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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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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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난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이 끔찍한 시기를 견디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회복하지 못할 것 같아요. 환청이 들리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제껏 내 모든 행복은 당신이 준 것이고, 더 이상 당신의 삶을 망칠 수 없습니다.”
정확히 63년 전인 1941년 3월 28일 ‘등대로’ ‘미세스 댈러웨이’ ‘세월’ 등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이런 쪽지를 남편에게 남겨놓고 산책을 나가서, 돌멩이를 주워 외투 주머니에 가득 넣고 아우스 강으로 뛰어들었다.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알려진 영국 최고의 모더니스트 작가는 이렇게 스스로의 삶을 마감했다.
예술가나 작가 중에는 유난히 버지니아 울프처럼 자살로 삶을 마감한 사람들이 많다. 반 고흐나 차이코프스키가 그렇고, 작가 중 미국시인 하트 크레인은 보트에서 뛰어내렸고, 랜델 제렐은 신혼여행 가는 자동차에 뛰어들었고, 실비아 플라스는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새라 티즈데일은 떠나간 연인에게 ‘나 죽으면 그대는…’이라는 아름다운 서정시를 유서 대신 써놓고 수면제를 먹었고, 또 다른 미국시인 앤 색스턴도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자살에 성공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치매기에 대한 공포와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1961년 6월 권총자살했다. 1928년에는 그의 아버지가 똑같은 방식으로 자살했었으며 그의 형·누이에 이어 1996년에는 손녀이자 유명한 배우였던 마고 헤밍웨이가 자기 할아버지의 기일에 자살함으로써 한 가족에서 다섯 명이 자살한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일본문학에서도 미시마 유키오,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자이 오사무 등 굵직굵직한 작가들이 모두 스스로의 재능을 자살로 마감했다. 우리나라 작가 중에는 얼핏 생각나는 이가 ‘봄은 고양이로소이다’를 쓴 이장희가 있다. 청산가리를 먹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장희를 그의 아버지가 발견, 숟가락으로 아들의 입을 벌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그는 악착같이 입을 다물고 죽음을 택했다.
미국에서는 창의력과 자살 충동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고, 시인이나 작가가 보통사람들에 비해 중증의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네 배 정도 높다는 연구가 발표된 바 있다. 그렇지만 꼭 작가나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요즘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자살이 많다. 마치 추풍낙엽처럼, 걷잡을 수 없이 생명들이 불 속으로, 물 속으로 뛰어든다.
성서 구절을 실제상황에 적용시켜 해석해 놓은 유대교의 ‘미드라시’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고 한다. 어느 날 다윗왕이 보석 세공인에게 “반지 하나를 만들되 거기에 내가 큰 승리를 거둬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감정을 조절할 수 있고, 동시에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는 다시 내게 기운을 북돋워 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는 명령을 내렸다. 좀처럼 그런 글귀가 생각나지 않자 보석 세공인은 지혜롭기로 소문난 솔로몬 왕자를 찾아갔다. 도움을 청하니 왕자가 답했다. “그 반지에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고 새겨 넣으십시오. 왕이 승리감에 도취해 자만할 때, 또는 패배해서 낙심했을 때 그 글귀를 보면 마음이 가라앉을 것입니다.”
모든 삶의 과정은 영원하지 않다. 견딜 수 없는 슬픔, 기쁨, 영광과 오욕의 순간도 어차피 지나가기 마련이다. 모든 것이 회생하는 봄에 새삼 생명을 생각해 본다. 생명이 있는 한, 이 고달픈 질곡의 삶 속에도 희망은 있기 때문이다.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