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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처럼 좀 더 큰 목적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곳까지 이르도록 이끌 수 있다. 우리 각자에게 진정한 존재 목적은 참으로 개인적인 것이요 열정의 대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 위해 그리고 왜 여기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그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진정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이념을 찾는 것이다.”
*본서의 주장은, 우리가 창조된 구체적인 목적, 곧 우리가 부름 받은 목적을 발견할 때에만 비로소 이 목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창조주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이며 인간의 존재 목적의 가장 고상한 근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못 미치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목적을 찾겠다는 인간의 열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
*톨스토이가 과학에 관해 말한 바는 다른 모든 것에도 적용된다. “과학이 무의미한 이유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질문, 즉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목적을 찾는 노력을 벗어나서는 어떤 대답도 있을 수 없으며, 그 노력에 대한 대답 가운데 소명에 응답하는 것보다 더 깊고 만족스러운 대답은 없다.
그러면 소명(Calling)이란 무엇인가?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 보겠다.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열정적으로 부르셨기에, 그분의 소환과 은혜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소유가 헌신적이고 역동적으로 그분을 섬기는데 투자된다는 진리다.
이 진리-소명-는 세계역사의 위대한 ‘도약’의 원동력이었다. 시내 산에서 있었던 유대 민족의 형성, 갈릴리에서 있었던 유대 민족의 탄생, 16세기의 종교개혁과 그로 인한 근대 세계의 발흥이 그러한 예이다.
*에로스는 추구를, 갈망하는 목표를 향한 인간의 ‘위대한 상승’으로 본다. 일반적으로 고대 세계에서, 특히 헬라인의 경우 에로스란 욕망의 대상-명예, 인정, 진리, 정의, 미, 사랑, 신이든 무엇이든-이 지닌 매력적인 특징이 야기하는 욕구, 동경, 요망으로서의 사랑을 뜻한다. 따라서 추구하는 것은 사랑하기를 갈구하는 것이고, 사랑과 욕망을 한 대상에게 향하도록 하고 그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행복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추구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인데, 사랑은 욕망이 되고, 욕망은 소유가 되며, 소유는 행복이 된다. 키케로가 「호르텐시우스」에서 말했듯이, 경험적으로 보아도 최대의 행복은 최대의 선을 소유하는데서 온다.
*아가페의 길은 예수님이 소개한 길이다. 이 길은 에로스의 길과 두 가지 면, 곧 추구의 목표 및 수단의 면에서 다르다. 먼저 아가페의 길은 이렇게 말한다. “물론 사랑도 좋고 욕망도 좋다. 그러나 당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당신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 에로스의 길을 따르는 자의 경우, 행복을 원하는 것은 전혀 잘못은 아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곳에서 행복을 발견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우리 인간이 욕망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피조물임을 입증한다. 우리 스스로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를 완성시켜 주리라고 생각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원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 이외의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그분은 최고의 선이며 유일하게 영존하는 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못 미치는 대상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유한하고 불완전하다. 그러한 것들을 궁극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한 우리는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가페의 길은 다음과 같이 외친다. 참된 만족과 진정한 안식은 최고의 영존하는 선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에 못 미치는 추구는 불안만 줄 뿐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한 유명한 말의 의미이다. “당신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에는 늘 불안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하나님께 도달 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추구를 주도하지 않는 한,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를 그분께로 나아가게 해서 추구를 완성시키지 않는 한 우리의 추구는 항상 부족한 것이 될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말하기를
나는 감방에서 걸어 나올 때
마치 지주가 자기 저택에서 나오듯
침착하고, 쾌활하고, 당당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말하기를
나는 간수에게 말을 건넬 때
마치 명령하는 권한이 있는 듯
자유롭고, 친근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또한 말하기를
나는 불행한 날들을 견디면서
마치 승리하는데 익숙한 듯
평온하고, 미소 지으며, 당당하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정말 다른 이들이 말하는 그런 존재인가?
