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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적표)
이 나이에 학교에서 맨 처음 치룬 시험점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남겨 논 흔적도 없으면서 무슨 문제였는지도 나는 또렷이 안다. 고작 15점이 내 점수다. 시험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어ㅁ니 , 아ㅁ지 , 바ㅁ아 . 빈칸을 채우는 의미를 몰라 가만 앉아 있다가 끝날 무렵 선생님이 이 놈 바보 아니야 하는 답답함에 가운데에 알맞은 말을 채우라고 귀띔을 해줘 부랴부랴 써넣어 맞춘 세 글자이다.
어머니는 장롱 벽에 1년간이나 부실한 시험지를 두고두고 보라는 작정으로 부쳐 놓았었다. 그 시절 나는 여실히
총기가 부족했다. 생활기록부에는 양순하나 총기가 부족하다거나 소심하다는 말이 늘 따라붙었다. 그나마 열심히 노력을 한다거나 충실하다는 말이
어머니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반에서 처음으로 10등 안쪽에 들어선 3학년 때 삼립크림빵의 달콤한 맛을 처음
알았다.
치맛바람이란 말이 돌던 그 무렵이지만 어느 정도는 되는 녀석이어야 체신이 서고 그 말도 위력을 갖는다. 사범학교
출신으로서 많은 신경을 섰던 어머니였지만 따라 주지를 못하였으니 그 심정은 오죽했으랴. 저학년 시절은 성적표에 수가 하나 둘 정도이고
대체적으로 우 아니면 미였으며 음악은 늘 양이었다.
나는 내가 음치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 차렸다. 노래 못하는 것이 서럽다했지만 그것으로서 끝이 아니라 평생 애물단지처럼 쫓아다니며 곤욕을 치루고 외톨이를 만드는 산물이 될 줄이야 그 시절엔들 감히 생각이나 했겠는가. 우리나라는 노래의 천국이다. 소심한 녀석이 앞에 나서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혹한 형벌이다. 머릿속에선 할 말들이 그득한데도 일어서면 하얗게 질려 아무 생각이 안 든다.
비록 노래는 못하지만 그 때도 그러했지만 난 여전히 음악에는 관심이 많다. 옆집 형한테 들숨날숨도 모른 채 하모니카를 빌려서는 단번에 음률을 탔었다. 그 바람에 나는 합주반에 끼어 오수재너와 스와니강 그리고 뻐꾸기왈츠를 불렀었고 계명도 모르는 가요를 곧잘 불러 대 주위를 놀라게 한 적도 있다. 생을 통 털어서 딱 한 번이지만 그런 나는 4학년 2학기 때 올 수를 맞았다.
어머니는 그때도 장롱에 성적표를 부쳐 놓았었다. 이후 공부를 조금 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래도 생활기록부상에는 늘 소심함이었다. 평상시에는 잘 하는데 긴장을 하는 때나 큰 시험 때는 기회를 놓친다. 그런 내게 그나마 조금은 달라진 계기를 만들어준 분은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시다. 그때 처음 반장을 했었다.
반장은 늘 교실 안을 쭉 훑어보고 선생님께 경례란 호령을 한다. 긴장하면서 손에 땀이 배고 기어들어가는 가는 목소리. 우스운 얘기지만 소심함은 그 조차도 허용이 안 된다. 선생님은 아주 독하고 엄한 어조로 나를 바로 세웠다. 큰 소리가 나올 때까지 시켜서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매로 다스렸다. 그렇다고 그 호기가 하루아침에 생기려마는 그로 전과는 분명 달라진 나였다.
나는 지금도 일어서면 그 시절의 선생님이 하라는 그대로 우선 심호흡을 하고 배에 힘을 주고 칼을 휘두르듯 거칠게 목소리를 높여서 좌중을 둘러보고 말을 시작한다. 그러면 힘이 나고 침착해지는 것만 같다. 훗날 현대란 직장에 잠시 머물던 때 수 백 명이 모이는 합숙훈련 과정 중에 나는 전체반장을 거뜬히 했고 그로 공로상도 받았다.
