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요약]
■최영경(崔永慶)
1529년(중종 24) - 1590년(선조 23) / 향년 62세
조선 전기에, 기축옥사로 인해 정여립과 함께 역모를 꾸민 주동자로 무고되어 처형된 학자로,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 서울 출생. 전라도관찰사 최중홍(崔重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교하현감 최훈(崔壎)이고, 아버지는 병조좌랑 최세준(崔世俊)이다. 어머니는 현감 손준(孫濬)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질을 보였으며, 여러 번 초시에 합격했으나 복시(覆試)에서 실패하였다. 학행으로 1572년(선조 5) 경주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고, 연이어 수령·도사·장원(掌苑)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당시 안민학(安敏學)이 자주 찾아와 정철(鄭澈)을 칭찬하고 만나볼 것을 권했지만, 단호히 거절하였다. 1575년 선대의 전장(田庄)이 있는 진주의 도동(道洞)으로 은거하였다. 마침 나라에서 사축(司畜)에 제수하고 그를 부르자, 잠시 나가 취임했다가 곧 그만두었다.
정구(鄭逑)·김우옹(金宇顒)·오건(吳健)·하항(河沆)·박제인(朴齊仁)·조종도(趙宗道) 등과 교유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1576년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창건하여 스승 조식을 배향하였다. 이듬해에는 외아들 최홍렴(崔弘濂)이 죽는 불행을 겪었다. 1581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이 상소에서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다.
1585년 『소학』·사서(四書)의 언해를 위한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90년 정여립 역옥사건(鄭汝立逆獄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유령의 인물 삼봉(三峯)으로 무고되어 옥사(獄死)하였다. 당시 정적 정철과의 사이가 특히 좋지 않아 그의 사주로 죽은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1591년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대사헌에 추증되고, 사제(賜祭)의 특전이 베풀어졌다. 1611년(광해군 3) 산청의 덕천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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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집 제13권 / 비문(碑文)
수우당 최공 묘갈명(守愚堂 崔公 墓碣銘)
공의 휘는 영경(永慶)이고 자는 효원(孝元)이며 본관은 화순(和順)인데 참의(參議)에 추증된 원지(元之)의 후손이다. 증조부 휘 중홍(重洪)은 전라도 관찰사였으며 증조모 정부인(貞夫人)은 현풍 곽씨(玄風郭氏)이다. 조부 훈(壎)은 언양 현감(彦陽縣監)이며 조모는 숙인(淑人) 진주 강씨(晉州姜氏)이다.
부친 세준(世俊)은 병조 좌랑이며 모친은 공인(恭人) 평해 손씨(平海孫氏)로, 찬성(贊成) 문정공(文貞公) 순효(舜孝)의 손녀이자 현감 준(濬)의 딸이다. 공은 가정(嘉靖) 기축년(1529, 중종 24) 7월 16일 갑자일에 출생하였는데, 날 때부터 특출하여 우뚝이 두각을 나타내니 관찰공(觀察公)이 매우 사랑하였다.
성장해서는 입에 속된 말을 담지 않았고 걸음걸이에도 법도가 있었으며, 행실이 엄정하여 구차스럽게 사람들과 영합하지 않았다. 일찍이 어떤 사람과 사귄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외척과 교분이 두터워 당시에 이름이 나게 되자 교제를 끊었다.
권세를 좋아하는 사람이 간혹 사람을 보내 만나보려 하기도 했지만, 마치 자기 몸이 더렵혀질 것처럼 손사래를 쳤다. 일찍이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사직하는 소를 올렸다. 그 중에 “현명하게 기미를 살피고 위엄으로 눌러서, 편당을 짓는 무리들이 흉악한 생각을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라는 등의 말이 있어서 당시 무리들이 크게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는데, 결국 비도(非道)로 무고를 당하여 위관에게 문초를 당했다.
