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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어제 올라온 따끈따끈한 최신의 기사에서 나미님이 첫번째 댄스음반 BEST로 뽑혔네요. 저의 생각과 같아서 기쁜 나머지 여기에 퍼왔습니다 >
“요새는 댄스뮤직도 재미가 없어…”
며 칠 전 음악계 인사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한 음악 평론가는 “한국 댄스뮤직이 점점 획일화 되고 있다”고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2003년 가수 이효리가 솔로 데뷔곡 ‘텐 미닛’으로 인기를 모은 후 너도나도 여가수들이 ‘섹시’ 콘셉트를 일관했고, 최근에는 여성 아이돌 그룹들이 기획사의 빵빵한 힘을 빌어 ‘고만고만한’ 음악을 내놓는다는 것이죠.
사 실, 따지고보면 맞는 말입니다. 이효리 등장 이전 섹시 여가수라고 한다면 ‘룰라’의 김지현, ‘늘 지금처럼’을 히트시킨 이예린, 엄정화 등 몇 손가락 안에 꼽았죠. 이효리가 성공한 직후인 2003년 말부터는 채연, 유니, 아이비, 서인영, 손담비 등 넘쳐 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대형 기획사’ 출신의 여성 아이돌 그룹 전성기를 맞았죠. ‘원더걸스’, ‘소녀시대’, ‘2NE1’, ‘카라’, 그리고 연초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보핍보핍’의 ‘티아라’까지.
문 제는 ‘개성’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뭐 하나가 히트하면 우르르 몰리는 게 국내 가요계의 고질적인 문제니까요. 사실 그건 가요계 뿐만의 문제라고 볼 수 없습니다. 길거리만 나가봐도 ‘어그부츠’ 신은 여성들? 아뇨, 안 신은 여성들을 찾는 게 오히려 빠른 편일 듯 합니다.
다 시 음악 얘기로 돌아가서, 아무튼 “요즘 댄스뮤직 개성이 없다”며 사람들과 술 한 잔 들이켰습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가수 고 이금희 씨 였습니다. 2007년 2월 20일. 정확히 3년 전 이맘 때 세상을 떠난 고인은 1960년대 ‘한국 최초의 댄스뮤직’이라 일컬어지는 ‘키다리 미스터김’으로 인기를 얻었죠. “망측하다” “어디 감히 엉덩이를 흔드냐” 등 기성세대들은 ‘댄스뮤직=불경한 것’으로 치부했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고인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셈이죠. 이금희 씨가 있었기에 1970년대 김추차, 1980년대 김완선과 박남정,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 ‘H.O.T’, 그리고 지금의 이효리와 ‘2PM’까지 댄스뮤직이 발전해온 것 아닐까요?
그 간 우리 가요 역사에서 댄스뮤직만큼 평가 절하 받은 장르도 없을 듯 합니다. 춤을 추며 노래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한 번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춤은 기본이고 음악적 완성도도 높아야 하는데도 ‘가볍다’는 느낌 때문에 제대로 대접 못 받은 것이 사실이죠.
“댄 스뮤직 중에는 높은 음악성을 가진 곡들도 많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듀스’ 등의 댄스뮤직은 엄청난 파괴력을 행사 했다” “갈수록 기계음에 의존하는 댄스뮤직이 넘쳐난다” 술자리는 갈수록 진지해졌습니다. 결국 토론의 귀결점은 “가장 충격적인 댄스뮤직은 무엇이었을까?”라는 것이었죠. 주관적이긴 하지만 술자리 멤버들은 가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댄스음반 다섯 장을 즉흥적으로 골랐습니다. 적어도 이들의 음반에는 ‘댄스’ 못지않게 ‘음악’도 녹아 있었습니다.
