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59 편
데카폴리스 여행
. 중도자 위원회
. 29년 8월 18일 ~ 9월 16일
. 장소 : 데카폴리스
159:0.1 예수와 열두 사람이 마가단 공원에 도착했을 때, 여인단까지 포함하여 거의 1백 명의 전도사와 제자들의 무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했고, 그들은 즉시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에서 가르치고 전도하는 여행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9:0.2 8월 18일 목요일 아침, 주는 추종자들을 불러 모으고, 사도들은 각자 열두 전도사 가운데 하나와 함께 연합하여, 다른 전도사들과 함께 열두 그룹으로 나누어,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수고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여인단과 다른 제자들은 그와 함께 남아 있으라고 지시했다. 예수는 이 여행에 4주를 할당하였고, 추종자들에게 9월 16일 금요일까지는 마가단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그들을 자주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달 동안에 이 열두 그룹은 게라사ㆍ가말라ㆍ히포, 자폰ㆍ가다라ㆍ아빌라, 에드레이ㆍ필라델피아ㆍ헤스본, 디움ㆍ스키토폴리스, 그리고 많은 다른 도시에서 일했다. 이 여행 기간 동안에 치유 기적이나 다른 특별한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1. 용서에 관한 설교
159:1.1 어느 날 저녁 히포에서 한 제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는 용서에 대한 교훈을 가르쳤다. 주가 말했다:
159:1.2 “마음이 착한 어느 사람이 양 1백 마리를 키우다가, 그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바로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아서 나서지 않겠느냐? 그리고 만약 그가 좋은 목자라면, 잃어버린 양을 찾아낼 때까지 계속 찾지 않겠느냐? 그리고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내면, 그 양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면서 집으로 가서 친구와 이웃들에게 소리칠 것이다, ‘함께 즐거워하자, 내가 잃어버린 내 양을 찾아냈다.’ 내가 선언하니, 회개할 필요 없는 올바른 아흔아홉 사람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명을 하늘에서 더욱 크게 기뻐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작은 아이들 중 하나가 길을 잃거나, 하물며 그들이 멸망하는 것은 더더욱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너희의 종교에는 하나님이 회개하는 죄인들을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의 복음에서는 그들이 회개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그들을 찾으려고 나가신다.
159:1.3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따라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너희의 죄를 용서하신다; 따라서 너희는 서로 용서하기를 배워야 한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지었으면, 그에게 가서, 재치와 인내심을 가지고 그가 잘못한 것을 보이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너와 그 사람 둘이서만 하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를 설득한 것이다. 그러나 형제가 네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가 자기의 잘못된 길을 고집하거든, 서로에게 친구인 사람 한두 명을 데리고 그에게 다시 가라. 이처럼 둘 아니 세 증인이라도 너의 증언을 확인하고, 죄를 저지르는 형제를 네가 공정하고 자비롭게 다루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라. 이제 그가 형제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든, 너는 회중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도 좋고, 다음에 그가 단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든, 그들이 현명하다고 여기는대로 행동하게 하여라; 그렇게 제멋대로인 구성원은 하늘나라에서 쫓겨나게 하라. 너희는 동료들의 혼을 심판하는 듯 할 수 없고, 너희가 죄를 용서해 주거나 다른 방법으로 하늘 무리의 감독자들의 특권을 빼앗을 수도 없지만, 동시에 세상의 나라에서 현세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일이 너희 손에 맡겨져 있다. 너희가 영생에 관한 신성한 율례를 간섭할 수는 없겠지만, 땅에서 너희는 형제들이 현세에 누리는 복지에 관계되는 행동 문제들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형제의 규율과 관련된 이 모든 일은, 땅에서 너희가 무엇을 선포하든지 하늘에서 인정받을 것이다. 비록 너희가 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으나, 너희는 단체 행동에 대해 법을 제정할 수 있다. 이는 이 일 중에 어떤 것에 관해서도 너희 가운데 두셋이 찬성하고 내게 요청하면, 그 간청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언제라도 사실이니, 두세 명의 신자가 모여 있는 곳에는, 그 가운데 내가 있다.”
