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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6:1~18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어떤 것? 2014.4.20.
먼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평안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2014년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할절 예배를 통해서 부할의 기쁨과 소망과 복이 되기 위해서는 이 부활이 사실이라는 터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사실과 함께 나에게 그대로 부활이 적용된다는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몇몇 고린도 교회 사람들을 향해 고전 15;16-20에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는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무슨 말씀일까요?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 우리의 구원, 우리의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믿는 인생은 허무 그 자체이거 여전히 죄악 가운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 부활은 분석할 사안이 아니라 믿음의 사실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입니다. 각박한 현실에서 승리의 상징이며 깃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 때문이고, 부활이 나에게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아침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음성이 무엇입니까? 평안하냐? 무서워 말라, 내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새로운 소명에 대한 부응을 위해서 성령을 받으라. 이 세 마디입니다. 여러분, 왜 부활하신 주님의 첫 메시지가 평안, 갈릴리, 성령입니까? 여기에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의 멧세지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됩니까?
1. 일상의 평안입니다. 무서움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지식 가운데서 적용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의 부활로 주어지는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평안이어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향한 부활이 그 자체로 끝이 난다면 그것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힘도 되어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반드시 우리의 삶 가운데, 생활 속에서 적용되어야 합니다. 적용되어 삶이 평안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과 공관복음에 의하면 안식 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 두 마리아와 살로메 등 세 명의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물론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을 확신하고 예수님을 만나러 간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은혜에 감사하여 마지막 사랑을 드리러 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 드리려고 갔습니다. 가면서 무덤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 때문에 서로 이야기를 하지만 동굴 무덤에 갔을 때 이미 굴을 막았던 큰 바위는 굴려져 있었습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는 곱게 개어져 있었고 웬일인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상기시켜 주고 무서워 말라 평안이니라. 그리고 부활하면 갈릴리로 가겠다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제자들에게 빨리 알려서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주님을 만나라고 합니다. 여인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쳤을 뿐 이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경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곧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존에서 만나고 세마디 표현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듣습니다. 평안하뇨? 무서워 말라. 너희들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성령을 받으라. 이 세 마디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패턴으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여인들은 자기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여인들로부터 들은 일부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과 함께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 20;19절로 연결이 되고 21장에서 제자들은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호수 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이 또 만납니다. 그러면, 왜 하필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기를 원하셨을까요? 부활이 진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 녹아져야 하는데, 그 것이 무엇입니까? 언제나 평안입니까? 언제나 살롬입니까? 언제나? 그 말이지요. 눈물을 흘릴 현장에서도, 낙담되는 현장에서도, 절망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 그 현장, 그래서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도 그래도 평안하느냐? 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나에게 언제 어디서나 무슨 조건이든지 평안입니다. 한국에서 일어난 어처구니가 없는 대 참사와 정부와 관료들의 구조 대응의 무능력 앞에서도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낙심한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합니다. 