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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세계 : 시조 부(富)-후1세 득규(得虯)-2세 중윤(仲允)-3세 송기(松 奇)-4세 수영(守永)-5세 源(원) -6세 진(璡)-7세 공언(公彦)-8세 설(設) |
<비문 후면>
공의 성은 나(羅)요 나주인이며 이름은 설(設)이니 고려정의대부감문위상장군 부(富)를 시조로 하고 후 3세가 영동정(令同正)으로 그 직을 세습하고 진사 수영(守永)의 제5자 사온서 직장 원(源)이 공의 증조이며 왕고(王考)는 진(璡)으로 공조전서(工曹典書)인데 조선조에 들어와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제수하였으나 의리를 지켜 벼슬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공언(公彦)이니 중현대부 전농시정나성군(典農寺正羅城君)이요 비(妣)는 군부인(郡夫人) 고흥유씨로 흥위위(興威衛) 보승랑장(保勝郞將) 번(蕃)의 따님이다.
공이 고려우왕 경신(庚申)에 태어나 세종 을축(乙丑)에 졸하니 향년66이라 공은 총혜이범(聰慧異凡)하여 이른 나이에 벼슬에 나아가 봉훈랑 도강감무에 이르렀으며 나이 30에 나주 고을 서성리(西城里)에서 살았다.
배(配)는 공인(恭人) 나주정씨(羅州鄭氏)로 서원(瑞原) 군사(郡事) 연(淵)의 따님이며 안변 호장(安邊 戶長) 신(信)의 손(孫)이면서 봉서운 부정(奉書雲 副正) 지석(池碩)의 외손으로 딸 하나를 낳으니 직장 평택 임첨(林襜)에게 시집갔다.
계배(繼配)는 공인(恭人) 제주양씨(濟州梁氏)로 사복소윤(司僕少尹) 서진(壻珍)의 따님으로 1남 2녀를 낳으니, 아들은 대구부사 맹례(大邱府使 孟禮)요, 딸은 장성현감 금성 나은제(長城縣監 錦成 羅殷制)와 판관 남양 홍맹신(判官 南陽 洪孟信)의 처(妻)이다.
손자 신덕(信德)은 생원이요, 증손자 치화(致華)는 부사직(副司直)이요, 현손은 윤(潤)과 별시위(別侍衛)인 능(綾)과 통정대부 시위부사직(侍衛副司直)인 위(緯)와 곤(紳)이다. 위(緯)의 아들 두남(斗南)은 산장처사(山庄處士)요 익남(翼南)은 호가 국암(菊菴)이니 일덕(逸德)으로 개성(開城)과 창원(昌原) 교수(敎授)를 역임하여 입향(立享) 도암사(道巖祠)하고, 이남(以南)은 문과로 승 교리(陞 校理)하다.
임첨(林襜)은 부처(夫妻)가 모두 일찍 죽으면서 4세인 효손(孝孫)과 3세인 종직(從直)과 강보(襁褓) 중의 1여를 남기니 공이 모두 보살펴 키워 성취시켜 주었다. 효손의 아들은 가종(可棟)이고 종직(從直)은 무과로 우후(虞侯)이며 증손 향수(享秀)는 호가 금호(錦湖)이며 문과 목사(牧使)로 을사명현(乙巳名賢)이며 금호사(錦湖祠)에 향사하였다. 증손녀(曾孫女) 이희옹(李希雍)은 문과로 감사(監司)요 신광한(申光漢)은 문(文)으로 대제학(大提學)이다. 여 시정 한장손(女寺正 韓長孫)의 아들 증(曾)은 시정(寺正)이요 손(孫) 효원(效元)은 영의정에 시호(諡號)는 장성(章成)이다. 나은제(羅殷制)의 아들 빈(彬)은 생원이요 손(孫) 세찬(世纘)은 호(號)가 송제(松齊)니 대사헌이며 송제사(松齊祠)에 향사하였다.
홍맹신(洪孟信)은 딸하나가 있는데 진사 진이손(陳二孫)에게 시집갔다.
