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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6월24일 토요일 서해랑길 77코스 사진입니다.
03. 가는곳 : 서해랑길 30번째(서해랑길77코스) 남진
도성3리마을회관~서산창작예술촌~검은굿지산~흑석소류지~팔봉초등학교 12.2k, 4h
도성3리 마을회관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 도원리(桃源里)의 ‘도’자와 성동(星洞)의 ‘성’자를 따서 도성리(道成里)가 되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돗다란리, 셩동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 저주리(猪走里)이던 마을이 1895년 성동과 도원리의 두 개 리로 분리되었다. 1914년 도원리와 성동리가 합쳐져 서산군 지곡면 도성리가 만들어졌다. 1995년 서산군과 서산시의 통합에 따라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구릉성 산지와 곡간지(谷間地)로 이루어져 있으며, 곡간지는 가로림만에 의해 간석지가 발달하였던 지역으로 간척지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현황
2010년 12월 기준으로 면적은 6.6㎢ 이며, 2014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210세대에 436명(남자 203명, 여자 23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3개의 행정리, 10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릉지 주변에 성동·안태·고잔·닭전·잔넘어·시드물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특산물은 낙지, 바지락, 굴, 맛 등 해산물이다. 2010년 7월에 칠지도 제작 야철지 기념비가 도성리 마을회관 앞에 건립되었다. 또한 2011년 7월 14일에 도성리 마을회관에 주민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칠지도 제작 도장(刀匠) 추모제가 열렸다. 동쪽은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와 화천리, 서쪽은 중왕리, 남쪽은 산성리, 북쪽은 가로림만에 접한다.
참고문헌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이은우, 『서산의 지명사』(서산시, 2008)
『2011 통계로 보는 서산시 모습』(서산시, 2011)
「서산 지곡 도성리서 칠지도 제작 도장 추모제」(『대전일보』, 2011. 7. 15)
서산시 지곡면(http://jg.seosan.go.kr/)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서산의 문화예술 창작예술
마을과 마을을 잇는 농촌의 풍경을 엿볼 수 있는 코스에는 기존 문화에 더해진 도예(陶藝) 공예(工藝)의 - 예술촌과 어촌체험마을에서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여 가족단위 관광객에게 추천할만한 코스 관광포인트 - 폐교된 분교를 활용한 공간으로 미술, 도예, 공예품 등을 전시한 '서산창착예술촌' - 바지락 캐기, 낙지 잡기 등 체험과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는 '중리어촌체험마을'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화 예술 행위.
개설
충청남도 서산 지역 문화예술의 형성과 발달은 지역의 자연적 조건과 관계가 깊다. 한반도의 서쪽 부분, 충청도의 서북부 끝자락에 위치한 서산 지역은 비교적 넓은 해안선을 끼고 있으며 높은 산과 큰 강이 없는 평야 지대이다. 지형적인 조건 때문에 개간이 용이하여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는 일도 적었을 것이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은 문화예술적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미술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미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은 안견이다. 안견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로 유명한 조선 시대의 화가로 서산시 지곡면 출신이다. 안견을 기리기 위해 안견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며, 매년 안견 예술제가 개최되고 있다. 서해안고속국도의 개통으로 수도권과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많은 미술가들이 서산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서산시 문화회관의 전시실, 서산갤러리 등을 통해 도움을 받고 있다. 현재는 없어진 서인사랑이라는 공간을 통해서도 도움을 받았다. 한국미술협회 서산시지부를 통해 미술가의 권익 옹호 및 상호 교류 활동이 이루어고 있다. 주요 미술 단체로는 1981년 화촌회, 1983년 서산서도회, 1984년 묵향회, 1986년 연묵회, 1990년 서해조형작가회, 1994년 서산미술교과연구회, 1995년 서산청년작가회 등이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과 함께 서산 출신의 미술가들은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서 특선 등에 꾸준히 입선하고 있다.
