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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만
사람에게 갯벌은 오랜 친구입니다.
원시 시대의 인류가 숲에서 나와 처음 정착한 곳도 갯벌이었고, 풍부한 먹을거리를 준 것도 갯벌이었고, 부족한 땅을 대준 것도 갯벌이었으며, 사람이 만든 오염 물질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준 것도 갯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고마운 갯벌이 사람 때문에 병이 들다 못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갯벌에게는 사람이 좋은 친구가 아니었던 거지요.
강진은 지리상의 위치와 정치 군사상의 이유 때문에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번성했던 곳이다. 약 4천 년 전 청동기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지석묘)이 강진군의 여기저기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도암면 지석리(支石里)는 아예 마을 이름이 ‘고인돌’이다. 이는 강진만과 탐진강 일대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음을 뜻한다.
백제 때인 757년 탐진(耽津)현이 설치된 데 이어, 통일 신라 때인 828년 탐진현 앞바다에 청해진(지금은 행정구역상 완도군에 속하나 예전에는 모두 강진에 속했다)이 설치되면서 강진은 무역 중계 기지로 이름을 떨쳤다. 탐진이란 땅이름은 탐라(耽羅) 왕국이던 제주도와 육지를 잇는 나루터津라는 뜻의 합성어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강진만 일대는 고려 이전부터 황해와 남해를 아우르는 무역 중계 기지였다.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는 강진(康津)이란 말은 ‘편안한 나루’란 뜻을 가지고 있다.
강진만에 대한 새로운 사실
-2003. 5. 30. 강진신문-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이, 강진만은 강진사람들에게 가까이 있지만 관심을 덜 받는 곳이다. 간척사업의 영향으로 거의 끝장난 곳, 탐진강에서 토사가 흘러들어 재기가 불가능 한 곳, 그래서 어민들도 떠나고 있고 머지 않아 파장할 곳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 들려오는 강진만에 대한 소식은 우리의 이 같은 인식이 얼마나 잘못됐고 체념적인 것인지 질책하고 있다.
경남의 한 환경단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강진만은 남해안 해안가 중에서 겨울철새의 종류가 순천만 다음으로 가장 많은 곳으로 조사됐다. 강진만에 겨울철새가 먹고 살만한 것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고, 그만큼 강진만이 활발한 생태활동을 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천연기념물인 큰고니 수는 압도적인 숫자로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해남 고천암이나 순천만등이 전국적인 철새도래지로 알려지고 있을 때 강진만 고니는 그저 조용히 한 철을 난 후 다시 조용히 떠나고 있었다.
최근 강진만을 방문한 전문가들도 강진만 환경을 극찬했다. 대추귀고둥이 발견됐다는 것 자체가 큰 사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칠량구로앞바다 해변은 해안의 자연이 원시적인 상태로 보존된 곳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미래의 해안교과서라는 표현들도 썼다.
강진만에 대한 칭찬은 생태계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제적으로 여행을 많이 해 본 경험이 있는 한 여행전문가는 다산초당에서 바라본 강진만 전경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우리가 칭찬에 민감할 필요는 없다. 또 외지인들의 평가에 지나치게 과민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고 있는 강진만의 새로운 진실들에 대해 겸허한 마음으로 접근할 필요는 있다. 강진만이 이토록 중요하고 아까운 곳이라면 지역민들도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접근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강진만 간척사업으로 잃어버린 보통사람들의 역사가 있다
2007.04.13 17:41:12 주희춘 기자 | ju@gjon.com
강진만은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지금은 간척지가 넓은 들을 형성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전만해도 강진읍을 비롯한 군동, 칠량, 대구 등은 산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그러다가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해 일제가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진행하면서 바다와 갯벌을 막아 농경지를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간척지가 도암면 만덕간척지(205㏊)와 신전면 사초리 사내간척지(390㏊)이다.
강진만에는 총 9개의 섬이 자리하고 있다. 강진의 유일한 유인도인 도암면 가우도를 비롯해 자그마한 무인도 죽도(竹島)와 내호도, 외호도, 홀애비섬, 미래도, 까막섬 등의 섬들이 옹기종기 위치해 있다.
일제 강점기 전에는 해남 북평면 남창 앞바다에서 신전면 장수리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신전 사초리와 송천리에 푸른 물결이 출렁였다. 조금 올라오면 신전면 논정리 앞바다가 광활했고, 조금만 더 밀고 들어오면 도암 만덕리 귤동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일렁거렸다.
