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5. 10. 29. 06:13
■ 경주이씨 유래
시 조 명 |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 |
시조유래 | 기원전 117년 한무제 원수6년 갑자에 하늘로부터 진한 땅의 표암봉인 박바위로 처음 내려오셨고, 양산촌장으로서 부족들을 다스리며 혁거세를 양육 시켰고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시는데 6부 촌장의 의장으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제도를 시행하셔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 시키신 선구자였음을 호언 할 수 있다.
서기 32년 신라 3대왕인 유리왕 9년에는 진한 6촌을 6부로 개칭할 때 지금의 경주시 일원에 해당되는 양산촌의 급량부라 부르고 성씨를 이씨(李氏)라고 사성 하였으니 경주라는 지명을 붙여서 경주 이씨(慶州李氏)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신라건국(新羅建國)의 모체(母體)인 사로(斯盧)의 6부(六部) 중 알천양산촌(閼川陽山寸)을 다스렸다. |
본관 창성유래 | 우리나라 대다수 이씨(李氏)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진 경주 이씨는 신라 말에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의 이거명(李居明)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대체로 고려 초기(高麗初期)에서부터 훌륭한 인맥(人脈)을 형성하여 벌족(閥族)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조선조에 와서도 수많은 명현(名賢)과 학자를 배출시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지위를 굳혔다. |
지명유래 |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 · 사로(斯盧) 사라(斯羅)로 하고, 수도(首道)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 (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 되었다. |
▲표암전((瓢巖殿) / 所在地 : 慶尙北道 慶州市 東川洞 산 16번지
西紀1917年丁巳 2月27日 創建發起하여 期成會를 結成하고 8年에 걸친 공사로 江原道 강릉에서 大關嶺 白松을 水運하여
建立, 서기 1925년 乙丑에 竣工되었고 1971年에 重修하였다. 매년 3월 중정(中丁)에 시조 향사(享祀)를 모신다.
▲시조 탄생지 광림대(光臨臺)
▲시조 탄강지 표석비
■ 신라 좌명공신 급량부대인 이알평 유허비
(新羅 佐命功臣 及梁部大人 李謁平 遺墟碑)
삼가 살펴 보건데 경주이씨 옛 족보에「시조의 이름은 알평(謁平)인데 진한(辰韓)의 표암봉(瓢巖峰), 아래에서 처음 내려왔다」하였으니, 처음 내려 왔다함은 탄생(誕生)을 말한 것이다.
시(詩傳)에 유악강신(維嶽降神)하야, 생보급신(生甫及申), 이로다.
생각 컨데 묏부리가 신을 내려서 보아 신을 낳았도다.
묏부리의 제사를 잘 지내면 감동하여 좋은 아들을 낳는다고 생각 하였다.「보는 보(甫)의 제후인 후작 보후(甫侯)이고 신은 신(申)의 제후인 백작 신백(申伯)을 의미한다.」라고 하였으니 소자첨(蘇子瞻 :소동파의 자)이 신(申)과 여(呂:甫를 말함, 甫라고 부르기 전에는 呂라고 불렀음)가, 다 묏부리에서 내려 주엇다고 하였으니 옛날이나 현재나 그 전해지는 것이 거짓이 없을 것이다.
대개 뫼가 높고 신령이 맑아서 그 기운이 정수를 모으고 영채를 길러서 철인(哲人)을 낳는것은 이치의 필연적인 결과인데 유독 우리나라 동경지(東京誌)에만 육부(六部 : 경주이씨 세보 서문을 보라)의 대인들이 다 하늘에서 강생 하였다고 기록 하였으니 이상한 일이다.
신인이 태백산단목(太白山檀木), 아래에 강생하여 단군이 되었으니 나정부(羅井部)의 알에서 나온 사람이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느니 하는 등의 말이 옛날부터 전하여 이어왔다.
이것은 내려오는 전설의 말이어서 의심할 것인가 믿을 것인가 하는것은 물론 단정짓기 어려운 일이나, 오직 이 표암일구(瓢巖一區)가 급량 대인(及梁大人)의 유허(遺墟)로서 우리 이씨의 근본이 되는 땅이라고 하는 것은 명백하다.