일상에서의 평안은 주님의 부활과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첫 멧세지 때문에 주어집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느끼고, 감당하고, 겪는 오늘의 현실에서 주님의 부활 때문에 찾아오고, 주시는 참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러면 두 번째로 갈릴리와 일상 가운데의 부활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왜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가 아니고 갈릴리입니까? 두 번째로 부활은 현재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실패의 자리일 수도 있고, 권태로운 자리일 수도 있고, 마지못해 있는 자리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갈릴리로 내려간 것은 여인들이 전해 준 예수님 소식 때문이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결정입니다. 왜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했어야 할 제자들이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을까요? 사실 한 성격하는 제자들의 평소 모습대로라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손 봐야 될 사람이 한 둘이겠습니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빌라도, 그리고 매수돼서 예수님의 이름 대신 바라바를 불렀던 군중들 앞에 떡 하니 나타나서 “네 이놈들!” 그러면서 무엇인가 승리의 시위를 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런 것은 없고 오히려 제자들의 모습은 대체로 침울해 있습니다. 그리고 전에 하던 어부 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 자기들이 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하기로 장담을 했는데 예수님이 잡혀 가시자 다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모두들 죽은 듯 벌벌 떨며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나타나시니까 기쁘기보다는 뵐 면목이 없습니다. 그리고 부활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양심의 가책과 함께, 믿음이 없음으로 스스로 이미 제자로서 자격을 잃었다 싶어 낙향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이 먼저 갈릴리 현장에서 만나 주셨습니다. 다시 돌아간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만나 주셨습니다. 바로 그들 삶의 현장 속으로 주님이 직접 찾아 오셨습니다. 그들의 일을 도와주시고, 함께 식사를 하시며, 여러 격려의 말씀으로 그들이 잘못하고 마음 아파했던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역시 진정한 부활이란, 실패와 실수를 딛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 하셨지요? 그런데 바로 그 땅끝의 시작이 갈릴리입니다. 되돌아간 자리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꿈을 품었어도 시작은 언제나 현재의 자리이고, 지금의 자리입니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든 타고 난 재능이 한 가지씩은 있는데 이 청년은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재능을 살려서 삽화도 그리고 만화도 그리면서 실력을 쌓아가다가 드디어 에니메이션 작품 하나가 대박을 치게 됐습니다. 그러나 세상 물정을 몰랐던 청년은 사기를 당하고 그 에니메이션의 판권을 강탈당합니다. 그래서 거처할 곳도 없어서 그가 다니던 교회의 허름한 창고를 얻어 지냅니다. 궁핍해진 것은 둘째 치고 워낙 큰일을 당하고 보니 다시 일어설 힘조차 없었습니다.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창고에서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허물어진 벽 틈에서 고개를 삐죽 내민 생쥐를 만납니다. 그 생쥐나 자기나 같은 처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동정심을 발동합니다. 자기가 먹던 빵 부스러기를 내 밀고, 생쥐는 도망가지도 않고 슬금슬금 청년에게로 다가오더니 빵을 받아먹습니다. 이 일로 청년은 그 생쥐와 친구가 되어 ‘몰티마’라는 이름까지 지어줍니다. 그러면서 생쥐의 생태에 대해 관찰하기 시작하고 거기서 나온 캐릭터로 그는 돈방석에 앉게 됩니다.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월트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는 이렇게 해서 탄생이 됐습니다. 만약 월트가 낙담만 하고 있었다면, 그곳을 견디지 못해 다른 곳으로 떠났다면, 있는 자리에서 상상의 날개를 펴지 않았다면, 세계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꿈을 주고 기쁨을 주었던 디즈니랜드는 생겨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답은 언제나 지금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갈릴리에 있습니다. 돌아간 현실에 있습니다. 새로운 시작은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여기서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 있는 자리가 답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곳을 떠나라는 싸인을 주십니다. 떠나는 것은 그때 떠나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삶의 현장이란 단지 장소적인 개념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게으름과 무능 때문에 언제나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따라 속상함이 있고 후유증이 있고 그것은 악순환으로 이어지지만 생활 속의 부활이 가장 크게 적용되어야 할 곳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어제와 지난달과 작년에 하지 못했던 일을 억지로 복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새 날은 어제 일을 잊고 다시 시작하는 날입니다. 새 달은 지난달을 잊고 다시 시작하라고 있습니다. 새 해 역시 묵은해는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과거에 얽매이게 되어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진정한 부활이란 주님께서 용서해 주심을 믿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성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내가 서있고 감당하는 현실의 베이스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나의 삶의 베이스입니다. 