공의 제(弟) 집(諿)의 부처(夫妻)가 모두 일찍 죽고 아들 하나가 있는데 자강으로 당신 아들처럼 보살펴 기르니 문과로 무안현감과 의주부윤을 역임하고 손(孫) 승지(承旨) 일손(逸孫)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급제하여 이로부터 후손이 크게 번창하였다.
오호라, 공이 덕(德)과 인(仁)을 쌓고 원달유장(源達流長)하여 내외 손의 벼슬이 이 세상에 연이어지니 천지보시(天地報施)로다. 묘는 나주 송현 천(阡) 전서공 묘 아래 묘향원(卯向原)에 3합조(合兆)하다. 묘갈(墓碣)의 개수(改竪)가 두 번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고 세대가 깊어지니 글자 또한 닳고 이지러져 이제 다시 새로 할 때 후손 병현(炳賢)이 전심완역(專心完役)하고 운영하고 관리하는 자가 탁종(鐸宗)이라고 대략 그 전말을 서술하여
추모함이 만에 하나 위와 같이 겨우 말하노라.
단기4326년 계유(癸酉) 춘훤(春暄)
종후손(從後孫) 성균(性均) 근식(謹識)
봉화후인(奉化后人) 금선중(琴善仲) 근서(謹書)
<5> 通訓大夫成均館司藝兼世子侍講院弼善羅州羅公昶之墓
(통정대부 성균관 사예 겸 세자시강원필선 나주나공 창지묘)
配贈貞夫人平山申氏
(배증정부인 평산신씨)
〇세계 : 시조 부(富) -후1세 득규(得虯)-2세 중윤(仲允)-3세 송기(松 奇)-4세 수영(守永)-5세 源(원) -6세 진(璡)-7세 공언(公彦)-8세 집(諿)- 9세 자강(自康) -10세 계조(繼祖) -11세 일손(逸孫) -12세 -창(昶) |
<비문 후면>
지제나공(止齊羅公)의 체백(體魄)과 의관(衣冠)과 이장(履扙)을 묻은 장지(葬地)가 나주의 서쪽 장흥동(長興洞)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있다. 나의 선조 미호(美湖)선생께서 일찍 공의 학덕을 표석(表石)에 새겼는데 이제 또 갈명(碣銘)을 세워 묘의 모습을 새롭게 갖추려고 후손 여러 선비들이 못난 나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내가 감히 이 막중한 일을 감당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서 수차 사양하다가 마침내 다음과 같이 서술 한다.
공의 휘는 창(昶)이요, 자(字)는 언명(彦明)이며 지제(止齊)는 호(號)이다. 본관은 나주로 시조 부(富)의 벼슬은 고려 감문위상장군이니 이로부터 가문이 번창하고 빛나다.
조선의 왕조가 되어서도 벼슬은 이어지니 태종 때 휘(諱) 자강(自康)은 문과에 급제하고 무안현감과 나주목을 잠시 권섭(權攝)하게 된 연유로 나주에 살게 되었으니, 공의 증조(曾祖)이다. 장사랑(壯士郞) 휘(諱) 계조(繼祖)는 조부(祖父)이고, 전연사(典涓司) 직장(直長)으로 좌승지에 증직된 휘(諱) 일손(逸孫)은 아버지로 기묘사화 때에 성균관 유생들과 조정암(趙靜菴)을 구원하자는 상소문을 올리고, 아버지를 모시고 향리로 돌아와 금강, 영산강 위에 집을 짓고 금사정(錦社亭)이라 현액(懸額)하고 존심양성강의명리(存心養性講義明理) 여덟 글자를 서벽(西壁)에 걸었다.