그 시절 반장으로서 솔선수범은커녕 시원찮다고 무척 맞았는데 참 이상하다. 유독 그 선생님이 많이 떠오른다. 반장의 자질을 강조하였던 또렷한 그 눈빛을 잊지 못하겠다. 호랑이 선생님이란 표현이 겉에 나타난 의미보단 깊은 자상함을 전제 하는 말 같이 느껴진다. 그 누구든 달라지는 어느 계기를 맞는다. 어떤 사람은 공부가 계기가 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운동이 그 계기가 될 수 있다. 좋은 결과를 낳는 계기는 어느 계기든 깊은 느낌의 소유, 자상함에서 무릇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분명 그 분은 나를 다르게 한 좋은 계기를 선사해 주셨다. 계기란 동기로서 그 당시의 것이지만 벌로써 손을 내민 얄팍한 심정에서는 결코 알 수 없으며 먼 훗날 그리움으로서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 까지가 그 말의 본뜻이다. 그 시절이 하나의 그리움인 것은 바로 추억할 어느 계기가 그 안에서 여전히 남아 녹녹히 버팀을 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크림빵에 애착이 가고 짜장면이 질리지 않은 채 여전히 입맛이 가는 것도 모두 다 그 연유에서다.
(소싯적 내 이름)
얼마 전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에게 수필집을 보냈었다. 선생님은 한달음에 전화를 주셨다. 제자가 꽤 기특하였던 모양이다. 그런 선생님은 망설이듯 하더니 한 말씀하셨다. “ 어찌 자네 이름이 성원인가.”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내 이름이 바뀐 것을 알리가 없다. 초등학교 때까지 썼던 이름은 ‘ 조형곤’ 이란 이름이었다.
갑자기 말문이 막혀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써보기도 참으로 오랜만에 써보는 조형곤이란 옛 이름이다. 내 이름이 바뀐 것은 중학교를 막 들어가서다. 어디선가 그 이름으로는 앞길이 막막하다는 운명적 예언을 들으시고는 어머니는 이름을 바꾸기로 작정을 하신 거였다. 당시에 유명하다는 점쟁이가 시중에 셋이 있었다.
용산엔 백운학 선생이 종로엔 김봉수선생이 그리고 저 멀리 서산엔 욕쟁이 무당이란 분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계셨는데 어머니는 맨 처음 내 이름을 들고 욕쟁이 무당을 찾았다고 한다. 그 사주에 이름으로는 ‘아니올시다.’ 그러더란 것이다. 해서 또 찾은 분이 김봉수 선생인데 역시 같은 대답이라 작정을 하고 당신은 내 이름을 고치셨다.
당시는 이름을 호적에 고쳐 올린다는 것이 엄청 까다로워 재판까지 받아야 했는데 내 이름은 그야말로 운명적이라서 그런 것인지 무난히 나의 정식이름이 되었다. 내 이름이 작명이 잘된 것이란 신뢰를 갖은 것은 덕을 스스로 봤다 싶어서가 아니고 결혼을 할 무렵 김봉수 선생을 직접 만나 본 그 후부터다.
지금 아내와 잘 살 것인지를 보자며 어머니는 나를 청와대 뒤쪽 종로 어느 골목을 쑤시고 가셨다. 동네는 전체가 점쟁이 동네인지 그 집 간판 말고도 너 댓이 나란히 일자로 벌려서 손님을 맞았다. 나중에 안 것인데 용타는 그 집에서 속상한 꼴을 당하면 홧김에 옆집으로 쪼르륵 들어가 그 덕에 더불어 먹고 사는 점집들이라 했다. 재판을 받듯 긴 의지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을 치는 소리가 바깥까지도 간간이 기어 나왔다. 분명 그 때 안쪽으로부터 내가 들은 말은 말이지만 거의 패대기치는 것이나 진배없는 모진 말이었다. '너 또 시집가봐야 서방 또 죽여. ’ 참 기가 막힌 소리다. 여자는 우는 듯 했다. 콕콕 정곡을 후비는데 아무소리도 못하고 운다는 것은 제대로 맞춘다는 것이 아닌가. 점쟁이는 그러더니만 점쟁이 사촌인 문지기 하는 장수란 분을 부르더니 여인을 모시고 나가라고 이르는 것이었다.
그 여인이 나가자 휑하니 소금까지 뿌렸다. 정말 이름 석 자에 정해진 운명이 따로 있는 것인가. 그리고 내 차례, 분명 여기서 이름을 작명하였지만 숫한 시간이 지난 시점 이를 기억하랴 했다. 그런데 가분수 머리형인 그는 대뜸 이름이 좋다고 하는 것이었다. 혹 덤으로 묘한 말을 들을까 싶어서 더도 안 물어보았다.
그렇게 지은 이름이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것인가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사주에 천문 쫓아 글이라도 만지작댄다 싶으니 어느 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이름 석 자 드높일 일이 없겠다 싶으니 전혀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한데 다행이다 싶은 것은 지금 이름이 전 이름에 비해 흔하고 부드럽고 친근감이 든다는 사실이다.
