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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속의 인간과 자연 속의 인간
―최두석 시집 『투구꽃』(창비, 2009)에 대하여
이은봉(시인, 광주대 교수)
시인 최두석은 2009년 가을에 간행된 제6시집 『투구꽃』(창비)의 「시인의 말」에서 자신이 지금 “묵은 화두를 일용할 양식처럼 쪼아먹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때의 묵은 화두는 “사회 속의 인간과 자연 속의 인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사나”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화두에는 당연히 사회와 인간과 자연에서 비롯된 그 나름의 진지한 성찰이 담겨 있다. 말하자면 “사회 속의 인간과 자연 속의 인간이” 이루는 상호관계에 대한 그 자신의 의미 있는 통찰과 함께하는 것이 이 화두라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그가 그동안 좀 더 관심을 기울여온 것은 자연 속의 인간이기보다는 사회 속의 인간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첫 시집 『대꽃』(문학과지성사, 1984) 이후 네 번째 시집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문학과지성사, 1997)에 이르기까지 그가 정작 주목해온 것은 우리 시대의 민족ㆍ민중이 처해 있는 나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 속의 인간’에 대한 그의 탐구가 기미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예의 네 번째 시집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에서부터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시정신이 좀 더 구체적으로 ‘자연 속의 인간’에게로 기울어진 것은 다섯 번째 시집 『꽃에게 길을 묻는다』(문학과지성사, 2003)에서부터라고 해야 마땅하다.
2003년에 간행된 다섯 번째 시집 『꽃에게 길을 묻는다』의 세계는 2009년에 간행된 여섯 번째 시집 『투구꽃』의 세계에 그대로 이어진다. 물론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하려고 하는 여섯 번째 시집 『투구꽃』에는 ‘자연 속의 인간’에 대한 그의 사유가 좀 더 확장되어 있고 심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시집 『투구꽃』에 이르러서는 ‘자연 속의 인간’과 관련된 그의 상상력이 한층 성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이 시집의 시에 이르러서도 그의 상상력은 여전히 구체적인 사실이나 경험의 차원에 뿌리내려져 있기는 하다. 아직은 사회와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상상력을 완전히 잃고 있지는 않은 것이 그의 시라는 것이다.
서정시도 창작문학이니만큼 기본적으로는 허구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시는 실현이 가능하지 않은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상상력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허구 그 자체와 함께하는 비의적인 상상력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 그의 시라는 뜻이다. 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 최두석은 자신의 언어 및 지식에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근거가 분명한 언어와 지식을 바탕으로 사실과 경험에 기초한 상상력, 리얼리티가 분명한 상상력을 펼치고 있는 것이 그의 시라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시에는 충분히 현실에서 실현이 가능한 세계, 체험이 가능한 세계가 그려져 있다.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은 꽃이나 새 등 동식물을 소재로 삼고 있는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시 역시 지금까지 그가 견지해온 리얼리즘의 정신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주관적 진실보다는 객관적 진리를, 주체의 의식보다는 객체의 현실을 선행하는 가치로 여겨온 것이 그의 시이다. 그의 시의 경우 주체의 의식과 함께하는 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객체의 현실과 함께하는 진리를 좀 더 소중하게 여겨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가 주관적인 감정의 표현보다는 객관적인 사실의 표현을 선행하는 가치로 여기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시에 내면적 정념이 진술되어 있는 경우보다 외면적 사실이 묘사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기인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외면적 사실에는 자연이나 사물만이 아니라 역사나 사회도 들어 있다. 시를 통해 그가 자연과 사물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삶의 현실, 즉 역사ㆍ사회적 현실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의 시의 이미지가 대부분 경험적 사실에 기초한 대지의 상상력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도 본래는 이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그의 시에 그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 즉 그가 잘 아는 것들이 수용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의 소재와 대상을 확보하기 위해 구체적인 자연의 공간을 향해 끊임없이 창작기행, 곧 창작답사를 떠나는 것이 그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직접 들은 사실을 그 나름의 독특한 상상력을 통해 재조립하는 창작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 그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이지만 그의 시집 『투구꽃』에는 수많은 자연의 존재들이 노래되어 있다. 