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朝實錄(왕조실록)」과 다름없는 이 면담일지에는 제3공화국 출범 보름 후인 1964년 1월2일부터 집권 마지막 날인 1979년 10월26일까지, 통치기간 16년 동안 朴대통령이 만난 사람과 시간, 장소 등이 꼼꼼하게 기재되어 있다.

대통령이 누구와 자주 만나는지를 관찰하면 국정의 방향과 통치행태, 정권의 성격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대통령이 시간관리를 어떻게 해야 국정운영이 효율적인지 엿볼 수 있다.
본지는 「한국조직학회」에 의뢰해 朴正熙 정권 동안 대통령이 면담한 인사들을 시기별·분야별로 나누어 만남의 횟수를 수치화했고, 유형별·인물별 통계 자료를 만들었다.
이 자료를 보면 그 시대의 實勢(실세)는 누구였고, 권력 이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대통령과 자주 만나는 사람이라면 직위와 직책이 어떠하든 實勢라 할 수 있다.

초기엔 정치인 관리 철저
朴正熙 대통령이 16년 통치 기간에 청와대에서 접견한 횟수는 총 3만9318회다. 분야별로 볼 때 행정부 관료를 만난 것이 1만1412회로 가장 많고, 다음이 정치인(6420회), 청와대 비서(2226회), 군인(2045회), 중앙정보부장(2028회) 순이다.
이 통계만으로도 朴正熙 정권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朴대통령은 군인과 중앙정보부장을 상당히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다음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도록 했다는 것이 접견 횟수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연대별 합계를 보면 정권 초기인 1967년이 4301회로 가장 많고, 본격적인 유신체제로 접어든 1973년이 701회로 가장 적다. 전체적으로 1973년 이후 만나는 사람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는 朴대통령의 권력이 强權(강권) 통치로 가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
「朴正熙 전기」를 저술한 趙甲濟(조갑제) 月刊朝鮮 편집위원은 『이 자료를 보면 정권의 성격이 권위주의化하면서 사람을 적게 만났다는 게 드러난다』며 『朴正熙 권력의 흐름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자료의 가장 중요한 시사점인 것 같다』고 말했다.
『권위주의가 되면 정치 기능이 약화되기 때문에 지도자는 사람을 적게 만납니다. 굳이 만날 필요 없이 지시만 내리면 되니까.
자료를 보면 초기에는 정치인을 많이 만났습니다. 대부분 공화당 인사들인데, 이때는 여당이라 해도 정권에 반기 드는 사람이 있으니까 대통령이 설득하고 달래야 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정치인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때였던 거죠』
정권 초기인 1964년 한 해 동안 朴대통령은 정치인을 1163회 만났다. 이는 정치인 전체 만남 횟수의 6분의 1이 넘는 수치다. 시기적으로 尹潽善(윤보선) 씨가 「정신적 대통령」을 자처하며 강경한 反정권 투쟁을 전개한 직후라 民心 수습 차원에서 정치인들과의 만남이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치인과의 만남은 서서히 줄기 시작해 1977년이 되면 26회로 급감한다.
재미있는 것은 만남의 횟수가 전반적으로 줄어드는 가운데도 중앙정보장이나 군인들은 꾸준히 만났다는 사실이다. 반면 언론인은 유신체제 이후 거의 만나지 않았다.

핵심만 챙기고 나머지는 지시
정권 중반에 접어들면서 朴대통령은 정치보다는 안보와 경제 문제에 집중했다. 金正濂(김정렴·84)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에 따르면 정치인은 만나더라도 시간 배분이 5%가 안 되었다고 한다. 金正濂 회장은 朴정권 시절 재무부 장·차관, 상공부 장·차관을 지냈다. 1969~1978년까지 비서실장으로 있었다. 그는 한 일간지에 연재한 회고록에서 朴正熙 대통령의 면담 스타일과 원칙에 대해 이렇게 썼다.
<朴正熙 대통령은 면담을 운용하는 데 원칙이 있었다. 독대해야 할 사람을 제한적으로 구별하고, 그 외에는 전부 비서실장이나 관계수석이 같이 앉도록 했다. 비서실장이나 수석이 그 대화내용을 알아야 국정이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중앙일보 1995년 5월7일)
안보와 경제는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정치는 지시하면 되니까 자연히 정치인은 뒷전으로 물러난 것 같다.