아니면 나 자신이 아는 그런 존재일 뿐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뭔가를 갈망하며 병든,
손들이 내 목을 조르고 있는 듯 숨 가쁜,
빛깔과 꽃들과 새 소리에 굶주린,
친절한 말과 이웃에 목마른,
압제와 사소한 모욕에 분노로 치를 떠는,
위대한 사건들을 간절히 고대하는,
무한히 멀리 있는 친구들로 인해 힘없이 슬퍼하는,
기도하고, 생각하고, 만드는데 지치고 허무해진,
무기력하게 그 모든 것과 이별할 채비를 갖춘 그런 존재?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나는 동시에 둘 다인가? 타인 앞에 서는 위선자,
내 앞에서는 한심스러울 만큼 슬픔에 잠긴 약골인가?
아니면 이미 성취된 승리로부터 혼돈 가운데로 도망치는,
내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패잔병 같은 그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나를 조롱하고 이 고독한 질문을 비웃는다.
내가 그 누구든지, 오 하나님 당신은 아나이다.
내가 당신 것인 줄을.
-디트리히 본 회퍼- 2차 대전 베를린 감옥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일차적인 소명은 그분에 의한, 그분을 향한, 그분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누군가(하나님)에게 부름 받은 것이지, 무엇(어머니 역할이나 정치나 교직)이나 어디(도시 빈민가나 몽골)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이차적인 소명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기억하고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그분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살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정주부나 법조인으로 혹은 교직으로 부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이 이차적인 소명으로서 적절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것들은 어디까지나 이차적일 뿐 일차적인 소명은 아니다. 이것들은 여러 ‘소명들’이지 절대적인 그 ‘소명’은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이자 하나님의 소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이차적인 소명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일차적인 소명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수도사와 사제의 일이 아무리 거룩하고 힘들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시골 사람들이 들에서 하는 노동이나 여성들이 하는 집안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모든 일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만 측량될 뿐이다. …사실 종이 집에서 하는 육체노동이 때로는 수도사나 사제가 하는 금식이나 다른 일보다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더 합당한데, 그것은 수도사나 사제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루터
*만약 신자가 하는 모든 일이 믿음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진다면 모든 이원론적인 구별은 무너진다. 고차원/저차원, 성스러운/세속적인, 완전한/허용된, 관조적인/활동적인, 일등급/이등급의 구별이란 더 이상 없다. 소명이란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일차적인) 부르심에 반응함으로써 자신의(이차적인) 부르심을 성취하는 것이다. 농부와 상인-우리의 경우에는 사업가, 교사, 공장 노동자, 아나운서 등-이 목사나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혹은 하지 못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처럼 인간적인 성향으로 깊이 빠져드는 길을 차단한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어떤 것을 하도록 혹은 어디론가 가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로 부름 받았다. 먼저 특별한 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름 받았다. 부르심에 대한 올바른 응답은 다른 어떤 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헌신하는 것이다. 챔버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 주님이 당신의 사업을 위해 보내시는 남자와 여자는 평범한 인간들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인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것이 더해진다.” 그의 글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문구는 “절대적으로 그분의 것이 되라.”는 말이다.
*우리는 개별적인(혹은 특정한) 소명과 공동체적(혹은 일반적) 소명을 구별해야 한다. 이기심은 전자에 치우치지만 청지기 직은 양자를 모두 존중한다. 개별적인 소명이란 우리 각자가 독특한 개인으로서 하나님께 삶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개별적인 소명이 독특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고동체적 소명이란 우리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거룩한 자로, 화평하게 하는 자로 부름 받았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미덕이다.
