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몽집 제2권 / 묘지(墓誌) / 정엽(鄭曄) 저
선조고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부군 묘지
(先祖考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府君墓誌)
공의 휘는 선(璇)이고 자는 중온(仲溫)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증조 휘 윤신(允愼)은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지냈으니, 바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휘 발(發)의 장남이다. 조부 휘 전(詮)은 순천 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를 지냈다. 선고(先考)는 증(贈)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휘 희년(煕年)이고 선비(先妣)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관찰사 사건(思謇)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집안에서 잘못한 일이 거의 없었고 부모를 섬김에 조금도 그 뜻을 어긴 일이 없었다. 부모가 돌아가시고는 계씨(季氏)와 함께 살았는데 시종일관 흠잡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온 집안사람들 중 교화하기 어려운 자일지라도 공에게는 모두 기뻐하며 복종하였다.
병이 심해졌을 때는 앉고 누울 때에도 남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였으나, 미천한 자라도 보면 반드시 일어나 앉아서 용모를 단정히 하였다. 효성스럽고 우애 있는 행실과 공경하고 삼가는 덕은 잘못을 바로잡는 학문의 도움이 없이도 그렇게 된 것이니, 바로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신년(1512, 중종7)에 태어나서 임자년(1552, 명종7)에 졸하였으니 춘추가 겨우 마흔하나였다. 그 덕을 드러나지 않게 한 데다 수명마저도 짧게 하였으니 하늘은 진실로 무슨 마음이신가. 공은 장단 김씨(長湍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창신교위(彰信校尉) 숙담(淑淡)의 따님이다.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 유성(惟誠)은 나의 선고이니 성균관 진사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차남은 관례하기 전에 요절하였다. 판서공에서부터 나의 아들 생원 원석(元奭)에 이르기까지 삼대가 모두 독자이다. 딸의 출가에 대해서는 판서공의 묘지에 기록되어 있다.
부인 김씨는 엄중하면서도 덕량이 있었으며 견식과 사려도 높고 깊었다. 기축년(1589, 선조22)과 경인년(1590) 사이에 나라에 난리가 있을 줄 알아서 온 집안에 병화(兵禍)를 피할 계책을 마련하도록 경계하고 매번 하늘에 빨리 죽게 해 달라고 빌었다. 신묘년(1591) 겨울에 가벼운 질환으로 돌아가셨으니 승지공이 돌아가신 지 40년 뒤의 일이었다.
승지공의 묘가 양주(楊州) 풍양(豐壤) 봉곡리(蜂谷里)에 있었는데, 부인이 졸한 다음 해인 임진년(1592) 3월에 광주(廣州)의 강가로 옮겨 합장하였다. 하관이 끝나자마자 왜적이 삼도(三都)를 짓밟음에 따라 세족(世族)이 거의 다 병화를 입으니, 가족과 친척들 모두가 부인의 앞을 내다본 밝은 식견과 부인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에 대해 감복하였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 9월에 승지공 및 부인의 묘를 모두 옮겨 다시 양주 치소 서쪽 장흥리(長興里)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함께 장사 지냈으니 선조 지중추부사공의 묘가 있는 곳이다.
만력 47년(1619) 9월 일에 손자 모(某)는 삼가 쓰다.
ⓒ한국고전번역원 | 서혜준 엄태식 정하정 최소영 최승주 (공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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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先祖考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府君墓誌
公諱璇。字仲溫。籍草溪。曾祖諱允愼。坡州牧使。卽知中樞府事諱發之長胤也。祖諱詮。順天都護府使。考贈通禮院左通禮諱煕年。妣驪興閔氏。觀察使思謇之女。公自少至長。居家少過差。事親無毫髮違其意。親沒與季氏同居。終始無間言。一家之人。雖有難化者。於公則無不悅服。及其病革。坐臥須人。而見微賤者。亦必起坐斂容。孝友之行。敬謹之德。不待學問矯揉而然。蓋出於天性也。生於壬申。卒於壬子。春秋僅四十一。旣晦其德。又嗇其年。天實何心。公委禽于長湍金氏。彰信校尉淑淡之女也。生二男。長惟誠。卽某先考。成均進士。今 贈吏曹判書。次未冠夭。自判書公至某之子生員元奭。三世皆獨子。女出載判書公墓誌。夫人金氏。嚴重有德量。識慮且高遠。己丑庚寅間。知國家有難。戒一家爲避兵計。每祝天願速死。辛卯冬。以微疾卒。蓋後承旨公四十年也。承旨公墓在楊州豐壤蜂谷里。夫人卒之明年壬辰三月。遷之廣州江上合窆焉。纔塴。倭寇躪三都。巨室罹鋒刃殆盡。門親莫不服夫人先見之明所願之符也。戊申九月。
幷遷承旨公及夫人之墓。復同壙于楊州治之西長興里卯坐酉向之原。從先祖知中樞府事公之兆也。萬曆四十七年九月日。孫某謹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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