안보 위기에 만난 사람들
1968년 1월22일자 면담일지를 보면 朴대통령이 경제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이날은 간첩 金新朝(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피습하려 했던, 일명 「1·21 간첩사건」 다음 날이다. 오전 9시22분 대통령은 金聖恩(김성은) 국방부 장관, 任忠植(임충식) 합참의장, 沈興善(심흥선) 합참본부장, 柳炳賢(유병현) 합참작전국장 등으로부터 20여 분 동안 대간첩작전 보고를 받았고, 경찰청장 동석下에 李浩(이호) 내무부 장관을 만났다.
9시51분부터 10분 동안 丁一權(정일권) 총리로부터 사태 수습에 대한 짧은 보고를 받은 후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열린 제1차 수출진흥확대회의에 참석했다. 이 행사는 90명의 경제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되었다.
간첩 사건으로 정국이 불안한 가운데 美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號가 원산 앞바다에서 납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밤 사이 제대로 잠을 못 잔 탓인지 독감에 걸린 朴대통령은 1월23일 오전 일찍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申範植(신범식) 공보비서관, 金玄玉(김현옥) 서울시장, 金鍾泌(김종필) 당의장, 金炯旭(김형욱) 중앙정보부장, 金時珍(김시진) 정보비서관 등을 숨 가쁘게 만났다. 비상시국 관련 인사들과의 면담은 다음날인 1월24일까지 이어진다.


1969년에는 3選개헌이 있었다. 이 해 10월17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3選개헌이 확정되었다. 사흘 후인 10월20일 오전 丁一權 내각은 「대통령이 새로운 구상과 체제로 국정에 임할 수 있도록」이라는 이유를 걸고 일괄사표를 제출했다. 이날 오후 3시 상공부 장관실에서 짐을 꾸리고 있던 金正濂씨에게 『대통령이 급히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
金正濂씨가 급히 청와대로 올라가 오후 3시40분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니 대뜸 『내일 비서실장으로 발령을 낼 테니 그리 알고 열심히 일해 달라』고 했다. 金正濂씨는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전혀 모릅니다. 비서실장은 적임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朴대통령은 정색을 하면서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이야. 경제가 잘되어서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등 따습고 포실한 생활을 해야 정치가 안정되고, 국방도 튼튼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非민주적 통치와 능률의 극대화
1970년대 朴대통령은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건설, 中東(중동) 건설 시장 진출, 자주국방 등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든 중요한 변화는 모두 이 시기에 일어났다 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대통령은 행정부 관료들 외에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통계 자료를 보면 정치인은 정권 초기에 비해 만나는 횟수가 20분의 1 가량으로 줄었고, 언론인은 100분의 1 이상 감소했다. 민간인과 경제인도 마찬가지다. 정권 중반을 넘어서면서 대통령이 사람 만나기를 멀리한 것에 대해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위원은 이렇게 풀이했다.
『이 시기 朴대통령은 국가적으로 큰 전략만 챙겼습니다. 정치와 언론에 발목 잡히지 않으려고 만나는 사람을 대폭 줄인 대신 자기 시간을 많이 가진 것이죠. 대통령은 혼자 있는 시간에 굵직굵직한 사안들에 매달렸는데, 그 결과 굉장히 효율적인 정부가 되었습니다』
유신 시절의 구호는 「국력의 조직화」와 「능률의 극대화」였다. 면담일지 종합통계 자료는 대통령이 큰일에 집중하려면 정치코스트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朴正熙의 통치 스타일을 여실히 보여 준다. 사람을 멀리 하는 非민주적 통치의 결과가 오히려 능률의 극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행정부 분야별 면담 기록을 보면 경제 분야가 2309회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행정 분야(2111회), 국무총리(1369회), 외교 분야(1320회), 국방 분야(1018호) 순이다. 朴正熙는 경제를 가장 먼저 챙겼고, 그 다음으로 행정·외교 등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정 분야의 경우 거의 내무부 장관을 만난 것이고, 외교는 수출 관련 인사들을 면담한 것이니 이 역시 경제 분야와 무관하지 않다.