또 그 위쪽 강진읍 기룡마을 앞 들이 바다였던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다. 서남쪽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강진읍 영파리 팔영마을 오른쪽에는 도선등이란 곳이 있다. 한문으로 도선(渡船)등이다. 이는 팔영마을 일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배들이 왕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팔영마을 주변에는 지금도 땅을 파면 갯벌이 나온다고 한다.
강진읍에서 목리다리를 지나 칠량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군동 하신마을과 합섬이 보인다. 길 건너 오른쪽으로 들녘에 조그맣게 솟아오른 산봉우리가 보인다. 말이 산봉우리지 언덕이나 마찬가지다. 이곳이 바로 합섬이라는 섬이다. 논 가운데 무슨 섬이 있느냐고 궁금해 질 수 있다. 1930년대 중반까지 이 일대는 드넓은 바다였다. 바다에서 언덕이 봉긋 솟아있었으니 그것은 섬일 수밖에. 강진만의 섬 중 하나였던 합섬은 간척사업과 함께 육지가 되어 버렸다.
강진은 바다가 막아지면서 논을 얻었지만 대신 잃어버린 게 많았다. 갯벌을 잃어 버렸고, 역사를 잃어버렸다. 강진만에 펼쳐졌던 광활한 갯벌이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고, 강진만을 중심으로 곳곳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역사를 잃어버렸다.
군동 하신마을 앞 일대도 광활한 바다였다. 그냥 바다가 아니라 멀리 장흥 가지산에서 발원한 탐진강이 유유히 바다로 들어오는 곳이었다. 무진 풍부한 어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신마을 앞에 드넓은 염전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염전이 있었던 자리에 봄이 오면 푸른 보리가 바람에 산들거린다. 지금은 운전자들이 무심히 지나는 그곳에 또 다른 역사가 있었다.
하신마을 앞 들녘의 합섬 주변 바다를 ‘사비강’이라고 했다. 사비강(思江). ‘죽고 없는 어머니를 사모하는 강’이라는 뜻인데 장흥 마씨의 24세손 삼형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큰아들인 원형이 집 앞쪽 큰 강물에 아우들과 어리(독살이나 어살, 석전등과 같이 돌이나 대나무를 빙 둘러쳐서 물고기를 잡는 장치)를 만들어 물고기를 잡아 어버이에게 바쳐서 고향사람들이 그곳을 ‘사비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또 막내인 원성은 어머니가 아파서 약을 구하려고 했으나 물이 불어나 바다를 건너지 못하자 뗏목을 만들어 강진읍 쪽으로 건너가서 약을 구해왔다고 한다. 물고기를 잡던 곳은 지금의 합섬 서쪽 일대였을 것으로 현지 주민들은 보고 있다.
언뜻 보면 과거 유교질서 사회에서 당연히 있을 법한 아들들의 이야기 이지만, 후세사람들이 그곳을 ‘사비강’ 이라 이름 붙이기까지 독특한 사연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하신마을 앞 일대는 바다이면서 큰 강으로 통했던 것 같다. 지금은 탐진강 하류가 건너편 목리쪽으로 형성돼 있지만 아주 오래전에는 이쪽 하신마을 쪽도 탐진강 하류에 속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후세의 주민들이 이곳을 자연스럽게 ‘사비강江’이라 부르게 된 것 같다.
무심코 지나다녔던 합섬으로 들어가 보니 그럴싸한 광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북서쪽으로 강진읍이 훤하게 보인다. 북동쪽으로는 예전에 염전이었던 평야가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이 작은 섬은 온통 바위덩어리라고 하지만, 야트막한 정상에는 나무도 자라고 있고, 주변에는 노란유채꽃도 피어있다. 오래전에 바닷물이 철석 거렸을 섬 주변에는 아직도 바위가 위세를 자랑하고 있다.
합섬의 주변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마씨 형제들이 어버이에게 드릴 물고기를 잡기위해 어리를 설치했던 곳이다.
강진만의 형세는 마치 여인의 자궁과도 같다. 강진읍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도암면, 신전면이 위치해 있고 동쪽으로는 군동면, 칠량면, 대구면, 마량면이 자리하고 있다. 삼면이 육지와 맞물려 있다 보니 강진만의 바다는 항상 잔잔한 모습이다. 양쪽으로 갈라진 구불구불한 해안선은 신전 사초리 앞바다에서 시작돼 마량면까지 총 길이가 74㎞나 된다.
