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한 그루. 하나의 가지는 북한산이 있는 북쪽을 향해, 또 하나의 가지는 한강이 있는 남쪽을 향해 서로 갈라져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에 대한 얘기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그후로 오랫동안 나는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그녀와 함께 걸어다녔던 그 골목길에 대해, 그리고 그 골목길에서 본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오름차순으로, 혹은 내림차순으로 바뀌는 디지털 숫자들을 바라보며. 아니면 새벽 공원길을 달려가다가 길옆 벤치에 발을 올리고 풀린 운동화 끈을 묶으면서. 며칠 굶은 짐승의 내장처럼 어둡고 습하고 꾸불꾸불한, 그러나 텅 비어 막히지 않고 계속 어디론가 이어지던 그 골목길들에 대해. 땅거미로부터 뭉게뭉게 피어오른 저녁의 조각구름들이 초승달을 스쳐지나가듯. 문득문득. 총총히 정독도서관을 향해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가느라 땀이 맺힌 교복 차림 여학생들의 쇄골 안쪽 살갗이며 국군서울지구병원 담벼락 밑에서 각자 누런 봉투 안에 든 자신의 엑스레이 필름을 반쯤 꺼내어 햇살에 비춰보던 사병들의 찌푸린 주름, 혹은 서울시 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27호 윤보선 고택 돌죽담 모퉁이를 돌아갈 때 그녀를 바라보며 “방 보러 온다던 새댁이유?”라며 환하게 반기던 어느 할머니가 입고 있던 치마의 꽃무늬 같은 것들에 대해. 가끔 하릴없는 마음에 제 손톱을 가지런히 세우고 오랫동안 들여다보듯. 문득문득.
잠깐이나마 말이 끊기면 그 사이로 누기진 바람이 새 들어오던 유월하고도 중순이었다. 가회동 큰길을 따라 다시 율곡로 쪽으로 걸어 내려갈 즈음, 각자 떨어져 살아온 세월들에 대해 물어가며 겨우겨우 이어지던 대화가 어느 틈엔가 끊어졌다. 버성긴 마음에 한번 끊어진 대화는 좀체 다시 연결되지 않았다. 장마가 머지않은 끄느름한 하늘빛이 그대로 배어든 듯한 헌법재판소 담장 너머로 뭉툭한 우두머리를 빼죽거리는 청단풍이며 산수유며 왕벚꽃 따위의 키 작은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우리는 재동 교차로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들뜬 목소리로 “당신, 요즘도 혼잣말 잘해?”라고 내게 물었다. 나는 평범하달 수는 없는, 그렇다고 평범하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는 서른네 살의 회사원이고 가끔씩 내 삶이란 어느 지점에서인가 대단히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종류의 인간인지 아닌지는 여태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혼잣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어떤 식으로 혼잣말을 했느냐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등을 돌리고”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서글픈 마음이 잔뜩 밀려들었다. 그녀에게도 그렇지만, 나 자신에게도 그랬다. 그러더니 그녀는 며칠 전 내가 꿈에 나왔다고 했다.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혼자 중얼중얼 뭔가를 되뇌는 꿈이었을까? “글쎄, 대놓고 말하기는 좀 곤란하고. 아무튼 꿈속에서는 꽤 좋았는데…… 아, 뭐라고 말해야 하나”라며 그녀가 혼자서 말하고 혼자서 킥킥거렸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어쩐지 그녀가 재개발이 임박한 연립주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인지 정확하게 꼬집자면 속속들이 살펴봐야겠지만, 언뜻 봐서도 정상이 아니라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왼쪽으로 걸어가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른편에서 바라보는 얼굴이 내게는 훨씬 익숙했다. 늘 나는 그녀의 오른편에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잠들었으니까. 헛기침을 두 번 내뱉은 뒤, 내 경우에는 요즘 거의 꿈을 꾸지 않는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혼잣말하는 경우는 전혀 없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까닥거리는 그녀의 오른쪽 옆얼굴을 바라보노라니 언젠가 함께 변산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올라탄 밤의 고속버스 독서등 불빛이 떠올랐다. 그때도 나는 그녀의 오른쪽 옆에 앉아 있었다. 주홍색 불빛이 내 점퍼로 덮어놓은 그녀의 아랫배 부분을 둥글게 비춰주고 있었다. 우리는 낮에 직소폭포로 올라가다가 나무에 걸린 꽝꽝나무니 호랑가시나무니 까마귀베개나무니 하는 재미있는 이름표를 가리키며 웃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러던 끝에 이러다가는 자다가 꿈에 그 괴상한 이름의 나무들이 나오겠다며 그녀가 덧붙였다. 자신은 꿈 같은 꿈을 꾸지 않는다고 했다. 금요일 저녁, 눈이 휘둥그레진 샐러리맨들에게 손을 흔들며 하늘을 날거나 가슴이 뻥 뚫린 사내와 느낌 없는 키스를 나누는 꿈을 꾸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저 현실의 일들이 꿈속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어떨 때는 그게 꿈에서 일어난 일이었는지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었는지 모를 지경이라고 했다. 