수치로 흐르는 권력
朴正熙 집권 8년째인 1971년에는 군인을 만난 횟수가 3분의 1 이상 줄어들었다. 반면 청와대 비서는 초기만 해도 10회 안팎이었던 것이 233회로 증가했다. 이는 권력의 중심이 5·16 혁명 주도 인사들에서 최측근 인사 쪽으로 이동해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1971년 4월 27일과 28일 일지를 보면 대통령은 외부 인사 몇 명 외에 주요 인사는 거의 접촉한 사람이 없다. 27일에는 李厚洛(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30분 동안 접견했고, 28일에는 金鍾泌 부총재를 10여 분 동안 만났을 뿐이다. 李厚洛은 1963년 12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약 6년 동안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측근이었고, 金鍾泌은 친인척(조카사위)이었다.

1972년은 유신헌법이 선포된 해이다. 朴대통령은 이 해 10월17일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정치체제를 개혁한다」고 선언한 후 국가긴급권을 발동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동시에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렸다. 이날 대통령은 金溶植(김용식) 외무부 장관, 李厚洛 중앙정보부장, 金正濂 비서실장, 金鍾泌 국무총리, 丁一權 당의장, 車智澈(차지철) 국회의원 등을 면담했다.
장관급 인사들 사이에 국회의원인 車智澈이 끼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美 육군보병학교 출신인 그는 만 서른도 안 된 젊은 나이에 공화당 여주·광주·이천 국회의원이 된 후 4選을 하는 동안 朴대통령과 꾸준히 면담했다.
朴대통령은 車智澈을 5·16 혁명 당시 공수부대 대위로 참여했던 아들처럼 여겼다고 한다. 1974년부터 정권 말까지 무려 6년 동안 경호실장을 지낸, 實勢 중의 實勢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朴대통령과 함께했으니 가히 운명적인 관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陸英修 서거 후 대중과 괴리