#1 ‘빙글빙글’ 세상을 돌린 나미 ‘골든 앨범’(1984)
1970 년대 미 8군에서 위문공연을 다니던 여가수 나미. 당시만 해도 그저 그런 노래를 부르며 몇 장의 음반을 낸 무명 가수에 불과했죠. 1979년 발표한 디스코풍의 댄스곡 ‘영원한 친구’로 인기를 얻긴 했습니다만 강력한 ‘한 방’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런 나미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작곡가 김명곤 과의 만남. 얼마 전 폐암으로 사망한 가수 고 이남이가 속해있던 그룹 ‘사랑과 평화’의 멤버이기도 했죠. 그런 그는 당시 1980년대 초 미국에서 막 뜨기 시작한 ‘뉴웨이브’ 음악에 심취했습니다. “이런 음악을 한국에서 해볼 수 있을까” “한국적 멜로디를 얹은 ‘코리안웨이브’가 가능할까” 이런 궁리를 하던 그는 여가수 나미를 만났고, 그의 독특한 음색에 반해 의기투합 하게 되죠.
그 는 ‘빙글빙글’을 만들며 나미에게 더 목소리를 쥐어짜라고 주문 했습니다. 또 “뿅뿅”거리는 전자음에 어울리게 소위 ‘앵앵’거리는 콧소리를 더 높이라고도 시켰습니다. 패션은 짧은 단발, 의상은 최대한 펑키하게, 목소리는 허스키하면서 쥐어짜는 창법. 이런 요소들을 버무린 채 1984년, 나미는 김명곤과 함께 ‘골든앨범’을 냅니다. ‘빙글빙글’이 담긴 나미의 통산 세 번째 독집 음반입니다.
사 람들은 “뭐야 이거”이러면서 낯설어 했습니다. 하지만 뭔가 모를 매력에 빠졌죠. 라디오와 동네 레코드점에서는 빙글빙글이 하루에도 수십 번 흘러나왔습니다. 트로트와 포크음악 일색이던 1980년대 초, 사람들은 “뿌리를 알 수 없는 음악”이라며 놀란 반응을 보였습니다. ‘뿅뿅’거리는 효과음과 기계음은 마치 ‘빙글빙글’ 돌다 어지러운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죠. 마돈나, 신디로퍼 등 당시 갓 데뷔한 미국 여성 가수들의 음악에 빠진 팝 팬들도 “아니 이런 음악이 우리나라에…”라고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무엇보다 이 노래의 묘미 중 하나는 흐느적거리는 그녀의 ‘빙글빙글’ 춤. 국내 가요계에 본격적으로 ‘보는 음악’ 시대를 열었다는 게 이 노래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겠네요.
<'빙글빙글'이 수록된 나미 1984년 '골든앨범'(왼쪽), '사랑이란 묘한거야'가 담긴 1987년 앨범(오른쪽)>
‘빙 글빙글’로 나미는 당시 가요 인기의 척도였던 KBS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골든컵을 수상하고, 그 해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도 최고인기 여자가수상을 휩쓰는 쾌거를 이룹니다. 이후 그는 ‘유혹하지 말아요’, ‘사과 하나’ ‘보이네’ ‘사랑이란 묘한거야’ 등 뉴웨이브를 근간으로 한 댄스뮤직을 선보이며 인기를 얻었습니다. 1989년 잠시 트로트로 외도, ‘미움인지 그리움인지’를 내놨지만 별 반응이 없자 같은 앨범에 수록된 ‘인디언 인형처럼’으로 컴백,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죠. 당시 나미를 지원 사격한 쌍둥이 DJ듀오 ‘붐붐’ 기억 나시죠? “그래도 그래도 모든 것을 잊고…” 하는 다소 어설픈 랩이 아직도 귀에 맴도는 군요.
#2… ‘귀국 기념’이라는 촌스런 글귀를 무색하게 만든
민해경 ‘귀국 앨범’(1985)
지 금이라면 상상도 못할 앨범 제목 아닐까요. 귀국 기념 앨범이라니, 정말 소속사 사장이 안티 아닌 이상 이런 제목, 더 이상 없을 겁니다. 하지만 민해경은 이런 유치한 제목의 앨범을 내놓고 대박을 거뒀으니,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 없네요.