하루 종일 나와 거리를 쏘다닌 날이면 꿈결 속에서도 어김없이 계속 발을 굴린다고도 했고 나와 술을 마시다가 돌아간 날이면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느라 손목이 욱신거리는 느낌이 든다고도 했다. 나는 웃으며 지금도 꿈속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녀의 꿈속에서 그녀와 함께 밤의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라고 속삭였다. 그녀는 무슨 이상한 소리냐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녀의 꿈속까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의 일들이 그대로 꿈속으로 이어진다면 말이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한 인간의 꿈속에까지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골똘히 자신의 아랫배 부분에 드리워진 둥근 독서등 불빛을 바라보자, 그녀는 졸립다며 몸을 약간 일으키며 손을 내뻗어 독서등을 껐다. 그리고 밤의 고속버스 안에는 드문드문 켜놓은 독서등 몇 개, 좌석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은은하게 번지는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수면등, 어둠 속의 나지막한 속삭임과 마른기침 소리뿐. 그리고 그 며칠 뒤, 나는 그녀에게 청혼했다. 내 말을 들으며 그녀는 난처하다는 것인지, 행복하다는 것인지 알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재동 교차로까지 내려간 우리가 함께 서서 담배를 피우는 동안,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담배를 입에 물고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쳐다봤다. 그녀는 일본문화원 쪽을, 그리고 나는 종로경찰서 쪽을. 무슨 꿈이었냐고 한 번 더 물어보려던 차에 그녀가 다시 풍문여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토요일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빨간 줄무늬 셔츠를 입고 출근한 날이었다. 아침에 친구 아버지가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양으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들어가던 차에 나는 우연히 그녀를 보게 됐다. 자리에 앉아서 한참 졸다가 종로3가역에서 갑자기 눈을 떴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맞은편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정말 거짓말처럼. 재미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미국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나는 서로 마주 봤다. 3초 정도. 그녀가 눈길을 피하려는 찰나에 내가 알은체를 했다. 그게 잘한 일이었는지, 아니면 잘못한 일이었는지 아직까지는 알 수 없다. 나도 한 육백 년 정도 살아남아 그 내력을 원고지 2매 정도로 요약해놓은 안내판을 세워둔 천연기념물이 될 수 있다면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때는 이제 서로 약속하고 만나기도 번잡한 관계가 됐으므로 그렇게 만난 김에 그간 서로 어떻게 살았는지 얘기나 나눌 속셈이었다. 그렇게 엉거주춤한 마음가짐으로 우리는 안국역에서 내렸다. 안국역 구내에서는 ‘라라의 테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커피숍이 많은 인사동 쪽이 아니라 다짜고짜 송현동과 안국동 사잇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선재아트센터에 우리가 몇 번 가봤던 커피숍이 있으니까 처음에는 거기로 가는가 싶었다. 그런데 서로의 안부를 더듬더듬 묻고 난 뒤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걸었다. 우리는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떨어져 살았다고 해도 별다르게 달라질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사 다른 일이 생겼다고 해도 서로 시시콜콜하게 말할 처지도 아니었다. 아무 곳이나 가까운 커피숍으로 들어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함께 걸어가다 보니 커피숍에까지 들어가 할 말은 없을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그러는 동안, 등 쪽의 빨간색 줄무늬는 땀방울이 맺힌 자리를 따라 점점 자주색으로 바뀌어갔을 것이다. 육 개월 만에 우연히 만난 전처와 나눌 수 있는 대화의 길이는 송현동과 안국동과 화동과 가회동을 거쳐 재동으로 빠져나오는 정도의 거리면 충분했다. 나는 재동 교차로 어디쯤에서 헤어질 참이었다. 내가 담배를 피워 문 것은 그런 의미였다. 그런 까닭에 그녀가 자신에게도 담배를 달라고 말했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그녀는 담배 냄새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담배를 다 피운 뒤에는 더 놀랐다. 율곡로를 따라 걸어간 그녀가 다시 송현동과 안국동 사잇길로 걸어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그날, 우리는 갔던 길을 한 번 더 걸어갔다.