향중의 뜻이 같은 선비들과 경치 아름다운 때에 선유(船遊)하면서 그 광경을 그리게 하여 이르기를 금강계회도(錦江稧會圖)라 하였는데 매우 성대하였다.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공(孔)씨는 본관이 창원으로 진사 첨승(瞻勝)의 따님이다. 공께서는 성종(成宗) 정유(丁酉) 서기1477년5월10일에 출생하고 신유(辛酉) 서기150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중종(中宗) 경오(庚午) 서기1510년에 문과에 올라 한림원(翰林苑)에 선발되었고 중종(中宗) 병자(丙子) 서기1516년에 무안현감을 지내고 동궁사서(東宮司書)와 승정원 주서(注書) 사헌부 지평(持平)과 사간원 헌납(獻納) 의정부 검상(檢詳)과 사인(舍人) 형조정랑을 차례로 역임하고 국왕의 특별 사랑을 입어 어연(御硯)과 어병(御屛)을 하사받았다. 또한 성균관 사예(司藝)와 시강원 필선(弼善)을 역임하였다. 중종 갑신(甲申) 서기1524년8월28일에 향년 48세로 졸(卒)하니 이는 공의 모든 이력(履歷)이다. 공의 아우 정언공(正言公) 요(曜)가 일찍이 고질병이 있었다는데 관직에 있다가 서장관(書狀官)으로 가라는 왕명이 있어 북경으로 가는 도중에 이국땅에서 유명(幽冥)을 달리하였으니 그 정상이 절박하여 엎드려 바라옵건데 신(臣)의 사원(私願)을 살피시어 윤허하신다면 행심(幸甚)을 이기지 못하였고 도승지 김희수(金希壽)공이 상소하니 성상께서 이르기를 국사를 수행하다가 이역만리서 죽었으니 매우 가엽도다 하시고 호상(護喪)할 것을 윤허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예우이다. 공의 독실한 우애는 지금도 고을 사람들의 칭송이 이어지니 어찌 현인(賢人)이라 아니하겠는가.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참군(參軍) 계규(季糾)의 따님으로 계사(癸巳) 1473년생이며 수(壽)가 101세였으나 귀와 눈이 밝아 가사를 돌봤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관찰사에게 명하여 집을 찾아가 잔치를 베풀게 하라는 광영(光榮)을 내렸으며 특별히 정부인(貞夫人)의 벼슬까지 제수(除授) 하였다.
계유(癸酉) 서기1573년에 졸(卒)하니 공(公) 곁에 부장(附葬)하다.
3남7녀를 두니 큰아들 사항(士恒)은 판결사(判決事)요 둘째는 사순(士恂)이요 셋째는 사음(士愔)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고 한성좌윤으로 증직되다. 습독(習讀) 이세형(李世衡) 진사 정효종(鄭孝宗)과 김욱(金旭), 신윤종(辛胤宗), 김서(金湑), 이광보(李光輔), 윤형유(尹衡柚)는 모두 사위이다.
손자 연(璉)은 통덕랑(通德郞)이니 장파(長派)요 곤(袞)은 차파(次派)요 증공조참의(贈工曹參議) 덕겸(德謙)과 궁궐도감(宮闕都監) 덕양(德讓)은 계파(季派)이다.
증손 천기(天紀)는 선무원종(宣武原從) 공신으로 증병조참의(贈兵曹參議)이니 연(璉)의 아들이요, 효행으로 효능(孝陵)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갑자괄난(甲子适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의거하여 충의(忠義)로 이름이 있어 세금과 부역이 면제된 해륜(海崙)은 덕겸(德謙)의 아들이며 해룡(海龍)과 해붕(海鵬) 그리고 천거로 희능(禧陵)참봉으로 제수되었으나 불취(不就)한 해구(海龜)와 별제(別提)와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인 해봉(海鳳)과 이어 해학(海鶴)은 덕양(德讓)의 아들로서 후손이 번창함은 조상의 음덕이요 천리(天理)라는 말이 진실로 거짓이 아니다. 이에 명(銘)을 지어 이르니 뛰어난 행실과 깊은 학문은 효우가 근본이니 뭇사람 표상이라 아름다운 명성(名聲) 없어지지 않으니 산 높고 물 맑은 이 언덕에 길지(吉地)를 점지하였으니 만세(萬歲)토록 평안 하리라.