시조(始祖) 이래로 덕(德)을 쌓고 인(仁)을 쌓아서 여경(餘慶)이 자손에게 미쳐서 신라와 고려 사이에 높은 관작(官爵)이 연이어 왔고 이름있는 선비가 잇달아 왔다. 우리 조정(朝廷 : 조선국)에 들어와서 가지가 뻗고 파가 갈리어 자손이 여러 수십만이 되어 혹은 재상(宰相)이 되고 혹은 정경(正卿 : 판서), 아경(亞卿 : 참판)이 되어 대대로 아름다움을 이루어서 二千年 동안에 빛나고 커서 우리 동방(東邦)의 명망있는 씨족이 되었다.
이것은 오직 급량공(及梁公)의 음덕이 도와주고 덮어준데 의한 것이다. 금오산(金鰲山)기슭 어느곳이 우리 시조의 묘소인지 연대가 오래되고 문헌도 증빙 할바가 없으서 마침내 실전하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자손들이 추원(追遠)하고 사모하는 바는 오직 표암만이 그대로 있다. 丁未 1837년(憲宗 1)에 후손 집성(集星)이 영양(永陽)군수가 되었을때 표암위에 새겨 표지 하였다.
여러 경주의 자손들이 이것만으로는 유적을 천양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돌을구하여 구륭형(穹隆形)의 비(碑)를 표암 아래에 세우려 한다. 종인(宗人), 요신(堯臣)이 비로소 와서 나, 경일(敬一)에게 비문 쓰기를 요청하였다.
내가 생각컨데 이 일은 여러 일가들과 상의하지 않으면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을것 같으나 그 근본을 잊지않는 다는데 대개 같을줄 안다. 비를 세운 뒤 영구히 보호하여 아이들로 하여금 두드려서 모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것은 경주에 사는 여러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다.
후손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 원임 좌의정(原任左議政 : 원임은 전직이라는 뜻임), 오은군 (鰲恩君) 경일(敬一)은 글을짓고,
정헌대부 형조판서(正憲大夫 刑曺判書)겸, 경연(經筵) 춘추관(春秋館)의 지사(知事), 오위 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官) 집두(集斗)는 삼가쓴다.
본 유허비는 병인(丙寅) 1806년 9월에 세우다.
◇도 검(都 檢) : 전장령(前掌令) : 이진택(李鎭宅)
◇유 학(幼 學) : 이증규(李增奎)
◇감역유사(監役有司) : 이형묵(李亨默), 이규태(李奎泰)
◇각자유사(刻字有司) : 이경춘(李景春).
◇감관(監官) : 절충(折衝) 이중인(李重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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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新羅佐命功臣及梁部大人李公諱謁平遺墟碑
謹按慶州李氏舊譜曰 始祖諱謁平初降辰韓之瓢巖峰下 初降云者降生之謂歟 詩曰維嶽降神生甫及申 蘇子瞻以爲申呂自嶽降。古今所傳不可誣也 盖崧高靈淑之氣鍾精毓英 篤生哲人理之所必然者 而獨東京誌所載六部大人 皆從天而降云者異焉。神人降于太白山檀木下而爲檀君與蘿井剖卵遂爲佐命功臣等說自昔沿襲而齊東之言疑信固難定惟此瓢巖一區之爲及梁大人之遺墟而爲我李根本之地則明矣。自始祖以來積德累仁慶流雲仍羅麗之間簪組蟬聯名碩相望逮于我朝枝達派分子孫千億廼公廼卿世濟厥。美二千年之間赫舃爲吾東望族者惟及梁公之餘蔭是庇是庥耳金鰲之麓▨處是我始祖衣履之藏而年代渺茫文獻無徵遂失其傳在今後孫之追遠而想慕者獨瓢巖在耳歲。丁未後孫集星之守永陽也鐫刻于巖上標識之慶之諸孫以爲此不足表揚遺蹟。廼伐石爲穹碑將樹於巖下宗人堯臣輩來徵記文於敬一余以爲此事不謀於衆似有甲乙之論而其爲不忘本則亦或一義旣樹之後永世衞護旡俾。童敲而角勵則顧非在慶諸人之責乎遂爲之書。
後孫大匡輔國崇祿大夫原任左議政鰲恩君敬一謹記。
後孫正憲大夫刑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集斗謹書。
聖上卽阼六年丙寅九月 日立(순조 6, 1806년 9월 일)
都檢 後孫 前掌令 李鎭宅)。
幼學 李增奎。
監役有司 李亨默. 李奎泰。
刻字有司 李景春。
監官 折衝 李重仁。
▲광림대 석혈(光臨臺 石穴) > 시조(始祖)께서 강림(降臨)하시어 목욕(沐浴)하신 곳으로 전(傳)
해 내려온다.
▲‘경주이씨 시조 발상지’ 라고 기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