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1:17).
누군가가 형제에게 “복음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말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한다면 무엇이라 답변을 하시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서슴없이 복음이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소식입니다”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16절에서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 후에 17절에서는 복음이 무엇이기에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단 말인가?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7절은 로마서의 대 주제인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법왕청에서 무릎으로 빌라도의 층계를 올라가다가 이 말씀을 깨닫고는 그는 벌떡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 때 나는 새로 탄생하였고, 열린 문을 통하여 홀연히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본문 17절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한 엄청난 위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17절을 모른다면 그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17상)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존전에서 추방을 당한 아담의 후예들에게는 두 가지 풀어야 할 숙제(宿題)를 안고 있습니다.
㉠ 첫째는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신 “사망”(死亡)의 문제요,
㉡ 둘째는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한, “벌거벗음”입니다.
㉢ 그런데 본문 17절은,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즉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과,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고, 사는 길이 있다 하고 두 가지 숙제(宿題)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② “벌거벗음”부터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벌거벗었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죄인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벌거벗은 몸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심같이,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의 옷”을 마련해주셨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를 “의롭다함을 얻음”, 즉 칭의(稱義)라고 말합니다.
㉡ 구원계획에 있어서 풀어야할 가장 큰 난제(難題)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존전에서 추방을 당한 인간이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 이를 인간 입장에서 말한다면, 어떻게 하면 의로우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이고,
㉯ 하나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인(罪人)들을 받아주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여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어떻게 회복될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인 것입니다.
③ 그런데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3:20) 하고 단언을 합니다. 즉 인간의 자력(自力)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 갈라디아서 3:11절에서도,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합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행해주시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8:3),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3:21) 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소식”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④ 다음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5:12) 한 “사망” 문제입니다.
㉠ 성경이 말씀하는 “죽음”은 분리(分離)를 가리키는데,
㉮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적 죽음과,
㉯ 몸과 영이 분리되는 육신의 죽음과,
㉰ 최후심판 후에 있게 될 영원한 분리, 즉 멸망입니다.
⑤ 갈라디아서 3:11-12절에는 두 가지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1절은 “믿음으로 살리라” 말씀하고, 12절에서는 “행하는 자는…살리라”(레 18:5 인용) 하고 말씀합니다.
㉠ 그러니까 하나는 믿음으로 사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행함으로 사는 길입니다.
㉮ 그러나 “행함으로 사는 길”은,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이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그 길은 결국 저주로 끝날 수밖에 없다(갈 3:10)고 말씀합니다.
㉯ 그러므로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길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하나님의 의, 즉 복음을 믿음으로만이 살수가 있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요, 이에 대해 인간의 응답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칭의(稱義)와, 중생”(重生)은 동시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길은 “믿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⑥ 16절에서도, “모든 믿는 자에게” 하고, 믿음이 강조되어 있으며, 17절에서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고, “믿음”이 더욱 강조되어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받으며, 믿음을 통해서 믿음으로 연결되고 확장되어 나갑니다. 그리하여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16하), 즉 온 세계로 확장이 되어 나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미치지 않습니다.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깜짝 놀랄만한 기쁜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단 말입니다. 누구든지 이 의를 받아 입기만하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값이 얼마냐 구요? 값없이 거저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으로만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어서 믿음의 손을 내밀어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십시오”, 이것이 복음이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⑦ 루터는 처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씀을,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公義)인줄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이것이 복음이라면 하나님께서 차라리 복음을 주시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하였다” 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나타난다는 것은, 바로 심판(審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곡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까지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이러한 능력과 사는 길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훗날 루터는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 “그 교회가 서 있는 교회냐? 아니면 넘어지는 교회냐를 알려면, 그 교회가 하나님의 의(칭의)에 서 있느냐 여부를 알아보면 된다” 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예배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를 힘입음이 없이는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면 서 있는 믿음이 아니라, 넘어지는 믿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⑧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써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 3:18) 합니다. 왜 대신(代身)하여 죽으셨는가?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하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 돌아온 탕자처럼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나에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으니 어서 그 옷을 벗으라 하시고는, 당신이 입으셨던 옷을 나에게 입혀 주십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입고 있던 이 더러운 옷을 입고 네 대신 십자가를 지러 가니, 너는 나의 이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거라.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하여라. 그러면 하나님은 너의 아버지가 되시고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
㉡ 이점에서 한 말씀 부언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공의와, 칭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로우심” 하나뿐이라는 점입니다. 이 “의”가 바로 임하게 되면 공의(公義)가 되어 심판이 시행이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임하게 되면 칭의(稱義)가 되어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를 요약을 하면 주님께서 우리 대신 공의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칭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 됩니다.
⑨ 이 복음은 임기응변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류의 타락과 동시에 주어졌음을 잊지 마십시오. 아담 하와는 범죄 한 후 그들의 벗은 수치를 무화과 잎으로 가려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부르실 때에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던 것입니다.
㉠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것은 아담 하와가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아담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기 위해서는 짐승이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죄는 아담 하와가 범했는데 죽기는 죄 없는 양이 죽은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이 구약시대에는 “언약, 예표, 예언, 그림자” 등으로 나타났으나 이제는 실체(實體)로 밝히 나타난 것입니다. 형제도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의의 옷을 입고 계시겠지요. 감사하십시다. 찬양하십시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하고 자랑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