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자랑하는 美 보스턴 마라톤
차별 넘고 평화 되새기며 권위 가져
지난 4월17일, 미국 메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출발 신호가 울렸다. 보스턴시 홉킨튼의 메인 스트리트에서 시작해 135번 도로를 따라 달리는 마라톤 대회. 2017년 대회는 무려 121번째였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보스턴 마라톤이다.
우리나라 마라톤은 1936년 故손기정 옹의 베를린 하계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에서 시작하지만 이에 못지않은 중요한 기록들이 보스턴 마라톤을 통해 이뤄졌다. 손기정 옹이 감독으로 대표팀을 이끌고 나선 1947년 대회에서 서윤복은 2시간25분39초로 우승했다. 보스턴 마라톤 역사상 맨 처음 나온 세계 신기록이었다. 당시는 정식 정부가 생기기 전이어서 국제사회에서는 ‘無국적’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인들이 입던 헌 옷으로 유니폼을 만들었고 헌 스파이크에다 리어카 바퀴의 고무를 잘라 붙여 신고 뛰었지만 가슴에는 태극기가 박음질 돼 있었다. 11년 전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도 일장기를 가슴에 달아야 했던 감독 손기정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담은 금메달이었다.
3년 뒤 한국은 또다시 보스턴 마라톤을 제패했다. 1950년 4월 19일 열린 대회, 이번에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보스턴 마라톤 1, 2, 3등을 싹쓸이했다. 함기용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악마의 언덕을 걸어 넘었지만, 워낙 앞서간 덕분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함기용의 기대와 달리 우승 축하 귀국 세리머니는 이뤄지지 않았다. 보스턴에서 돌아왔을 때, 한국은 그해 6월 발발한 전쟁의 포화에 신음하고 있던 터였다. 한국 마라톤은 이후 딱 한 번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2001년 이봉주가 주인공이었다.
시간은 역사를 만들고, 역사가 쌓여 스토리와 함께 권위를 만든다. 보스턴 마라톤이 갖는 힘은 그 오랜 시간을 지켜온 전통과 권위다.
2017년, 121번째 대회 첫 출발은 오전 8시50분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 마라토너들이 맨 처음 출발했다. 오전 9시17분 두번째 그룹이 출발했다. 남성 휠체어 선수들이었다. 2분 뒤인 9시19분 여성 휠체어 선수들이 뒤를 이어 스타트라인을 떠났다. 9시32분에 여자 엘리트 선수들이, 오전 10시에 남자 엘리트 선수들이 출발했다. 기록이 가장 낮은 4그룹 선수들의 출발 시간은 오전 11시15분이었다. 출전 자격을 위한 시간 기준이 존재하는 대회지만 몸이 불편한 마라토너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이 역시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권위다.
이날 대회 참가자 중에는 70세 여성 캐서린 스위처도 있었다. 스위처는 이날 4시간44분31초로 완주했다. 레이스 내내 수 많은 카메라가 그녀를 향했고 인터뷰 요청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나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녀가 보스턴 마라톤에서 처음으로 완주한 여성 선수였기 때문이다.
스위처는 1967년 대회 때 몰래 참가해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의 마라톤 참가는 금지돼 있었다. 지금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다리가 굵어지고, 가슴에 털이 날 수 있으며 자궁이 떨어질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당시까지만 해도 믿어지고 있었다.
당시 20세였던 대학생 스위처는 ‘KV 스위처’라는 이름으로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게 등록했고 선수들 사이에 숨어 출발했다. 6㎞ 구간을 통과할 때 여자가 뛰고 있다는 사실이 조직위원회에 알려졌다. 감독관은 “번호표 내놓고 꺼져”라며 스위처를 끄집어 내려했다.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 코치와 남자친구가 감독관을 저지했고 그녀는 4시간20분이 걸려 피투성이가 된 발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그녀의 도전은 마라톤을 바꿨다. 1971년 뉴욕 마라톤에서 처음으로 여성 참가가 허용됐다. 이번 12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참가자 중 46%가 여성이다. 보스턴 마라톤의 순위별 상금은 남여가 동일하며 1위 상금은 역시 똑같이 15만 달러이다. 스위처는 이번 대회에서도 50년 전 감독관이 빼앗으려 했던 번호, 261번을 달고 뛰었다.
보스턴 마라톤은 2013년 대회 때 폭탄 테러라는 슬픈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해 보스턴은 ‘굳세어라’는 뜻의 ‘Be strong’이 슬로건처럼 움직였다. 보스턴 마라톤은 이후 매년 Be strong을 또 하나의 의미로 담은 채 이뤄지고 있다. 테러의 슬픔을 겪었지만 이를 딛고 일어서는 평화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121년을 이어 온 대회. 한국에게는 일제 식민지배와 태극기가 어우러진 복잡하고 의미있는 이야기가 얽힌 대회. 여성과 장애인을 향한 차별을 하나하나 없애 나간 대회. 테러를 넘어서 평화의 의미를 새기고 있는 대회. 오랜 역사는 그 시간을 겪어 온 것만으로 권위와 위엄을 갖는다. 오래된 것들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 오히려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길일 수 있음을 보스턴 마라톤이 잘 보여주고 있다.
- 교직원신문 2017-05-04 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