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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꿈꾸는 교회 (1)
150614 잠 14:31
1. 신뢰를 얻는 법
얼마 전에 짧은 글을 하나 보았는데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바로 ‘기업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글쓴이는 사람들로부터 기업이 신뢰를 얻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일관성입니다. 한마디로 예측 가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술 한 잔 한 후 대학생 아들의 형편없는 성적표를 보며 "괜찮아. 아빠도 옛날에 그랬어!"라며 호방하게 웃던 대인배 아빠가 며칠 뒤 맨 정신에 아들의 형편없는 성적표를 보며 “너 임마 공부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화를 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아들은 자기 아빠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니까 그런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혹은 이 회사는 이럴 때 한 결 같이 행동할 것’이라는 타인의 예상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기업으로 치자면 핵심 가치(core values), 즉 '우리 회사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야 할 원칙', 그 원칙이 살아 작동하는 회사가 신뢰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글쓴이는 이를 일관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분명한 정체성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글쓴이가 제시한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두 번째 방법은 단기 이익보다는 장기 이익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대형 할인매장 코스트코를 아시지요? 이 회사는 창업 때부터 '마진 15%의 원칙'을 지킨답니다. 마진이 15%보다 더 생길 때는 오히려 판매 가격을 낮춰 버립니다. "15% 이상 이익을 남기면, 기업의 규율이 사라지고 탐욕을 추구하게 된다.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길게 봤을 때 고객들이 떠나고 기업은 낙오한다."는 게 창업자 짐 시네갈(James D. Sinegal, 1936년 1월 1일 ~ )의 철학이랍니다.
저는 이 두 가지 교훈이 교회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우선 첫째, 기업이 핵심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 즉 ‘우리 회사는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야 할 원칙’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말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교회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야 할 원칙’ 그것은 반드시 지키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마진 15%의 원칙을 지킨다, 장기적인 이익을 바라본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자세는 교회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교회가 합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있었던 에피소드입니다. 저희 교회의 연간 결산 금액이 노회 회계부에 전년도에 비하여 매우 높게 상승한 것으로 보고된 적이 있습니다. 7월에 합병하였기 때문에 첫 해에는 반년 치 결산 액수만 보고되었고 둘째 해에는 일 년 치 결산 액수가 보고되었기에 차이가 나기도 했고, 또 회계 기장상의 문제도 좀 있었습니다. 아무튼 전년도에 비해 매우 높게 결산 액수가 보고되었습니다. 이 내용을 본 노회의 어떤 선배 목사님께서 제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그렇게 삽시간에 부흥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알고 싶단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음도 나왔지만 연배도 높고, 잘 모르는 선배목사님이라 설명해 드렸습니다. 교회가 부흥한 것이 아니고 장부 기록만 그리 된 것이라고 말씀해 드렸습니다. 그 통화를 하고 나서 좀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요즘 개신교회들이 부흥이 안 되고 어려우니까 갖은 방법들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새신자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 회사 식으로 말하자면 매출을 올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다 할 것 같은 개신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매출을 올려서 마진을 팍팍 내고 싶은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두 번째 원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가 막 나간다면 잠깐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장기적으로는 건강하게 유지될 수 없습니다. 무슨 프로그램, 무슨 프로그램, 프로그램이 프로그램을 낳고, 프로그램이 프로그램을 낳고, 끊임없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찾아 헤매는 개신교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프로그램이 그들의 생명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로서는 그런 모습이 별로 건강해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따라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더 멀리 볼 줄 알아야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합쳐져 하나의 교회가 된 지 3년이 되었습니다. 어떠한 교회를 이루어야 할까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가 꿈꾸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설교는 7월 첫 주일(5일) 합병기념주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될 것입니다. 왜 굳이 네 번인가 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우리 교회의 사명이 네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2. 본문 이해
지혜의 말씀으로 가득한 잠언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말씀이 많습니다.
14:21,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사람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
17:5상,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다.
19:17,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주신다.
22:22, 가난하다고 하여 그 가난한 사람에게서 함부로 빼앗지 말고,
고생하는 사람을 법정에서 압제하지 말아라.
