.19 08:00

    너무 대단한 은행나무 같았어요.
    내년에는 10월초에 한번 가보았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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