민 해경은 1985년 이 귀국 기념 앨범을 내놓고 타이틀 곡 ‘사랑은 이제그만’으로 성공적인 컴백을 했죠. 가요톱10 5주 연속 1위는 물론이고, 나미가 일궈놓은 1980년대 초중반 댄스뮤직 시장에 후발주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여 기서 드는 궁금증. 왜 ‘귀국’일까요? 아시다시피 민해경은 원래 댄스 가수로 데뷔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이수영 같은 곱고 고운 발라드 가수였죠. 1980년 데뷔곡 ‘누구의 노래일까’와 초창기 그의 대표곡인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 등 그의 노래들은 발라드가 근간을 이뤘죠. 그렇게 인기를 얻던 중 민해경은 1983년 돌연 일본 유학을 떠납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해외 유학, 특히 ‘일본행’은 간 큰 사람이나 하는 결정으로 여겨졌죠. 특히 당시 잘 나가던 여가수가 이런 행동을 한다? 바로 ‘아웃’이나 다름 없습니다. 민해경은 그래서 2년 간 일본에서 고국에 돌아올 수 없게 됩니다. 일본에 발이 묶여 있었던 셈이죠.
2 년 후 돌아온 그는 발라드로 컴백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 달리 분위기를 180도 바꿉니다. 그 첫 열쇠가 바로 ‘사랑은 이제그만’인 셈이죠. 나미처럼 현란한 춤도, 화려한 퍼포먼스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노래가 인기를 얻은 건 순전히 시원시원하게 내지르는 민해경의 창법 때문입니다. 당시만 해도 댄스뮤직에 가볍게 몸을 흔들어 노래 불러도 전혀 썰렁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게다가 이 노래는 완벽한 팝 댄스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한국적인 멜로디가 주를 이룹니다. 낯설지 않으면서도 색다른, 퓨전 한식과도 같은 느낌인 셈이죠. 여기에 앨범 제목 ‘귀국 기념 앨범’의 효과도 있습니다. 촌스럽지만 친근한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문제의 '귀.국.앨.범' --;; 그러나 '사랑은 이제그만' 이 노래는 대박났으니..>
한 국형 댄스뮤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 민해경은 아예 음악 노선을 댄스뮤직으로 바꿉니다.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존댓말을 써야할지 반말로 얘기해야할지’ 같은 노래부터 아모레 차밍무스 광고 음악으로 사용됐던 ‘그대 모습은 장미’ 등의 댄스뮤직들을 잇달아 히트시켰죠. 안타까운 것은, 민해경도 김완선 만큼이나 인기를 얻은 댄스가수임에도 당시 TV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화요일에 만나요’ 같은 데 출연해서 ‘선생님’을 ‘성생님’, ‘안전벨트’를 ‘앙절벨트’라고 발음해 큰 웃음을 줬죠. ‘혀 짧은 연예인’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보니 그 신비감은 코믹함으로 남게 됐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민해경에게는 ‘마이너스’로 작용한 듯 싶네요. 좀 더 신비주의로 나갔더라면 ‘전설’이 됐을지 모를, 막연한 아쉬움이랄까요.
#3… ‘뮤지션’이 만든 댄스홀, 김완선 2집(1987)
지금은 이효리가 있지만, 1980년대는 김완선을 빼놓고 댄스뮤직을 논하기 어려웠을 시기입니다. 단순한 인기를 넘어 한국 댄스뮤직의 ‘아이콘’이 돼버린 댄싱퀸 김완선.
가 수 인순이의 백댄서인 ‘리듬터치’ 멤버로 ‘춤 인생’을 시작한 그가 가수로 데뷔하기 까지는 1970년대 3인조 형제 밴드 ‘산울림’의 베이시스트 김창훈의 도움이 컸다는 사실, 아시나요? 당시만 해도 댄서가 가수로 데뷔하기는 쉽지 않은 시대였죠. 가수에게 있어 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상관없는 ‘끝 양념’과도 같은 것이었죠. 산울림의 김창훈은 이런 김완선에게 날개를 달아준 주인공입니다. 1985년 지금의 김완선을 있게 한 데뷔곡 ‘오늘밤’부터 데뷔 음반 전곡을 그가 작사, 작곡, 프로듀싱까지 합니다. 춤추는 댄싱퀸, 그러나 진보적인 사운드에 완성도 있는 편곡 상태. 대중은 김완선에게 귀를 쫑긋 세우게 되죠.