본격적인 유신체제에 들어가기 시작한 1973년을 기해 대통령의 면담횟수는 전체적으로 눈에 띄게 줄어든다. 1974년 8월15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총격을 받은 陸英修(육영수) 여사의 서거가 사람들과의 접촉이 감소한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피격 사건 직후 경호실장이 朴鐘圭(박종규)에서 車智澈로 바뀌면서 경호가 더욱 삼엄해졌다. 車智澈의 과잉 경호로 인해 접견 대상이 극히 제한되었고, 대중들과 유리되었다. 그 전에는 골프장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곧잘 어울렸으나 車智澈이 경호를 맡으면서는 미리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몰아내 일반인과 접촉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보직상 대통령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경호실장·비서실장·중앙정보부장의 연도별 면담횟수를 보면 시대별 實勢가 누구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호실장이나 비서실장은 늘 따라다니고 安家(안가)에서 함께 식사한 경우가 많아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지만 통계상으로는 중앙정보부장을 가장 많이 접견한 것으로 나타난다.
朴正熙 시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사람은 총 5명이다. 金炯旭(1964~ 1969년), 金桂元(김계원·1970), 李厚洛(1971 ~1973), 申稙秀(신직수 ·1974~1976), 金載圭(김재규·1977~1979) 등이다.
정권 말기인 1979년에는 경호실장이 중앙정보부장이나 비서실장보다 더 자주 대통령을 만났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일정을 통제하고 독대가 아닌 이상 면담 시간을 배분하며 대통령이 검토할 사항을 선택하는 자리이다. 때문에 대개는 비서실장의 파워가 경호실장보다 우위에 있다. 그런데 이 해에는 예외였다. 경호실장이 대통령의 눈과 귀 노릇을 했다. 대통령에 대한 영향력이 비서실장보다 더 강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79년의 변화는 의미가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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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교천 방조제 배수 갑문이 최초로 열리는 순간이다. 왼쪽 끝에 서서 버튼을 누르는 노인은 朴대통령이 즉석에서 초청한 마을 원로 이길순씨. 이 사진은 朴대통령의 마지막 공식 사진이 됐다. |
통계 자료에 예고된 10·26의 비극
당시 경호실장은 1974년부터 죽 자리를 지켜온 車智澈이었고, 비서실장은 1978년 12월에 있었던 인사이동으로 막 부임한 金桂元이었다. 전임 비서실장은 金正濂씨였다.
상공부 장관 출신인 金正濂씨는 9년 이상 朴正熙 대통령을 모시며 익힌 국정 전반에 대한 세부적인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車智澈의 영향력을 의도적으로 배제해 왔다. 車智澈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金桂元씨는 달랐다. 그는 사람은 좋지만 실무에는 약한 편이었고, 대만대사 출신이라 국내 사정에 어두웠다.
강력한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車智澈이 청와대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金正濂 비서실장, 金載圭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나름으로 유지해 온 평형이 깨진 것이다. 車智澈의 득세로 소외감을 느낀 金桂元과 불만을 품은 金載圭는 동료의식을 갖게 되었다. 둘은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친분까지 있었다. 두 사람의 묵인下에 朴대통령이 시해되었다는 점에서 10·26의 비극이 이때부터 배태되었다.

가장 먼저 보고하는 사람이 實勢
독재자에게 가장 먼저 보고하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 법이라고 한다. 10·26 전날인 1979년 10월25일자 접견일지에 車智澈이 비서실장인 金桂元이나 중앙정보부장인 金載圭보다 우위에 있었음이 드러난다. 朴대통령은 이날 아침 가장 먼저 車智澈을 만났고, 金載圭는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접견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오전 10시15분부터 10시38분까지 23분 동안 朴鐘圭 의원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 무렵 신민당 총재에 金泳三이 선출되어 그에 대한 보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대통령이 면담한 사람은 이 세 사람 외에 金溶植(김용식) 駐美대사, 崔圭夏 국무총리, 盧載鉉(노재현) 국방부 장관 등이다. 점심은 비서실장·의전담당 비서·정무수석, 朴振煥(박진환) 특보 등과 함께 먹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朴正熙의 「마지막 하루」인 다음날은 오전 9시40분 이발을 하고, 역시 車智澈을 만나 政街(정가)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오전 10시27분 전용헬기를 타고 농수산부 장관 수행下에 삽교호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청와대를 출발했다. 오후 12시10분에는 당진 송신소 행사에 참석했고, 12시45분에는 도고호텔에 도착해 오찬을 했다.
오후 1시53분 전용헬기를 타고 청와대로 출발, 오후 2시32분에 도착했다. 이후 오후 6시 궁정동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朴대통령의 접견일지는 오후 7시50분 궁정동 만찬 중에 서거했다는 것으로 16년 동안의 기록에 마침표를 찍는다.

인물은 丁一權·金炯旭·金鍾泌 순
면담일지 분석 통계 자료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인물별 면담 순위다. 통치 기간 16년 동안 100회 이상 만난 사람은 총 50명이다. 1위는 990회를 면담한 丁一權(정일권)이다. 이어 金炯旭(900회), 金鍾泌(729회), 張基榮(장기영·636회), 車智澈(609회), 李厚洛(592회), 申稙秀(신직수·556회), 金正濂(514회), 金聖恩(493회), 吉在號(길재호·479회), 金桂元(452회), 崔圭夏(452회), 金成坤(김성곤·411회), 홍종철(357회), 李錫濟(이석제·351회), 金玄玉(김현옥·348회), 金鶴烈(김학렬·325회), 嚴敏永(엄민영·317회), 李東元(이동원·312회), 金載圭(285회), 徐鐘喆(서종철·262회) 순이다.
丁一權은 朴正熙 시대 최장수 국무총리(1964년 5월~1970년 12월)를 지낸 인물이다. 朴대통령의 만주신경군학교 선배로 일본 육사와 미국 육군참모大를 졸업했다. 30代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을 정도로 유능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국무총리를 오래 했기 때문에 접견횟수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1973년부터 1979년까지는 국회의장을 지냈는데, 이 기간에는 접견 빈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朴대통령은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그를 어른으로 깍듯이 예우한 것으로 전해진다.