그리고 며칠 동안, 나는 그녀가 꿨다던 꿈에 대해서 생각했다. 같이 살던 시절에도 그녀는 꿈을 꾸면 늘 내게 얘기했었다. 꿈을 얘기할 때, 그녀의 눈빛은 때로 기대에 부풀기도 하고 때로 불안해하기도 했다. 나는 꿈 따위는 조간신문을 들여다보는 순간 다 잊어버리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꿈 얘기가 재미있었지만, 얼마 뒤부터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의 꿈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그 어느 날이었다. 세찬 빗줄기가 사선을 그으며 서울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늘이 어둠침침했다. 아침 내내 빗소리에 마음을 뺏겼던 나는 점심 시간에 회사를 빠져나와 종로구청 앞에 있는 중앙지도사에 갔다. 비에 젖은 몸이 꿉꿉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판매대 앞에 선 초로의 남자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우산을 접어 한쪽에 세워놓고 그에게 다가가 북촌 근처의 지도가 있는지 물었다. 남자는 북촌 어디를 원하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안국동과 화동과 가회동과 재동이 나오는 지도를 달라고 했다. 남자는 다시 지형도를 원하느냐, 지적도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나는 지적도를 달라고 했다. 남자는 서슴없이 구역별 지도가 칸칸이 들어 있는 곳으로 걸어가 지도를 한 장 꺼내고는 익숙한 솜씨로 둘둘 말았다. 그동안, 나는 가게 안을 훑어봤다. 천장은 높고 실내는 어두웠다. 한쪽에서는 아가씨가 계산기를 두들기며 장부에 숫자를 기입하고 있었다. 나는 진열대에 놓인 한반도 입체 지도나 한라산 등반 지도 따위를 훑어봤다. 이윽고 남자가 지도를 건네면서 “원래 견딜 만하다 싶을 때, 끝나는 법이라오”라고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가 싶어 그 남자를 쳐다봤다. 그 남자는 웃으며 “방금 장마가 언제 끝날까라고 말하지 않았소”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도를 옆구리에 낀 채, 우산을 펼치고 밖으로 나왔다.
중앙지도사 앞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나는 어느 2층 카페 쪽으로 뛰어갔다. 내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보고 막 밖으로 나오려던 여자가 얼른 카페로 돌아갔다. 그 여자가 카페의 주인이었다.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그러면서 여기가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가 있던 곳이 아니냐고 물었다. 내 말을 못 들었는지 여자는 들고 온 메뉴판을 펼치지도 않고 그냥 주방 쪽으로 되돌아갔다. 여자의 발걸음은 불안해 보였다. 맥주를 가져온 여자에게 나는 약간 큰 목소리로 볼펜을 빌려달라고 했다. 볼펜을 건네받은 나는 5천 분의 1 축척의 종로구 북쪽 지역 지도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뒤, 볼펜으로 선을 그어가며 둘이 걸었던 길들을 되짚어봤다. 때로는 S자로, 때로는 직선으로 우리는 언뜻 보기에는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하지만 무작정 걸어가는 그녀를 따라가다 보면 모퉁이를 여러 번 돌아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들을 밟고 다녔다. 내가 그은 검은 선들이 기억 속에서 서로 겹쳐지거나 뒤엉켜들면서, 혹은 더 이상 정확하게 되짚어갈 수 없게 되면서 그날 우리가 함께 지나온 시간은 꼬불꼬불하면서도 때로는 이어질 수 없는,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해할 수 없는 행로로 남게 됐다. 물론 내가 살아가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날 우리 둘이서 걸어간, 그리고 내가 그은, 그러나 끝내 완전히 긋지 못한 지도 위의 행로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없는 듯했다. 나는 지도에 적힌 수많은 숫자들을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우리는 안국동 175번지 앞에서 걷기 시작했다. 