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과 평택
청일전쟁은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하지 못한 친청수구정권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
텐진조약에 의해 청일양군이 공동출병하면서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전개된 전쟁이다.
이 전쟁은 열강들의 식민지쟁탈전이면서 조선에 대한 일제침략의 신호탄이었다.
전쟁에 대한 청일 양군의 태도는 청군이 농민군의 북상길이었던 아산만으로 들어온 데 비하여 일본군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인천항과 원산항을 통하여 들어온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청군은 임오군란 이후 다져진 조선의 지배권을 확인시키려고 했던 것에 비하여,
일본군은 청나라에 빼앗긴 정치, 군사적 주도권을 재 장악하려는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인천과 원산으로 입국한 일본군은 한양과 수원을 거쳐 평택방면으로 남하하였다.
반면 아산만을 통하여 들어온 청(淸)군은 안성천 하류를 거슬러 백석포와 군문포로 입국하여
아산방면과 평택지방에 진을 쳤다. 전쟁은 소사벌을 중심으로 평택과 성환부근에서 전개되었다.
그래서 유천동에서 가까운 벌판에는 "청망평-청군이 패한 곳"이라는 지명과
"왜몰보-왜군이 몰살당한 저수지", "군두포-청군이 들어온 마지막 나루"같은 이름이 있고,
청군이 주둔했던 군문포 자리에는 "망근다리-망군대가 세워졌던 곳" "군문(軍門)-청군이 들어와 진을 쳤던 곳"
같은 지명이 남아있게 되었다. 하지만 청군이 어디로 들어왔던,
일본군의 숫자가 얼마이던 평택의 민중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민중들은 전쟁으로 자신들이 피땀흘려 가꾼 옥토와 집과 마을과 형제와 친척들이 열강들에 의해서 죽고, 불타고,
쓰러져 가는 것이 원통할 뿐이었다. 그래서 생긴 말이
"아산이 깨지나 평택이 무너지나"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