2위에 오른 金炯旭은 대통령과의 만남이 전반기에 집중되어 있다. 1972년 이후에는 단 한 번도 면담일지에 등장하지 않는다. 육사 출신의 5·16 혁명 주도 세력 중 하나인 그는 1963년 7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1972년 이후 면담이 없는 것은 3選개헌의 볼모가 된 것에 불만을 품은 사건 때문이다. 3選개헌 찬반논쟁이 한창이던 1969년, 공화당內 金鍾泌계 의원들은 朴대통령의 회유에 찬성 조건으로 「중앙정보부장 金炯旭과 비서실장 李厚洛을 자르라」고 요구했다. 할 수 없이 朴대통령은 두 사람을 불러 「몇 년만 참고 있으면 다시 부르겠다」며 직위 해제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金炯旭은 朴대통령의 눈밖에 나자 미국으로 망명했고, 李厚洛은 그 후로도 충성을 다해 얼마 동안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李厚洛의 정치적 부침 역시 金炯旭 못지않았다.

짧게 가는 사람, 길게 가는 사람
金鍾泌은 위의 두 사람과 확연히 비교될 만큼 朴대통령을 꾸준히 골고루 만났다. 육사 8기 출신인 그는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시작으로 공화당 의장, 공화당 부총재 등을 거쳐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국무총리를 지냈다.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위원은 「朴正熙 전기」에서 『李厚洛 정보부장이 물러난 1973년 12월부터 약 2년간 金鍾泌 국무총리는 역대 어느 총리보다도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朴대통령은 이 무렵 경제문제는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권한을 위임했고, 일반 행정은 金鍾泌 국무총리에게 맡긴 채 자신은 국방·외교 등 안보에 집중했다. 당시의 권력 구도가 이 통계자료에 잘 나타나 있다.
金鍾泌과 마찬가지로 정권 초기부터 말기까지 꾸준히 접견한 인물은 車智澈, 申稙秀, 金正濂, 崔圭夏, 金載圭 다섯 사람이다. 이들은 朴정권 시절 쉬지 않고 현직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면담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大 법대, 군법무관 출신의 申稙秀는 1963년 중앙정보부 차장을 시작으로 검찰총장·법무부 장관·중앙정보부장(1973~1976)을 지냈고, 대통령법률담당특보가 마지막이었다.
미국 클라크大 대학원 경제학 석사 출신의 金正濂은 경제전문가로 오랫동안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 한국은행 조사부 차장과 뉴욕사무소 소장을 거쳐 朴정권 때는 재무부 장·차관, 상공부 장·차관, 韓日회담 대표,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駐日 대사를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후 현재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있다.