안부를 묻던 우리의 대화가 끊어진 것은 가회동 12번지를 지날 즈음이었다. 그녀가 꿈 얘기를 한 것은 재동 83번지 헌법재판소 앞을 지날 때였으며 어이없게도 그녀를 방 보러 온 새댁으로 착각한 할머니를 만난 것은 안국동 8번지 앞에서 9번지 앞으로 걸어갈 때였다. 하지만 그녀가 울어버린 곳은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지도를 들여다봤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생각했다. 이 행로에도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 대답을 구하기 위해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나는 그다지 논리적이랄 수 없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녀가 어떤 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나를 끌고 다녔다는 결론에. 하나의 가지는 북한산이 있는 북쪽을 향해, 또 하나의 가지는 한강이 있는 남쪽을 향해 서로 갈라져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그녀가 그 나무를 알 리가 없다. 그건 우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도상으로 볼 때, 내가 알아낼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날 오후, 우리의 행로 한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는 사실. 나는 장마 내내 선을 그어놓은 지도를 벽에 붙여놓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봤다. “저게 도대체 다 뭐야?” “나도 잘 몰라서 바라보고 있는 중이야.” 술이 취한 밤이면 집에 들어와 혼자 침대에 누워 나는 그런 자문자답을 하곤 했다. 내 생각과 달리, 나는 혼잣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나무
그날의 행로가 무슨 의미인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 그녀는 분명히 나란 인간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고 쏘아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시작해보자. 연암 박지원은 언젠가 처남이자 평생의 친구였던 이재성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꿈에 중을 보면 문둥이가 된다’는 속담이 있지요. 무슨 말이겠습니까! 중은 절에서 살고 절은 산에 있고 산에는 옻나무가 있고 옻나무는 사람을 문둥이처럼 옻 오르게 합니다. 꿈에 본 중과 문둥이는 이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박지원을 오랑캐라고 욕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작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재성이 편지로 일러줬기 때문에 박지원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들을 서로 연결시켜 한가한 입을 달래는 자들의 허망함을 속담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의 고갱이는 그 뒤에 나오는 “지난 수십 년 이래로 옛날 함께 놀던 친구는 대부분 이 세상에서 없어졌습니다. 하룻밤 우스갯소리나 하면서 지내보고 싶은 때도 있지만 그런 날이 있을 수 없게 됐습니다”라는 구절에 있다. 이재성이 일러준 헛소문 얘기를 듣고 느낀 허망함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가 결국에는 먼저 죽은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옮겨갔다. 그러니 죽은 박지원을 위해 이재성이 제문을 짓는 장면에 이르러 내 마음이 다 편안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재성마저 자신보다 먼저 죽었더라면 박지원은 아마 그 고통을 견디지 못했을 테니. 서울 가회방 재동 중국식 벽돌집 사랑채에서 “깨끗이 목욕시켜달라”는 말만 남긴 채, 박지원이 숨을 거둔 것은 1805년 10월 20일 오전 여덟시경이었다. 이재성의 제문에는 이런 구절이 남아 있다. “마치 저 굉장한 보물이 크고 아름답고 기이하고 빼어나나 마음과 눈으로 보지 못하면 이름하기 어려운 것과 같지요.”
