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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라는 말은 건너왔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어떻게 어디로 건너왔느냐고
묻는다면 옛적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여러 부분으로 말씀하셨지만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시는 곳으로 건너왔다는 뜻입니다(히1:1-2) 한 마디로 말하면
율법에서 말씀으로, 광야에서 가나안의 안식으로 건너왔다는 개념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우리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고 우리 안에 그 분이 계시는 곳으로
건너왔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그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주께서 세상으로 건너오셨다가 다시 하나님 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게 하시려고 이쪽으로 오셔서 몽땅 한
보따리를 싸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저쪽으로 넘겼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한 히브리인이 되었습니다. 이미 요단강을 건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사하셨다는 의미로 십자가를 워낙 많이 듣다보니 예수께서 항상
거기에 못 박혀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참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우리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지옥열차를 타고 가는데
지옥열차를 탔는지 천국열차를 탔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들리게 하심으로 우리를 깨우신 겁니다. ‘네가 나 좀 찾아봐라
내 말 좀 들어봐라 네가 전에는 지옥열차를 타고 갔다. 그런데 내가 내 아들을 십자가에
죽여서 다시 살리므로 말미암아 네가 지옥열차 타고 가는 것을 천당 열차로 옮겨 놨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어져야 믿지요’ 말합니다.
그런데 믿어지는 사람은 성령이 그 사실을 믿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옥으로 가고 있는지 천국으로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천당열차로 옮겨놓으시고는 그 다음에 말씀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이를 믿게 하셔서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은 소급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말씀을 통해 받아서
창1장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겁니다. 창세기부터 알고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니까 예수가 하신 일도 알고, 예수를 아니까 그를 보내신 하나님도
알고 그 전에 우리가 어떻게 타락했는지 그것도 알고 원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대속의 사랑을 안다는 것입니다.
어찌하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건너왔습니다. 이쪽에서는
이미 건너갔고 저쪽에서 봤을 때는 건너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의미입니다. 승천은 통과(pass)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믿고 그를 힘 입어 함께 통과한 것입니다.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며 성령으로 인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1절 “이제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히7장은 멜기세덱 반차의 제사장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제사장은 아론의 반차이고 새 언약의 제사장은 멜기세덱의 반차이며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의 중요한 것이 뭐냐?’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안 써 먹습니까? 이와 같은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으면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므로
그 결과 성령의 충만한 모습을 서로가 느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린 믿음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론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하고 항상 있는 대제사장이 나의
영혼의 닻을 이끌고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셔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그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자들을 능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언제나
하시는 일 나 같은 죄인 부르사 참 복을 내리신다. 주 앞에 내가 엎드려 그 이름
찬송함은 내 귀에 들린 말씀 중 귀하신 이름 예수’ 그래서 우리는 이런
찬양을 목이 터져라 크게 함성을 질러가며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예수인데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가 하신 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예수가 하신 일을 믿게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설명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하신 일을
자꾸 말하면 예수만 믿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당장 그분이 지금 살아계셔서
당신 안에 있는 것을 믿으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오시면
예수로서 하신 일은 저절로 믿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피 흘리신 것도 믿어지고,
내 죄를 위해 죽으신 것도 믿어지고, 그가 죽으셨을 때 나도 죽은 것이 믿어지고,
그가 다시 살아나실 때 나도 산 것이 믿어지고, 그가 올라갈 때 나를 끌어올려
하늘에 앉힌 것도 믿어집니다. 예수를 믿게 하면 역사적인 예수만 믿고 병 고치려고
하고 능력 받으려고 덤비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그 분을 닮아 가자고 말합니다.
그 분을 모시면 자동적으로 연약과 병은 치료되고 그 분의 권능과 형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요3장에서 거듭나는 비결이 나옵니다.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요3:16)
거듭나는 비결이 뭐냐?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내가 영접하는 것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방법입니다. 모든 절차와 수속은 그 분이 다 해결해 놓고 난 뒤에 이 사실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from heaven입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씨를
받으면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고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되 성령도 이와 같으니라’
하심과 같이 바로 거듭난다는 의미는 하늘로부터 생명의 씨앗이 내게 들어오니
내가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듭나기 위해서 애를 써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독생자인데 말씀을 받아 이 분을 구주로 믿으니 그분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이 말씀을 받으면 곧 이 복음을 받으면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내가 믿어지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접했다는 것을
왜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그런 말들을 사용하는 사람이 적어서
그전에는 많은 분들이 구원에 대해 고생들을 많이 했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우리가 수고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된 사실을 말씀을 듣고 믿는 겁니다.