어디를 가든 내 이름은 흔하다. 전국에 흩어진 슈퍼나 잡화상 간판이름이 내 이름인 경우가 의외로 많다. 흔한 만큼 친근감이 들고 많이 들어본 이름 같다하니 그 점이 나는 꽤 마음에 든다. 사주팔자에 외롭다는 천고가 있다는 데 그래서인지 나는 내성적인 기질이 다분하고 잘 어울리지를 못한다. 그런 때 별 말도 아닌 ‘조성원입니다. 분위기 조성을 좀 할까요. 성원 좀 부탁드립니다.’하고 불쑥 건네면 어색한 순간이 금세 달라지곤 한다.
이젠 그런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도 나온다. 그래서 손해 난 적이 없다. 새로 지은 내 이름 석 자, 운명을 바꿔보자고 지은 이름이기는 하지만 나는 기실 그 운명론을 반 이상 믿지 않는다. 다 자기 하는 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던가. 그보다는 나는 운명이 바뀐다는 절박함으로 재판을 하면서까지 이름을 고치신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절절한 마음을 굳게 믿는다. 바로 내 이름은 성명학을 철저히 믿으신 애착많은 당신 사랑으로서의 이름 석자이다.
어쨌거나 나는 밝을 晟에 언덕 原 하여 언덕 위에 밝게 떠오르는 혜성 같은 존재의 이름뜻풀이로 보단 성원하여 달라하는 마음으로 곱게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난 소싯적 내 이름 또한 버리고 싶지는 않다. 해맑은 미소가 몽실몽실 샘솟던 시절. 어느 누구도 그렇지만 나 역시도 몇 개의 별명을 가졌었다. 그 나이에 별명이라 한들 별 것일 리가 없다.
낱말을 배우면 비슷한 말이나 반대말을 한창 따라서 배우는 참이니 비슷한 말 찾듯 얼굴 생김에 맞게 그냥 갖다가 부쳐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뚱뚱하다 싶으면 돼지나 찐빵이 되고, 머리가 뒤뚱하면 짱구, 홀쭉하면 홀쭉이, 키가 크면 꺽다리, 콧물을 줄줄 흘리면 코흘리개 하는 식이다. 성과 이름에서도 그냥 따서 불렀다.
이름이 봉구라 하면 방구쟁이라 불렀으며 변 씨 성을 가진 아이는 그나마 양호한 별명이 변덕쟁이였으니 몇몇 아이는 성씨 때문 아주 죽을 맛이었다. 별명은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조금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들어졌다. 키가 작으면 몽당연필이 되었으며, 코흘리개는 코딱지, 대변이란 별명은 변 사또로 바뀌었고 아무것이나 걸신들린 양 먹어대는 아이는 똥개 아니면 미친개라고 불렀다.
막 머리가 트이면서 직접적인 묘사 풀이에서 그런대로 상징성을 갖는 별명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내 별명 또한 그런 식으로 변하였다. 맨 처음 듣던 별명이 안경을 꼈다하여 안경다리 이었는데 바로 소싯적이름 곤과 곤 색 스웨터가 매칭 되어 곤 색이란 별명이 한동안 붙더니만 어느 날 부터서는 머리가 달걀모양을 닮았다 하여 곤달걀이 되었다.
별명이란 가벼운 놀림은 있지만 친근감을 나타내고 이름보다 더 잘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문단에 데뷔하기 전 '내 어릴 적'이란 제목으로 그 시절 이야기를 모아 소싯적 친구들에게 돌렸던 글 집이 따로 하나 있다. 오늘따라 그 글 표지에 새겨진 6학년 4반 조형곤이란 이름이 기억해주어 고맙다는 듯 책장에서 살갑게 웃는다. 그로 부를 땐 여전히 나는 14살이고 부끄럼 많은 소심한 곤달걀 그 아이다.
(내 삶의 지표는)
조앤 K. 롤링이 만들어낸 마법의 인물 ‘해리 포터’. 극장가에서 흥행을 거듭하는 것을 보면 글로 벌어들이는 돈이 웬만한 대기업 수익보다 낫다. 글은 잘 쓰고 볼 일이다. 그의 글을 보면 우선에 흥미롭다. 해리가 다니는 기숙학교의 이름은 호그와츠인데 ‘잠자는 용을 절대 간지럽히지 말라’가 학교 교훈이다.
생각이 참 기발하다. 무심코 지나다 눈에 띄어 기억해두는 표어가 하나 있다. '큰 꿈과 희망을 키워 가는 즐거운 학교 스스로 자유롭게 내일을 향해서 걷자.' 글이 딱딱하지 않고 친근감이 있어 좋다. 그렇다고 나타낼 바를 제대로 표현 못 한 것 같지도 않다.