159:1.4 시몬 베드로는 히포에 있는 일꾼들을 책임진 사도였다. 예수가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듣자 그는 말했다: “주님,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얼마나 자주 그를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예수는 베드로에게 대답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집사에게 재정적인 계산을 명령하는 어떤 왕에 비유할 수 있다. 그들이 장부 검사를 시작했을 때, 우두머리 신하들 중에서 하나가 앞에 끌려 와서 그가 왕에게 1만 달란트를 빚졌다고 고백하였다. 왕의 궁정에 있는 이 관리는 어려운 시절이 그에게 닥쳤고 이 빚을 갚을 물건이 없다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왕은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의 자녀들을 팔아 빚을 갚도록 명령하였다. 이 엄명을 듣자 이 우두머리 집사는 왕의 앞에 쓰러져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베풀고 그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왕에게 탄원하며 말했다, ‘주여, 나를 조금 더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모두 갚겠습니다.’ 이 나태한 신하와 그 가족을 바라보았을 때 왕은 동정심에 마음이 움직였다. 왕은 그를 풀어주고, 빚을 전부 탕감해주라고 명령하였다.
159:1.5 “이 우두머리 집사가 왕의 손에서 이렇게 자비와 용서를 받고 나서 열심히 일하였는데, 그에게 겨우 1백 데나리온 빚진 그의 하급 집사 하나를 발견하고서 그를 붙잡아 멱살을 잡고 말했다, ‘네가 내게 빚진 것을 모두 갚아라.’ 그리고 나서 이 동료 집사는 우두머리 집사 앞에 쓰러져서 탄원하며 말했다, ‘나를 참아 주십시오. 그렇게만 하시면 내가 곧 당신께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두머리 집사는 동료 집사에게 자비를 보이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빚을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의 동료 집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들의 주, 상전인 왕에게 가서 말하였다. 우두머리 집사가 한 일을 들었을 때, 그 왕은 고마움을 모르고 용서하지 않는 이 사람을 앞에 부르고 말했다: ‘너는 악하고 자격이 없는 집사다. 네가 동정을 구했을 때 나는 너의 빚을 모두 아낌없이 용서하였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보인 것 같이, 어째서 너도 동료 집사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았느냐?’ 그 왕은 아주 몹시 성이 나서, 고마움을 모르는 우두머리 집사가 빚진 것을 모두 갚을 때까지 붙들어 두도록 간수에게 그를 넘겨주었다. 그와 같이 동료에게 아낌없이 자비를 보이는 자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는 더욱 풍부하게 자비를 보일 것이다. 똑같은 이 인간의 약점을 가진 죄 때문에 너희가 형제를 꾸짖는 버릇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자신의 부족함을 배려해 달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너희 모두에게 말하니, 하늘나라의 좋은 것들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땅에 있는 동료들에게 거저 주라.”
159:1.6 이렇게 예수는 사람이 동료를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위험함을 가르치고 그 불공평함을 보여주었다. 규율은 유지되어야 하고 공정은 집행되어야 하지만, 이 모든 문제에서 형제 사랑의 지혜가 앞서야 한다. 예수는 입법과 사법 권한을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게 맡겼다. 이렇게 권한을 집단에 맡기는 것조차 개인의 권한으로서 행사해서는 안 된다. 한 개인의 판결이 편견 때문에 치우치거나 열정 때문에 왜곡될 위험이 언제나 있다. 집단의 판결은 개인적 편견에 따르는 위험을 없애고 불공평을 제거할 가능성이 더 많다. 예수는 언제나 불공평ㆍ앙갚음ㆍ복수의 요소를 최소로 줄이려고 애썼다.