우리의 공동체적 소명이 중요한 이유는 소명이 지나치게 개인주의로 발전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소명은 공동체적 소명을 보완해야지 그것과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성경에 나온 예처럼 공동체적 소명이 우선 되어야 한다. 자신의 개별적인 소명을 앞세워 교회의 공동체적 소명을 거부하는 자는 자기기만에 빠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정체성을 단 한 문장으로 기술할 수 있는가? 이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당신의 소명도 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없다. 기껏해야 일부분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부분적인 것마저도 명료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지고 있다. 많은 경우, 시행착오를 포함한 오랜 기간의 탐색을 통해서만 분명한 소명의식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십대에는 분명하게 보였던 것이 오십대에 이르러서는 훨씬 더 신비롭게 보일 수도 있는데,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이생에서 완전히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시내 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얼마나 새로운 것이기에 그로 인해 모든 범주와 우상들이 박살나 버리는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것 같고, 양심을 괴롭히는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불, 연기, 천둥소리인가? 하지만 이런 것들은 핵폭탄이 터지듯이 드러난 진리,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진리에 비하면 그저 변두리에서 터지는 불꽃놀이에 불과하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주장했듯이 “제자의 반응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순종의 행위다.” 그들은 그분의 요구를 심사숙고한 다음 마음을 정하고, 그 후에 따를지 말지를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부르심을 듣고 바로 순종했다(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의 반응은 ‘예수님의 권위가 절대적이고, 직접적이며, 설명할 수 없는 권위임을 증거 하는 것’이었다. 부르심이 전부이고, 예수님이 그 이유이다. 그분을 따르는 유일한 길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만을 좇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모든 의문과 반발과 핑계를 단번에 해결하는 부르심이 있다. 제자란 따르는 자라기보다는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자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사용한 본받는 자(imitators)란 단어는 중요한 용어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모델을 닮는 것-관찰하고 모방하는 것-은 제자도에서 매우 중요하다. 인간적인 앎에는 한계가 있고 항상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법이다. 따라서 가장 심오한 지식은 결코 말로 표현될 수 없으며 설교나 책, 강의나 세미나로도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스승의 권위 아래서 경험을 통하여 스승에게 배워야만 한다. 복음서에 기록된바 예수님이 열둘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려고” 선택하셨다는 말은 그분과 같이 있는 것이 제자들의 추가적인 특권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제자도와 배움의 핵심이자 영혼에 해당되었다.
*소명의 진리는 책임에 대한 깊은 근거를 제공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 그리고 우리 각자의 시작에도 우리를 향한 말씀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 인생의 핵심에는 관계적인 요소와 청각적인 요소가 있다. 우리 전체의 존재는 하나의 들음이요 하나의 반응이다. 우리가 책임 있는 존재인 이유는 반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할 때 발하신 최초의 말씀과 그분이 심판할 때 발하실 최후의 말씀 사이에서, 우리 인생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은 없다. 하나님 말씀 이외의 다른 말은 없다. 하나님의 삶의 방식 이외의 다른 삶의 방식은 없다. 그런데 당분간, 우리 의 반응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가 ‘예’라고 말하도록 강요당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주장하듯이 “‘인간’의 모든 교활함은 한 가지를 추구한다. 즉 책임질 것 없이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르침을 주신 다음에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고 덧붙이신다. 그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모두 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경청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책임 있는 존재이므로 오늘이 아니더라도 장차 언젠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글을 인용하자면, 책임이 있는 곳이 내가 서있는 곳이다. 우리의 소명은 우리의 책임이 유효한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소명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고, 우리의 소명은 그 소명을 행사하는 곳이다.
소명의 책임은 유행어나 상투적인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앙의 사회적인 의미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가각 자기의 매순간에 대해 영원히 책임지도록 하는 것을 동원하는데 있다. 심지어 가장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책임지게 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이다.”라고 키이르케고르는 썼다. 오늘날처럼 호언장담이 난무하고, 변명은 늘지만 책임은 서로 미루는 시대에 우리는 진정한 책임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보이지 않거나 무명의 인물이라면 책임지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과거 전통적인 도덕의 대부분은 책임이 차지하고 있었다. 옳게 행동하고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타인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 그들의 도덕은 가시성을 통한 책임성 이었다. 물론 익명성이 존재하는 상황이 현대에 새로 생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대에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사는 마을은 충분한 응집력을 갖고 있었고 서로의 관계가 무척 가까웠기 때문에 개인의 행위는 통제될 수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는 이웃 관계가 종종 ‘참견 잘하는 것’이었던 반면에 도시에서는 익명성이 ‘해방’을 의미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도덕은 여전히 책임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하나님만 제외하고는) 우리가 행하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책임성에 대한 시험이다.
