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병산 골짜기에 보문암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었습니다. 보문암은 크지는 않지만 내리 뻗은 천병산 줄기에 두 갈래로 갈라진 절벽 아래 자리 잡고 있어서 아늑하고 경치가 아름다웠습니다. 계곡을 따라 10여 리를 내려가면 무학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비룡천이란 개울이 마을을 휘돌아 흘러 그야말로 무릉도원이었습니다.
보문암에는 60 고개를 넘은 철감대사와 왕노인 단 두 사람이 살고 있었고, 무학 마을에는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옮겨와 서원을 짓고 사는 고진사가 있었습니다. 고진사는 비록 유생이기는 하나 부처님 법을 따르는 철감대사와 아주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어느 날 새벽 비몽사몽 간에 한 부인이 나타나서 철감대사에게 발우 한 벌을 바쳤습니다. 스님은 제자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아침 공양을 마친 뒤, 암자를 나섰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스님은 발길을 돌려 암자로 향했습니다. 일과인 〈법화경〉을 독송하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평소보다 좀 늦어졌구나 생각한 스님은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바로 그때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시냇물 소리에 섞여 들려왔습니다. 스님은 울음소리를 따라 갔습니다. 커다란 바위 위에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아이를 장삼소매에 받쳐 안고 보문암으로 돌아왔습니다. 등불을 밝히고 어린아이를 살펴 본 스님은 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앞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철감대사와 왕노인, 두 사람은 정성을 다해 아이를 길렀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혜안이라고 지었습니다.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철감대사를 따라 법당에 올라가 예불을 마치고 나온 혜안은 슬픈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저는 스님의 은혜만 입고 아무 보람 없이 살아가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렇게 앞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합니다.” 혜안의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철감대사는 빙긋 웃었습니다.
“네 이름은 혜안이다. 혜안은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이다. 네가 내 말대로만 한다면 너는 10년 뒤에는 중생을 살릴 수 있는 모든 의원 중에서 으뜸이 되는 부처님의 대의왕이 될 것이다.”
그날 저녁에 대사는 비룡천 개울가에서 삼베 자루에 모래를 가득 담아 가지고 암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혜안과 함께 목욕재계를 하고, 법당에 올라가 예불을 한 후에 혜안을 모래자루 옆에 앉히고 말했습니다.
“너는 지금부터 10년 동안 이 모래자루를 주무르면서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불러라. 그러면 이 모래 한 알 한 알이 다 신선이 만들어 먹는 효험이 신기하고 오래 사는 약인 선단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을 조금이라도 의심하면 헛일이 될 것이다. 능히 할 수 있겠느냐?”
“예. 이르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혜안의 얼굴에는 기쁨과 희망이 넘쳐흘렀습니다. 혜안은 기어코 선단을 만들고야 말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그날부터 모래자루를 만지면서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고 〈법화경〉을 독송하였습니다.
대사는 전보다 더 간곡하게 불법을 가르쳐 주고 불보살의 뛰어난 행적을 일러주어 성불을 도왔습니다. 혜안이 정진을 시작한지 벌써 9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모래자루를 스물일곱 번이나 새것으로 바꾸었고 모래알은 모가 닳고 닳아서 금강석 같이 빛이 나는데 아직 선단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혜안은 정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정진에 정진을 더해갔습니다.
철감대사는 83살의 고령으로 이제는 기력이 많이 쇠약해졌습니다. 어느 날 예불을 마친 대사는 왕노인을 불러 고진사를 청해 오라고 했습니다. 부탁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별을 받고 고진사가 급히 암자로 왔습니다. 왕노인과 혜안도 옆에 앉았지요. 대사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앉아 입을 열었습니다.
“갑자기 진사 어른을 오시라고 한 것은 부탁할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실은 오늘로 나의 이 세상 인연이 다하는 것 같습니다.”
대사가 입적한다는 말에 모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대사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혜안이 너는 내가 간 뒤에도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을 성심으로 모시고 공부를 계속하여 내 뒤를 이어라. 그리고 왕노인은 오늘부터 절의 살림을 맡는 총지거사가 되어 주시오. 그러나 이 암자를 유지 발전시켜 나가려면 고진사께서 적극 도와 주셔 야 하겠습니다. 두 분께 뒷일을 부탁합니다.”
말을 마친 대사는 합장하고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을 염한 다음 조용히 자리에 누워 영원히 눈을 감았습니다. 철감대사가 입적한 이듬해 10월 14일은 혜안이 정진을 시작한 지 만 십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래는 아직 선단이 되지 않았습니다.
혜안은 실망하지 않고 앞으로 다시 10년이 더 걸리더라도 기어코 철감대사의 뜻을 이루리라 결심했습니다. 이튿날 혜안이 법당으로 올라가 예불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한 신도가 황급히 달려와서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스님, 스님, 큰일 났습니다. 고진사 어른이 그만...”
스님은 그를 따라 급히 고진사가 있는 데로 갔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고진사가 중풍을 일으킨 것입니다. 스님은 사람들을 물리치고 고진사의 옷을 벗기고 모래를 흩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고진사를 눕힌 다음 온 몸을 주무르면서 관세음보살을 염했습니다.
한참 만에 고진사는 차차 정신이 들어 눈을 떠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모두들 이 엄청난 기적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 보문암에는 병자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병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중한 병에 걸린 사람도 혜안 스님의 치료를 받기만 하면 새사람이 되어 돌아갔습니다.
이 무렵 대궐에서는 공주가 중풍에 걸려 3년 동안 온갖 약을 다 써 보았지만 조금의 차도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임금님과 왕비는 근심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왕비가 혜안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왕비의 말을 들은 임금님은 곧바로 명령을 내렸습니다.
“즉시 혜안 스님을 모셔오라!”
사신이 급히 말을 달려 보문암으로 달려왔습니다. 사신은 스님을 만나 왕명을 전하고 급히 상경하기를 청했습니다. 혜안은 보문암으로 찾아오는 병자들이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한 후 모래주머니를 가지고 사신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대궐로 들어간 혜안은 공주의 병실로 인도되었습니다. 혜안은 잠시 공주의 맥을 짚어 본 다음 왕비와 시녀 한 사람만 남기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물러가게 했습니다. 그 다음 그 자리에 모래를 깔고 공주를 속옷만 입혀 그 위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합장하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공주의 맥을 따라 천천히 주물렀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바로 일어났습니다. 스님이 치료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공주가 먼저 크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앉았던 것입니다.
3년 동안이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던 공주가 순식간에 깨어나 자리에 일어나 앉았으니 임금님과 왕비의 기쁨은 이루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임금님은 혜안의 손을 잡고 물었습니다.
“스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제가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계속>
우봉규 작가 ggbn@ggbn.co.kr |
첫댓글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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