경술(庚戌)제석(除夕) 서기1970년12월말 안동후인 김윤동 삼가 짓고
대한민국85년 계미(癸未) 음(陰) 8월28일 서기 2003년 9월24일
태인후인(泰仁後人) 박래호(朴來鎬) 국역
전주후인 이규형 삼가 쓰다
나주나씨 한림공 후손 일동 삼가 세우다
<6> 通政大夫掌隸院判決事羅州羅公諱士恒之墓(통정대부 장예원 판결 사 나주나공휘사항지묘)
配淑夫人漢陽趙氏(배 숙부인 한양조씨)
〇세계 : 시조 부(富) -후1세 득규(得虯)-2세 중윤(仲允)-3세 송기(松 奇)-4세 수영(守永)-5세 源(원) -6세 진(璡)-7세 공언(公彦)-8세 집(諿) -9세 자강(自康) -10세 계조(繼祖) -11세 일손(逸孫) -12세 -창(昶) -13세 사항(士恒) |
<비문 후면>
공(公)의 휘(諱)는 사항(士恒) 자(字)는 관(寬) 호(號)는 낙촌(樂村) 본관은 나주이다.
시조 부(富)는 고려조에 상장군을 지냈고 조선조에 들어와 공언(公彦)은 공훈을 세워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지니 곧 공의 6세조이다. 고조 자강(自康)은 무안현감(務安縣監)과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역임했고 증조 계종(繼祖)는 장사랑(將仕郞)이고 조부 일손(逸孫)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이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창(昶)은 호당(湖堂)에 뽑혀 한림(翰林)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을 역임했고 어머니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참군(參軍) 계규(季糾)의 따님인데 수직(壽職)으로 정부인(貞夫人)이 되었다. 공은 성종 신해년 11월15일에 담안 옛터에서 태어났는데 용모 성품이 단아했고 효성과 우애는 하늘로부터 타고 났다. 어려서부터 효도를 실천했고 성장해서는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집중하여 東동명서명경제잠(銘西銘敬齊箴)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한림공이 병을 앓자 허리띠를 풀지 않고 오직 의약으로 구완하기를 일삼았으며 위독해지자 하늘에 빌면서 자신이 대신 아프기를 원했다. 상을 당해서는 예문(禮文)과 슬픔을 두루 표했고 장례를 치른 뒤에도 삭망에는 반드시 성묘하여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중종 계미년(癸未年)에 왜적이 침략하여 여러 지역을 노략질 했는데 公이 전라병사 오보(吳堡) 우후(虞候) 조세간(趙世幹)과 남대양(南大洋)까지 뒤따라가 격파하니 임금은 공훈을 인정하여 훈련원 봉사(訓練院 奉事)에 임명하고 또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를 제수(除授)했다. 어머니가 백살을 넘겨서도 기력이 강건하고 귀와 눈이 다시 밝아져 몸소 길쌈을 하니 사람들은 효성스런 봉양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공의 나이는 이미 83세이었으나 가려움을 긁거나 주물러 드리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적이 없었으며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거나 병아리를 놀리기도 하여 노모를 기쁘게 해 드렸다. 이에 사론(士論)으로 조정에 효성을 알리니 본도에 명하여 잔치를 베풀게 하고 도백(道伯) 임서(林㥠)는 그 사실을 기록하여 널리 들추었다. 공은 연로한 나이에도 주육을 멀리하고 모상(母喪)을 예법에 대로 치른 뒤 86세 되던 병자년 9월8일에 졸(卒) 하였다. 나주 장흥동 자좌(子坐)에 배위(配位)와 합장했다. 배위(配位) 숙부인( 淑夫人) 한양조씨(漢陽趙氏)는 군수(郡守) 감(勘)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을 지녔는데 공(公)보다 1년 늦게 태어나 24년 앞서 죽었다. 1남3녀 중에 아들 연(璉)은 통덕랑(通德郞)이고 큰딸은 정찬(丁瓚)에게 시집갔는데 정려(旌閭)가 세워졌으며 그 다음은 안침(安琛)과 정승록(鄭承祿)에게 시집갔다.
연(璉)의 아들 사복시정(司僕寺正) 천기(天紀)는 임진왜란에 의주로 피난한 선조를 모신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기록되었고 천기(天紀)의 아들 동부참봉(東部參奉) 의생(義生)도 어가(御駕)행렬을 따라가 원종공신에 기록되었다.
