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마지막 전통가극배우 원희옥
무대 안에서 보낸 60년간의 삶으로부터
무대 밖 ‘70세 만년소녀’로 남다

내가 원희옥을 처음 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인 97년,
전통가극을 재현한 ‘눈물의 여왕’ 공연 실황음반에서였다.
그녀가 극중 막간가수로 출연해 부르는 옛 노래는 ‘애수의 소야곡’.
한껏 멋스런,
그래서 잊고 지냈던 빛바랜 향수를 일깨워주는 듯한 이 노래를 듣게 되었을 당시
‘원희옥’이라는 이름은 내겐 매우 생소했기 때문에,
나는 짐짓 스물 몇 살의 무명연극배우 정도로 어림했었다.
허나 정작 원희옥, 그녀는 놀랍게도 70세였고,
당시 내가 들었던 ‘애수의 소야곡’은 그녀가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기고 난 뒤에 부른 노래였다.
이러한 사실은 선뜻 믿기지 않았다.
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희옥은 ‘무대생활 60년’이라는 관록이 무색하리만치
아직도 첫 목소리, 첫 설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 여겨진다.
그녀는 마이크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인 1947년 해방 직후,
그녀 나이 불과 열 살 때 ‘백조가극단’의 막간소녀가수로 무대에 서기 시작해
대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가극배우를 거쳐 작년에 공연되었던 악극 ‘곡예사의 첫사랑’ 까지,
무려 60년간 무대 활동을 하고 있는 전통가극배우이자 원로가수다.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만년소녀 원희옥의 무대, 그 삶
어린아이인 양 천진스런 모습으로 인해 그녀의 무대에서의 삶 60년,
무대 밖에서의 인생 70년이라는 세월을 가늠해내기가 한편 쉽지 않다.
원희옥은 1940년과 50년대 최고 악극단이었던 ‘백조가극단’의 아역배우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눈물의 여왕’ 전옥의 수제자인 동시에 수양딸이다.
전옥은여배우가 다섯 명도 채 안 되던 시기의 배우였다.
이념의 혼란기에 월북해 북한영화제작소장까지 지냈던 우리나라 직업가수 1호 강홍식과 결혼했으나
자유로운 예술을 좇아 헤어진 뒤
전국 각지를 돌며 백조가극단 단장으로, 그리고 배우로 활동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옥은 분단 뒤 반공예술인연맹 회장인 최일과 결혼했다.
이데올로기의 양극단을 오가며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인 셈이다.
배우 강효실은 전옥의 딸, 최무룡은 사위였으며 배우 최민수가 그녀의 외손자다.
동생 전황은 무용가 최승희의 유일한 남자제자였고
재즈발레리나 전마리가 그의 딸이다.
이러한 ‘전옥 가(家)’를 추적하다보면 강홍식으로부터 전마리까지
193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한국 대중예술사가 큰 그림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전옥가‘에 수양딸로 등재된 또 하나의 인물이 바로 원희옥이다.
전옥과 원희옥의 운명적 만남은지금으로부터 60년 전, 그녀 나이 여덟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36년 강원도 치악산 부근에서 태어난 원희옥은 오빠의 손에서 자랐다.
전북 이리로 이사해 잠시 살던 여덟 살 때 가극 ‘눈 내리는 밤’을 보게 된다.
전옥의 연기를 보고 난 뒤 운명적인 그 무엇을 느꼈는지
여덟살 소녀 원희옥은 당돌하게도
명배우 전옥을 만나 할 말이 있다며 무대 뒤 분장실로 간다.
오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분장실에 들어선 이 당찬 여덟 살짜리 소녀는
‘나도 노래를 아주 잘하니까 무대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게 해달라.’고 조른다.
너무 당돌해 분장실에 있던 단원들이 장난삼아 그럼 노래 한번 불러보라 부추기니
주저앉고 당시 유행되던 노래들을 부른다.
그 노래와 모습이 앙증스러워 여기저기에서 앙콜 주문을 날라 왔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래가 계속 되자
마침내 백조가극단장이자 당대 최고 명배우 전옥이 꼬마 원희옥에게 다가온다.
이 것이 후에 그녀의 후계자이자 수양딸이 되는 원희옥과 전옥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전옥은 처음 나이가 너무 어리다며 어린 희옥을 돌려보낸다.
당시에는 어린아이가 무대에 서는 걸 제약 받았던 때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 전옥이 꼬마 원희옥에게 받은 인상이 얼마나 깊었던지
결국 2년 후인 열 살 때,
원희옥을 백조가극단에 합류시킨다.
나이를 열두 살로 속이면서까지.
-이 60년 전 일화에 대해 원희옥은 마치 순간적으로 신이 들렸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무대 밖 막간가수, ‘붕대옷’ 입고 무대 중심에 서다
그렇게 고달픈 극단생활, 그러나 화려한 무대생활이 시작되었다.
막간가수로 무대에 오른 이 어린 천재소녀는 단숨에 신데렐라로 부상한다.
가는 곳마다 인기를 몰고 다니는, 말하자면 ‘백조가극단의 마스코트’로 부상한다.
소녀 희옥은 ‘눈 내리는 밤’ 공연 때면 늘 무대 옆에서 이 공연을 지켜보며
배우들 동작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했다.
운명은 이 열 살배기 무대 옆 막간가수를 무대 중심으로 불러 세운다.
‘눈 내리는 밤’ 공연 도중 ‘춘영이’ 역을 맡은 가수 황금심이 배탈이 나 결국 병원으로 실려 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전옥, 김승호와 더불어 3대 주인공이었던 춘영이가 빠지면서
백조가극단은 아직도 서너 차례 공연이 더 남아 있음에도 막을 내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했다.