연극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연극은 1940년대에 서산악극단의 설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설립된 서산악극단은 「흥부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홍길동전」 등의 고전을 공연하여 서산 지역 민중의 삶에 힘을 주었다. 당시의 무대는 지금과 같은 상설 무대가 아니라 주로 임시 가설 무대였다. 1948년에는 서산농림중학교[현 서산중앙고등학교] 학생들이 악극단을 만들고 서산 지역 각지에서 「의사 안중근」을 공연하여 서산 지역민의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1950년대에 소규모의 연극이 성행한 이후 서산 지역의 연극이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으나, 1991년 서산 지역 최초의 현대적 극단 둥지가 창단되면서 다시 활성화되었다. 극단 둥지는 「토끼와 포수」를 시작으로 「등신과 머저리」, 「동승」 등을 연달아 공연하였으며, 특히 「동승」은 전국 연극제에도 참가하여 서산 지역 연극을 중앙에 알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1995년 창단된 ‘뻘바람’은 서산의 또 다른 대표적 극단이다. 뻘바람은 창단 기념 마당극 「아무일도 없었습니다」를 시작으로 1990년대 말에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이후 공간 문제로 활동이 뜸하였으나, 2011년 7월 서산시 동문동에 전용 연습실을 마련함으로써 활발한 활동이 기대되고 있다. 현재는 한국연극협회 서산시지부가 서산 지역 연극인들의 창작 활동을 돕고 있다.
음악
서산 지역은 중고제판소리의 산실로 유명한 국악인을 많이 배출했으며, 특히 고수관이 유명하다. 이에 전통 국악 전승을 위하여 고수관전수관을 지어 교육 활동에 힘쓰고 있다. 또한 한국국악협회 서산시지부, 창우국악교습소, 스산농요보존회[전 우리소리연구회], 뜬쇠예술단, 고북연암풍물단 등의 상설 단체가 활동하고 있으며, 서산 지역의 각 읍·면·동에서도 한두 개의 단체가 활동하면서 국악 발전 및 전승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국악 중심의 활동에 비해 양악 중심 합창단의 활동이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합창단으로는 호산나합창단, 서해윈드앙상블, 서산시 소년소녀합창단 등이 활동하고 있으며, 각종 합창 경연 대회도 개최되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중반에 활동한 박명신의 영향으로 서산 지역 소재 각 급 학교에서 합창단이 만들어져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편 서산 지역 출신의 가수로는 심수봉과 별이 유명하다.
무용
서산 지역에서 무용은 다른 예술 분야에 비해 취약한 편이나 고전 무용으로 심화영 승무가 유명하다. 1930년대의 옛 형태의 승무인 심화영 승무는 2000년 1월에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27호로 지정되었으며, 더불어 심화영 승무보존회가 설립되어 보존에 힘쓰고 있다. 2009년 11월 17일 심화영이 타계한 이후로 손녀인 이애리가 기능 보유자로서 뒤를 이어 활동하고 있다. 그 외에 발레 학원 두개가 있으며 학교 방과 후 활동 프로그램으로 댄스 동아리 등이 운영되고 있는 것이 전부다.
참고문헌
『서산의 문화』(서산향토문화연구회, 1996)
『서령예술』(서령인사, 1997)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스산의 숨결』(서산문화원, 1983~2010)
「충남도 무형문화재 심화영 선생 별세」(『서산인터넷신문』2009. 11. 18)
「충남 무형문화재 심화영씨 별세」(『충청일보』, 2009. 11. 19)
뻘바람(http://baaraam.com.ne.kr/)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흑석리[黑石里]=검은굿지산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마을 들 가운데 볏섬 크기 정도의 커다란 검은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검은돌, 거문들, 흑석 등으로 불렸다고 전하지만, 농지 정리 작업 과정에서 없어져 현재는 확인할 수 없다. 일설에는 대황2리 마을 바닷가에 있는 검은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789년(정조 13)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흑석리(黑石里),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거믄돌[黑石里]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는 서산군 문현면 지역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흑석리와 잉복리 일부를 합쳐 흑석리라 하고 서산군 팔봉면에 속하게 하였다. 1995년 서산군과 서산시가 통합됨에 따라 서산시 팔봉면 흑석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동쪽과 북쪽 그리고 남쪽은 연화산으로부터 흘러온 산줄기가 이웃 마을과 경계를 형성하며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이들 산자락 끝에 소규모 가옥들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을 경계 삼아 볼 때 뒤쪽은 대부분 밭으로 이용되고 있고, 앞쪽 즉 서쪽의 서해 가로림만으로 열려 있는 곳에는 간척 매립으로 만들어진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평야 위쪽에 흑석소류지가 있다.