159:1.7 [자비와 참을성의 예로 일흔일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라멕이 몹시 의기양양해 하는 것을 언급하는 성서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라멕은 그의 아들 두발 가인이 가진 금속 무기 때문에, 적들의 무기와 이 우수한 도구를 비교하면서 “카인이 그의 손에 무기도 없이 일곱 배의 복수를 했다면, 나는 이제 일흔일곱 배로 복수를 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2. 이상한 설교자
159:2.1 예수는 가말라로 건너가 요한과 그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을 방문하였다. 그날 저녁, 질문과 대답이 끝난 후에, 요한은 예수에게 말했다: “주님, 나는 어제 아스타롯에 가서, 당신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던 사람, 아니 악귀들을 내쫓을 수 있다고도 주장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와 한 번도 함께 한 적이 없었고, 우리 뒤를 따라 다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가 대답했다: “그를 막지 말라. 이 하늘나라 복음이 곧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어떻게 복음을 믿을 모든 사람이 너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기대할 수 있느냐? 우리의 가르침이 이미 우리의 개인적 영향력의 한계를 넘어서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기뻐하라. 요한, 내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한다고 공언하는 자들이 결국엔 우리 운동을 지지해야 하는 것을 모르겠느냐? 그들은 분명히 급하게 나를 나쁘게 평하지 않을 것이다. 내 아들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그가 우리를 위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후대에 온전히 가치가 없는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이상한 일을 많이 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금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마른 혼에게 찬물을 주더라도, 아버지의 전령들은 그런 사랑의 봉사를 기록하게 될 것이다.”
159:2.2 이 설명은 요한을 크게 당황하게 했다. “나와 함께 있지 않은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하는 주의 말씀을 그가 듣지 않았는가? 이 경우에는 하늘나라의 영적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 사이의 개인적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반면, 다른 경우에는 한 집단의 신자들이, 앞으로 생길 세계적 형제 단체를 궁극에 구성할 기타 집단의 일을 행정적으로 통제하고 관할하는 권리에 관하여, 밖으로 나타나는 광범위한 관계, 신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언급했음을 요한은 깨닫지 못했다.
159:2.3 그러나 요한은 종종 하늘나라를 위해 그의 이후의 수고와 관련하여 이 체험을 회상했다. 그런데도 사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대담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여러 번 화를 냈다. 그들에게는 예수의 발 앞에 앉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감히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것은 항상 부적절해 보였다.
159:2.4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일하지 말라고 요한이 막은 이 사람은 사도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노력을 계속하였고, 메소포타미아로 계속 가기 전에 카나타에서 상당한 무리의 일행을 모았다. 이 사람 아덴은 케레사 가까이에서 예수가 고쳐 준 미친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주가 그에게서 내쫓았다고 생각한 그 악령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들을 몰아 벼랑을 넘어 거꾸로 떨어져 죽게 만들었다고 아주 확신했던 사람이었다.
3. 선생과 신자를 위한 가르침
159:3.1 토마스와 그 동료들이 일하던 에드레이에서 예수는 낮과 밤을 보냈다. 저녁 토론 과정에서, 그는 진리를 전도하는 자들을 인도하고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는 모든 사람이 활동하도록 하는 원칙의 말씀을 주었다. 현대의 어구로 요약되고 재작성하면, 예수는 이렇게 가르쳤다:
159:3.2 항상 사람의 성격(personality)을 존중하라. 의로운 주장은 결코 힘으로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 영적 승리는 오직 영적 힘으로 얻을 수 있다. 물질적 힘을 이용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물리적 힘뿐만 아니라 정신의 힘도 언급한다. 압도하는 논리와 정신적 우월성으로 남녀들을 하늘나라로 들어가라고 강요하는데 이용해서는 안 된다. 인간 지성의 단순한 논리의 무게로 짓누르거나, 기발한 웅변으로 겁을 주어서도 안 된다. 인간 결정에서의 한 요소인 감정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하늘나라의 운동을 진전시키려 하는 자들을 가르칠 때, 감정에 직접 호소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단순한 감정에 호소하지 말라. 사람들에게 호소할 때는 공정해야 하고, 자제력을 발휘해야 하며, 생도들의 성격을 적절히 존중해야 한다.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갈 것이다.”
159:3.3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올 때, 그들의 자존심을 낮추거나 손상시키지 말라. 지나친 자존감은 적절한 겸손을 파괴하고, 자존심, 자만심, 오만함으로 끝날 수 있지만, 자존심을 잃는 것은 때때로 의지의 마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자존심을 잃은 자에게 자존심을 회복하고, 가진 자는 자제하는 것이 이 복음의 목적이다. 너희 생도들의 생활에서 잘못을 비난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 그들의 생활에서 가장 칭찬받을 만한 일에 대해 너그러운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 또한 기억하라. 자존심을 잃고서 정말로 다시 찾고 싶어 하는 자에게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나는 무슨 일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잊지 말라.