아! 공의 순수한 효성이 만일 주문공(朱文公) 시절에 있었다면 아마도 효자인 유검루(庾黔婁)나 노래자(老萊子)와 함께 소학에 나란히 기재되어 영원히 빛났을 터인데 나처럼 보잘 것 없는 글을 빌려 만분의 일 정도나 후세에 전해야 하다니 슬프다. 이어서 명(銘)을 붙인다. 효도는 백가지 행실의 근원이니 나머지는 미루어 알 수 있다네. 왜적을 무찌르고 공을 세워서 나라의 기틀 세웠지, 무궁토록 감동을 주니 먼 훗날 나도 흠모한다네. 내 어찌 사사로이 말하리. 이 명시(銘詩)를 잘 보게나.
서기1938년 무인정월보름날에 안동후인 김덕한(金德漢) 지음
단군기원4340년 2007년 정해6월 죽산후인 철학박사 안동교 번역
단군기원4340년 2007년 정해중추 전주후인 이규형 서
대한민국89년 2007. 정해 8월 일 통정공후손 일동 근수
<7> 贈嘉善大夫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部副摠管行宣畧將軍龍驤衛副護軍羅州羅公諱士愔之墓(증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5위도총부부총관행선략장군 용양위부호군 나주나공 사음지묘)
配貞夫人 昌寧成氏(배 정부인 창녕성씨)
配貞夫人 利川徐氏(배 정부인 이천서씨) 合祔(합부)
〇세계 : 시조 부(富)-후1세 득규(得虯)-2세 중윤(仲允)-3세 송기(松 奇)-4세 수영(守永)-5세 源(원) -6세 진(璡)-7세 공언(公彦)- 8세 집(諿)-9세 자강(自康)-10세 계조(繼祖)-11세 일손(逸孫)- 12세 -창(昶) -13세 사음(士愔 1511~1586) |
<사음 비석 후면>
나는 이전에 지제공(止齊公)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는데 부호군(副護軍)을 지내고 한성부 좌윤 겸 5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된 그의 아들 휘(諱)는 사음(士愔) 자(字)는 자정(子靜)도, 아버지 지제공 묘소와 같은 벌안 오향(午向)에 모셔져 원배 창녕성씨(元配昌寧成氏) 계배 이천서씨(繼配利川徐氏)와 합장되었다. 성(成)씨의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완(阮)이요 서(徐)씨의 아버지는 종사랑(從仕郞) 윤지(允智)이다. 공의 덕을 들춘 글이 오랜 세월로 마모되자 새로 바꾸어 세우려고 나씨 문중의 선비들이 그의 9세손 성유(性裕)가 지은 묘표(墓表)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銘)을 청했다. 이에 그 글을 근거로 다음처럼 쓴다.
공의 성은 나씨요 본관은 나주이다. 아버지 창(昶)은 세자시강원 필선이고 고조부 전연사 직장 일손(逸孫)은 기묘명현으로 좌승지에 추증되고 증조부 계조(繼祖)는 장사랑(將仕郞)이다. 어머니 평산신씨는 참군(參軍) 계규(季糾)의 따님인데 수직(壽職)으로 정부인(貞夫人)이 되었다. 시조 이후에 분파된 계통은 지제공의 묘갈에 상세히 실려 있다. 중종 신미년 9월22일에 태어나니 도량이 매우 크고 성정이 담백하고 지략과 용기가 뛰어났다.
정승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나라를 지킬 장수 재목으로 천거하여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임명되고 주부(主簿)와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역임했다. 권신(權臣)과 간신(奸臣)들이 국사를 맡자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향리로 물러나 어머니를 봉양하니 어머니의 나이가 101세에 이르렀다. 이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도백(道伯)에게 명하여 잔치를 열어 영광 되게 했다. 향년76에 졸하니 병술년 8월26일이었다. 2남1여를 낳으니 장남 덕겸(德謙)은 통정대부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고 차남 덕양(德讓)은 궁궐도감(宮闕都監)이며 딸은 통정대부 노언호(魯彦豪)에게 시집갔다. 덕겸(德謙)의 아들 해륜(海崙)은 효능(孝陵)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 창의하여 충효를 드높이니 나라에서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덕양의 다섯 아들은 해룡(海龍), 해붕(海鵬), 해구(海龜), 해봉(海鳳), 해학(海鶴)이다.
해구(海龜)는 유일(遺逸)로 천거되고 효성이 뛰어나 희능(禧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해봉(海鳳)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경기전(慶基殿)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별제(別提)를 역임한 뒤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모두 싣지 않는다.