마치 저 굉장한 보물이 크고 아름답고 기이하고 빼어나나…… 이 구절을 읽을 때면 나는 늘 늦가을 아침 유언을 남기고 죽는 박지원의 재동 집 벽장에 들어 있었다는 지구의를 떠올린다. 그 지구의에 대한 얘기를 처음 꺼낸 사람은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는 박지원이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지구의를 가져왔다고 쓴 바 있다. 박지원이 손수 지은 재동 집 사랑채 앞에는 그가 태어나기 오래전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원래는 숲을 이룰 만큼 많았겠지만,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다. 바로 그날, 우리의 행로 한가운데에 서 있던 바로 그 나무 한 그루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비롯한 수많은 책을 남겼으며 조선 후기의 개화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건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아울러 박지원은 벽장 속의 지구의와 뜰 앞의 나무 한 그루도 남겼다. 그건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다. 나는 역사라는 이름의 위험천만한 폭약을 단숨에 폭파시키는 뇌관은 『열하일기』나 실학 사상 같은 게 아니라 벽장 속의 지구의나 뜰 앞의 나무 한 그루처럼 사소하고 하잘 것 없고 우연의 소산으로만 보이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만을 두고 본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 사이의 행로는 때로 너무나 우연적이고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곤 한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가끔씩 혼자서 중얼거릴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야 깨달았다. 이혼할 만큼 우리에게 큰 문제가 있었나? 하지만 결국 나는 그 대답은 알아내지 못하고 다만 지극히 하찮은 우연들의 연쇄 과정에다 대고 왜 그래야만 했느냐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만을 알아냈을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은 대부분 스캔들에 휩싸인 영화배우가 서둘러 차에 올라타면서 진실은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들을 향해 내젓는 단호한 손짓 이상의 의미를 띠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나간 일들을 다시 떠올릴 때 늘 만나게 되는, 서로 연결될 수 없음에도 그어지는 그 많은 선들은 다 무슨 의미인 것일까? 역사의 인과관계가, 혹은 지나간 일들의 진실이 도중의 사소하고 우연적이고 꾸불꾸불한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숨에 긋는, 그런 선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날 걸어간 복잡하고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는 무엇일까?
기억을 쫓아가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혼자서 옛일들을 생각하며 자문자답할 때면 특히 그렇다. 지나간 일들은 실험실에서 알코올 램프와 플라스크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일어난 일들은 그 자체가 사실로 증명되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검증할 방법이 없다. 내가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내면 그녀는 늘 화를 냈었다. 자기가 원하는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하는 수 없다. 이렇게 얘기해야만 한다. 사실은 박지원이 살던 중국식 벽돌집 벽장 안에는 지구의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박지원의 손자로 나중에 우의정까지 올라간 박규수가 북촌에 사는 어린 청년들인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을 사랑채에 모아놓고 지구의를 보여주며 국제 정세에 대해 얘기한 것은 그의 나이 68세가 되던 1874년 11월 무렵의 일이었다. 이때, 김옥균 등에게 보여준 지구의가 박지원이 중국에서 가져온 지구의인가, 박규수가 손수 만든 지구의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지금은 박규수가 만든 지구의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은 그 수많은 지난 일들 역시 그 지구의와 같은 것이다. 박지원이 죽을 당시, 그 집의 벽장에는 지구의가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 이제는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또 이렇게 얘기하면 어떨까? 그 지구의를 보면서 조선을 개화시켜야만 하겠다고 결심한 김옥균과 홍영식과 박영효 등은 정확하게 10년 뒤,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날, 민씨 세력의 핵심이었던 민영익은 온몸에 자상을 당했다. 역사가 사소하고 우연하고 모호한 일들의 연속체가 아니라면 그날 민영익은 죽어야만 했다. 무려 열네 명이나 되는 한의사들이 달려들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해 9월 20일, 앨런이라는 미국 의사가 조선에 들어와 있었다. 의료 선교사였던 앨런의 임지는 베이징이었으나 중국인들의 폭력에 시달리며 난징과 상하이를 전전하다가 다른 곳을 찾던 중, 주변의 권유로 우연히 조선에 들어가게 됐다. 박지원가의 지구의 때문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중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앨런 덕분에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적어도 갑신정변 때문에, 더 나아가서는 박지원가의 지구의 때문에 조선 땅에서 첫 개신교 신자가 나오게 됐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앨런의 조선어 선생이던 노춘경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바로 그날 밤, 앨런이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에 앨런의 서재에서 앨런마저도 읽지 말라고 말렸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집으로 훔쳐가 밤새 두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노춘경은 그로부터 2년 뒤, 세례를 받았다. 