159:3.4 소심하고 두려운 혼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주의하라. 생각이 단순한 내 형제들을 희생하면서 빈정거리는 일에 빠지지 말라. 두려움에 시달리는 내 아이들에게 냉소적으로 굴지 말라. 게으름은 자존심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친구들에게 그들이 선택한 일을 바쁘게 하도록 충고하고, 직업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라.
159:3.5 “겁을 주어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들어오게 하는 것과 같은 가치 없는 책략을 쓰는 일에 결코 죄를 짓지 말라. 사랑하는 아버지는 자식들이 자신의 정당한 요구에 복종하도록 겁주지 않는다.
159:3.6 언젠가 하늘나라의 자녀들은 강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신성한 영의 인도하심과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곳으로 가도록 강하고 이상하게 감명을 받는 것이 반드시 그러한 충동이 내면에 깃드는 영이 이끄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59:3.7 육신을 입고 사는 삶으로부터 영적으로 사는 높은 삶으로 넘어가는 모든 이들이 영적으로 살아가면서 넘어야 할 갈등의 경계에 대해 모든 신자들에게 미리 경고하라. 어느 한 영역 안에서든 꽤 온전히 사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이나 혼란이 거의 없지만, 두 단계의 삶 사이의 과도기 동안에는 모두 다소간의 불확실성을 경험하게 마련이다. 하늘나라에 입성할 때, 너희는 그 책임을 회피하거나 의무를 회피할 수 없다. 하지만 기억하라: 복음의 멍에는 쉽고 진리의 짐은 가볍다.
159:3.8 세상은 생명의 빵을 바로 눈앞에 두고 허덕이는 갈급한 혼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사는 바로 그 하나님을 찾다가 죽는다. 살아있는 믿음으로 바로 붙잡을 수 있는 거리에 하늘나라의 보물이 모두 있는데, 사람들은 동경하는 마음과 지친 발로 이 보물을 찾는다. 믿음과 종교의 관계는 돛과 배의 관계와 같다. 믿음은 능력이 늘어나는 것이요, 생명의 짐은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자에게 오직 하나의 투쟁이 있으니, 즉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것이다. 믿는 사람은 오직 한 가지 투쟁이 있으니, 즉 의심―불신―을 이기는 것이다.
159:3.9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다만 하나님과 친구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친교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똑같이 호소할 것이요, 그들의 특징인 열망과 이상을 아주 참되게 채워주는 무엇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자녀들에게 말해라. 나는 그들의 느낌을 다치지 않으려 애쓰고 약점을 참을 뿐 아니라, 또한 죄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불의를 참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가 계신 앞에서 정말로 온유하고 겸손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일부러 저지르는 악행과 사악한 반란의 와중에서 나는 똑같이, 사정없이 용서하지 않는다.
159:3.10 너희의 선생을 슬픈 사람으로 묘사하지 말라. 미래의 세대는 우리의 기쁨의 광채, 우리의 선한 의지의 솟는 힘, 우리의 좋은 유머가 주는 영감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좋은 소식이 담긴 말씀을 선포하고, 변화시키는 그 힘은 사람들에게 퍼진다. 우리의 종교는 새 생명과 새 의미로 고동친다.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가슴 속에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다. 늘어나는 행복은 하나님을 확신하는 모든 사람이 항상 겪는 체험이다.
159:3.11 모든 신자가 거짓 동정이라는 불안한 버팀목에 기대지 않도록 가르치라. 자기 연민에 빠져서는 튼튼한 성품을 기를 수 없다; 불쌍한 처지를 단지 같이 슬퍼하는 거짓된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정직하게 애쓰라. 생활의 시련 앞에서 겨우 마지못해 버티는 비겁한 사람에게 지나친 동정을 삼가며, 담대하고 용감한 자에게 동정을 베풀라.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자기 문제 앞에 드러눕는 자를 위로하지 말라. 단지 동료들이 보답으로 너희를 동정할 수도 있다 해도 친구들을 동정하지 말라.