*소명이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도달한 자가 아니라 이 생애동안 항상 ‘그리스도의 추종자’요 ‘그 도’를 따르는 자로서 길 위에 서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가, 아니면 믿음에 관한 바른 신학적 교리를 신뢰함으로써 구원받는가? 정통적 교리를 붙들고 있기만 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지는가? 그리스도께서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 중에 동방 박사들, 우물가의 문란한 이방 여인, 증오의 대상이었던 침략군의 백부장 같은 그럴듯하지 않은 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리라고 예상이나 했는가? 예수님의 제자들 중 가장 일찍 선택된 자들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데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그들은 그 진리를 알자마자 오해하고 그분을 배신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과정을 더 단순하게, 더 확실하게, 더 일상적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부른 제자들을 확인하고 집으로 영접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가망이 없어 보일 정도로 초라한 미완성의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길 위에 있다. 그러고 우리는 그 도를 따르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제도적인 방법으로 교만에 도전한 적도 가끔 있었다. 함부르크가의 황제들은 죽은 후 비엔나 카푸친 수도원의 지하 납골소에 안장되었는데, 그 장례식은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이었다. 프란츠 조셉 황제가 죽었을 때 거대한 장례 행렬이 굳게 닫힌 수도원의 정문에 도착했고 의전관이 문을 두드렸다. 그 때 문 너머에서 수도원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두드리는 분은 누구요?”
“나는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왕 프란츠 조셉이요”라고 의전관이 대답했다.
“나는 당신을 모르오. 당신이 누구인지 다시 한 번 말해 보시오.”
“나는 오스트리아의 ㄹ황제이자 헝가리, 보헤미아, 갈리시아, 로도메리아, 달마시아의 왕이며, 트란실바니아의 대 공작이자, 모라비아의 후작이며, 스티리아와 코린티아의 공작인 프란츠 조셉이오.”
“우리는 당신을 아직 모르겠소.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라는 서늘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때서야 의전관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저는 하나님의 자비를 겸손히 구하는 불쌍한 죄인 프란츠 조셉입니다.”
“그대는 이제 들어오시오.”라고 수도장이 말했고 대문은 활짝 열렸다.
우리는 오늘날의 지도자들에게도 동일한 도전을 던지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부름 받은데 대해 경이감을 느끼고 있는가? 그것은 순전히 선물이요 은혜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은혜는 영접의 문제가 아니다. 곧 하나님이 준법자 뿐 아니라 범법자를, 존경받는 자뿐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자를, 집에 남아있던 장남뿐 아니라 탕자를 영접하시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다. 교만은 첫 번째이자 최악의 죄이기에, 은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가장 놀랍게 드러난다. 즉, 은혜는 탐심이나 정욕의 열매보다 교만의 열매를 끌어안을 때, 방탕한 막달라 마리아보다 바리새인의 영혼에 미칠 때,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죄인에게 다가갈 때보다 소명에 의해 더 자만해진 자만할 인간을 사로잡을 때,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다.
우리 각자 속에 있는 교만이라는 죄, 즉 홀로 뽐내는 단단한 ‘자아’를 녹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뿐이다. 그런데 좋은 소식은 그런 은혜가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한 사람씩 부르신다. 비교는 부질없는 짓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억측은 시간 낭비이며, 질투는 어리석은 죄악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부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책임이 있으며, 그분만을 기쁘게 해야 하며, 결국에는 그분으로부터만 인정받게 되어 있다. 우리가 혹시라도 유혹을 받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서로를 비교하면서 남의 진보를 우리 자신의 소명의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한다면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 역시 듣게 될 것이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나를 따르라!”