뮤 지션의 탄탄한 음악과 비주얼 댄스의 만남. 1집의 실험이 있었기에, 김완선 음악 인생에 명반이라 불리는 2집이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1987년 발매된 그의 2집의 첫 타이틀곡은 ‘나 홀로 뜰 앞에서’. 1집에 이어 작사 작곡 및 편곡에 참여한 김창훈은 좀 더 펑키한 컨셉트를 강조했습니다. 1집에 비해 좀 더 빨라진 템포를 비롯해, 다소 신경질적인 창법, 여기에 당시 미국을 휩쓸고 있던 마돈나의 집시풍 패션까지 차용, 비주얼 음악의 완성을 보이게 되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음반 버전과 방송 버전을 달리해 철저히 ‘비주얼 가수’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이죠. 김완선 이후 음반 버전과 방송 버전을 달리한 사례는 후에 강수지, 서태지와 아이들 등을 통해 ‘일반화’가 됐습니다.
‘나 홀로 뜰 앞에서’의 활동이 끝날 때 쯤, 김완선은 이미 발매된 2집 음반을 다시 찍겠다는 발표를 합니다. 새로운 노래 ‘리듬 속의 그 춤을’을 넣어서 소위 ‘리패키지’ 음반을 발매하겠다는 셈이죠. 당시만 해도 이미 낸 음반을 새롭게 찍은 사례가 없었기에 무모한 결정처럼 비춰졌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김창훈이 아닌 또 다른 뮤지션이 김완선에게 ‘러브콜’을 했기 때문이죠. 바로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신중현입니다. 그가 김완선을 염두해두고 만든 ‘리듬 속의 그 춤을’은 김완선을 단순히 춤 잘 추는 가수에서 음악성 있는 가수로 한 단계 뛰게 만든 계기이기도 합니다. 이 노래를 발표하고 김완선은 한국과 일본, 대만 등 아시아 가수들이 모여 공연을 하는 ‘팩스 뮤지카’에 출연하게 되죠.
<1987년 발표된 김완선 2집>
2 집의 성공으로 김완선은 매번 음반 작업을 하면서 재능 있는 뮤지션들과 조우를 합니다. 팝 댄스 풍의 히트곡 ‘기분 좋은 날’을 작곡한 베이시스트이자 작곡가 박청귀, 그리고 김완선 음악 인생 역사상 최절정기를 안겨준 손무현 등이 대표적으로 꼽힙니다. 특히 윤상과 함께 당시 ‘페이퍼모드’ 그룹 멤버였던 손무현은 김완선의 5집에 참여, ‘나만의 것’,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가장 무도회’를 잇달아 히트시키며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죠.
#4… 껄렁껄렁 블랙뮤직이 ‘부잣집 아들이 된 순간
듀스 3집 ‘포스 듀스’(1995)
분 명 힙합, 펑크 등 흑인음악을 들고 나왔던 힙합듀오 ‘듀스’는 당시 음악계가 이들의 음악을 수용할 만큼 깨어있지 않았기에 ‘댄스 그룹’으로 단순 분류됐습니다. 하지만 훗날 ‘듀스’는 한국 댄스뮤직, 힙합음악 역사 모두에 등장할만큼 음악성 넘치는 듀오로 평가 받고, 여러 후배 뮤지션들에게 재평가를 받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잘 된 일 아닐까 싶네요.