임금이 현명하고 신중하여 특별히 용서를 받았으나,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의 악행은 끝이 없어서 끝내 자기들이 마음먹었던 대로 하고자 했기에 마침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돌아갔다. 아! 선비에게는 나쁜 무리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지조가 있기에, 하늘은 그가 뜻을 확고히 세울 수 있도록 허여하였는데 사람이 그를 죽이고야 말았으니 이것은 유독 무슨 마음에서인가? 비록 선생을 죽일 수는 있었으나, 끝내 죽일 수 없는 것이 남아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공의 인의(仁義)는 천성이라서, 살아 계신 부모를 섬기고 죽은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에 공경과 효성을 다하였으니 사람들이 흠잡을 수가 없었다. 일찍부터 스스로 고상한 경지를 추구하여, 속습을 벗어났고 명리에 초연하였으며, 가난에 처해서도 걱정하지 않았고 뜻을 지키며 스스로 확신을 가졌으니, 천하 만물도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지조를 바꿀 수가 없었다.
글을 보되 자기에게 절실한 부문에 힘썼을 뿐 문장 꾸미는 것은 일삼지 않았으며, 말과 행동이 은연중에 도에 부합하였으니 옛사람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일찍이 남명 선생께 집지하고 문인이 되었는데 남명 선생이 돌아가시자 스승을 위해 사우(祠宇)를 세우고, 진양(晉陽)에 터를 잡아 그곳에서 노년을 보냈다. 옥에 갇혀 있을 적에는 매일 반드시 대궐을 향하여 앉았는데 잠시도 변함이 없었으며, 담소하는 것도 평일과 같아서 어떠한 기미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유사가 기어이 죄를 얽어매려고, 위협하여 욕을 보이기도 하고 무고와 날조도 자행하였으나 공은 태연한 모습으로 개의치 아니했으며 논변하고 대답하는 것이 조금도 궁색하지 않았다. 어떤 심문관은 “이 사람은 생사를 도외시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부리던 종들 몇몇도 체포당했는데, 어떤 사람이 “종들이 문초 당할 때 해야 할 말을 상세하게 가르쳐주십시오.”라고 하였더니, 공은 정색하고 “저들이 응당 할 말을 할 텐데, 내가 어찌 관여하겠느냐.”라고 하면서 끝내 그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의금부 옥사 감방에는 수직(守直)이 있었는데, 제아무리 신분이 높은 벼슬아치가 갇혔다 해도 능멸하고 기를 꺾는 데는 눈치를 보거나 꺼리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공을 대할 때는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마치 선량한 종이 엄한 주인을 섬기듯 하였으니, 이 역시 공의 풍모가 어리석은 무리들을 절로 감동시킨 것이다.
아! 공이 끝내 죽음을 면하지 못한 것은 사람 때문이지 하늘 때문은 아니니, 하늘은 실로 이치에 벗어나지 않았으나 사람이 끝내 함정에 빠트린 것이다. 공이 감동시킨 것은 하늘이요 공이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은 사람이니, 군자가 사람을 어쩌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도다.
임금께서 누차 부르셨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는데 오직 사축에 대해서만은 사은숙배하고 돌아갔다. 공이 돌아가자 명철하신 임금께서는 사정을 훤히 살펴서 흉도들의 관직을 삭탈하여 쫓아내었고, 애도를 표하여 시호를 내리는 한편 관작을 추증하고 제사를 내렸으며 그 가족을 진휼하였다.
아! 사람들이, 죽이더라도 뜻을 빼앗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끝내 어찌 할 수 없었다. “가리개를 잃었으나 7일이면 얻으리라.”라고 하였으니, 공이 하늘을 감동시켰다는 것은 믿을 만하다. 공이 종실(宗室) 화암 부수(花岩副守) 억세(憶歲)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홍렴(弘濂)을 낳았으나 공보다 먼저 요사(夭死)하였고, 소실(小室)이 1남 2녀를 낳았는데 왜구가 포로로 잡아 갔다.