張基榮 언론인 출신 중 면담 가장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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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4인방 중 두 사람인 길재호(오른쪽)와 백남억(가운데)이 길전식 의원과 손을 잡고 있다. |
金載圭는 朴대통령의 고향 후배이자 육사 2기 동기다. 朴正熙가 지속적으로 끌어 주고 보살펴 주었다는 점이 면담 기록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韓日회담 반대 시위가 격렬했던 1964년 6월3일 당시 6사단장으로서 계엄군을 이끌고 서울에 들어온 인물이다. 3군단장·건설부 장관·정보부장 등을 지냈고, 궁정동의 저격수가 되어 16년 朴正熙 시대의 막을 내렸다.
張基榮은 한국일보 창설자로 언론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50위 안에 들었다. 그는 미국이 양곡 원조를 중단할 것에 대비해 1963년 朴대통령의 지시로 일본에 밀가루 교섭 책임자로 다녀온 인물이다. 그가 교섭에 성공한데다 미국이 우려와 달리 양곡 지원을 끊지 않아 정부는 많은 밀가루를 보유하게 되었다. 1963년 말에 있은 두 차례 선거에서 밀가루 공세를 펴 승리한다.
朴대통령이 張基榮을 자주 면담한 것은 언론인으로서보다는 이 공로에 대한 예우 차원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1964년부터 1967년까지 부총리 겸 제2代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다.