이 공연을 계속하게 만든 것이 원희옥이었다. 그 역할을 대신 맡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허나 아무도 원희옥이 그 역을 대신해내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없었다.
많은 대사는 물론 무려 여덟 곡이나 되는 노래를 불러야하는 어려운 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던 전옥은 원희옥을 무대로 올려 보낸다.
유독 어리고 키가 작아
큰 의상을 임시로 실로 꿰매 ‘붕대옷’으로 만들어 입힌 채.
이 때 ‘백조가극단원’들, 그리고 관객들 눈앞에는 깜짝 놀랄만한 감동의 무대가 펼쳐진다.
마치 ‘인형옷’을 입고 나온 듯한 이 어린 소녀가 대사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가극배우 전옥이 소녀 원희옥을 자신의 후계자이자 수양딸로 지목했던 안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비로소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더욱 놀랐던 것은 주제가 ‘사랑의 운명’을 부르는 장면에서였다.
무대에서 그녀는 실제로 울고 있었다.
울면서 노래했고 관객들도 함께 따라 울었다.
당시 원희옥은 이 공연을 시작으로 가는 곳마다 온통 극장 안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것은
세상이 다 알만큼 유명한 일화다.
실제로 그녀는 천성적으로 비극에 썩 잘 어울리는 두성발성,
즉 온 힘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 소리를 내는 타고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원희옥의 존재는 백조가극단 무대에서 빠지면 안 되는 주역으로 떠올랐다.
해서 새로운 가극을 무대에 올릴 때마다 백조 측은 본래 대본에 원희옥이 맡을 역할이 없으면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 넣어서라도 그녀를 빠짐없이 공연 무대에 올려 세웠다.
일례로 ‘항구의 일야’에서의 ‘연심이’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백조꼬마’로 통칭되던 원희옥은 ‘업혀 다닐 정도로 귀하신몸’으로 인기와 호강을 누렸고
그에 따른 대가 또한 혹독했다.
어른 배우들은 제법 수가 많아 대역배우들이 두세 명 씩 되었으나
아역배우는 오로지 혼자였기 때문에 남여아이 역 모두 그의 몫이었다.
주사까지 맞아가며 무대에 올라야 했다. 때로는 무대에서 기어 나오기도 수차례,
심지어 무대 뒤로 퇴장하는 장면에서는 다른 배우들을 등장시켜 부축이며 나가도록 설정을 바꾸기도 했다.
그렇게 혹독한 환경 속에서 ‘눈 내리는 밤’을 비롯해
‘율곡과 그 어머니’ ‘어머니의 힘’ ‘노국공주’, ‘항구의 일야’ 등 명작들을 열연해냈다.
51년 5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피난지 부산에서 원희옥은
‘눈내리는 밤’의 삽입곡 ‘사랑의 운명’을 음반으로 취입하며
본격적인 가수로도 데뷔한다.
이 때 그녀의 나이 불과 열네 살.
그녀의 인기는 영화로 까지 이어져 ‘내가 낳은 검둥이’에 출연,
스크린에 진출함과 동시에 당시 극장마다 영화 시작 전
대한뉴스 시간을 통해 상영되었던 현대식 다리미 1호의 CF에도 출연,
막간가수에서 가극배우로 그리고 CF스타로, 영화배우로, 거침없이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키가 자라지 않아 연극무대 포기하고 가수의 길 택해
허나 그녀에게도 위기가 닥쳐왔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데 남들만큼 키가 커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연극무대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대신 본격적인 가수에의 길을 택한다.
가수는 의상이나 굽 높은 구두로 외모를 커버할 수 있다는 판단도 그 결심을 굳히는데 작용했다.
해서 원희옥은 59년 7월, ‘남포동 마도로스’를 시작으로
‘짝사랑’, ‘눈물의 황혼길’, ‘맨발의 수기’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60년대 초 가요들에 등장하는 원희영, 원희숙 등의 이름이 모두 그녀의 또 다른 예명이다.
69년 5월 그가 몸담았던 백조가극단이 해체되면서 그녀는
쇼보트나 거성, 국제, 파피쇼 등의 쇼 단체로 무대를 옮겨 활동한다.
그는 이미 가극무대를 통해 발레부터 탭댄스, 캉캉까지 배우지 않은 춤이 없었고
또한 노래, 연기 등이 모두 뛰어났기 때문에 음반 취입보다는
주로 공연 위주의 무대가수로 활동했다.
때문에 그와 호흡을 맞추지 않은 악단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69년 10월 민속무용예술단의 가수로 일본재일교포 위문 공연일본에 합류해
일본을 건너가 활동하다가
30여 년 만에 귀국했다.
다시금 국내무대로 돌아온 그녀는 97년부터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그리고 ‘눈물의 여왕’을 비롯해
작년에 공연했던 ‘곡예사의 첫사랑’까지 매년 무대에 서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녀의 가창력이 증명하듯 원희옥의 호흡은 매우 길다.
발성법 또한 남다르게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성악에서처럼 목소리가 둥그렇게 시작되어 끝에 가서도 둥글게 끝난다.
때문에 그녀의 대사나 노래는 객석 끝에 앉은 관객에까지 또렷이 들린다.
이러한 발성법은 특히 얼마 전 공연했던 연극 ‘어머니’에서도 평론가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철들기 이전부터 무대에서 인생의 눈을 뜨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던 ‘만년소녀’ 원희옥.
무대 안에서 보낸 60년간의 삶으로부터
무대 밖 ‘만년소녀’로 남아 있는 그녀에게선
존경심을 넘어 사랑스러움마저 느껴졌다.
여전히 혼자인 그녀에게 하느님이 맡겨준 역할 또한
‘아역’이었을 런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글ㅣ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2007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