역사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왜 이혼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면 그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다만 며칠 굶은 짐승의 내장처럼 어둡고 습하고 꾸불꾸불한, 그러나 텅 비어 막히지 않고 계속 어디론가 이어지는 골목길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도 납득이 안 되면 이렇게 덧붙이겠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홍영식이 비참하게 죽은 뒤, 민영익의 도움을 받은 앨런은 흉가가 된 홍영식의 집에다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했다. 제중원의 뜰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박지원의 집 앞에 있었던 나무. 홍영식의 집 앞에 있었던 나무.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그녀와 함께 걸어다녔던 골목길들, 그 가운데 서 있던 나무. 그 나무 한 그루 말이다. 그녀와 내가 헤어진 지금, 이 모든 일이 과연 우연일 뿐일까?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
농담
말했다시피 나는 평범하달 수는 없는, 그렇다고 평범하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는 서른네 살의 회사원이고 가끔씩 내 삶이란 어느 지점에선가 대단히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태어나기를 따분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차를 몰고 가더라도 도로는 보지 않고 좌우의 차선에 더 신경 쓰는 사람이다. 남에게 칭찬받을 수 있는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잘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칭찬받기 어려운 일을 혼자서 결정해야만 할 일이 생긴다면 당장 뭘 해야만 할지 모르는 사람이다. 나 같은 종류의 인간은 절대로 농담을 하지 못한다. 농담을 잘 못할뿐더러 남의 농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따분한 인간이니까 남는 시간이면 역사책이나 들여다보면서 소일하는 셈이다. 역사책에는 농담이란 기록돼 있지 않으니까. 원인과 결과만이 나열된 책이니까. 그러니 내가 며칠을 두고 벽에 붙여놓은 지도에 그어진 선을 바라본 뒤에야 그녀의 농담을 이해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말이 진짜 농담이라는 걸 이제는 잘 알겠다. 하지만 왜 그런 농담을 해야만 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역시 세상의 일들을 죄다 이해하기에 아직 서른네 살의 나이는 부족한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침에 일어나 넥타이를 잡고 서서 가만히 벽에 붙은 그 지도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내가 채 긋지 못한 선을 다시 똑바로 긋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미리 통지하고 찾아오는 불운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인생의 모든 불운이라는 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인과관계의 규칙에서 벗어난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단어일 뿐이다. 나는 내게 닥친 그 불운이 정말 우연한 것인지, 아니면 필연이 내포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날 오전 근무를 마친 나는 회사에서 조퇴한 뒤, 지하철을 타고 안국역까지 갔다. 안국역에서 내린 나는 지도에 그은 선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송현동과 안국동 사잇길을 지나 화동 정독도서관 주위를 한 바퀴 에두른 뒤, 가회동 큰길로 빠져나와 재동 네거리를 거쳐 다시 백상기념관 앞까지 돌아오는 경로였다. 막바지에 이른 장마가 북쪽으로 물러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서울에 비를 뿌리던 날이었다. 가회동 골목길에서 약간 착오가 있었을 뿐, 처음 한 바퀴를 돌아가는 동안에는 내가 그은 선이 그런대로 정확했다. 문제는 두번째로 걸어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덕성여고 담벼락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그녀는 갑자기 오른쪽 좁은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었다. 골목 초입에 선 전봇대에 교육1길이라는 이름을 내건 화살표 모양의 표지판이 그 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즈음부터 나는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그 나무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과연 우리에게 이혼할 만큼 큰 문제가 있었는지 따져봤을 것이다.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외짝문 옆으로 꾸며놓은 손바닥만 한 화단이라든가, 철조망이 둘러쳐진 담벼락 위로 드리워진 어느 집 뒤란의 살구나무 잎사귀 따위를 바라보며 걸어갔었다. 키 낮은 한옥의 처마를 따라 여러 번 굽이치는 골목을 돌아 교육2길로 빠져나가는 길, 또 거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조금 걸어가다 보면 나오는 세거리를 거쳐 다시 오른쪽으로 윤보선 고택 담장을 따라 놓인 별궁길까지는 내가 제대로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녀를 방 보러 온 새댁으로 착각한 할머니를 만난 뒤부터는 기억이 가물거렸다. 지도에서도 그 사이의 행로는 비어 있었다.