요사이 광고 카피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한국의 포스코 광고인데요. 당신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입니까? 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면 베이스캠프는 방향이 될 것이고 어떻게 가야할지 묻는다면 지도가 될 것이고 계속 가야할지 망설인다면 용기가 될 것입니다. 베이스 없는 정상은 없습니다. 세상의 베이스가 되다. TV에서 이 광고를 볼 때마다 가슴에 어떤 울림이 느껴집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부활의 멧세지 없이는 우리가 정상에 설 수가 없습니다. 베이스란 단어 자체가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이 있습니다. 화려한 소리는 아니지만 낮은 울림으로 전체의 분위기를 깔아주는 베이스 기타처럼 말입니다. 사람도 이렇게 확연히 드러나진 않아도 낮고 부드러운 몸짓으로 전체를 받쳐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없이 존재감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명예퇴직을 하고 자신의 취미를 살려 2014년봄에 야생화농원을 시작했습니다. 30년간의 공직생활이 시간과 장소에 얽매어 살았다면 오십대부터는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자신의 취미를 살릴 수 있는 일을 갖는다면 더 풍요롭고 알찬 인생의 후반부가 되리라 생각을 하고 시작을 했습니다만, 주위에선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습니다. 친화력만큼은 타고난 사람입니다. 약간의 헐렁함과 무모한 용기를 가진 성격 때문에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순식간에 친해지는데, 친해지는 시간이 1분이면 족할 것처럼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키는 유별나게 촌스러운 사투리를 구사한는 사라입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인심이 후하지만 성격이 급하고 엉뚱한 면이 있어 주변 사람을 불안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이웃의 손길이 분주하고, 화분으로 쓸 도자기를 사러 가는 길에 안목 있는 이웃이 기꺼이 동행을 해 주고, 많은 짐이 오면 목장갑부터 끼고 달려들어 도와줍니다. 심지어 마을의 통장님으로부터 푹신푹신하고 근사한 의자를 10개나 기부 받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좋아해서인지 원형의 테이블이 무지하게 크게 만들어 의자를 빙 둘러 놓으니 당장이라도 마을회의를 해도 좋을 분위기입니다. 얼마나 신기하고 반가웠던지. 이처럼 인연이란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될지 모르기에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동네 분들이 기웃기웃하면서 화분 정리를 해 주고, 흙을 돋워 주기도 합니다. 쉼터를 갖고 싶은 사람들의 공동의 장소가 되고, 멀리 사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낫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역시 사람입니다. 사람끼리 어울려 연주하는 협주곡, 서로가 서로의 베이스가 되어주는 만남, 좀 더 낮고 부드러운 자세로 사람을 대하려는 마음이라면 분명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한 사람의 일어남도 베이스가 있으면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미래가 없어서 꿈이 사라져서 낙향한 실패한 제자들의 삶의 자리에 부활의 주님이 베이스가 되셨고, 베이스캠프가 되셨습니다. 제자들의 방향이 되었고, 지도가 되었고, 용기가 되었고, 영원한 삶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멧세지가 갈릴리입니다. 이런 부활의 참뜻을 깨닫고, 있는 자리에서 성실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세 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일상에서 주신 소명, 부르신 소명, 찾아오신 소명을 부여잡고 이 땅에서의 사명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부르신 소명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말씀이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이 땅에 계셨던 것은 40일 밖에 되지 않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부활하셨으니 훨씬 더 큰 권능으로 힘 있게 일하실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분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유언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하실 일을 제자들에게 모두 위임하셨습니다. 바로 이 위임하신 일을 하는 것이 생활 속의 부활입니다. 우리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 원래 죄인이고 다 지옥에 처해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와서 우리를 살렸고 대신 우리에겐 소명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다시 살았으니 부활이요, 다시 누리는 삶은 곧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모두들 살아야 할 이유가 됩니다. 가장 큰 사명은 우리가 살아난 것처럼 다른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 때문에 살아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살린다는 것,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 때문에 사람이 예수 믿고 영생을 얻는다면 가장 좋은 것이지만, 나 때문에 주변이 조금이라도 변하고, 나 때문에 공동체가 변한다면 그것 역시 살리는 일입니다. 조그마한 관심, 단 한 마디의 격려, 단 한 줄의 이 메일도 때로는 사명이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일,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요구하실 뿐입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사명이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부활의 세 번째 멧세지가 됩 됩니다. 반드시 주어진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떠나면 아니 됩니다.
