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10월14일 경기도
양주시의 어가행열(御駕行列)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웬 어가행열(御駕行列)이냐 하시겠지만
려말선초(麗末鮮初) 때는 왕찰(王刹)이었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함흥에서 돌아와 회암사에서 머물렀으니 태종
이방원이 어가행열을 했음직도 하고 궁의 고관대작들이 단시간도
멀다하고 소통했음을 짐작해보면 가능하리란 생각을 하게됩니다.
회암사(양주)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天寶山) 남쪽 기슭에 있는 회암사(檜巖寺)는
1328년(충숙왕15)에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
화상이 인도의 나란타사(那蘭陀寺)를 본떠서 창건한 266칸의 대규모
사찰이었다.고려 말의 대유학자 목은 이색(李穡)이 지은 천보산
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 의하면 서천(西天) 108대
조사라는 지공(指空)화상이고려에 와서 머물고 있을 때, 이곳 천보산
을 지나가다 인도 최대의 불교대학이 있던 나란타사(那蘭陀寺)의
지세와 같은 삼산이수(三山二水)가 갖춰져 있으니 이곳에 큰 절을
지을 만하다고 생각하여 지공의 법통을 이은 나옹선서가 이곳에
대찰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1374년(공민왕23)에 나옹대사에 의해 대대적인 불사가 시작
되었고 1376년(우왕2)에 나옹이 입적하자 그 문인인 각전(覺田) 등이
마무리 지었는데, 전각이 모두 262칸이었고 모셔진 불상도 15척
짜리가 7구나 있었고 관음상도 10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의 회암사는 크고 웅장하고 아름다웠고, 이 모습은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이와 같이 나옹에 의하여 우리나라
제일의 사찰이 되었으나 그 역사는 나옹(1320~1376)이 머물기
오래 전부터 있어 오던 사찰이었다. 즉 《동국여지승람》권11의
양주 회암사조에 의하면 1174년에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와 왔던
적이 있으며,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가 1313년에 13살
의 나이로 회암사 광지(廣智)선사에게 출가했음을
그의 비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옹 또한 20세에 출가한 후 25세 때인 1344년(충혜왕 복위
5)에 깨달음을 얻었던 곳도 바로 이 회암사였던 것이다. 요컨대 나옹
말년인 1370년에 창건된 것이 아니라 이미 12세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나옹과 그 문인에 의하여 회암사가 국가와
왕실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의 사찰로 새롭게 발돋움했던 것 또한 사실
이다.나옹에 의한 불사가 이루어진 이후 고려 말 조선 초에 왕실의
원찰이자 국가의 중심사찰로서의 구실을 해왔다. 특히 태조는 무학을
이곳에 머물게 하고 자신도 자주 왕래하였으며 많은 토지를 내리기도
하였다. 세종 대에도 선종에 속한 사찰 가운데 승려와 전답이 가장 많은
사찰로 진관사(津寬寺)와 함께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후 성종 때에
한차례 중수가 이루어졌다. 김수온(金守溫)이 쓴 <회암사중창기에
의하면 1472년(성종 3)에 세조 비인 정희(貞熹)왕후의 발원으로 정현조
(鄭顯祖)로 하여금 새로 지은지 100여년이 되어 퇴락한 절을 중수케
하였다고 한다. 이에 정현조는 정양사(正陽寺) 주지 처안(處安)과
더불어 널리 승속을 모아 13개월 만에 절의 면모를 일신하는
대중창 불사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억불숭유정책이 심화되면서 절은 여러 차례
유생의 상소와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명종의 어머니이자
중종의 비였던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가 선교양종을 다시 복구
하고 승과를 실시하는 등 허응당 보우(虛應堂普雨, 1515~1565)를
내세워 불교중흥을 꾀하여, 1565년(명종 20) 이곳에서 보우와
함께 대설무차대회(大設無遮大會)를 여는 등 한때 번성하였으나
문정왕후가 죽고 보우마저제주도로 유배되어 피살됨으로써 퇴락
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즉 나옹 이후 200여 년간 동방 제일의
대가람이었던 회암사는 보우의 피살과 함께
폐사의 길로 치달았던 것이다.
19세기에는 넓디넓은 절터에 남아 있던 지공과 무학의 부도와 탑비
마저도 훼손을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즉 1821년(순조 21)에 광주
에 사는 이응준(李應峻)이란 자가 술사(術士)인 조대진(趙大鎭)의
말을 듣고 이곳 법당자리로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지공과
무학의 부도와 탑비를 헐고 깨뜨려버렸던 것이다. 이에 경산(京山)
의 각 사찰의 납자들이 유생 이응준의 폭거에 항의하고 삼화상
(三和尙) 부도 옆에다 현존의 큰 방을 지어 부도를 수호하게 하는
동시에 그 것이 옛 회암사의 후신임을 표명하기 위해
회암사라 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1828년에
탑비와 부도를 다시 세웠다는 내용은 현존 무학대사비 음기에 나와
있다. 또한 운허용하(耘虛龍夏)스님의 <천보산회암사대웅전창건기에
의하면 1828년에 탑비를 다시 세우면서 조그만 암자를 지어 가람을
수호하고 옛 회암사를 잇게 했으며, 1849년 몽성(夢惺)화상이 중건
하고, 1922년에는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화상이 새로 보전
대웅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나옹·무학 등
세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양주 회암사 제1부) 양주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天寶山) 남쪽 기슭에 있는 회암사(檜巖寺)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인도의 고승 지공 화상이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와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건설한 266칸의 대규모 사찰이었다.
1378년(우왕 4) 나옹(懶翁)이 중건하였고, 조선 성종 3년(1472)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삼창 되어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번창하였던 국찰이었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각별한 관심으로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례하게 했으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회암사에서 수도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 회암사지
그러나 태조 이성계 이후 성종 3년(1472) 정희왕후가 하성부원군 정현조를 시켜 중창시켰으나,
당시 억불숭유정책이 심화되면서부터 회암사는 여러 차례 유생의 상소와 함께
특히 명종 때 불교를 중흥하려던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보우대사가 제주도로 유배된 이후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이후 보우대사가 유배지에서 피살되고
덩달아 회암사 승려까지 미움을 받게 되니 200여 년 동안 번성하던 회암사는 빈집이 되어 버렸다.
이때부터 점차 퇴폐해지기 시작하여 어느 때인지 모르게 풍상과 함께 회암사는 인멸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말에는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고 조선 초기 최대 왕실 사찰이던 회암사 터에 세워진
양주시에서 건립한 양주시립 화암사지 박물관은 회암사지 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
연구하여 전시를 통해 다음 세대에 교육하고자 건립한 역사유물 박물관이다.
현재도 발굴이 진행 중인 회암사는 대규모일 뿐만 아니라 궁궐과 닮은 건축 방식이 특징이다.
▼ 양주시 행사 "어가행열"
물방아고향
최치수:작사 이철혁:작곡 배 호:노래
물방아 고향싫어 모두 떠나도
나홀로 남아살자 초가삼간에
옥같이 기름진땅 내가 다듬고
얼룩소 논밭갈아 씨를 뿌리며
한평생 살고지고 물방아 고향
흙냄새 풀냄새를 맡고 살아도
나혼자 지키련다 꽃피는 마을
청대숲 화전밭을 내가 가꾸고
시냇가 언덕에서 풀피리 불며
희망에 살고지고 물방아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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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2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