그의 시에서 자연의 존재들은 구체적인 사물의 이름으로도 등장하지만 지역의 이름으로도, 터전의 이름으로도, 즉 산천의 지명으로도 등장한다. 물론 이들 산천의 지명보다 훨씬 더 많이 등장하는 것이 동식물의 이름, 즉 사물의 이름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시경』과 관련해 흔히 강조해온 조수초목지명(鳥獸草木之名)을 많이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의 시집 『투구꽃』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후투티, 괭이갈매기, 황조롱이, 직박구리, 우렁이, 강치, 연어, 곰, 풀솜대, 족도리풀, 홀아비바람꽃, 복수초, 사스레피나무, 고로쇠나무, 박달나무, 느티나무 등이 조수초목지명의 실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그의 시들은 이들 동식물을 구체적인 이름으로 불러내는 데 초점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 까닭은 간단하다. 이들 동식물도 엄연히 자기 땅에서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동식물은 동식물대로 그 나름의 생태적 질서를 갖고 자기 땅에서 살아가야 마땅하다. 따라서 이들 동식물의 생태적 질서 또한 깊이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이들 동식물이 지니고 있는 생태적 질서에 오늘날의 인간이 지나치게 개입하거나 참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일은 누구라도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다음의 시를 보더라도 이는 잘 알 수 있다.
비질이 잘된 융건릉 숲길에
나뭇잎 요람이 깔려 있다
거위벌레가 알을 낳고 상수리잎으로 말아
바닥에 떨군 것이다
나는 이 정성들여 만든 요람이
사람들의 발길에 밟힐까 저어하여
주워서 숲속에 넣어주며 가다가
그냥 발에 밟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걷는다
나뭇잎 요람이 너무 지천인 탓이요
나의 가벼운 적선을 보는
상수리나무의 곱지 않은 시선을 느껴서이다
왕릉 지키는 숲을 해치는 해충을
무엄하게 동정하는 죄를 저지르다니!
무덤 속 정조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해서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자신의 묘를 쓰기 위해
수원성을 옮긴 정조의
공과를 묻는 나의 상념은 부질없이
숲길을 따라 돌며 칡넝쿨처럼 뻗어가는데
산책이 끝날 즈음에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거위벌레도 엄연히
행복하게 살 권리를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요람과 무덤」 전문
시인은 지금 “융건릉 숲길”의 “나뭇잎 요람” 위를 걷고 있다. “나뭇잎 요람”은 물론 “거위벌레가 알을 낳고 상수리잎으로 말아/바닥에 떨군 것”들을 가리킨다. 그가 상수리잎에 말려 있는 거위벌레 알이 “발에 밟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걷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상수리나무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가 그렇게 걷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시인의 “가벼운 적선”에 대해 상수리나무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융건릉의 “숲을 해치는 해충을/무엄하게 동정하는 죄를 저지르”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나무잎 요람”에 내포되어 있는 양가적 의미를 탐구하는 데 초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거위벌레의 입장을 택하면 상수리나무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상수리나무의 입장을 택하면 거위벌레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복잡한 현실을 가리킨다. 이처럼 복잡한 현실이 양가적 가치를 낳거니와, 이 시에는 그것이 “아버지와 자신의 묘를 쓰기 위해/수원성을 옮긴 정조의/공과를 묻는” 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한편으로 “정조의/공과를 묻는” 일은 부질없는 상념이 “숲길을 따라 돌며 칡넝쿨처럼 뻗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는 “산책이 끝날 즈음” 거위벌레도 “요람에서 무덤까지” “엄연히/행복하게 살 권리를 지니고/이 땅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이는 결국 그가 양자 중의 한 편, 곧 거위벌레의 편을 선택하는 셈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가 거위벌레의 입장을 선택하는 것은 상수리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융건릉 숲길”이 자연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지금 이 시에서 인간의 편이 아니라 자연의 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의 동식물 중에는 인간의 문명에 의해 깊이 견인되는 것들도 없지 않다. 그중에는 꽃 피우는 계절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문명에 기대어 자신의 존재영역을 확장하는 것들도 있다. “꽃이 귀한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로” “진화하는 중”(「겨울 장미」)인 장미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자연의 존재들 중에는 이처럼 인간의 문명과 경쟁하며 진화하는 것들도 없지 않다. 이는 “고층아파트 베란다에 둥지를 틀고/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워지나 시험하고 있”(「황조롱이」)는 “황조롱이”를 노래하고 있는 시에 의해서도 확인이 된다. 이 시에 따르면 자연의 동식물 중에는 인간의 문명에 순치된 채 살아가는 것들도 상당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도시문명에 세 들어 사는 자연의 사물들도, 곧 도시문명에 적응해 살아가는 자연의 존재들도 적잖다는 것이다.