*유일하신 청중이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연습을 하는데 고독의 훈련이 왜 중요한지 살펴보자. 예수님과 제자들이 너무나 바빠서 식사할 겨를조차 없을 때 그분은 “너희는 나와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잠깐 쉬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셨다. 다른 금욕의 훈련(개입의 훈련과 정반대인)과 마찬가지로 고독은 우리가 현대문화의 과잉에 대항하도록 훈련하는데 꼭 필요하다. 일상적인 삶은 우리 자신을 중요한 인물인양 치켜 올리고 타인 의존적인 생각과 행동 양식으로 몰아넣는 반면, 고독은 유일한 청중이신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상황을 볼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함으로써 그러한 올무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 산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속, 고상한/저급한, 완전한/허용된, 관조/활동의 구별이 없다. 소명은 심지어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구별조차 없애 서로 평등하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삶을 살아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유화된 신앙은 총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말하고 찬양도 부를지 모르지만 그들이 실제 삶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그와 다르다. 주되심은 주머니 크기로 축소되어 버렸다. 총체적인 삶의 규범이 때에 따라 적용되는 시간제 가치관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계속해서 거듭 지적해야 한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마땅히 보여야 할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억지로 순종을 한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고기가 잡혀 그물이 찢어지고 두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다. 그 광경을 본 베드로는 서둘러 육지로 나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은 ‘조교 지도자’가 아니라 삶 전체의 주인이시다. 그분의 소명에 응답하는 것은 설교 뿐 아니라 고기잡이의 세계에도, 물가 뿐 아니라 호수 깊은 곳에까지 미친다. 우리의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소유, 심지어는 우리가 생각하고 꿈꾸는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이 요구에 비추어 점검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다시금 반복하건대 이것은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것의 문제다.
*현대의 교통수단은 우리를 세계의 어느 곳이든 데려간다. 현대의 대중매체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온 세계와 우리를 현혹시키는 수많은 선택안을 보여준다. 현대의 비즈니스는 세계 전역에서 생산된 상품을 동네에서 구입할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선택과 변화가 급격하게 많아지고 빨라짐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차원에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남의 것에 대한 인식이 더욱 높아지면서 우리에게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의식하게 된다. 그들의 음식, 그들의 관습, 그들의 확신이 우리의 선택, 우리의 대안, 우리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삶은 마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음식이 즐비한 뷔페식당과 같이 되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하게는, 선택이 그저 마음의 상태로 그치지 않는다. 선택은 하나의 가치, 하나의 우선순위, 하나의 권리가 되었다. 현대적이 된다는 것은 선택과 변화에 중독되는 것을 뜻한다. 이런 것들이 현대적인 삶의 본질로 여겨지고 있다.
*선택을 반대하는 논의들은 선택이 지닌 특별하고도 신적인 힘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오직 한 가지만 이 선택을 정복할 수 있다. 그것은 ‘선택 받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소명은 현대 생활에서 선택이 지닌 근본적인 특성을 중화시켜 버린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값 주고 사신바 된 존재들이다. 우리에게는 권리가 없고 책임만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우리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순종적인 반응일 뿐이다. 소명의 확신보다 선택의 허식을 더 잘 폭로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일단 우리가 부름 받은 이상 문자 그대로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낯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을 따라 길도 없는 광야를 건넜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의 방향 감각과 의미의 발견은 오직 하나님의 소명으로부터 왔지, 그들의 예견, 지혜, 상황 파악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향해 거ㅏ는 중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해 가시는 길을 항상 알지 못했지만 그들이 왜 하나님을 신뢰했는지는 항상 알고 있었다. 그분의 말씀이 그 약속이었고 그분의 부르심이 그 길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은 이와 전혀 다른가? 우리는 모두 유랑민의 신세에 처해 있다. 우리는 한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 수도 잠시 살 수도 있다. 우리 직업은 수입이 적을 수도 상당히 많을 수도 있다. 우리의 친구 관계는 풍성하고 유쾌할 수도 있고 혹은 빈약하고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우리의 이력서는 화려할 수도 들쭉날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는 그 어느 것도 인생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소명을 찾아가는 것이다.
*나를 가르치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시여.
모든 일 가운데 당신을 볼 수 있도록
내가 어떤 일을 하든
당신을 위해 하게 하소서!
유리를 보는 사람은
그 눈을 유리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되,
원하기만 한다면 그 유리를 뚫고 들어가
천국을 일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모든 것에 함께하는 이상
어떤 것도 너무 비천한 것은 없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는 이름의 빛깔이 더해져
밝고 깨끗하게 되지 않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어구를 지닌 종은
단조로운 일을 신성하게 만듭니다.