李厚洛의 몰락

李厚洛은 권력을 탐하는 자의 말로가 어떤지를 보여 준다. 육군본부 군수처 차장,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 국방부 장관 특보 등 軍의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1963년 대통령비서실장으로 朴正熙 시대에 입문했다.
이후 駐日대사와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는 동안 많은 일을 했다. 제2의 5·16쿠데타인 10월 유신을 기획해 실행에 옮겼고, 많은 여당 국회의원 후보를 추천하는 등 새로운 정치판을 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7·4공동성명 이후 李厚洛의 인기가 높아지자 「후계자를 노리는 것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다.
1973년 초 李厚洛 부장의 영향력이나 그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절정에 달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대통령은 왜 갑자기 멀리 하기 시작한 것일까? 문제는 그가 또 한 명의 실력자인 尹必鏞(윤필용) 수경사령관과 알고 지낸다는 데 있었다.
趙甲濟 편집위원은 『朴正熙 대통령이 갖고 있던 권력자 고유의 의심과 불안이 발동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尹必鏞 계열은 대통령이 李厚洛을 견제하기 위해 숙청한 것이나 다름없다. 尹必鏞은 1973년 4월28일 갑작스레 구속되었다. 이유는 「치부와 엽색행각에 치달음으로써 反유신적 죄악을 자행했다」는 것이었다. 다분히 인신공격적이고 개인적인 죄목이었다.
매일 자신에게서 정보를 보고받던 대통령이 어느 날부터 안 만나 주자 李厚洛은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와 함께 서서히 힘을 잃어 갔다. 이 무렵 李厚洛이 자신의 신임을 만회하기 위해 金大中 납치사건을 벌였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李厚洛의 정치적 부침을 보면 대통령을 만나는 게 얼마나 큰 힘이고 권력인지 알 수 있다.
金成坤은 李厚洛 못지않게 정치적 부침이 심했던 또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공화당內 실력자들로 4人 체제를 이루었던 吉在號, 白南檍(백남억), 金振晩(김진만) 등을 떼어놓고 이야기하기 힘든 인물이다. 4人 체제의 주인공들은 대통령에 충성하면서 공화당 金鍾泌 계열과는 반대 노선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金成坤이 핵심 인물이었다. 쌍용그룹 창립자인 그는 공화당 6, 7, 8代 국회의원과 공화당 재정위원장, 중앙위원회 의장 등을 지냈고, 3選개헌을 주동했다.
그가 朴대통령으로부터 숙청당한 것은 야당이 발의한 吳致成(오치성) 내무부 장관 불신임 결의안을 통과시킨 게 화근이 되었다. 대통령이 극구 만류하는데 계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자기 계파 의원들까지 회유해 반대표를 던졌다. 이는 대통령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화가 난 대통령은 그 즉시 네 사람을 모두 제거해 버렸고, 그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공화당이 풍비박산 난 1971년 정치파동 때 일이다. 金成坤이 1972년부터 면담일지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1974년에 두 번 면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만난 것이다.
그 밖에 순위 50위 안에 든 인사 중 눈에 띄는 인물은 李錫濟(이석제)와 徐鐘喆, 민관식, 이효상, 백두진 등이다. 육군 준장 출신인 李錫濟는 총무처 장관과 4, 5, 6代 감사원장을 지냈다. 우리나라 관료제도를 확립하는 데 지대한 功(공)을 세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육사 2기 출신의 徐鐘喆은 31사단장, 25사단장, 육군본부 정보부장, 1군사령관, 합참본부장, 육군참모총장 등 軍의 요직에 있으면서 스캔들 한 번 없었다.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안보 담당특보를 지냈다. 성격이 원만했던 사람으로 육사 후배인 全斗煥(전두환)과 盧泰愚(노태우)를 아꼈다고 한다.
閔寬植(민관식)은 공화당 국회의원, 문교부 장관 등을 지냈고, 경북大 교수 출신인 李孝祥(이효상)은 공화당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지냈다. 李孝祥은 경북의 대표적 인물로 TK 인맥의 좌장 노릇을 했기 때문에 지속적인 만남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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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영동고속도로 현장에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
기간별로 중복 인사 없어
접견일지에 자주 등장하는 상위 20인을 시기별로 나누어 분석한 통계 자료를 보면 朴正熙 시대 권력의 흐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또한 주요 인물의 접견 통향 파악이 가능하다. 편의상 1964~1968년을 제1기로, 1968~1974년을 제2기로, 1975~1979년을 제3기로 구분해 본다.
제1기에는 金炯旭(789회), 제2기에는 李厚洛(443회), 제3기에는 金正濂(295회)이 가장 많이 면담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들은 그 前 시기나 다음 시기에는 20위 안에 들지 않았다. 1, 2, 3기에 걸쳐 모두 상위 20위에 든 인물은 金鍾泌·申稙秀·崔圭夏 세 사람뿐이다.
상위 5위에 든 인물 중에는 두 기에 걸쳐 만남이 지속된 이조차 많지 않다. 1기에 2위, 2기에 3위에 오른 丁一權과 1기에 5위, 2기에 4위에 오른 金鍾泌이 있을 뿐이다. 이는 朴正熙가 권력이 어느 한 사람에게 몰리는 것을 경계한 데서 비롯된 듯하다.
趙甲濟 편집위원에 따르면 『朴正熙 대통령은 권력의 4大 파수꾼인 정보부장·육군보안사령관·수경사령관·경호실장을 서로 견제시켜 놓음으로써 권력의 안정을 기하는 방식을 애호했다』고 한다. 이 통계자료가 그의 인사 스타일과 통치 방식을 잘 보여 준다.