이처럼 문명의 인간들과 끊임없이 경쟁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 자연의 동식물들이다. 물론 그중에는 인간의 문명에 의해 완전히 운명이 바뀌는 것들도 없지 않다. 쓰임새가 바뀌면서 운명이 바뀌는 동식물도 있다는 것인데, 사스레피나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고향 뒷산에서 보던” 사스레피나무의 “윤기 흐르는 촘촘한 잎”(「사스레피나무」)이 문상을 간 상가에 배달되어 있는 조화를 만드는 재료로 쓰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의 시에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함부로 파괴해온 자연의 사물이 노래되어 있기도 하다. 「백운산 고로쇠나무」가 그 하나의 예이다. 이 시에서 그는 고로쇠나무의 “밑둥에 구멍 뚫어/고무호스를 박아” 받은 “고로쇠 수액”을 피라고 인식한다.「독도와 강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더러는 인간의 욕망이 구현되는 과정에 완전히 소멸되어버린 동식물도 없지 않다. 먹이사슬이 파괴되어 우렁이도, 개구리도, 미꾸라지도 찾아보기 힘든 농촌현실을 다루고 있는 그의 시가 이러한 예를 잘 드러내준다. “발등이 붓고 발바닥이 부르트도록/돌아다니며 찾아봐”도 “다 어디로 가서/꼭꼭 숨었”(「고향 들녘에서」)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렁이이고, 개구리이고, 미꾸라지이다.
인간의 욕망이 실현되는 과정에 자연의 사물들이 소멸되는 까닭은 그것이 대부분 인간의 식량으로 전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은 먹이사슬의 최저층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거니와, 자신의 시에서 그가 “세상에는 참 잎도 많고/입도 많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가 “오물거리는 입들/과연 잎 없이 입 벌릴 수 있을까”(「명이」)라고 노래하는 것도 이에서 기인한다. 자신의 시에서 그가 “곡식이 귀한/두메산골 아낙들에게/나물은 보살이었나보다”(「지장보살을 먹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도 동일한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나물을 보살로 받아들이는 일을 접하게 되면 누구라도 “먹고사는 일의 엄연함에/고개를 끄덕”(「후투티」)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먹고사는 일이라는 것이 본래 자연의 동식물을 뜯고, 찢고, 쪼개고, 베는 일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식욕이 이렇게 엄청나다 보니 자연의 사물들이 점차 줄어들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자연의 사물들에게는 저 자신조차도 먹고살 것이 별로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의 시에서 괭이갈매기가 “사람아 사람아/세상의 먹거리 모조리 쓸어가는/꼬리 없는 원숭이야”(「괭이갈매기」)라고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자연의 존재들은 본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도 자연의 속성이지만 서로 돌보고, 가꾸고, 기리는 것도 자연의 속성이다. 본질적으로 자연의 존재들은 이처럼 양가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바랭이나 강아지풀의 씨앗”도 “부비새에게는 귀한 양식이 되는”(「부비새 운다」) 것이 자연의 질서이다. “선홍빛 열매/주렁주렁 매달고 선 팥배나무”에게는 직박구리가 “가장 기꺼운 손님”이고, “날름날름 팥배 따먹는 직박구리”에게는 “가장 고마운 주인”(「팥배나무와 직박구리」)이 팥배나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나날의 삶에 엄청난 교훈과 지혜를 주는 것이 자연의 존재들이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 자체가 자연에서 모범을 발견해온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자연에서 발견하는 모범은 “나면서부터” “자신의 몸 씻은 물 정화시켜/다시 마시는 법을”(「가시연꽃」) 알고 있는 가시연꽃을 그리고 있는 시는 말할 것도 없고, “새끼를 돌보는/까투리의 조심스러운 몸짓과/장끼의 의젓한 태도”(「꿩 가족」)를 그리고 있는 시에서도 확인이 된다.