당신의 법으로 말하자면, 방을 청소하는 자는
그것을 멋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돌,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든 돌입니다.
하나님이 만지시고 소유하시는 것이라면
그 이하로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조지 허버트
*소명은 하나님 아래서 우리의 시선을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집중시킴으로써 그것을 변혁시킨다. 불교와 영지주의를 비롯한 많은 종교는 세계를 부정한다. 그들이 보기에 물질은 부패를, 장소는 제한성을, 시간은 죽음을 의미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이중 초점의 시각을 갖고 있는데, 세계를 긍정하는 동시에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세계는 악으로 인해 손상되고 황폐해져 버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ㅅ계는 선하게 창조 되었다. 따라서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실재와 선함은 계속 존재하며 양도될 수 없는 것이다.
*소명은 단조로운 일이 제자도의 대가 중 일부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사물을 변혁시킨다. 이에 대해 오스왈드 챔버스처럼 솔직하고도 끈기 있게 쓴 사람은 없다. 그는 “단조로운 일이야말로 성품을 평가하는 시금석이다.”라는 점을 반복해서 지적한다. 우리는 보통 큰일을 찾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이 환상의 꼭대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골짜기로 돌려보내신다. 우리는 드물게 찾아오는 영감의 순간에 말하고 행동하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일상적인 일, 보이지 않는 일, 보상이 없는 일 가운데 그분께 순종하기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화려한 순간과 우리 말을 경청하는 청중에게서 우리의 자아상을 찾는다. 그런데 그분은 무대의 조명이 꺼진 상태에서 우리가 하는 평범한 일 가운데서 그것을 찾으신다.
*충동적인 용기를 가진 사람이 물위를 걷기는 쉽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마른 땅 위를 걷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가기 위해 물 위를 걸었지만 땅 위에서는 멀리 떨어져 그분을 좇았다. 위기를 견디기 위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과 자존심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상당한 긴장에 놀랄 만큼 잘 대처한다. 그러나 매일 24시간 동안 성도답게 사는 것, 제자로서 단조로운 일을 해내는 것, 예수님의 제자로서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고, 무시된 존재로 사는 데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꼭 필요하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특별한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평범한 일에서 특별해야 하고, 더러운 거리, 비천한 사람들 중에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이것은 5분 내에 배울 수 없는 것이다. - 챔버스
*소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인생의 그 어떤 것도 당연시해서는 안 되며 삶의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나 현대 세계는 상기한 두 가지를 모두 결정적으로 뒤집어버렸다. 한편으로는, 의존의식을 자율의식으로 바꾸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건 과거사다”라고 현대 세계는 말한다. “오늘날에는 사람이 떡만으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혹은 적어도 이성만으로도, 테크놀로지만으로도, 섹스만으로도, 쇼핑만으로도 등등.” 과거에는 철학적 무신론자가 “하나님은 없다!”라고 반항조로 외치곤 했다. 지금은 실용적 무신론자-현대의 경영인, 판매업자, 기술자, 커설던트-가 전문가의 권위를 빌려 점잖게 말한다. “하나님은 필요 없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그런 질문을 다룰 때도, 다룰 상황도 아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프란체스코를 비롯한 역사상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제기한 이 질문을 묵상함으로써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는 한 가지 대답, “아무것도 없다”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에서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좋은 것들을 은혜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선택받을만한 가치가 있어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단지 그분의 은혜 가운데 우리를 사랑하셔서 선택하신 것이다. 사실상 그분은 그 선택을 피로써 인치기 위해 그 모든 대가를 지불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신다.
이 ‘선택받은 백성’에게 합당한 감사한 마음이 없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모세는 유대 민족에게 이렇게 상기시켰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그것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다윗 왕 역시 개인적으로 받은 소명에 너무나 놀라 압도되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이니이다.”