아! 공의 기개와 재능은 세상에 쓰일 만 했으나 곧바로 막힌 운수를 만났고 영욕과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고 숨어서 생을 마치니 이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후손들이 번창하여 대대로 가업을 이으니 하늘이 복으로 갚아 줌이 여기에 있는 것이리라 이어 명(銘)을 붙인다.
화려한 가문에서 공이 오직 빼어나 영특한 자질로 나라의 방패가 되었네. 신하들이 권력을 훔치니 물러나 산림에 묻혀 즐겁게 어머니를 모시면서 아침저녁으로 효도했네. 몸과 이름을 온전히 하여 편안히 늘그막을 보내니 훗날 공의 덕을 살피려면 청컨대 이 명(銘)을 보라.
서기 1971년 신해 월 일 안동후인 김윤동(金潤東) 지음
2007년 정해 월 일 죽산후인 철학박사 안동교(安東敎) 번역
단군 기원4340년, 2007 정해 중추절
전주후인 이규형(李圭珩) 근서(槿書)
<8> 贈 通政大夫 工曹參議 羅州羅公 德謙之墓(증 통정대부 공조참의 나주나공덕겸지묘)
配 淑夫人 豊山洪氏(배 숙부인 풍산홍씨)
〇세계 : 시조 부(富) -후1세 득규(得虯)-2세 중윤(仲允) -3세 송기(松 奇)-4세 수영(守永)-5세 源(원) -6세 진(璡) -7세 공언(公彦)-8세 집(諿)-9세 자강(自康) -10세 계조(繼祖) -11세 일손(逸孫) -12세 -창(昶) -13세 사음(士愔) -14세 덕겸(德謙) |
<비문 후면>
이곳 나주 장흥동 오좌(午坐)의 묘원(墓原)은 통정대부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된 나공(羅公)의 만년유택이다. 공의 휘(諱)는 덕겸(德謙)이요 자(字)는 익지(益之)이니 나주인이다. 아버지 휘(諱)는 사음(士愔)으로 용양위부호군의 관직을 역임하고 한성부 좌윤에 증직되었고 할아버지의 휘(諱)는 창(昶)인데 세자시강원 필선이며, 증조의 휘(諱)는 일손(逸孫)인데 전연사 직장으로 승정원죄승지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 창영성씨는 장사랑 완(阮)의 따님이며 계비 이천서씨는 종사랑 윤지의 따님이다. 그이전의 선대 세계(世系)는 지제공(止齊公) 묘갈명(墓碣銘)에 상세히 갖추어 기록 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다시 밝히지 아니하였다. 공은 조선왕 인종 을사 서기1545년12월12일에 출생하였고 서기 1616년 병진 11월16일에 졸하니 향년 72세이다. 벼슬은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증직 되었다. 배위 풍산홍씨는 참봉(參奉) 한신(漢信)의 따님으로 서기1541년 신축(辛丑)에 출생하여 1630년 경오(庚午)에 졸하니 향수(享壽)는 90이시고 묘는 合窆하다. 1남3녀를 두시니 해륜(海崙)은 참봉(參奉)으로 인조 갑자 서기 1624년 이괄(李适)의 난과 인조 병자 서기1636년 호란의 양란(兩亂)을 만나 의병을 일으켜서 효능참봉(孝陵參奉)에 제수 복호(復戶)의 몽전(蒙典)을 받았고 주부(主簿) 최정(崔挺)과 오수성(吳守性) 최홍찬(崔弘纘)은 모두 사위이다. 손자 희(僖)는 생원이요 경(儆)과 민(亻黽)은 진사이다. 다음은 선(僐)이고 보(保)는 통덕랑(通德郞)이요 다음은 근(僅)이다. 증손은 모두 22명인데 희(僖)의 아들 천로(天老)는 생원이요, 다음은 천규(天奎)이고, 천정(天鼎)은 진사요, 다음은 천태(天泰)요 천형(天衡)과 천심(天心)은 생원이다. 또 경(儆)의 아들 천주(天柱)는 통덕랑이요 천우(天祐)는 통정대부 부사직이다. 민(亻黽)의 아들은 천두(天斗), 천구(天衢), 천벽(天璧)이요, 희(僖)의 아들 천추(天樞)는 생원이요 다음은 천경(天經)이고 천위(天緯)와 천태(天台)는 통덕랑(通德郞)이다. 그리고 보(保)의 아들 천극(天極)은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장악원정(掌樂院正)이요 다음은 천표(天標)와 천기(天璣)이다. 근(僅)의 아들은 천실(天室), 천환(天煥), 천각(天閣), 천립(天立)이다. 훌륭한 후손들이 많으나 능히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묘도(墓道)에 아직까지 새겨놓은 비가 없어 나씨문중 여러 선비들이 나에게 그 비석 후면에 글을 지으라 청하므로 그 추모의 정신에 감동되어 마침내 그 사료를 모아서 서술 하노니 오로지 이 능곡(陵谷)의 걱정이 없게 되리라.