강극신(姜克新) 군은 공과 가장 친했으며 또 가르침을 받았기로, 묘에 비를 세워 사적(事迹)을 기록하고자 하니 사우(士友)들이 힘을 모아 서로 도왔다. 보잘것없는 내가 공을 안다고 하여, 거칠고 변변치 못하다고 해도 듣지 않고 억지로 비문을 청하기에 사양하다 못해 명(銘)을 쓴다.
목암에 / 木之岩
언덕을 다듬었으니 / 營丘岡
네 척의 봉분은 / 四尺封
공의 무덤이라네 / 公之藏
몸은 죽을지라도 / 身可死
지킨 바는 더욱 빛나 / 守益光
이곳에 비를 세우니 / 石于此
유풍이 절로 전해지리라 / 風自長
<끝>
[각주]
[주01] 순효(舜孝) : 손순효(孫舜孝, 1427~1497)로, 본관은 평해, 자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齋)ㆍ칠휴거사(七休居士)이다.
1453년(단종1)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술로 《물재집》이 있다.
[주02] 관찰공(觀察公) :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증조부 중홍(重洪)을 가리킨다. <끝>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김익재 양기석 정현섭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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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守愚堂崔公墓碣銘
公諱永慶。字孝元。和順人。贈參議元之之後也。曾祖諱重洪。全羅道觀察使。曾祖妣貞夫人玄風郭氏。祖壎。彦陽縣監。祖妣淑人晉州姜氏。考世俊。兵曹佐郞。妣恭人平海孫氏。贊成文貞公舜孝之子縣監濬之女。公以嘉靖己丑七月十六日甲子生。有異質。嶄然出頭角。觀察公奇愛之。旣長。口無俚近語。步趨有法度。制行峻整。與人不苟合。嘗與人遊從。其人與戚里交厚。有時名。絶之。有嗜權樂勢者。或勉使相見。掉臂若將浼。嘗以持平召不就。上辭職疏。其中有明以燭幾。威以鎭之。使偏黨之徒。不得肆其胸臆等語。大爲時輩噎唱。畢竟誣以非道。問于廷尉。宸衷明愼。特蒙渙宥。奸兇罔極。必欲甘心。竟不得以大耋終焉。嗚呼。士有不羣之操。天與其樹立。人心殺越之。此獨何心。雖能殺越。終不以殺越者存。庸非天乎。公仁義性於天。事生喪死。致敬致孝。人無間然。早自高蹈。於俗習蛻如也。於聲利超然也。處約而不悶。有守而自信。天下萬物。無足以動其心易其操者。看書切己。不事文藻。言行暗與道合。無愧古人。嘗執贄見南冥先生。先生卒。爲立祠宇。莵裘晉陽老焉。及在幽繫中。日必面闕而坐。未嘗頃刻變。談笑如平日。無幾微見焉。有司必欲及之。恣威辱誣揑。公怡然不以爲意。辨對不小拙。有一問事卽言。此人能置死生於度外。不可及也。蒼頭數輩亦被逮。或曰蒼頭當置辭。請詳指敎。公正色曰。自當爲辭。我何與焉。終不與之相近。王獄間有直。雖薦紳囚繫。其凌挫無顧忌。事公虔。若良奴僕事嚴主。此亦公風神。自有感動頑類者。噫。公之終不免者人。非天也。天實理之。人卒陷之。公之所動者天。公之所不能者人。君子之不能於人。久矣。累徵皆不起。獨於司蓄。拜謝而歸。公歿。离明洞燭。削黜兇徒。隱卒崇終。贈之爵。賜之祭。恤其孥。噫。人於不可得以殺越者。終不容如何。喪茀而七日得。公之動乎天者孚矣。公娶花巖副守億歲之女。生子弘濂。先公夭。旁室生一男二女。遭倭寇擄焉。姜君克新。於公最親且受學。欲其墓著其跡。士友出力相助。謂無狀知公。不聽荒頓。強爲之請。辭不獲。銘曰。
木之巖。營丘岡。四尺封。公之藏。身可死。守益光。石于此。風自長。<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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