1993 년 데뷔한 듀스는 데뷔곡 ‘나를 돌아봐’를 통해 당시 유행하는 자메이카 랩을 국내에 선보였습니다. 이후 ‘우리는’, ‘약한 남자’ 등을 연달아 히트시켰지만, 당시 문화 대통령으로 10대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에 눌리며 “가볍다”는 평가를 받았죠. 이에 팀의 ‘브레인’인 이현도는 모든 역량을 발휘, 해체 전 역작 ‘포스 듀스’를 내게 됩니다. 정규 3집이자 해체 전 마지막 앨범이란 점에서 아쉬움을 가지지만 수록곡 전반에서 그 전과는 다른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졌죠. 3년 남짓한 커리어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많은 음악적 시도가 담긴 앨범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1995년 발표된 듀스의 마지막 정규 앨범 'Force Deux'>
‘굴 레를 벗어나’ 같은 ‘명령법’식 펑크곡은 이 앨범의 얼굴이자 이현도의 장기나 나름 없었습니다. 또, ‘뽕’기 가득한 트로트 멜로디를 힙합과 적절히 섞은 ‘상처’는 한국식 힙합, 이른바 ‘된장 힙합’의 면모를 보여주었죠. 또 힙합 재즈곡 ‘반추’, 뉴 잭 스윙 장르인 ‘너에게만’ 등 혈기 왕성한 20대 시절 이현도의 실험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5 주도 면밀한 컨셉트로 세상을 '바꾼'
이정현 1집 ‘렛츠 고 투 마이 스타’(1999)
세기말 불안한 미래, 사람들은 밤마다 머리를 흔들며 ‘아모크’를 외쳤죠. 주문과도 같은 이 ‘아모크’는 당시 무도회장의 찬가와도 같은 독일 테크노 음악이었죠. 아, 정말 11년 전 테크노 열풍은 대단했습니다.
그 열풍의 중심에는 영화배우 출신의 가수 이정현이 서 있었습니다. 3인조 댄스그룹 ‘구피’의 ‘게임의 법칙’ 뮤직비디오 출연해 신들린 테크노 춤을 췄고, 조PD 2집 타이틀곡 ‘피버’에서 맛깔나는 랩을 담당했죠. 그 때 까지만 해도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1996년 영화 ‘꽃잎’에서 미치광이 소녀 연기 이미지가 워낙 강렬한 지라, 그 모습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 런 그가 1999년 9월 말 세기말 테크노 열풍을 담은 앨범 ‘렛츠 고 투 마이 스타’를 발표했습니다. 앨범 인트로부터 뭔 외계어로 중얼거리며 사람들의 혼을 빼놓고, 이어 나오는 2번 트랙 ‘GX339-1’은 “진짜 이정현 맞아?”라 의심할 정도로 괴기스러운 면모를 보입니다.
<눈깔로 앨범 재킷을 만든 --;; 1999년 이정현 1집 'Let's go to my star'>
하 지만 무엇보다 대박은 4번 트랙 ‘와’에서 터집니다. ‘동양 테크노’를 표방한 그는 음악부터 비녀, 새끼손가락 마이크, 부채 등 패션 아이템까지 유행시키는 등 완벽한 컨셉트로 중무장하죠. 영화 ‘꽃잎’에서 보여준 신들린 연기 못지않게 그는 이 댄스음반에서 표현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모두 쏟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뷔 음반임에도 57만장이나 팔리는 인기를 얻었지만 1집의 잔상이 너무 컸을까요. 이후 그녀는 2집 타이틀곡 ‘너’에서 이집트 클레오파트라, 3집 ‘미쳐’에서 마법사 등 앨범마다 다른 컨셉트로 승부를 걸지만 1집의 어마어마한 카리스마를 넘는 데는 실패합니다.
흥 미로운 것 하나. 이정현 데뷔음반 12번 트랙은 ‘아이 러브 X’란 곡인데, 여기에는 1990년대 말 유행하던 사회 비판적 가사가 담겼습니다. 뭐랄까, ‘H.O.T’ 노래를 만든 유영진 식 화법이랄까요. 그런데 이 노래에는 조PD와 함께 당시 스물 세 살 청년 박재상이 등장해 신나게 랩을 합니다. 박재상, 누군지 아시죠? 래퍼 싸이입니다. 지금은 거물이 된 싸이와 조PD의 파릇한 시절 모습은 참으로 적응이 안 되네요. ^^;;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정보 나미님의 옛모습 너무너무 이쁘고 좋아요 제가 15살때 빙글빙글 대히트했죠 ...그때가 그리워요 ..ㅎㅎ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자료를 봤네요. 기사 잘 읽었습니다.
80년대... 저 3분은..잊지못할 경쟁자들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