159:3.12 내 자녀들이 일단 신성한 존재에 대한 확신을 스스로 의식하게 될 때, 그러한 믿음은 시야를 넓히고, 혼을 고귀하게 만들고, 성격을 강화시키고, 행복을 키우고, 영적 인식을 깊게 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능력을 높여줄 것이다.
159:3.13 모든 신자에게 하늘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이 시간의 사고나 자연의 보통 재앙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라. 복음을 믿는다고 해서 곤경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너희에게 고난이 덮칠 때 너희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보장할 것이다. 너희가 감히 나를 믿고 마음을 다하여 나를 따라온다면, 그렇게 함으로 분명한 고난의 길로 아주 확실히 들어설 것이다. 나는 역경의 바다에서 너희를 구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지만, 나는 그 모든 역경을 함께 헤쳐나갈 것을 약속한다.
159:3.14 그리고 예수는 이 무리의 신자들이 밤에 잘 준비를 하기 전에 그들을 더 가르쳤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씀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했고, 이 말씀을 주실 때 자리에 없던 사도와 제자들의 수련을 위하여 이 말씀을 자주 되풀이했다.
4. 나다니엘과 한 이야기
159:4.1 그리고 나서 예수는 아빌라로 갔는데, 거기에는 나다니엘과 그 동료들이 일하는 곳이었다. 나다니엘은 예수의 선언 중에 일부가 인정된 히브리 성서의 권한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따라서 이날 밤에, 여느 때처럼 질문 대답 시간이 끝난 후, 나다니엘은 다른 사람들과 떨어진 데로 예수를 모시고 가서 물었다: “주님, 당신은 제가 성서에 대한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제가 관찰하기에는, 당신은 우리에게 신성한 기록의 일부만―내가 보건대 최선을―가르치고, 아브라함과 모세의 시대 이전에도 하늘에서 계신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율법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취지로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을 당신은 배척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성서에 대한 진실은 무엇입니까?” 혼란스러워하는 사도의 질문을 듣고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159:4.2 “나다니엘, 네가 옳게 판단하였다, 나는 성서를 랍비들과 같이 여기지 않는다. 나는 이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온전히 되어 있지 않은 너의 형제들에게 이 일을 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너와 함께 이야기할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담긴 말씀과 성서의 가르침은 아브라함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겨우 요즈음에 와서 성서가 우리가 가진 대로 수집되었다. 유대 민족의 최고 사상과 최선의 소망을 담고 있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본성과 가르침을 대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즉 나는 더 좋은 가르침 중에서 하늘나라 복음을 위하여 이삭을 줍듯 진리를 골라야 한다.
159:4.3 “이 글들은 사람들이 지은 것인데, 어떤 사람은 거룩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거룩하지 않다. 이 책들의 가르침은 그 기원이 있던 시절에 깨우친 관점과 정도를 나타낸다. 진리의 계시로서, 마지막 것은 처음 것보다 더 믿을 만하다. 성서는 결함이 있고 그 기원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지만, 잘못 생각하지 말라, 성서는 이 시점에 온 세상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지혜와 영적 진리 가운데 최고의 모음집이다.
159:4.4 “이 책들 중 다수는 자신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고, 그것이 담고 있는 진리의 가치를 결코 훼손하지 않는다. 요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요나가 살아있지 않았더라도, 니느웨와 소위 이교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 이야기의 심오한 진리는 동료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눈에는 여전히 귀중할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을 찾던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 글에 담고 있으며, 의와 진리, 거룩함의 가장 높은 개념을 기록하기 때문에 신성하다. 성서에는 참된 내용이 아주 많이 담겨 있지만, 현재 너희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이 글들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즉 내가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온 사랑하는 하나님을 잘못 표현한 내용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159:4.5 “나다니엘, 사랑의 하나님이 너의 조상에게 싸움터에 나가서, 적을 모두―어른과 아이들을―도륙하라 지시했다는 성서의 기록을 단 한 순간이라도 믿지 말라. 그런 기록은 그리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한 말이며,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다. 성서는 성서를 쓴 사람들의 지적ㆍ도덕적ㆍ영적 상태를 언제나 반영해 왔고,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선지자들이 사무엘부터 이사야까지 기록하면서 야웨 개념이 더 아름답고 영화롭게 성장하는 것을 너는 주목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너는 성서가 종교적인 가르침과 영적인 지도를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들은 역사가나 철학자들의 작품이 아니다.