간척사업은 일제 강점기에 본격화 돼 1980년대 후반까지 계속됐다. 건너편 동쪽도 마찬가지다. 마량 하분마을 앞도 바다였고, 숙마마을 넓은 들도 바닷물이 들락날락 하던 곳이었다. 윗동네인 대구와 칠량도 사라진 바다가 많다. 칠량 영계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구로 앞 들도 마찬가지다. 군동 하신마을 앞 광활한 땅도 모두 바다였다. 칠량은 저 안쪽 명주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대구는 용운리 저수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그 일대를 훈정강이라 불렀다. 마량은 원포앞에 남원포란 큰 포구가 있었다. 신전은 주작산, 지금의 관광농원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도암은 도암면 소재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요즘에도 그렇지만 옛날 바다를 생각하며 상상력을 확대해 가면 강진만은 커다란 항아리를 떠 올리게 한다. 완도 본섬과 신지면, 고금면이 병뚜껑처럼 항아리 주둥아리를 막고 있고, 그 안쪽에 둥그렇고 거대한 만이 형성돼 있다.
군사적으로 천혜의 요새이면서 어민들이 안심하고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또 큰 파도가 많지 않아 멀리 떠나는 배들이 항구로 삼기에 좋았을 곳이다. 내륙 깊숙히 까지 들어와 있는 강진만은 육지에서 생산된 물건이 나가고, 각 섬지역에서 내륙으로 물건이 들어가기에 최상의 지역이었다.
시대를 조금 더 올라가면 우리는 더 큰 바다와 만난다. 617년 신라 진평왕 39년에 건립된 성전 무위사는 905년의 절 명칭이 무위갑사(無爲岬寺)였다. 갑사는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을 뜻한다.
1417년 병영에 병영이 설치된 것은 이곳의 산세가 천혜의 요새라는 점과 함께 바닷물이 지금의 병영면 소재지 앞까지 들어와 해로가 용이했다는 장점이 있었다.
강진만은 크지 않은 만(灣)이지만 포(浦)가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 만의 남쪽에서부터 열거해 보면 마량면의 원포(垣浦), 대구의 구강포(九江浦), 칠량의 장포(長浦: 장계리앞 포구), 군동의 군령포(君令浦: 지금의 호계리 영포)와 백금포(白金浦), 강진읍의 남포(南浦), 도암의 율포(栗浦: 만덕리와 송학리 주변에 있던 포구)등이 있다.
오래전 강진만의 지도를 추정해 보면, 북쪽으로 성전 무위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동북쪽으로는 병영 하고마을 앞뜰, 군동 비파산 아래쪽으로는 시목, 동동마을앞까지 바닷물이 일렁거렸다. 시목마을 앞에는 일제 강점기 전까지 군영포라는 큰 포구가 있었다.
아주 오래전의 강진만의 풍경을 상상해 보면 한반도 지역에 이 정도의 넓고 포근한 만이 또 있었을까 생각될 정도다. 일제시대 간척사업이 진행되기 전에는 강진의 북쪽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역이 바다에 의지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강진은 강진만이란 호수같은 바다를 중간에 두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에 의지해 생활하는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강진의 해양 지리학적 특징은 강진사람들이 외부와 다양한 교류를 하게 했다. 일찍이 강진이 제주로 가는 길목이 된 것, 고려 때 청자가 발전한 것, 칠량에서 옹기가 발전한 것, 근세들어 쌀 교역이 발전한 것 등은 모두 강진만이 갖는 해양 지리학적 특징이 많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총 면적 186.75㎢, 강진면적의 36%... 바다와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곳
2009. 12. 31. 강진신문
간척지가 생겨나기 전에 강진만은 금 캐는 뻘 밭이었다. 갯벌 어느 곳이나 노다지가 가득가득 했다. 그 덕분에 칠량, 도암, 신전에서는 꼬막이나 바지락이 특산물로 나왔고 무안 뻘 낙지만큼이나 많은 양의 낙지가 나왔다. 또 만조 때는 강진만을 이용해 구강포에 배들이 들락거리며 수산물이나 농산물들이 거래 될 정도로 좋은 무역경로였다. 하지만 간척 사업을 벌인 강진만에서는 예전만큼의 노다지를 발견할 수가 없다. 강진을 대표하던 자연산 바지락의 양도 크게 줄었다.