그 가운데서도 오늘 본문은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14:31,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가난한 사람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그러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빈부에 따른 격차와 차별이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피부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장 강한 나라,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조차 아직도 피부색에 따른, 즉 인종에 따른 차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종교에 따른 차별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성적 취향, 성적 정체성의 문제로 인한 차별도 부각되고 있습니다. 21세기 첨단 과학 기술시대에 사는 인류가 대단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것처럼 부풀려지고 있습니다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 시대의 인간들이 얼마나 몰이성적이며, 부도덕하고, 부조리한 존재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가난한 사람에게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이른바 ‘갑질’이라는 것이 뭡니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가난하고 약한 존재들에 대한 폭력을, 아주 일상적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약자에 대한 폭력을 말하는 것이지요. 성경은 말씀하기를,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갑질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죄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반대로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궁핍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과 꼭 같이 어려운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공경하겠습니까? 편찮으신 부모님처럼 눈에 보이면 뭐라도 하겠습니다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공경할 수 있습니까? 새벽마다 일어나 정한수(井華水) 떠놓고 백일기도를 하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까? 지은 죄를 고백하며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도록 40일 동안 금식을 하며 기도하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까? 고행하던 신앙의 선배들처럼 소금을 한 사발이나 삼키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절벽 위 벼랑 끝에서 졸음을 참아가며 목숨 걸고 몇 날 며칠을 기도하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까? 새벽기도, 삼일예배, 금요철야 빠뜨리지 않고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까? 물론 훌륭한 신앙 선배들의 신앙적 몸부림을 폄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만큼,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만큼 하나님을 공경하는 확실한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가 신앙이 메말라서, 마음이 푸석푸석해져서 견딜 수 없는 분이 계시다면 주변을 돌아보시면 됩니다. 주변을 잘 살펴서 가장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십시오. 그의 손에 도움의 손길을 전하십시오. 그것이 돈이든지, 시간이든지 무엇이든지 전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의 불길이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걸 느낄 것입니다.
3. 낮은 곳을 향한 교회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것은 가장 먼저 낮은 곳을 향하는 교회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찬송하면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나아가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힘을 다하여 주변의 궁핍한 사람을 돕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사역의 선봉에는 교회의 섬김의 사역을 담당하는 봉사부가 앞장서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이 부름 받았습니다. 물론 사회적인,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인의 성실한 노력만이 궁핍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국가적인 노력의 불필요성을 변명하는 것으로 쓰일 때 매우 교활한 말이 됩니다. 생산력이 매우 낮았던 시대에는, 아니 지금도 매우 어려운 경제사정에 있는 나라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생산력이 발달한, 이 정도의 경제적 성장을 이룬 한국 사회에서는 이 말은 더 이상 통용 될 수 없는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지 과잉, 복지병이라고 비판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력 대비 복지수준은 OECD 국가 가운데서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더구나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급속하게 고령화되어가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에서는 더 빠른 속도로 복지제도가 확대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개혁을 위한 노력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과는 별도로 현실 속에서, 오늘 지금 당장 시급한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있습니다.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복지제도, 기초생활보장수급대상이나 차상위계층등의 제도에서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가난과 궁핍에 익숙해져서 아프다는, 힘들다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동사무소에서, 구청에서 도와주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나라에서 해주는 복지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된 참으로 딱한 사정에 처한 분들, 저는 이 분들이 바로 우리 교회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을 찾아 소리 없이 도와드리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입니다. 마침 봉사부에서 오늘 이런 내용의 주보 광고를 요청하였습니다. 주변에 어려움을 겪는 딱한 처지의 분들을 알려주시면 매월 정기회시 살펴서 돕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처지에, 우리 실력에 얼마나 크게 도울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작은 우리의 정성을 전달하고자 하는 이와 같은 노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노력과 수고가 바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임을, 이것이 산 제사, 살아 있는 제사요, 참된 예배임을 우리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그것은 우선 낮은 곳을 향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주변의 궁핍한 이들을 돌아보는 교회입니다.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 귀한 사명에 앞장서는 봉사부가 되시기를, 그리고 하늘샘교회 모든 교우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