서기 1971년 신해(辛亥) 양춘(陽春) 안동후인 김윤동(金潤東) 찬(撰)
대한민국85년, 계미(癸未) 음 8월 서기 2003년 9월 일
진원후인(珍原后人) 박경래(朴景來) 국역
전주후인(全州后人) 이규형(李圭珩) 근서(謹書)
나주나씨 참의공파후손 일동 근수(謹竪)
<9> 通政大夫宮闕都監羅公德讓之墓(통정대부궁궐도감나공덕양지묘)
配淑夫人咸平李氏(配淑夫人咸平李氏)
〇세계 : 시조 부(富) -후1세 득규(得虯)-2세 중윤(仲允)-3세 송기(松 奇)-4세 수영(守永)-5세 源(원) -6세 진(璡)- 7세 공언(公彦)-8세 집(諿)-9세 자강(自康) -10세 계조(繼祖) - 11세 일손(逸孫) -12세 -창(昶) -13세 사음(士愔)-14세 덕양(德讓:1548~1618) |
<비문 후면>
옛적 임진 계사년에 나라가 결딴나는 위급한 때에 충성스런 신하와 열사들의 마음이 활달하여 조그마한 일에는 구애하지 않았다.
삭망 날에 고 통정대부 궁궐도감 나덕양은 벼슬을 하지 못한 선비이지만 무슨 일이든 앞장서서 나아가 의기를 떨쳤으며 죽기를 맹서하고 적을 토벌하니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스런 마음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후세로 하여금 신하됨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공이 죽은 지 3백여 년이 지나 후손들이 비문을 세우자고 모의하여 이 일을 마침내 종성, 종열에게 시키자 나에게 명을 구하려는데 세의로 거절하기 어려워 행장을 상고하여 서술하였다.
공의 자는 득지요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장군 부가 시조로 누대로 전해오며 공언은 외적을 토벌한 공으로 나성군에 봉해졌다.
조선조에 들어와 자강은 무안현감으로 살았으며 계조는 장사랑으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일손은 직장이며 증직으로 도승지를 하였으며 기묘명현으로 전해진다. 할아버지 창은 필선을 하셨으며 글씨나 문장을 쓰는 법으로 이름이 세상에 높이 드러났으며, 아버지 사음은 재주와 용기가 있어서 한음 이덕형 재상의 추천으로 절충장군 부호군을 제수 받았다.
비는 이천서씨 장사랑 윤지의 따님이다. 공은 명종 무신년에 태어났으며 효도와 사랑이 순수하고 독실하고 또한 기개와 절조가 있어 사람들은 모두 뜻과 문경과 학식이 깊고 원대하다 하였는데 섬나라 오랑캐가 창궐하여 종묘사직과 백성들이 조석으로 위기에 빠지자 공이 통분하여 마침내 의(義)의 지팡이를 따라 건제 김천일과 무리들과 모의를 하고 기를 세웠으며 스스로 양식과 기기의 운반책임을 분담하여 죽음을 무릎 쓰고 앞으로 나아가 이러한 양식이나 기기를 사정에 맞게 수원으로, 강화의 진으로, 진양을 지키는 곳으로, 선산의 부병소까지 음식을 보내어 접대하는 적절한 처리는 역시 공의 큰 조운(漕運)의 힘에 의한 것이다.