파고가 일정하다보니 강진만을 생활 터전으로 하는 어부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일터가 없다. 강진군에 따르면 강진 내 어업 종사자는 약 1천 900여 가구이다. 10여년 전 2천 500여 가구에 비해 크게 줄어든 숫자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강진만을 무대로 생업을 이어가고 있다.
도암면 망호선착장에서 만난 조부용(64·신전면)씨는 "50여년동안 강진만에서 고기를 잡아 4명의 자식들을 대학까지 가르쳤다"며 "예전에 비해 강진만 주변이 변했지만 아직도 변함없는 것은 어부들이 강진만에서 생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강진만 "10년내 어패류 구경 힘들것"
2007.06.01 16:08:50 주희춘 기자 | ju@gjon.com
어패류 폐사가 늘고 있는 강진만의 오염실태와 원인을 종합적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어민들은 강진만에 대한 체계적인 보호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앞으로 10여년이 못돼 어패류를 더 이상 구경할 수 없는 바다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강진만의 어패류 폐사는 상류와 하류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폐사 어종도 숭어에서부터 장어, 돔, 전어새끼, 문저리, 광어, 가잘매기등 강진만에 서식하고 있는 모든 어종을 망라하고 있다.
강진읍 남포와 목리일대의 어민들은 "지난 2004년 12월 장흥댐(당시는 탐진댐)이 담수를 시작한 이후 물고기 폐사가 급증한 것을 매년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어민들은 이와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요인들로 최근들어 농경지의 농약사용량이 많이 줄어 바다로 유입하는 농약성분이 예전보다 감소했을 것이고 강진읍에 하수처리장이 가동되면서 생활오폐수의 강진만 유입도 적어졌을 것이라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강진만의 어패류 폐사가 농약이나 생활오폐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어민들은 논에서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바다의 부유물질이 상대적으로 적은 초겨울에도 어패류 폐사가 줄지 않고 있다며 장흥댐이 강진만 어패류 폐사의 주원인이라는 의혹을 강력히 제기하고 있는 상태다.
이에 대해 수자원 공사측은 장흥 댐이 강진만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 수자원공사는 하루 13~14만 톤의 방류로 탐진강 유지가 가능하지만 매일 25만톤의 물을 방류하고 있고, 방류된 물은 모두 1급수에 해당되기 때문에 장흥댐 때문에 강진만이 오염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장흥댐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댐방류가 시작된 이후 전남대학교에서 장흥댐 건설로 인한 환경변화에 대한 조사를 매년 실시하고 있다"며 "피해가 나오면 적절한 보상을 하겠지만 현재까지 별다른 이상징후는 발견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강진만해역 복원사업이 강진만에 미치는 영향도 파악되어야 할 것으로 요구되고 있다. 그동안 탐진강물이 강진만으로 유입되면 일부가 목리와 남포앞을 지나 서쪽 금강천 물과 합류했으나 복원사업 이후 해류의 흐름이 바뀌면서 탐진강 물이 곧바로 강진만 중심으로 유입되고 있다.
목리와 남포일대 갈대밭이 정화될 수 있는 여건이 그만큼 사라진 것이다. 강진수산연구소 왕세호박사는 "조만간 강진군과 공동으로 어패류 폐사실태를 조사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현장르포]강진만 물고기가 죽어간다
2007.05.25 12:37:03 주희춘 기자 | ju@gjon.com
지난 23일 오전 9시께 강진읍 목리와 남포마을 앞 바다 현장. 바닷물이 빠져나가자 관행어업으로 쳐 놓은 그물들이 앙상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물 주변에서 잡힌 고기를 살피던 강진읍 A모(65)씨가 어른 팔뚝만한 숭어를 들어 올리더니 "이것 좀 보라"고 소리치며 기자가 서있는 뭍으로 힘껏 내 던졌다. 땅에 떨어진 숭어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몸둥이 여기저기는 마치 작은 면도칼로 찔린 것처럼 피자욱이 선명했다.
"고기가 온전한게 없어요. 다 죽고 썩었으니..."
잠시 후 A씨가 그물에 걸려있는 고기들을 바구니에 담아 밖으로 들고 나왔다. 바구니 안에는 숭어와 장어, 돔, 전어새끼, 문저리, 광어, 가잘매기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바구니안의 고기들도 대부분 죽어있었다. 숭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부패가 상당히 진행돼 있었고, 몸에 핏자국과 함께 상처가 있었다. 몸둥이는 부패가 진행 중이지만 몸을 팔딱거리는 물고기도 있었다.