나는 우산을 쓰고 다시 별궁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그때의 일들을 기억해내려고 노력했다. 꽃무늬 치마의 할머니를 만나면서부터 나는 이게 다 무슨 짓인가 하는 허망한 느낌에 사로잡혔었다. 방 보러 온 새댁이 아니냐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어쨌든 그녀는 이제 다시는 행복한 새댁이 될 수 없는 몸이다. 그건 내 잘못일 수도 있고 그녀의 잘못일 수도 있고 둘 다의 잘못이거나, 혹은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우연히 만난 사람이 잘못 던진 질문을 통해 그런 깨달음을 얻어야만 한단 말인가. 그게 왜 그렇게 화가 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런 내게 그녀는 오래전에 내가 자신의 삐삐에다가 남긴 음성 메시지에 대한 얘기를 했었다. 그녀에 따르면 언젠가 술이 취한 나는 그녀의 삐삐에 “사실 나, 너 사랑해”라고 말해놓고서는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정색을 한 목소리로 “방금 말한 것은 농담이었어”라며 다시 녹음한 적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아직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기 전의 일이라고 했다. 나는 그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으므로 그것도 농담이라면 대단히 재미없는 농담이라고 대꾸하며 그녀의 얘기를 건성건성 한쪽 귀로 넘겼다. 별궁길을 따라 내려가던 그녀가 왼쪽의 골목길로 다시 방향을 틀면서 내게 “그거 진짜 농담이었느냐”고 물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원래 농담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야”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나는 원래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피식거리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는 내게 그녀는 한 번 더 나는 원래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그건 농담이 분명했다고 강변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모처럼 만나서 그녀와 그런 문제로 말다툼하기 싫다고 대꾸했다.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서 다시 걸어가다 보니 그녀가 들어간 길은 전혀 우체국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좁은 길이었는데 우체국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나는 골목 초입에 서서 지도를 펼치고 긋지 못한 선을 그었다.
우체국길은 안국동이나 가회동 골목길만큼이나 좁고 미로 같았다. 지도에도 그 골목길은 희미하게 표시돼 있었다. 그녀는 우체국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튼 뒤, 조금 더 걸어가다가는 다시 왼쪽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하지만 거기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거기서 들어온 방향으로 되돌아 내려가다가 이번에는 들어온 길의 맞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역시 막다른 길인가 싶었는데, 등나무 덩굴이 손을 뻗어 잡을 수 있도록 골목 양옆의 담벼락 위로 나무막대를 몇 개 올려놓은 곳이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물었으나, 그녀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해 결국 혼잣말이 돼 버렸다. 여전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화가 났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한 번 더 물었다. 갈 데가 있기는 있는 거냐고. 내 말에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덩거친 덩굴 아래에 있는 나무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고는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울음이라면, 더구나 그녀의 울음이라면 그때까지도 지긋지긋했다. 다시 한 번 깨달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잘못 만난 사이였다. 우리는 애당초 서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만났더라도 알은체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길까지의 경로를 모두 확인한 나는 빗물이 떨어지는 등나무 덩굴 아래에 서서 지도를 펼치고 선을 긋기 시작했다. 빗물이 떨어진 지도의 한쪽 귀가 푹 수그러졌다. 나는 지도 위에 떨어진 빗물을 손등으로 쳐내고 그날 우리가 걸어간 길을 한참 들여다봤다.
꿈속에서 그녀는 나와 잠을 잤다. 현실의 일들이 꿈속까지 이어지는 그런 꿈이 아니라 진짜 꿈이었다. 우리는 아직 헤어지기 전이었고 무척 행복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이혼했으며 다시는 행복한 마음으로 함께 잠을 잘 수 없는 처지가 됐다는 사실을.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꿈은 사라졌지만 그녀는 그 행복한 느낌이 너무나 좋아서 눈을 감고 누워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하지만 한번 머릿속에서 떠나버린 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뒤, 나란 인간은 이미 마음속에서 지워버린 지 오래됐는데 그런 꿈을 꿨다는 사실을 그녀는 견딜 수 없었다. 그게 화가 나서 며칠 동안 기분이 안 좋았는데, 결국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는 길을 찾고야 말았다. 그건 육체의 생리 현상에 의한 우연한 연상 작용의 결과에 불과하며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한참 울고 나서 그런 얘기를 하는 그녀에게 나는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럼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더니 자기가 지금 한 말이 농담이라는 걸 모르냐고 덧붙였다. 그 말에 말문이 막힌 나는 그것도 농담이냐고, 그런 것도 농담이냐고 쏘아붙였다. 내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그녀가 말했다. 이게 웃긴 얘기가 아니라고? 이게 어째서 웃긴 얘기가 아니야?