원수 권율장군이 공의 진을 오갈 때 식복, 기계를 밤을 세워 즉시 보수를 하여 주었으며 이대윤 최상중 등과 번갈라 가며 마음과 힘을 다 쏟아 끝없이 조운하였으니 안무사 학봉 김성일이 삼남의 조운에서 호남이 가장 잘했다는 것을 아뢰어 벼슬에 임명하도록 천거하였으나 난이 평정 된 후 삼장사와 같이 함께 순절하지 못한 것을 매양 한스러워 했으며 나아갈 뜻을 끊고 몸을 뒤로 숨기면서 험한 바위너설에 몸을 던져 자결하려 하였다. 인조 무오년 4월27일 죽으니 향년71세였다.
나주 서쪽 장흥동에 장사 지내니 침자의 자리이다.
배는 함평이씨 좌랑 강의 따님으로 선비의 기풍이 있었으며 노나라의 예에 따라 묘를 썼다.
다섯 아들을 길렀는데, 해룡, 해붕, 해구는 유일(遺逸)로 참봉이 되고 책을 읽으면서 효도를 한 진사 해봉은 중형과 함께 사계 김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해학은 참봉으로 손자 증손 이하로는 다 기록하는 것이 번거로워 하지 않는다.
아, 세월이 흘러 공의 능침은 멀고 문헌의 흔적은 이지러져서 완전하지 못하는데 삼가 상세함은 어렵지만 생각해보니 충성과 사랑의 정성이 탁월하므로 이와 같이 비록 백세가 지났지만 더욱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명에 이르기를
忠義之性(충의지성)/충의의 품성이요
才智之名(재지지명)/재주와 슬기로 이름이 났네.
適時板蕩(적시판탕)/때마침 나라가 결딴 날 때에
敵愾殫誠(적개탄성)/적에 대한 분노로 충성을 다하였네.
起自草野(기자초야)/스스로 초야에서 일어나
大振義聲(대진의성)/의로운 명성을 크게 떨쳤지만
亂定斂藏(난정렴장)/난이 평정되어 그 공을 감추고
絶意復榮(절의복영)/명예가 회복되는 뜻도 끊었네.
沒身自靖(몰신자정)/종신토록 조용히 지내니
志操之淸(지조지청)/지조가 맑아져
長興之原(장흥지원)/장흥골 언덕이
有山崢嶸(유산쟁영)/산처럼 높이 솟아 있네.
내가 쓴 명(銘)은 그윽한 것을 드러내는 묘표로 무덤 앞에 우뚝 서리라.
천중절에 은진 송재성 짓고, 청송 심한구 삼가 쓰다.
병오 3월 일에 삼가 세우다.
첫댓글 맨 밑 덕양공 생몰년을 (1548~1618)으로 수정합니다..
몰년을 경오년(庚午年 1630) 무오년(戊午年 1618) 간지가 해서체로 쓰였기에 庚과 ,戊가 혼동이 추정합니다...
남간 해봉공은 덕양공의 4子임
"남간공 연보에서...
萬曆四十六年戊午, 光海君 十年, 三十五歲(만력사십육년무오, 광해군 십년, 삼십오세)/1618년 무오년 광해군 10년,
春侍通政公患侯(춘시통정공환후)/봄에 통정공의 환후에 시중들었다
時沉疴二載有奇湯藥不掇(시침아이재유기탕약불철)/때는 2년간 지병으로 기이한 탕약을 가리지 않고 썼으나
危谻斷斷指(위갹단단지)/위독해지자 斷指를 斷行 하였다.
夏四月二十七日丁通政公憂/여름인 4월27일에 아버지의 喪을 당하였다
<4> 奉訓郞道康監務羅州羅公設之墓 (봉훈랑도강감무나주나공 설지묘)...홍맹신(洪孟信)은 딸하나가 있는데 진사 진이손(陳二孫)에게 시집갔다.
(陳二孫)은 금강 11계 士林들 ..
<4> 奉訓郞道康監務羅州羅公設之墓
申光漢 (1484(성종 15)∼1555)공조참판 신장(申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신숙주(申叔舟)
임첨(林襜)은 인조때 장군 林 檜 (1562(명종 17)∼1624) 증조부,,,
設 公의 系子 9世 孟禮公의 親父는 누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