여러분, 배가 해상에서 침몰하거나 항공기가 바다 등에 추락해 탈출할 때 누구를 먼저 구출해야 할까요. 선장도 항해사도, 기관사도, 어른도, 남자도 아닙니다. "여자와 어린이 먼저"입니다. 이 것을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이 전통은 162년 전, 1852년 영국 해군의 수송선 버큰헤이드호가 남아프리카로 가던 중 케이프타운 66km 전방에서 암초에 부딪쳐 침몰했습니다. 당시 승객들은 630명이었으나 구명보트는 60명을 태울 수 있는 단 세 척뿐. 180명밖에 구조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령관 시드니 세튼 대령은 주로 신병들인 모든 병사들을 갑판 위에 모이게 한 뒤 부동자세로 서있게 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3척의 구명보트에 태우게 했습니다. 여자와 어린이를 태운 3척의 구명보트는 침몰하고 있던 버큰헤이드호를 떠났고, 군인들은 세튼 대령의 명령에 따라 끝까지 움직이지 않고 서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령관 세튼 대령을 포함한 436명이 그대로 배와 함께 침몰을 했습니다. 그 이후로 "여자와 어린이 먼저"라는 전통이 세워졌는데, 그 배의 이름을 따서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배가 항해 도중 재난을 당하거나 비행기가 불시착을 할 경우 "버큰헤이드 호를 기억하라"는 전통은 이때부터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탈출과 구조의 불문율이 됩니다.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은 그로부터 얼마 뒤 다른 해상 재난사고 때 빛을 드러냅니다. 승객 1,515명을 태운 영국 수송선 엠파이어 윈드러쉬호가 알제리아 해안 77km 해역을 지나다 보일러가 폭발하는 화재로 인해 배가 가라앉을 위기에 처합니다. 역시 구명보트가 제한된 인원만을 태울 수밖에 없었고, 사령관이던 로버트 스코트 대령은 병사와 승객들을 모두 집합시켜놓고 일장 연설을 합니다."지금 우리는 버큰헤이드 연습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구명정을 지정 받을 때까지 갑판 위에서 움직이지 말고 서 계십시오!".엠파이어 윈드러쉬호 선상의 남자들은 한사람도 예외 없이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을 지켰고, 여자와 어린이가 구명보트에 다 타고난 이후 약간의 자리가 남았습니다. 스코트 사령관에게 "이제 누구를 태울까요?"라고 묻자 사령관은 이렇게 "물론 장례식 순서를 따라야지. 제일 젊은 사람부터!". 승객 1,515명 가운데 여자 125명과 어린이 87명, 병약자 17명이 먼저 탑승을 했고 구명보트의 마지막 빈자리는 스코트 사령관의 명령대로 젊은 순서대로 채워졌습니다. 군인과 연장자들은 배가 멀어질 때까지 부동자세로 선상에 서 있습니다. 구명보트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사령관은 병사와 선원들에게 바다에 뛰어들도록 지시를 하지만 겸하여, 절대로 구명보트로 헤엄쳐 가지 말라는 명령도 합니다. 얼마 뒤 인근 해역을 지나던 배가 와서 최후의 생존자까지 구출하기까지, 4시간 동안 단 한 사람도 구명보트로 헤엄쳐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천 명 이상이 숨질 뻔 했던 엠파이어 윈드러쉬호의 해난 사고에서 보일러 폭발 사고로 숨진 네 명의 보일러 기사 외에는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함장과 선장의 용기는 국격에 비례합니다. 그런데 한국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여객선 조난 사고 때문에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어린 학생들을 사지에 놔두고 선장이 먼저 탈출하다뇨. 세계 어느 나라든 선원법에 ‘선장은 위급시 승객과 승무원 전원의 하선을 확인한 후에야 내려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명예와 용기는 물론 의무마저 포기한 것인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선장 또는 함장의 용기는 국격을 드높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찌질이 선장은 나라에 망신을 안깁니다. 지난해 승객을 버리고 도망갔던 이탈리아인 선장 셰티노는 승객을 구호할 의무를 저버린 죄를 2,679년을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가 도망가던 당시 해안경비대장과 통화내용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탈리아의 국격을 완전히 떨어 뜨렸습니다. 셰티노 선장이 포기한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의 침몰로 사망한 사람은 32명입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놔두고라도 피지도 못한 250명 이상의 아이들을 뒤로 남긴 세월호의 한국인 선장은 어떨까요. 그는 살아도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어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상에서 긴급한 사고가 발생하면 선원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버큰헤이드호를 기억하라’. 타이타닉호의 침몰 순간에도 그랬습니다. 왜 그럴까요. 