159:4.6 “가장 개탄스러운 것은 단순히 성서의 완전성과 가르침에 오류가 없다는 잘못된 생각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전통에 노예가 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신성한 글을 혼동하여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하늘나라 복음의 새로운 가르침을 대적하기 위해 성서의 영감과 그 잘못된 교리 둘 다를 사용할 것이다. 나다니엘, 결코 잊지 말라. 아버지께서는 진리의 계시를 한 세대나 어느 한 민족에게만 주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이 성서의 완전성에 대한 이러한 교리에 혼란스러워하고 낙담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59:4.7 “진리의 권위는 살아있는 모습을 드러내는 바로 그 정신이지, 다른 세대에 깨우침이 덜한 사람들,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죽은 말이 아니다. 그리고 이 오래된 거룩한 사람들이 영감을 받고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들의 말이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이 하늘나라의 복음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내가 떠나면, 너희가 나의 가르침에 대한 너희의 해석의 다양성으로 인해 여러 집단이 급속히 진리 경쟁자로 분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세대를 위해 우리는 기록 만드는 것을 피하면서 이러한 진리를 사는 것이 최선이다.
159:4.8 “나다니엘, 내 말을 잘 새겨라. 인간의 본성이 닿는 것은 절대 확실한 것으로 간주 될 수 없다. 인간의 지성을 통해 신성한 진리는 실제로 빛을 발할 수 있지만, 항상 상대적인 순수함과 부분적인 신성을 가지고 있다. 그 생명 존재가 절대 확실성을 갈망할지 몰라도, 그러나 그것은 오직 창조주만이 소유한다.
159:4.9 “그러나 성서에 관한 가르침에 가장 큰 착오는 성서가 오로지 그 민족의 지혜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만 감히 풀이하는 봉인된 책, 신비와 지혜의 책이라는 교리이다. 신성한 진리의 계시는 인간의 무지, 편견, 좁게 생각하는 불관용이 아니면 봉인되지 않는다. 성서의 빛은 오직 편견이 가리고 미신에 의해 어두워질 뿐이다. 신성시 되는 것에 대한 잘못된 두려움은 종교가 일반적 느낌에 의해 보호되는 것을 방해해 왔다. 과거의 신성한 기록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은 오늘날 정직한 혼들이 복음의 새로운 빛, 즉 하나님을 아는 바로 이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빛을 받아들이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해한다.
159:4.10 “그러나 가장 슬픈 점은 이 전통주의의 신성함을 아는 일부 선생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성서의 이러한 한계를 어느 정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기에, 도덕적으로는 겁쟁이며, 지적으로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들은 성서에 관한 진실을 알고 있지만, 그런 충격적인 사실을 사람들에게 감추기를 고집한다. 그래서 그들은 성서를 달리 해석하고 왜곡하여, 성서를 다른 세대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도덕적 지혜, 종교적 영감, 영적인 가르침의 보고로서 성서에 관심을 끄는 대신에, 비영적인 것 안에서 권위와 일상생활의 맹종하는 세부사항을 담은 안내서로서 만들고 있다.”
159:4.11 나다니엘은 주의 선언에 깨달음과 충격을 받았다. 마음속 깊이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예수의 승천 이후까지 이 회담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다음에도 주가 가르친 이야기를 전부 전하기를 두려워했다.
5. 예수의 종교의 긍정적 본질
159:5.1 야고보가 일하고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예수는 하늘나라 복음의 긍정적 본질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논평을 하는 과정에서, 성서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진리를 더 담고 있음을 넌지시 비추었고, 듣는 사람들에게 영적 양식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자기 혼에게 먹이라고 훈계했을 때, 야고보는 주의 말씀을 가로막고 물었다: “주님, 어떻게 하면 성서에서 더 좋은 구절을 선택할 수 있을지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예수는 대답했다: “좋다, 야고보, 너희가 성서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이 영원히 참되고 신성하게 아름다운 가르침을 찾아보라:
“오, 주님, 제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주는 나의 목자이시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
“너희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의 오른손을 붙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나라들이 더 이상 전쟁을 배우지 않을 것이다.”