강과 뼝대가 잘 어우러진
동강 가수리 콘크리트 포장도로
먼저 까투리가 주위를 살피며 도로를 건너간다
다음 장끼가 등장하여 어험스럽게 걷는데
꺼병이 아홉 마리가 연이어 나타나
달음질로 잽싸게 도로를 가로지른다
어미 까투리는 풀숲에 숨어 새끼들을 부르고
아비 장끼는 마지막 꺼병이가 풀숲에 드는 것을 보고
뒤따라 자취를 감춘다
새끼를 돌보는
까투리의 조심스러운 몸짓과
장끼의 의젓한 태도가
눈시울이 젖도록 정겹다
꿩 가족의 삶터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나는
잠시 운전대를 놓고 그들의 안녕과 행운을 빈다.
―「꿩 가족」 전문
시인 최두석의 생태의식이 잘 드러나 있어 이 시는 특히 주목이 된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는 지금 “동강 가수리 콘크리트 포장도로” 위에 차를 멈추고 있다. 꿩 가족이 “주위를 살피며 도로를 건너”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이다. 까투리의 뒤를 이어 “장끼가 등장하여 어험스럽게 걷는데/꺼병이 아홉 마리가 연이어 나타나” “잽싸게 도로를 가로지른다”. “어미 까투리는 풀숲에 숨어 새끼들을 부르고/아비 장끼는 마지막 꺼병이가 풀숲에 드는 것을 보고/뒤따라 자취를 감춘다”. 화자인 그는 “새끼를 돌보는/까투리의 조심스러운 몸짓과/장끼의 의젓한 태도”를 지켜보면서 “눈시울이 젖도록 정”겨워 한다. 그가 “잠시 운전대를 놓고” 꿩 가족 안녕과 행운을” 비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러한 마음 때문이다.
이 시는 이처럼 꿩 가족을 비롯한 이들 자연의 존재가 얼마나 귀중한 생명인가를 드러내주는 데 초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는 사람의 가족보다 훨씬 투철하게 가족공동체를 영위하고 있는 꿩 가족을 소개해 사람살이의 지혜를 얻도록 하는 데도 초점이 있다.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사람살이의 지혜는 그 밖의 시에서도 두루 확인되는데, 「두루미」도 그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경우 “철원평야”에 날아와 “이삭을 주워먹는” 두루미를 통해 “지상에서 먹이를 구해/사랑을 나누고/새끼를 기르는/원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사물들이 이러한 교훈을 주는 것은 그것이 본래 얼마간 복잡한 내포를 갖는 데서 연유한다. 결국 이는 그것이 양가적인 진실로 뒤얽혀 있다는 것을 가리키지만 말이다.
