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5. 10. 9. 07:54
■ 권업회(勸業會)의 창립
니콜리스크로 추방된 이상설은 7개월간의 유형생활 끝에 1911년 5월 18일 석방되어 블라디보스톡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이상설을 비롯한 러시아의 한인민족운동 지도자들은 현실적이고도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상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1911년 6월 1일 ‘조국독립’을 최고이념으로 하는 자치결사로 권업회(勸業會)를 발기했다. 이 날의 권업회 발기인대회에서는 최재형이 회장, 홍범도가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한인세력의 파쟁은 권업회의 조직과 인가과정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1911년 6월 21일의 ‘정순만 피살사건’으로 기호파(畿湖派-경기, 충청, 호남)와 서도파(西道派-평안도, 황해도)가 대립하자 정재관과 이강이 치타로 피신했다. 주1)
또 이상설의 기호파와 이종호(李鍾鎬=의 북도파(北道派/대한제국 탁지부 대신과 내장원경을 역임한 李容翊의 손자) 간에도 갈등이 노골화되면서 양 세력은 ‘권업회’라는 이름으로 각각 러시아 당국의 인가를 신청하기도 했다. 결국 러시아 관헌들이 이상설과 이종호를 ‘소집하고 조화하기를 권고’해 양측의 적대적 관계를 타협 조정했다.
이어 이상설이 치타에 있던 정재관을 오게 하여 서도파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권업회는 가까스로 3파간의 연합을 달성했다. 한편 러시아 당국의 권업회인가는 미국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국민회일부지도자들의 친미반로적(親美反露的) 경향을 견제하기 위한 러시아의 정책적 결과이기도 했다.
마침내 1911년 12월 17일,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에서 공식적인 권업회창립대회가 열렸다. 이날의 공식총회에서는 조직이 회장제에서 총재제로 바뀌면서 유인석이 도총재(都總裁), 김학만·최재형·최봉준이 총재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권업회의 실질적인 책임기관은 의사부(議事部)에 있어, 의사부의장으로는 이상설, 부의장에 이종호, 교육부장에 정재관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처럼 권업회는 연해주 한인의 3파 정치세력이 대동단결해 하나로 전화(轉化)된 기관이었다.
●권업회, 광복사업의대기관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한인사회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실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면서, 조국독립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다. 회의 명칭을 ‘권업(勸業)’ 이라 한 것은 ‘왜구(倭仇)와의 교섭상 방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실제적 ‘광복사업의대기관’으로 조직했다.
한편 재러 한인들은 곤다찌 총독의 부임기회를 이용해 권업회를 조직했다. 주2)
그러나 그 조직은 러·일간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면적으로는 독립운동단체라고 하더라도 표면적으로는 정치적인 색채를 띠어서는 안 되었다.
그럼에도 권업회 같은 성격의 독립운동 단체는 러시아에서도 탄압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일본과 부드러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러일전쟁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적대감정이 항상 남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당국에서도 한국인들이 겉으로는 실업이나 교육을 표방하더라도 안으로는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또 러시아당국은 한인을 전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한인조직이 이루어지기를 내심 기대했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서 효과적으로 한인을 관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 러시아 원동총독 곤다찌 역시 이러한 사정을 알고 권업회를 인가했고, 곤다찌 자신도 명예회원으로 가입했다.
창립이후 권업회는 우수리스크‧하바로프스크‧ 니콜라예프스크‧ 이만등지를 비롯한 연해주 각처에 지회와 사무소를 두면서 한인사회를 효과적으로 조직했다. 사업진척에 따라 회원 수도 크게 늘어 1913년 10월경에는 총 회원이 2,600여명, 1914년 무렵에는 8,579명에 이르렀다.
●권업신문의 창간
한편 권업회의 주요사업가운데 하나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한인신문을 발간하는 일이었다. 신문간행은 러시아 한인사회의 숙원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권업회는 청년근업회가 발간하고 있던 <대양보>를 인수해, 1912년 4월 22일 <권업신문>을 창간했다.