*그러나 이 모든 예는 성경에서 가장 으뜸가는 ‘바보처럼 보이는 자’였던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 가족에게 미치광이로 여겨져 버림받았으며, 결국에는 로마 친위대 앞에 선 채 조롱거리가 되셨다. 세상의 죄를 짊어지기에 앞서 그분은 세상의 어리석음을 짊어지신다. 예수님은 홍포와 가시 면류관과 갈대 홀로 치장되어, 고의적으로 바보 같은 왕의 모습을 한 조롱받는 왕이 된다. 그러므로 수없이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로욜라의 아그나티우스의 말을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그분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바보로 취급받기를 원해야 하고, 그분의 옷을 입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야말로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마구간에 무방비 상태로’ 누우시고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채’ 달리고자 하신 분이다.
*첫째, 바보처럼 되는 것이 소명에 필수적인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과 같아지는데 따르는 대가를 지불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아를 부정하고 그분을 좇아 십자가를 지며 그분의 소명에 순종하는 값이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을 부르실 때 그분은 그 사람에게 와서 죽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1937년 「나를 따르라」에서 본 회퍼가 쓴 이 말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신학적인 문장일 것이다. 그는 히틀러에게 저항하는 가운데 자신의 피로 이 말에 친히 서명했다.
그러나 본 회퍼는 “십자가는 모든 그리스도인 개개인 위에 놓여 있다.”고 가르치는 동시에 죽음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런가 하면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 종류의 순교가 있다고 가르쳐 왔다. 피를 흘리는 적색 순교, 금식처럼 금욕의 영적 훈련으로 이어지는 녹색 순교,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는 백색 순교가 그것이다. 따라서 제자도란 ‘백색 장례식’, 곧 우리 자신의 독립성에 죽음을 고하는 장례식을 의미한다.
*여기에 예수님의 복음에 담긴 가장 전복적인 특성이 있다. 복음은 혁명적일 뿐 아니라-다른 모든 혁명 및 혁명가와 비교할 때-혁명적이 되는 혁명적인 방법이다. 예수님은 악이 자신에게 최악의 해를 입히도록 허용함으로써 악과 싸우고 악을 무찌르셨다. 그러고 나서 너무나 놀랍게도 그분은 우리도 똑같이 하라고 부르신다.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고,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구할 것이다.
편안한 시대에는 외적인 소명의 대가가 작을 수 있고 어려운 때는-본회퍼의 경우와 같이-그 대가가 엄청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가 되라는 부름을 받았지만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어리석어지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지 내적인 대가는 항상 동일하다. 즉 자아를 죽이는 것이다. 루이스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이렇게 썼다. “결국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즉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마지막에 하나님이 마주보시며 ‘그대의 뜻이 이루어질 지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천국과 지옥의 차이다.
*그러한 모든 경향에 반하여 거룩한 바보는 도로 장애물로 우뚝 서 있다. 복음에는 우리가 느긋해질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대립이 있고,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제자도의 대가가 있으며, 우리가 은폐해서는 안 될 순종에 대한 도전이 있고, 우리가 결코 증발시켜서는 안 될 믿음에 대한 스캔들이 있다. 그러한 진리에 충실하다가 경계선 밖으로 밀려나도 좋다. 우리더러 미쳤다고 선언하는 오늘날의 세상적인 지혜는 내일이면 구시대의 이론으로 전락할 것이다. 우리의 어리석음이 진정한 복음이고 얼간이의 망상이 아닌 이상, 우리는 ‘무식하게 무식하거나’‘어리석게 어리석은’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학교의 겸손한 학생일 것이다.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가 돈키호테에 관해 썼듯이 “바보는 항상 옳다. 오직 바보만이 이 세상에서 옳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인 우리는 여행자이며, 비록 그 길을 이미 찾았지만 목적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우리가 직업에서 은퇴할 수는 있으나 개인적인 소명에서 은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공적인 책임에서 물러날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적인 소명에서는 퇴진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길의 끝을 볼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할 수는 있으나 그 때에는 우리의 눈이 길 끝에 계신 아버지와 집에 더 가까이 고정될 것이다. 헨리 나우엔이 썼듯이,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는 자는 끝장난 자다. 이제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자는 길을 잃은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