'성실 인화 단결'이란 엄중한 글귀가 학교 표어로서 인식되던 시대에 살았던 나로서는 상큼하고 인간적 향기로움까지도 느껴진다. 그 시절에 불렀던 동요는 떠올라도 학교 교훈이나 교가는 전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단지 기억력이 쇠퇴하여서만은 아니지 싶다. 인식하여 자각하고 느껴져 닿는 것이 소중하단 생각을 하곤 한다.
실천할 표어를 작성하던 그 시절의 학생회. 선생님이 주제를 주면 토의를 거쳐 실천할 사항을 결정하는 식으로 운영이 되었었다. 주제는 대개가 한경미화나 자율학습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사항이었으며 우리는 복도에서 뛰지 말고 주번이 교탁이나 지우개를 잘 정리하고 자율학습 문제를 철저히 푼다던지 하는 면학분위기 조성에 대한 실천 표어를 내걸곤 했었다.
제대로 실천될 리 없는 결정사항으로 자율적으로 정하고서 안 지킨다 하여 선생님한테 늘 혼이 났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그 벌의 대가가 교훈이나 급훈보다 선명하다. 요즘 아이들은 어떤가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방금 구워낸 빵같이 정감이 모락모락 나고 재미있다. ‘놀다 죽자’,‘재미가 공부다’.‘공부는 쉬엄쉬엄, ‘놀기는 죽을 각오로’,‘Cap이 되자’,‘대빵 멋지게’ ,‘내가 먼저’, ‘최고보다 최선을’
그 중 제일 마음에 드는 표어는 ‘내갈길 내가 개척이다.’ 란 표어다. 그러고 보니 이 나이되도록 나는 반듯한 좌우명 하나 없이 엄벙덤벙 살아온 듯싶다. 젊은 시절 취직이라도 해 보려고 너의 신조가 무어냐 하면 말 해 둘 두셋 정도는 생각해두었던 것도 같은데 흐릿해져서 뭐라 말할 거리조차 없다.
난 한마디로 꼬리가 긴 놈이다. 변명이 늘어지고 그렇게 하는 이유도 길다. 변명과 이유 때문에 말도 길고 어설픈 생각의 시간도 길다. 어설픈 관계로 그냥 넘어 가도 될 것을 따지게 되고 따지다보니 달라붙고 달라붙으니 떼어 달라 큰소리도 나오고 오해도 생기고 스스로 화도 난다. 나를 보고 누군가 화통하다 하지만 앞을 보고 뒤를 아니 봐서 하는 말이다.
원래 화통한 사람은 벌겋게 달아올라 비록 화는 잘 내지만 남이 잘못된 것이나 못 보아줄 것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잊기도 잘 잊고 시원스런 사람이다. 이참에 고치고 달라진다면 간결한 삶이 되었으면 한다. 단순한 마음을 의미한다. 이는 낙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잘 수용하는 표리부동하지 않은 마음의 자세를 말한다.
물과 우유가 적절하게 잘 섞여진 커피의 맛은 단순하면서도 맛이 깊다. 쓰지도 달지도 아니하고 그윽한 향내가 하나가 되어 단순하기 때문에 거부감 없는 느낌을 잘 선사해준다. 누구나 욕망을 얹고 살지만 내려놓을 줄 아는 단순함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느 유명인사가 대학자를 명절이라 하여 새벽같이 찾아갔다고 한다.
빗자루를 들고 길목을 바지런히 쓰는 촌로가 눈에 띄어 보니 그 분이 그 대학자였다고 한다. 명절 날 곱게 차려입고 제자들을 맞이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마당을 쓸고 화초에 물을 주고 차 한 잔을 끓여주며 빙그레 웃으시는 모습을 보고 얻은바 크다고 회고한 글을 나 역시도 깊게 받아들였다. 그의 평온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단순함은 단일한 색채로서도 단아함을 잃지 않는다. 단순하고 간결한 색채를 희구하며 가난으로서 여유로움을 찾고 싶다. 빗자루를 하나 들고 새벽을 쓸듯 정갈한 마음을 쓸어 가난을 심고 싶다. 그러기에 굳이 표어를 하나 만들자 하면 ‘대빵 멋지게 단순하게 살자.' 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제대로 실천을 못 할 것은 불 보듯 뻔 할 노릇인데 이제는 누가 나를 혼내주려나. 이제는 붉은 노을에 비영비영 시들어가는 인생이 내 스승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