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기원은 여제(女帝) 소서노(召西努)로부터 비롯되었다.
고주몽(高朱蒙)은 졸본부여의 단군으로, 소서노는 연타발(延타渤)의 딸로서 고주몽(高朱蒙)을 맞아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낳았다.
그러나, 소서노는 주몽이 고무서(高無胥)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여달왕(閭達王)과 일찌기 고주몽의 적자인 유리(類利)로 인하여,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다.
기묘년(7156-BC42) 3월에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辰), 번(番)의 사이에 이르러 어하라(於瑕羅)를 세웠다. 7161(BC37)년 앞서 고주몽(高朱蒙)이 졸본부여의 구신들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를 당하고, 그의 아들인 여달왕(閭達王)이 고구려 2대왕, 졸본부여로 치면 고두막한 이후의 4대왕으로 세워졌다. 강제로 퇴위된 고주몽(高朱蒙)은 비류가에 은거한 후 연타발의 도움으로 이때에 이르러 구려국(句麗國)을 건국하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1년(7167-BC31)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 임인년(7179-BC19년,어하라 13년) 즉 온조(溫祚) 즉위년이다. 소서노(召西努)는 책봉 13년만에 죽고,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비류(沸流) 태자가 소서노의 뒤를 이어서 어라하(於羅瑕)로 즉위하였는데 온조(溫祚)는 스스로 독립하여 마한(馬韓) 땅으로 옮겨간다.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려(馬黎) 등은 온조에게 마한이 쇠퇴하니 가서 도읍을 세우자 하니 승락하여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홀(彌鄒忽; 평안남도 영유현)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 만에 한산(漢山)에 이르러서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려(馬黎), 오간(烏干)등 열명의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慰支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국호를 고쳐 백제(百濟)라 하였다.
1대 온조시제(溫祚始帝) 1년(7178-BC18) 동명성제(東明聖帝)의 대묘를 세웠다. 8년 2월 말갈이 3천으로 위례성(慰禮城)을 침략하였으나 물리쳤다. 7월 마수성(馬首城)을 축조하고 병산(甁山)에 목책을 세웠다. 10년 낙랑(樂浪)이 말갈을 시켜 병산의 책을 습격하였다. 13년(7192-BC6) 7월 한산 밑에 성축과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민호를 옮겼다. 8월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를 알리고 영토를 확정하였다. 북으로 패하(浿河-태자하)에 이르고 남으로 웅천(熊川-임진강)에 한하며 서로 큰바다에 접하고 동으로 주양(朱壤-마식령)에 이르렀다. 9월 도성과 궁궐을 세웠다. 14년 정월 도읍을 옮겼다. 17년 낙랑이 침략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 22년(7201-AD4) 9월 왕이 1천 기병으로 부현(斧峴) 동쪽에서 말갈과 만나 싸워 이겼다. 26년 왕이 사냥을 핑계로 마한(馬韓)을 급습하여 왕성과 성읍을 합병하였으나 원산(圓山), 금현(錦峴) 두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27년 4월 원산, 금현 두성이 항복하므로 그 백성을 한산 북으로 옮기니 마한은 멸망하고 말았다. 28년(7207-AD10) 2월 원자 다루(多婁)를 태자에 봉했다. 36년 7월 탕정성(湯井城)을 축조하였다. 40년 말갈이 침입하니 왕이 기병을 내어 막았다. 43년(7222-AD25) 10월 남옥저(南沃沮-대련반도)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가구가 부양에 와서 살기를 청하니 한산 서쪽에 살게 하였다. 46년 2월 임금이 승하였다.
2대 다루제(多婁帝) 1년(7225-AD28) 온조시제의 원자이다. 3년 10월 동부의 흘우(屹于)가 말갈(靺鞨)과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7년 우보(右輔) 해루(解婁)가 90세로 죽어 동부(東部) 흘우(屹于)를 우보로 삼았다. 9월 말갈군에게 마수성(馬首城)이 함락되었다. 10월 말갈군이 병산(甁山) 책을 습격하였다. 29년(7253-AD56) 동부에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말갈에 대비하였다. 39년 신라(新羅)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여 이를 취하였지만 다시 신라에게 빼앗겼다. 47년(7271-AD74) 8월 군사를 내어 신라를 침략하였다. 48년 10월 다시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49년 9월 와산성을 신라에 빼앗겼다. 50년 9월 임금이 승하하였다.
3대 기루제(己婁帝) 1년(7274-AD77) 다루제의 원자이다. 29년(7302-AD105) 신라와 화친하였다. 49년 신라가 말갈을 침입을 받고 구원을 청하자 5명의 장군을 보내어 이를 구하였다. 52년 11월 임금이 승하하였다.