159:5.7 이것은 예수가 어떻게 히브리 성서의 노른자를 추종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리고 하늘나라의 새로운 복음의 가르침에 넣으려고 날마다 사용하는 예를 든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하나님이 사람과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을 보살피는 것을 다정한 아버지가 의존하는 자녀들의 복지를 위하여 걱정하는 것으로 비유했고, 다음에 이 가르침을 그의 종교의 주춧돌로 만들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신조는 사람이 형제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은 그의 종교의 총체이자 실체가 되었다. 예수는 유대 종교를 최대한 활용하여 하늘나라 복음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가치 있게 설정해 놓았다.
159:5.8 예수는 유대 종교의 부정적 교리 속에 긍정적 행동 정신을 집어넣었다. 예식의 요구 조건에 부정적으로 순응하는 대신에, 예수는 새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새 종교가 요구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행하라고 명령했다. 예수의 종교는 그 복음이 요구한 것을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는 데 있다. 그의 종교의 핵심이 사회봉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봉사는 참된 종교 정신을 가져서 생기는 한 가지 확실한 결과라고 가르쳤다.
159:5.9 예수는 서슴지 않고 성서에서 더 좋은 반쪽을 이용했고, 한편 못한 부분을 거부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의 큰 훈계는 성서에서 인용한 것으로, “너희는 네 민족의 아이들에게 복수하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부정적 부분을 거부하면서 이 성서의 긍정적 부분을 이용했다. 그는 심지어 부정적이거나 순전히 소극적 무저항도 반대하였다. 그는 말했다: “적이 네 한쪽 뺨을 치거든, 잠자코 소극적으로 서 있지 말고, 적극적 태도로 다른 뺨을 돌려대라. 다시 말해서, 잘못에 빠진 네 형제를 잘못된 길로부터 올바르게 사는 더 나은 길로 이끌도록 가능한 최선의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라.”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어떤 생활 상황에 대해서도 긍정적ㆍ적극적 반응을 요구했다.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이나 또는 그것이 무슨 행위를 상징하든지, 진취성을 요구하고 그 신자의 성격에 대한 활기차고 긍정적이며 용기 있는 표현을 요구했다.
159:5.10 예수는 악의 저항을 하지 않는 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악용하는 자가 모욕을 주는 데 소극적으로 굴복하는 행위를 옹호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추종자들이 선으로 악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끝까지 선에 대하여 빠르고 긍정적인 반응으로 지혜롭고 민첩하게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잊지 말라. 참된 선은 가장 지독한 악보다 언제나 훨씬 더 강력하다. 주는 의에 대한 긍정적인 기준을 가르쳤다: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을 무시하고 날마다 모든 책임을 다하며 나를 따르라.” 그리고 그는 “선행을 하는 것”으로 그 스스로 그렇게 살았다. 복음의 이러한 측면은 그가 나중에 그의 추종자들에게 말씀한 여러 비유에 서 잘 설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결코 인내심을 가지고 자기 의무를 짊어지라고 훈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의 인간적 책임과 신성한 특권을 충분히 충족시키기 위한 에너지와 열정을 가지라고 훈계하였다.
159:5.11 예수는 사도들에게, 누가 부당하게 외투를 빼앗을 때, 다른 옷도 주어야 한다고 가르쳤을 때, 문자 그대로 외투가 아니라, 관련된 오래된 충고―“눈에는 눈"을 보복하라는 대신에 잘못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긍정적인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개념이었다. 예수는 복수하거나 그저 불공평을 소극적으로 참거나 그에 희생되는 자가 되는 개념을 몹시 싫어했다. 이 경우에 그는 악에 맞서 싸우고 저항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음을 가르쳤다:
1. 악을 악으로 갚는 것―적극적이지만 올바르지 않은 방법.