위험상황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부터 구출하는 위대한 전통의 시발점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도 사람들은 ‘버큰헤이드를 기억하라’는 귓속말을 나누며 여자와 어린아이를 먼저 구했습니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습니다. 일본의 이야기입니다. 때는 지난 1910년 봄, 일본에서 73톤에 불과하지만 최신형 군함 한 척이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제6호 잠수정. 사고 함정의 이름입니다. 미국에서 다섯 척을 직도입한 홀랜드급 잠수정을 가와사키 조선소에서 건조한 함정입니다. 미국제보다 신뢰성이 떨어졌어도 일본의 첫 국산 잠수정이었기에 우수인력들이 배치됐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두 번째 잠항훈련에서 6호정은 히로시마만의 16m 해저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침몰 이튿날 인양된 6호정은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14명의 승조원들이 흐트러지지 않고 자기 위치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정장은 사령탑에, 기관장교는 전동기 옆에, 조타병은 조타석에서 죽었습니다. 단 두 명 예외가 있었는데 함을 고치는 병사들이었습니다. 마침 영국 해군에서 동형의 잠수정이 침몰했을 때 먼저 탈출하려고 시신이 출입구에 엉겨붙은 채 발견되고 심지어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난투극까지 일어났던 터라 전 세계는 일본 군인들의 죽음 앞에 전율했습니다. 일각에서 조작설을 제기했으나 정장 사쿠마 쓰토무 대위의 유서 하나로 자취를 감췄습니다. 사고발생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두 시간 동안 그는 침몰 원인과 대응을 상황별로 기록했습니다. 975개 글자로 이뤄진 유언 중 가장 감명을 준 대목은 일본 국왕에 대한 탄원입니다. ‘폐하의 배를 침몰시키고 부하를 죽게 한 소관의 죄는 씻을 길이 없으나 승조원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나이다. 그들의 유족이 곤궁하게 살지 않기를 오직 바라나이다.’ 영국의 데일리 뉴스의 동경 특파원은 이런 기사를 타전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용감할 뿐 아니라 정신적ㆍ도덕적으로 빼어난 민족이다.’ 장엄한 죽음 앞에 각국의 황제와 국가 원수들의 조전이 쏟아지고 영국 해군의 교범에 6호정의 사례가 실렸습니다.
미국 의회 의사당에는 사쿠마 대위의 유서가 전시됐습니다. 일본을 ‘운 좋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아시아의 노란 원숭이’쯤으로 여겼던 구미 각국은 여기서부터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일본은 훈장과 특진, 영웅 칭호도 내리지 않았지만 위대한 자산을 얻었습니다. 국격이 높아졌습니다. 일본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선장이나 함장은 지도자입니다. 명예를 지키고 용기를 잃지 않는 지도자와 국격은 비례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함장을 볼 수 있을까요. 명예와 용기…. 남 탓할 것도 아닙니다. 친구를 그리며 우는 여학생의 모습을 보고 울컥하고 목도 메였지만 이 땅, 이 시대에 중년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여러분! 생사의 갈림길에서 버티게 해 주었던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끝이 아니고 신앙인에게 사명이 있음을 깨우쳐주기까지 하는 그 힘은 무엇입니까?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멧세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아야 그 책임을 다하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사명이 위기를 무릅쓰고 한 생명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힘이 됩니다. 이 사명을 통하여 전파된 복음은 분명히 오늘 현실에서 또 다른 생명을 살릴 것입니다. 2014년 부활절에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생활 중에 체험될 수 있는 일입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사명 따라 살 수 있습니다. 가정을 지키시고, 공동체를 지키시고, 여러분의 삶을 지키십시오. 그러면 그 열매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으로 축복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있는 자리에서 다시 시작합시다! 어제는 잊고 새로운 날들에 성실을 다하십시다! 사명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그만 사명부터 점차 큰일을 감당하고, 살리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는 것이 바로 부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런 부활의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내내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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