朴正熙 대통령은 전체적으로 경제인은 그리 많이 만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상위 20위 안에 든 기업인이라도 많아야 1년에 평균 1, 2회 정도다. 순위를 보면 鄭周永(현대그룹)이 42회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朴泰俊(포항제철) 39회, 金興基(금호석유화학) 30회 순이다. 李秉喆(삼성그룹)은 총 10회 면담으로 12위에, 具仁會(금성사·現 LG그룹)는 총 8회 면담으로 19위에 올라 있다.
이 통계 자료를 보면 朴대통령이 鄭周永과 朴泰俊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朴대통령은 두 사람을 지속적으로 면담했다. 독대를 잘 하지 않은 朴대통령이 기업인 중에 독대한 이는 이 두 사람이 전부이다.
반면 李秉喆은 초기에는 좀 만나는가 싶더니 중기와 말기에는 단 한 차례도 면담하지 않았다. 사료에 따르면 李秉喆은 朴대통령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할 때 직접 찾아가 경제개발하려면 기업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나온다. 이에 朴대통령이 그를 반겨 초기에는 자주 접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1968년부터는 아예 면담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부정축재 사건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1966년 삼성은 울산에 한국비료공장을 세웠는데, 이 공장은 원자재를 일본에서 수입했다. 그런데 원자재 수입을 하면서 밀수품을 팔아서 자금을 축적한 사실이 밝혀져 정치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사건은 李秉喆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朴대통령은 도덕적으로 용서할 수 없었는지 그 후 李秉喆을 만나지 않았다. 대통령과 李秉喆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이다. 훗날 李秉喆은 『朴대통령에게 당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나 이제는 둘다 故人이 된 만큼 옳고 그름은 누구도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후반기로 갈수록 거리 둔 언론과 정치
朴正熙 대통령은 정권 초기 외에는 언론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16년 통치 기간 동안 朴대통령이 접견한 언론사는 30여 개社이고, 총 627회 만났다. 이 중 가장 많이 접촉한 언론사는 서울신문사다. 총 133회로 수치상 전체 언론사의 5분의 1 수준이다. 다음이 한국일보(80회), 국제신문(70회), 문화방송(51회), 조선일보(47회) 순인 것으로 집계됐다.
언론인 개별 면담은 장태화가 74회로 가장 많았고, 서정귀(65회), 조증출(23회), 방일영·김여원(17회), 고재욱(16회), 김종규(15회) 순이었다.
전체적인 특징은 언론인 역시 1973년부터 거의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1975년부터 1979년까지는 한 해에 딱 1명씩 면담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정치인은 표면적인 수치상으로는 吉在號가 총 457회로 가장 많고, 그 다음 金鍾泌(455회), 金成坤(401회), 車智澈(319회), 金振晩(241회), 백남억(192회), 李孝祥(128회), 오치성(102회) 순이다.
吉在號·金成坤·백남억 등은 전반기에만 집중적으로 만난 반면, 길전석·김용태·백두진·육인수·이효상 등은 지속적으로 꾸준히 만난 것으로 나타났다.
야당 정치인 중에는 金泳三과 박순천이 민중당 시절에, 고흥문·정해구·金泳三·김은하가 신민당 시절에 각각 1, 2회씩 만났을 뿐 거의 왕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통계 자료를 보면 당시 여야 간의 대화가 얼마나 단절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영관급 장교로 접견한 全斗煥
군부가 장악한 정권이었던 만큼 朴正熙 시대에는 군부의 힘이 상당히 셌다. 면담횟수에 따라 상위 10위 안에 든 군부 인사를 소개하면 이렇다.
우선 수치상으로는 金桂元이 총 105회로 가장 많고, 다음이 徐鐘喆(82회), 민기식(76회), 金載圭(71회), 심흥선(71회), 尹必鏞(69회), 강기천(66회), 임충식(65회), 문형태(53회), 장창국(47회) 순이다. 이 중 金桂元은 순수 군인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제외하면, 徐鐘喆의 면담횟수가 가장 많다.
이 통계 자료에서 눈여겨볼 만한 사람은 민기식과 尹必鏞, 그리고 20위 밖에 있지만 영관급 군인으로 50위 안에 든 全斗煥이다.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민기식은 朴대통령의 술친구로 유명하다. 朴대통령이 그를 1964년 한 해 동안 무려 66회 면담한 것은 그해 6월3일 격렬하게 들고 일어난 韓日회담 반대 시위운동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육사 8기 출신인 尹必鏞은 朴正熙가 맹호사단장으로 있던 시절 바로 밑의 부하직원이었다. 육사 11기인 全斗煥은 당시 계급이 영관급 장교인데 대통령을 자주 만났다. 대통령이 중령·대령 정도의 장교를 만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朴대통령은 全斗煥뿐만 아니라 盧泰愚 등 육사 출신의 젊은 군인들을 자주 만났고, 매우 총애했다고 한다. 全斗煥은 이때부터 「하나회」를 만들어 軍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후반기로 갈수록 사람들을 적게 만나면서 측근들과 함께하는 만찬은 자주 가졌다. 1978년에는 66회, 1979년에는 70회의 만찬을 가졌다. 이렇듯 만찬이 많아진 데는 陸英修 여사를 잃고 혼자 된 몸이어서 쓸쓸한 마음을 달래고자 했던 것 같다.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 아닌 참모들과의 반복된 만찬은 후반기의 폐쇄적 국정운영의 실태를 잘 보여 주는 증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