처음에 <권업신문>은 일제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 발행인을 러시아인으로 하고, 초대주필 신채호를 비롯해 이상설 ‧ 김하구 등이 교대로 주필을 맡았다. 신문사는 취재를 위해 북간도지역과 국내에도 파견원을 보냈으며, 연해주일대는 물론 간도와 미주지역까지 신문을 발송했다. 하지만 3년간 총 126호가 발행된 <권업신문>은 1914년 9월, 권업회의 해산과 함께 러시아정부로부터 발행금지를 당했다.
●권업회의 해산
권업회는 러시아한인들의 경제력이나 민권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권업회내부에서 각 정치세력이 자체의 조직적 독자성을 폐기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권업회는 각파 정치세력의 연합기관으로서 외형상의 통일을 유지했지만, 간간이 각파간의 긴장과 알력이 드러났다.
따라서 이러한 파쟁의 심각성을 인식한 각 지도자들은, 1913년 9월 초에 회합을 갖고 파쟁을 중단하면서 일치행동으로 나갈 것을 합의했다. 1913년 10월에는 이동휘가 블라디보스톡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권업회내부에 대동단결의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어 1913년 10월 19일 열린 특별총회에서 이상설은 <권업신문>의 사장 겸 주필직을 맡았으나 곧 사퇴한다. 그리고 이후 권업회는 이종호와 이동휘가 주도해나갔다. 하지만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권업회는 위기에 직면했다.
1914년 8월 1일에는 러시아당국이 블라디보스톡에 계엄령을 포고했다. 그러자 권업회는 러시아 정부의 전쟁 노력에 적극지원활동에 나섰다. 8월 6일 권업회 하바로프스크 지부에서는 러시아의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회를 개최하고 헌금도 모금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이 됨으로써 권업회의 주도로 추진된 한인들의 모든 활동은 일시에 중단되었다. 그리고 8월 20일에는 연해주 군정순무사가 권업회의 해산과 함께 36명의 한인지도자들에게 48시간 내에 러시아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1911년 이후 3년간 러시아의 한인사회를 지도하면서 광복사업을 추진한 권업회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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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1910년대 러시아지역의 한인독립운동은 크게 두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한 지역은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 하바로브스크 등을 포함하는 연흑룡주(沿黑龍州) 지역이며, 또 한 지역은 치따, 이르꾸쯔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자바이칼(Transbaikal) 지역이다.
실제로 구한말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자바이칼지역에서도 활발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미주에 본부를 두고 있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시베리아지방총회다.
*주2)
1911년 한인들에 대하여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곤다찌가 연흑룡주(沿黑龍州)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총독은 지역전반에 대한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한인들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갖고 있는 인물이 총독으로 부임하는가 하는 점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새로이 부임한 곤다찌는 1909년부터 1910년에 걸쳐 한인들이 정착하고 있는 아무르지역을 조사하였던 인물로 한인들에 대해 나름대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즉 그는 한민족의 토착성과 임지개간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또 정부가 이들을 귀화시키고 병역의 의무를 부과한다면 러시아화는 어렵지 않다고 보았다.
한편 한인의 질 높은 노동력을 이용해 극동 노령을 개발하고 반일민족운동을 지원함으로써 한민족을 완전히 그의 통제권 안에 넣어 후일 대일복수전에서도 효과적으로 한인들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점은 연해주 군지사가 권업회 의회의 의결 사항을 그에게 보고하도록 권업회 회칙에 명문화시키고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이었던 곤다찌는 부임한 후 1911년 3월 23일에는, 1910년 7월에 발표된 외국인 노동자 고용금지안을 철폐했다. 또 1909년 이래 금지되었던 한인들의 금광취업을 귀화신청을 제출한자에게는 허락하는 등 한인들에 대한 유화정책을 적극 전개했다.
-와다 하루키, <소비에트 극동의 조선인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