그의 시 「투구꽃」은 약이 될 때도 있고 독이 될 때도 있는 양가적 자연이 노래되어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물론 이는 또 다른 그의 시 「매화차」에 양가적 의미가 노래되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아한 취미가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자연파괴가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 ‘매화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각에 따라 양면적 진실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존재의 실재이다. 사람에게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약이 되기도 하고, 멧돼지에게는 식량이 되기도 하는 원추리가 노래되어 있는 「돼지평전 원추리」도 동일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예이다. 다음은 앞에서 줄곧 논의해온 양가적 진실을 가장 실감 있게 드러내고 있는 그의 시 「투구꽃」의 전문이다.
사노라면 겪게 되는 일로
애증이 엇갈릴 때
그리하여 문득 슬퍼질 때
한바탕 사랑싸움이라도 벌일 듯한
투구꽃의 도발적인 자태를 떠올린다
사노라면 약이 되면서 동시에
독이 되는 일 얼마나 많은가 궁리하며
머리가 아파올 때
입술이 얼얼하고 혀가 화끈거리는
투구꽃 뿌리를 씹기도 한다
조금씩 먹으면 보약이지만
많이 넣어 끓이면 사약이 되는
예전에 임금이 신하를 죽일 때 썼다는
투구꽃 뿌리를 잘게 잘라 씹으며
세상에 어떤 사랑이 독이 되는지 생각한다
진보라의 진수라 할
아찔하게 아리따운 꽃빛을 내기 위해
뿌리는 독을 품는 것이라 짐작하며
목구멍에 계속 침을 삼키고
뜨거워지는 배를 움켜쥐기도 한다.
이 시는 새로운 시대의 진실인 양가적 가치를 구명(究明)해 기존의 흑백논리를 벗어나려는 데 초점이 있다. 흑백논리는 언제나 이것이냐 저것이냐, 민주냐 독재냐 하는 등의 양자택일적 의식을 주입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흑백논리는 궁극적으로 꽃이냐 열매냐, 꽃이냐 뿌리냐 등의 이분법적 상황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양자택일적 의식은 최근에 들어 점차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미 우리의 의식이 꽃이냐 열매냐, 꽃이냐 뿌리냐라는 양자택일의 가치가 아니라 꽃이면서도 뿌리이고, 꽃이면서도 열매인 불이(不二)의 가치에 이르러 있기 때문이다. 선불교(禪佛敎)에서 불이의 정신은 본래 하나이면서도 둘인 세계, 둘이면서도 하나인 세계를 가리킨다. 이러한 양가적 세계를 동학(東學)의 언어로 말하면 기연불연(其然不然)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 복잡계의 정신은 끊임없이 양자택일적 사고를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의 시「선운산 꽃무릇」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연의 사물들조차도 끊임없이 상품화시켜 인간소외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근대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이의 정신으로, 양가적 가치로 세계를 인식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시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의 모순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세계의 모순이 복잡한 모습으로 상호침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시 「투구꽃」은 그의 다른 많은 시들과 함께 다름 아닌 이러한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어 더욱 중요시 된다. 하나의 존재가 갖는 두 가지 의미를 따져보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이 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오늘과 내일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와, 그에 따른 섬세하고도 복잡한 정서를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시집 『투구꽃』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은 이처럼 하나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양면적 진실을 탐구하는 데 초점이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양면적 진실은 변화하는 삶의 과정에 현현되는 하나의 존재가 갖고 있는 각이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본질은 하나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각각 다르다는 것인데, 무엇보다 이는 용처에 따라 그것의 기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용처에 따라 “약이 되면서 동시에/독이 되는” 것이 「투구꽃」을 비롯한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양가적 진실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존재의 양면적 진실은 투구꽃을 두고 그가 “조금씩 먹으면 보약이지만/많이 넣어 끓이면 사약이” 된다고 노래하는 구절에 이르러 확연하게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성찰과 반성의 기제로 존재하는 것이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자연의 사물들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의 시에는 자연의 사물들을 통해 성찰과 반성의 기회를 드러내고 있는 경우가 적잖다. 「무등산 해맞이」, 「마애관음보살을 보며」, 「의심 많은 새는 알을 품지 못한다」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나무로부터 하심(下心)을 깨닫고 있는 「참성단 소사나무」, 그리고 나무와 관련해 진실의 의미를 되묻고 있는「면앙정 참나무」 등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는 예이다. 그의 시 중에는 사람살이의 일부나 그것의 한 형태, 그리고 각각의 삶의 국면과 관련된 이름을 갖고 있는 식물들을 노래하고 있는 경우도 상당하다. 「족도리풀」, 「홀아비바람꽃」, 「복수초」 등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런저런 외모를 닮은 꽃, “그윽한 숲그늘로 나를 이끈 여인” 같은 “은밀한 향내를 지닌 꽃”(「뻐꾹나리」)을 노래하고 있는 예도 없지 않다.