"어제 오후에 그물을 확인했으니 모두 어제 밤부터 오늘아침 사이에 걸린 놈들이요. 그런데 죄다 죽어있고, 썩어 있어요"
바다에서 재첩을 잡고 있던 남포마을의 한 주민은 갯벌로 들어가면 곳곳에서 썩은 냄새들이 진동하고 있다고 했다. 죽은 물고기들이 갈대밭에 걸려 부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몇 년 전부터 남포마을과 목리마을 앞 갯벌에는 너구리들이 출몰하고 있다. 재첩을 잡던 주민은 "밤중이면 너구리들이 죽은 고기를 먹기 위해 떼거리로 몰려다닌다. 너구리들이 갈대밭에 아예 굴을 파고 사는 것 같더라"고 했다.
마을주민들은 "2~3년 전부터 바닷고기가 죽기 시작해 매년 해가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5년 내 강진만 고기의 씨가 마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4㎞ 정도 떨어진 칠량면 구로마을 선착장. 어부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선착장 한 귀퉁이에 큰 숭어 한 마리가 처박혀 썩어가고 있었다. 바닷물에 떠밀려 온 죽은 숭어였다. 주변 갯벌에도 죽은 고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같은 날 칠량 봉황마을 선착장에서 만난 주민들은 강진만 남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류폐사 실태를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봉황마을 한 주민은 "썰물 때 바다 가운데로 나가면 죽은 물고기들이 둥둥 떠내려 온다"고 했다. 또 다른 주민은 "여름철이면 갯벌에 죽은 고기새끼들이 하얗다"고 혀를 끌끌 찼다.
봉황마을 주민들은 보통 6월말이면 수확하는 일본 수출용 바지락 수확을 5월말에 하고 있다. 갯벌이 급속도로 오염되고 있어 되도록이면 빨리 수확을 하기 위해서다.
이날 바지락 세척작업이 진행된 봉황마을 선착장 주변에는 폐사된 바지락 껍데기가 수북했다. 한 주민은 "최고의 바지락 어장인 '역등실' 어장도 오염이 심각할 정도"라고 말했다. 어민들이 의아해 하는 것은 물고기들이 철을 가리지 않고 폐사하고 있다는 것.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 때는 참숭어가 서식할 때인데 그 때도 죽은 숭어들이 여기저기 떠다닌다는 것이다.
강진만 어류폐사 원인을 놓고 주민들 사이에 의견도 엇갈리고 있다. 상류쪽 주민들은 장흥댐이 가동을 시작한 후 폐사율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의견들이 많고, 하류쪽 주민들은 강진읍 일대의 생활하수와 주변 농경지에서 나오는 농약 등을 주범으로 꼽았다.
주민들은 "각종 어패류가 죽어가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아 보인다"며 "하루 빨리 원인이 규명돼 더 이상의 진척을 막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풍요롭고 드넓은 갯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갯벌에 대해서 그다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손쉽게 메울 수 있다는 이유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갯벌 파괴 사업을 벌이고 있을 뿐입니다. 갯벌을 ‘생명의 자궁’이라고 합니다. 지구가 사람을 비롯한 수많은 동물과 식물이 자랄 수 있도록 보살피는 어머니라면, 갯벌은 지구의 아기 주머니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갯벌이 생겨난 건 자그마치 8천 년 전이지요. 갯벌에 모래 한 알이 쌓이기까지는 온 우주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렁이와 게와 고둥과 새들은 오랫동안 서로 어울려 사는 연습을 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갯벌에서 나는 해산물에 의지해 살다가 갯벌을 파괴하는 적으로 변해 버렸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 어리석음을 깨닫고 다시 갯벌을 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강진만, 우리 자손들에게 물려 줄, 아니 빌려서 살고 있는 천혜의 고장 강진만입니다. 참 자랑스럽고 고마운 우리 고장 강진만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이 더불어 소통하며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강진신문 등에서 강진만에 대한 기사를 발췌하여
놀자 놀자 책이랑 놀자 그루터기반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2012. 3. 31. (토)
주제 《마지막 거인》
(사) 어린이도서연구회 전남지부 강진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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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파일에는 최근의 강진만과 1900년 이전의 강진만을 비교할 수 있는 구글 지도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