지도에 선을 모두 그은 나는 지도를 둘둘 말아 들고 등나무 덩굴 아래를 빠져나갔다. 거기서 앉아 있다가 우리는 다시 온 길을 되짚어 나갔으니 그날 그녀와는 함께 걸어가지 못한 길이었다. 우리는 율곡로의 어느 은행 처마 밑에 나란히 서서 담배를 나눠 피운 뒤, 분명한 작별 인사도 없이 어정쩡하게 헤어졌다. 어둠침침한 등나무 덩굴 아래를 지나 골목이 끝나는 곳에 이르니 너른 주차장이 눈에 들어왔고 그 주차장을 따라 걸어가니 희망길이 나왔다. 희망길에서 다시 왼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더니 헌법재판소 건물이 보였다. 나는 그 건물을 바라보면서 걸어갔다. 그날 우리가 걸어간 길에 어떤 의미가 있었다면 희망길을 목전에 두고 다시 걸어온 길을 되짚어 돌아나간 일을 두고 그게 우리의 운명을 암시하는 은유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우연에 불과했다. 그날, 그녀가 나를 이끌고 다닌 행로 역시 우연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른 식으로 골목을 걸어다닐 수도 있었다. 내가 지도에 그은 선은 모든 일이 지나간 뒤 돌아보니 결과적으로 그런 선이 됐다는 의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물론 나는 태어나기를 그런 사실을 제대로 납득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이제는 억지로라도 그런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믿는 나이가 됐다. 그녀가 울었던 곳이 어디였는지 정확하게 확인한 뒤, 내가 헌법재판소 뒤에 있는 그 나무를 보러 가리라 마음먹은 일은, 그러므로 당연하다.
자, 이제 나는 살아서 서른네 살이 됐고 그 나무는 육백 살이 넘었다. 육백 년을 살게 되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이제쯤이면 지하철에서 내가 그녀에게 알은체를 한 것이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그 나무는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나 나나 이제는 삶의 행로가 하나의 거대한 농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농담은 하나도 재미가 없으며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우리는 그런 것도 농담이냐고 쏘아붙이기도 하고 이게 웃긴 얘기가 아니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삶을 이해하기에 서른네 살이라는 나이는 아직도 부족하다. 나는 우산을 뒤로 젖히고 고개를 들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선 백송을 올려다봤다. 하나의 가지는 북한산이 있는 북쪽을 향해, 또 하나의 가지는 한강이 있는 남쪽을 향해 서로 갈라져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차가운 장맛비가 내 얼굴로 들이닥치는 동안, 여전히 푸른 우듬지가 흐리마리 빗물에 지워졌다. 나는 고개를 숙여 오른손으로 눈두덩을 한 번 닦은 뒤, 다시 얼굴을 들어 백송을 올려다봤다. 둥치에서부터 나뉜 두 개의 가지는 저마다 아픈 사람들처럼 철제 버팀기둥에 기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두 가지 사이로는 가느다란 쇠줄이 연결돼 있었다. 그 통에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면서 버티는 꼴이 돼버렸다. 쇠줄을 자르고 버팀기둥을 없애버리면 금방이라도 두 개의 가지는 땅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얼굴로 떨어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서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왜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인가? 나는 울타리를 넘어 잔디를 밟으며 백송을 향해 몇 걸음 더 걸어갔다.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 백송이 내 머리 위로 그 젖은 잎을 드리웠다. 비가 쏟아지는데도 여전히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계속 따져 묻기로 했다. 왜 그냥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가? 철제 버팀기둥과 쇠줄로 지탱되는 육백 살이라니? 다른 나무들은 다 죽어버렸는데, 오래 살아남기만 하면 천연기념물이 된다니 그것도 일종의 농담인가? 백송이여, 그런 것도 농담인가?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는 뜻인가? 어린 백송도 천연기념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인가? 우리가 만난 것도, 헤어진 것도,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골목길을 한없이 걸어다녔던 일들도 필연이 된다는 뜻인가? 백송 사이를 지나온 빗물이 내 얼굴로 떨어졌지만, 그래서 부릅뜬 눈이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한번 버텨보기로 했으니까. 육백 살이 넘은 천연기념물과 이제 고작 서른네 살이 된 따분한 인간, 둘 중 누구의 농담이 더 웃긴 것인가 따져보기로 했으니까.
첫댓글 농담이 썰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