교훈이나 지혜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그의 시의 자연의 사물들에게는 아무래도 그의 자아가 투영될 수밖에 없다. 이미 그와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 이들 자연의 사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닮고 싶고, 되고 싶은 대상으로 존재하는 자연의 사물이 많은 것도 원래는 이에서 기인한다. “곰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시 「남대천을 거니노라면」, “다가가 안고 싶은” 마음을 그리고 있는 시 「박달나무」, “그 뿌리 밑에/잠들고 싶”은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 시「화엄사 매화나무」등이 그 예이다.
나날의 일상에서도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큰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이다. 이처럼 그는 늘 자연과 어우러지는 삶의 평화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러한 꿈은 오늘의 회색빛 도시에서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별로 많지 않다. 그가 회색빛 도시 이전의 마을공동체에 대한 기억을 끝내 버리지 않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이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자연과 함께하는 마을공동체는 추억이나 기억의 모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마을공동체의 자연과 함께하는 삶은 결국 그를 옛날로, 과거로, 유년으로 돌아가게 할 따름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회억되고 추억되는 그의 시의 자연의 존재들은 대부분 신화나 전설, 민담 등을 바탕으로 하는 가운데 춥고 배고프던 유년시절의 체험이 뒤얽힌 채 존재한다. “아내가/꽃구경 가자 했을 때” 그가 “꽃이 일시에 구름처럼 피면 풍년이요/꽃이 주춤주춤 빈약하게 피면 흉년이라는/이팝나무”(「이팝나무 꽃그늘」)를 떠올리는 것이 그 하나의 예이다. “노릇노릇 고슬고슬한 조밥이 아니라/희멀건 조죽으로 허기를 달래던/꽃이” 그에게 “밥으로 보이던 시절”(「조팝꽃」)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도 자연의 사물들이 이렇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들 시는 이처럼 전통적으로 구전되어오던 신화나 전설, 민담 등을 담고 있어 더욱 주목이 된다.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은 「며느리밥풀꽃」 등 그 밖의 예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밖의 예에는 역사와 함께하는 자연의 사물을 노래하고 있는 시들도 포함이 된다.「한재초등학교 느티나무」,「철원노동당사 돌나물」, 「김굉필 은행나무」, 「옥룡사터 동백숲에서」, 「정암사 주목」, 「화엄사 구층암 모과나무」, 「탄금대에서」, 「재인폭포」 등의 시가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이들 시에 함유되어 있는 자연의 사물들은 늘 역사의 현장과 함께하고 있어 두루 관심을 끈다. 역사의 현장과 함께하는 자연의 사물들을 다루고 있는 시에는 한편으로 그 자신이 역사적 존재가 되려는 마음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이들 나무와 동일시되어 있는 것이, 이들 존재와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 시인 최두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라도 역사적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닐 수는 있다. 역사적 존재가 되는 것이야말로 영원히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서도 이들 자연의 사물들을 통해 지금도 살아 있는 각종 신화나 전설, 민담 등을 시로 담아내는 일은 매우 소중하다. 이처럼 매우 소중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시인 최두석이라는 것이다.(『실천문학』2010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