현황
흑석리는 팔봉면의 북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2010년 12월 기준으로 면적은 4.57㎢이며, 2014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90세대에 187명(남자 97명, 여자 9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검은돌[흑석]·큰말·너북이[광복]·학림·반월[발월]·양지편 등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유적으로 흑석리 돌장승 2기가 있다.
참고문헌
『호구총수(戶口總數)』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越智唯七,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7)
『한국지명총람』4-충청남도(한글학회, 1974)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이은우, 『서산의 지명사』(서산시, 2008)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팔봉초등학교[八峰初等學校]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양길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
교육 목표(교훈 포함)
기초가 충실한 똑똑한 학생, 기본을 갖춘 올바른 학생, 몸과 마음이 튼튼한 학생 육성을 교육 목표로 하고 있다. 교훈은 ‘사랑을 심어 주고 꿈을 가꾸는 지덕체 교육’이다.’
변천
1927년 4월 4일 팔봉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다. 1940년 4월 4일 팔봉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61년 9월 1일 팔봉국민학교 고파도분교장을 개교하였으며, 1984년 12월 1일 팔봉국민학교 호리분교장을 개교하였다. 1996년 3월 1일 팔봉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9년 9월 1일 팔봉초등학교 호리분교장을 통폐합하고, 2008년 3월 1일 고성초등학교를 통폐합하였다. 2016년 2월 5일 제85회 졸업생까지 총 7,54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교육 활동
학생들의 기본예절 생활 실천과 자기 주도적 학습력과 창의력을 기르기 위한 맞춤형 학습 및 독서 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방과 후 활동으로 영어, 풍물놀이, 한자, 학력 향상 및 보충을 위한 교과반을 운영하고 있다.
교가와 상징물
1. 교가[작사 이석래/작곡 이계광]
팔봉산 높은 정기 우리의 기상/ 봉황이 빛을 밝힌 무지개 동산/ 여기에 새싹들이 슬기를 모아/ 청운의 푸른 꿈을 꽃피워 간다/ 보아라 우리들의 힘찬 전진을/ 그 이름 길이 빛낼 팔봉학교.
2. 교목: 단풍나무이다. 3. 교화: 개나리이다.
현황
2015년 4월 1일 기준 특수학급 1학급 포함 총 7학급에 43명이 재학하고 있다. 이 중 본교인 팔봉초등학교는 1학년은 1학급에 11명, 2학년은 1학급에 5명, 3학년은 1학급에 9명, 4학년은 1학급에 5명, 5학년은 1학급에 3명, 6학년은 1학급에 4명이 재학하고 있다. 팔봉초등학교 고파도분교장은 5~6학년이 1학급으로, 5학년 2명, 6학년 1명으로 총 3명이 재학하고 있다. 교직원은 교장 1명, 교감 1명, 교사 8명, 그리고 행정 담당 및 일반직 7명 등이 근무하고 있다. 도서관, 어학실, 체육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참고문헌
팔봉초등학교(http://www.palbong.cnees.kr)
전화 인터뷰(팔봉초등학교 고파도분교장 직원, 2011. 7. 20)
전화 인터뷰(팔봉초등학교 교무실 직원, 2011. 7. 20)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6-17 작성자 명사십리
2023-06-25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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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상한 후기와 더불어
명 영상둘 즐감했어요.
감사합니다.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농지정리가
잘 된 논에 심은 벼가 튼실하게 뿌리를 내려 활착이
되니 포기가 굵어지고 짙은 녹색으로 변하여 여름임
을 실감케 합니다... 늘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