2. 불평 없이 저항하지 않고 악을 견디는 것―순전히 소극적인 방법.
3. 악을 선으로 갚는 것, 그 상황의 주인이 되도록 의지를 주장하는 것,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긍정적이고 올바른 방법.
159:5.15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한때 물었다: “주님, 어느 낯선 자가 짐을 지고 십리를 가라 강제하면 어찌해야 합니까?” 예수는 대답하였다: “소리를 죽여 그 낯선 자를 헐뜯으면서, 앉아서 위안을 얻으려 한숨을 쉬지 말라. 의(義)는 그러한 수동적 태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더 효과 있게 적극적인 일을 전혀 생각할 수 없거든, 적어도 그 짐을 십리나 더 나를 수 있다. 이것은 부당하고 사악한 낯선 사람에게 분명히 도전이 될 것이다.”
159:5.16 유대인은 하나님이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들의 악행을 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고, 먼저 죄인을 찾아 나서며, 그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기꺼이 돌아오려고 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기뻐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듣지 못했다. 종교에서 이 적극적 음성은 주의 기도까지 연장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황금률을 인간의 공정성에 대한 긍정적인 훈계로 전환했다.
159:5.17 어떤 가르침에도 예수는 어수선한 세부를 어김없이 피했다. 그는 미사여구를 피하고 말로만 표현하는 단순한 시적인 묘사를 피했다. 그는 습관적으로 작은 표현 속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예수는 예를 들어 설명할 목적으로 소금ㆍ누룩ㆍ고기잡이ㆍ어린아이와 같은 현재 통용되는 여러 낱말의 의미를 다르게 표현했다. 그는 분 단위와 무한 등을 비교하며 대조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그의 묘사는 “소경을 이끄는 소경”처럼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증적 가르침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장점은 자연스러움이었다. 예수는 종교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가져왔다. 그는 새로운 통찰력과 새로운 애정을 줌으로서 혼의 기본적 필요를 묘사했다.
6. 마가단으로 돌아오다
159:6.1 데카폴리스에서 4주 동안의 임무는 적당히 성공적이었다. 수백 명의 혼들이 하늘나라로 받아들여졌고, 사도와 전도사들은 예수의 직접적인 성격적 존재에 대한 영감 없이도 그들의 일을 수행하는 값진 체험을 가졌다.
159:6.2 9월 16일 금요일, 모든 수고자들은 사전에 마가단 공원에서 모이기로 했었다. 안식일에 1백 명이 넘는 신자들의 회의가 열렸고, 거기서 하늘나라의 일을 확장하기 위하여 앞날의 계획이 충분히 고려되었다. 다윗의 전령들이 자리에 있었고, 유대ㆍ사마리아ㆍ갈릴리, 그리고 인접한 구역에 두루, 신자들의 복지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159:6.3 이때 예수의 추종자들 가운데 거의 아무도 전령단이 얼마나 값진 수고를 했는지 충분히 알지 못했다. 전령들은 팔레스타인에 두루, 신자들이 서로, 그리고 예수와 사도들과 연락을 유지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이 어두운 시절에 또한 자금을 모으는 자로서 예수와 그 동료들을 부양까지 했으며, 또한 열두 사도와 열두 전도사의 가족들을 원조하기 위하여 일했다.
159:6.4 이 무렵에 아브너는 활동의 근거지를 헤브론에서 베들레헴으로 옮겼는데, 여기는 또한 유대 지방에서 다윗의 전령들의 본부였다. 다윗은 예루살렘과 벳세다 사이에서 교대로 밤 동안에 전령 봉사를 유지했다. 이 전령들은 저녁마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시카와 스키토폴리스에서 교대하였고, 이튿날 아침 식사 때에 벳세다에 도착했다.
159:6.5 예수와 동료들은 이제 하늘나라를 위하여 수고하는 마지막 시기를 개시할 준비가 되기 전에, 한 주 동안 휴식을 취하려고 준비했다. 이것은 마지막 휴식이었는데, 페레아 사명이 전도하고 가르치는 운동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예루살렘에 그들이 도착하고 예수의 지상 삶을 마무리하는 사건들을 연출할 때까지 바로 이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