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 자서전] 연장자 의견대로 배우자를 결정하는 모라비아 교도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 모라비아 교도들의 습관을 관찰해보았다. 다들 내게 친절했고 몇몇 사람들은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녀주기도 했다. 모라비아 교도들은 함께 일하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했으며 식사도 함께 하고 잠도 공동 숙서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잤다. 숙소의 천장 바로 밑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있었는데, 환기를 하기에는 아주 적절하게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교회에도 가서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클라리넷 등과 오르간이 함께 어우러진 멋진 음악을 들었다. 그들은 우리처럼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모두 같이 모여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결혼한 남자들끼리, 어떤 때는 결혼한 여자들끼리, 또는 젊은 남자들끼리, 젊은 여자들끼리, 아이들끼리 따로 나뉘어 설교를 들었다. 한번은 아이들의 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들어보았다. 아이들은 들어오는 순서대로 줄을 지어 의자에 앉았다. 남자 아이들은 젊은 남자 선생님이, 여자 아이들은 젊은 여자 선생님이 가르쳤다. 설교는 아이들의 수준에 잘 맞는 것 같았다. 선생님들은 친근하고 다정한 말투와 태도로 아이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아이들은 아주 질서정연하게 행동했지만 안색이 창백하고 허약해 보였다. 집 안에만 있으면서 운동을 충분히 하지 않은 탓인 듯했다.
모라비아 교도들은 제비뽑기로 결혼 상대를 정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나서 사실인지 물어보았다. 제비뽑기는 특별한 경우에만 하는 거라고 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한다고 했다. 젊은 남자가 결혼하고 싶으면 자기 반의 연장자에게 얘기를 한다. 그러면 그 연장자는 젊은 여자들 반을 감독하는 연장자와 의논을 한다. 이 연장자들은 각자가 맡고 있는 젊은이들의 기질과 성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구와 누구를 맺어주는 것이 좋을지를 가장 잘 판단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판단을 따랐다. 그런데 가령 한 청년에게 두세 명의 처녀가 똑같이 어울리는 일이 벌어진다면 이럴 때 제비를 뽑는다고 했다.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주 불행해질 수도 있다고 나는 항변했다. 그랬더니 “스스로 상대를 선택해도 불행해질 수 있는 겁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 말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장교들의 호위를 받은 일로 영주의 오해를 사다
필라델피아에 돌아와보니 시민병 협회가 순조롭게 체계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퀘이커 교도가 아닌 주민들 대부분이 이 협회에 가입해서 중대를 만들고 새로운 법에 따라 대위, 중위, 소위를 선출했다. 본드 박사가 나를 찾아와서 사람들이 새로운 법에 친숙해지도록 만드느라 자신이 애를 많이 썼노라고 했다. 나는 모든 것이 내가 쓴 <대화집> 덕분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이썼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는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그냥 두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게 나의 평소 지론이었다. 장교들은 회의를 열어 나를 연대장으로 뽑았고 이번에는 나도 받아들였다. 그때 중대가 몇 개였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1,200명의 늠름한 군인과 여섯 대의 놋쇠 야전포로 무장한 포병 1중대를 사열했다. 포병들은 1분에 열두 발을 발포할 정도로 야포를 능숙하게 다루었다. 내가 처음 연대를 사열하고 나서 군인들은 나를 집까지 배웅한 뒤 문 앞에서 야포를 몇 발 쏘아 경의를 표했다. 그 바람에 집에 있던 전기 실험 장치 몇 개가 흔들리면서 유리가 깨졌다. 그리고 새로 얻은 내 직함도 얼마 안 가 그렇게 깨졌다. 영국에서 이 법이 폐지되면서 우리의 임무도 모두 끝났기 때문이다.
내가 연대장을 맡고 있던 그 잠깐 동안 이런 일이 있었다. 버지니아에 가야 할 일이 있었는데, 내 연대의 장교들은 도시 외곽인 로우어 페리까지 나를 호위해야 한다고 자기들끼리 결정을 한 것이다. 내가 말에 막 오르려는데 30-40명의 장교들이 제복 차림으로 집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들의 계획을 사전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알았더라면 오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허세 부리는 것을 나는 천성적으로 싫어했다. 그래서 장교들의 행동이 굉장히 불편했지만, 그들이 나를 따라오는 걸 막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장교들은 내가 출발하자 칼을 뽑아 든 채로 계속 다라와 나를 더욱 난처하게 했다. 누군가가 이 일을 영주에게 편지로 알렸고 영주는 발끈하며 성을 냈다. 그 지방에 있는 동안 자신도 그렇고 지사들도 그런 대접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예우는 왕족 중에서도 왕자 정도는 되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궁중 예법에 대해 전혀 모르니 아마도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사소할 수도 있는 이 일로 나에 대한 영주의 반감은 더 커졌다. 의회에서 내가 영주 토지의 면세 문제를 격렬하게 반대하는가 하면 영주의 행동을 비열하고 부당하다며 비난해왔기 때문에 영주는 진즉부터 나를 못마땅해하던 참이었다. 결국 그는 내가 주의회에서 영향력을 이용해 현금징수법안의 통과를 방해하면서 국왕의 업무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며 장관에게 나를 고발했다. 또한 장교들을 거느리고 행진을 한 것은 영주의 권한을 무력으로 빼앗으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체신장관인 에버라드 포크너 경에게도 내 지위를 박탈하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예버라드 포크너 경은 나를 불러 점잖게 경고하는 걸로 끝냈다.
지사와 주의회 사이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의회에서 내가 큰 역할을 하고 있긴 했지만, 지사와 나는 개인적으로 서로 부딪히는 일 없이 언제나 예의를 갖추는 사이로 지냈다. 지사가 그의 교서에 답변을 작성하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알면서도 내게 별 반감을 갖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직업에서 비롯된 습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변호사였기 때문에 우리 둘을 한 사람은 영주를 위해, 또 한 사람은 의회를 위해 법정에서 싸우는 대변인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면 나를 찾아와 스스럼없이 의논을 하기도 했고, 가끔씩은 내 조언을 따르기도 했다.
우리 두 사람은 브래드독 장군의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는 일에는 하나가 되어 협력했다. 나중에 패전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을 때, 지사는 급히 내게 사람을 보내 후방의 경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했다. 그때 내가 무슨 충고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던바 대령에게 편지를 보내서 전방에 군대를 배치해 경계를 하고 있다가 지원군이 도착하면 그때 원정을 떠나도록 설득하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내가 전방에서 돌아오자 모리스 지사는 주의 군대를 이끌고 듀케인 요새 함락을 위한 원정을 떠나는 일을 내게 맡겼다. 던바 대령과 그 휘하의 군인들은 다른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지사는 나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나는 지사의 말처럼 군사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못 되었고, 지사 역시도 본심과 달리 과장해서 얘기했던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군인을 모집하는 데 도움이 될 테고 주의회에서 영향력이 있으니까 영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도 군인들에게 줄 돈을 받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사는 기대와 달리 내가 협조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계획을 취소했고 이내 지사직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후임으로 네니 대위가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