“말씀을 듣고 믿어 성령으로 인쳤느니라”(엡1:13)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독생자를 믿는 일’입니다. 저는 김 씨로 태어날 때 하나도 수고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수고를 하셨지요. 태어나서 말귀를 알아들을 즈음에 우리 어머니가
너의 아버지의 존함은 ‘낙자 구자다 너는 낙자 구자 아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실을 나도 모르게 그냥 받았습니다. 그 말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므로
내가 김씨의 아들인줄 알게 되었습니다. ‘거듭났다 영접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수고에
의한 공로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하게 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장치를 다 해 놓으시고 우린 그 복음을 듣기만 했을 뿐입니다. 영접했다는
것이 자기 공로가 되면 그 다음의 단계로 못 나갑니다. 내가 거듭난 것이 내 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 다음 단계의 복으로
나가게 됩니다. 영접한 것을 자기 공로로 생각하면 사람들이 의욕적이긴 하지만
전투적인 사람이 됩니다. 복음 전하는 것도 자기 공로, 기도도 자기 공로, 전부 다
자기 공로가 됩니다.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의 수준을 보면
현재 안식이 그 속에 없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단적으로 말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다음의 말씀의 내용을 많은 분들이 해결하지 못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도다. 그전에는 우리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자기 욕심대로 행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지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몽땅 살리셨도다. 몽땅 살렸을 뿐 아니라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도다’(엡2:1-6) 바로 이 “앉히셨도다”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미래로 봅니다. 몸은 여기 있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 보좌에 앉히셨습니다. 바로 현재 우리를 그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엡2:6절을 봅시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게 안 믿어집니다. 이 사실은 오직 성령님만이 가르쳐주십니다.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앉히시니” 그 분과 함께 앉히신 겁니다. 어떤 분에게 ‘당신은 안식을 언제 얻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안식은 천국에 가야 얻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의 대답은
이미 틀린 겁니다. 안식이 미래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안식이 없는 겁니다.
현재 천국이 장차 천국으로 현재 안식이 장차 올 완전한 안식의 기초가 됩니다.
분명히 히브리서 3장, 4장은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믿음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라 그리하면 안식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천사가 전하는 말씀으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 죄인을 다시 살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품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그의 영광을 본 자만이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이 살아납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아무리 자비롭고
친절하고 자상하게 그들을 보살피더라도 사람들을 하나님 품에 안기는 비밀이 없으면
그 사람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품에 안겨 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하나님 품에 안기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내가 진리를 전파할 때 성령께서 나를 인정하면 그 때 다른 사람에게도
성령이 역사합니다. 성령이 나를 보증한다는 말은 성령이 나를 암탉이 날개 아래
그 새끼를 모음 같이 감싸 주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나님의 품에 안겨
복음을 증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의 복음만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하나님 품에 안기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부리는 영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습니다.
우편은 의롭다는 뜻이고 능력의 자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우편에 앉았다고 할 때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편에 앉았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 자리를 바꿀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우편에 앉으려고 싸우느냐 그게 아닙니다.
두 분이 필요할 때마다 행사를 하신다는 뜻으로 우편에 앉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아버지께 드릴 때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의 왕 중의
왕으로 총지휘권을 주시고 인정하고 계십니다. 그걸 우편에 앉았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품에 안긴 독생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심령에 있는 것입니다. 시편 84:5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걸 복이라고 합니다. 이런 복이 있으면
찬양이 언제나 넘치고 은혜로 얼굴이 환해요 성령의 충만한 모습은 서로 느낍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다시 말하면 하늘에 있는 보좌 우편에 앉으신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지금 모시고 있는 겁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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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할렐루야 주께 영광!
늘 기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