4대 개루제(蓋婁帝) 1년(7325-AD128) 기루제의 아들이다. 5년 2월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조하였다. 28년 신라의 아찬(阿찬) 길선(吉宣) 모반하다 실패하여 도망와 신라왕이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하자 침공하였다. 39년 임금이 승하하였다.
5대 초고제(肖古帝) 1년(7363-AD166) 소고(素古)라고도 하며 개루제의 아들이다. 2년 신라 서쪽의 두성을 쳐 1천을 포로로 하여 돌아왔으나 신라가 침입하여 한수(漢水)에 다다르자 포로를 돌려주었다. 25년 신라 서변의 원산향(圓山鄕)을 기습하고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하자 신라의 구도가 5백 기병으로 공격하니 후퇴하다 와산성(蛙山城)에서 크게 이겼다. 39년(7401-AD204) 7월 신라 요거성(腰車城)을 쳐서 빼았자 신라왕 내해(內海)가 이벌찬(伊伐찬) 이음(利音)을 장수로 하여 사현성(沙峴城)을 쳐왔다. 49년 9월 북부의 진과(眞果)가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취하자 10월 말갈이 침공하여 술천(述川)에 이르렀다. 임금이 승하하였다.
6대 구수제(仇首帝) 1년(7411-AD214) 혹은 귀수제(貴須帝)이라 하며 초고제의 장자이다. 3년 8월 말갈이 적현성(赤峴城)을 포위하였는데 굳게 지키어 물러갔다. 이에 왕이 추격하여 사도성(沙道城) 밑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11년(7421-AD224) 신라(新羅) 이벌찬 연진(連珍)이 침입하자 봉산(烽山)을 의지하고 싸웠으나 패하였다. 16년 말갈이 우곡(牛谷)의 경계에 침입하자 군사를 내었지만 패하였다. 21년 임금이 승하하였다.
7대 고이제(古이帝) 1년(7431-AD234) 개루제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제 장자 사반(沙伴)이 어려 정사를 볼 수 없어 아우 고이가 즉위하였다. 13년(7443-AD246) 위(魏)나라 관구검(관丘儉)이 낙랑, 대방과 함께 고구려을 침략한 틈을 타서 좌장군 진충(眞忠)을 보내어 낙랑의 변경을 침입하여 백성을 잡자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가 침략하려 하니 그 백성을 돌려보냈다. 27년 관제를 16품으로 고쳤다. 33년(7463-AD266) 정월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53년 11월 임금이 승하하였다.
8대 책계제(責稽帝) 1년(7483-AD286) 혹은 청계제(靑稽帝)이라고도 하며 고이제의 아들이다.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치자 대방과 사돈지간이라 군사를 내어 이를 구원한 후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 아차성(阿且城), 사성(蛇城)을 수리하였다. 13년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침입하자 임금이 직접나가 막다가 승하하였다.
9대 분서제(汾西帝) 1년(7495-AD298) 책계제의 장자이다. 7년 낙랑의 서쪽현을 기습하여 취하자 10월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적해를 당해 승하하였다.
10대 비류제(比流帝) 1년(7501-AD304) 구수제의 둘째 아들이다. 분서제의 아들이 아직 어려 대신 왕위에 올랐다. 24년 내신좌평(內臣佐平) 우복(優福)이 북한성에 의거 모반하자 이를 토벌하였다. 34년(7534-AD337)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수교를 하였다. 41년 임금이 승하하였다.
11대 계제(契帝) 1년(7541-AD344) 분서제의 장자이다. 3년 9월 임금이 승하하였다.
12대 근초고태무제(近肖古太武帝) 1년(7543-AD346) 비류제의 둘째 아들이다. 24년(7566-AD369) 고구려왕 사유(斯由)가 군사 2만으로 치양(雉壤)에 침입하니 태자를 보내어 치양성(雉壤城)을 급습하여 격파하고 적군 5천을 사로잡았다. 26년 고구려가 침공하자 패하(浿河)에서 이를 막고, 겨울 3만 군사로 평양성(平壤城)을 침공하여 왕 사유를 죽였다.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30년 7월 고구려가 수곡성(水谷城)을 함락시켰다. 박사(博士)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만들었다. 11월 왕이 승하하였다.
13대 근구수대제(近仇首大帝) 1년(7572-AD375) 일명 휘수(諱須)로 근초고제의 아들이다. 3년 군사 3만을 내어 고구려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10년 4월 임금이 승하하였다.
14대 침류제(枕流帝) 1년(7581-AD384) 근구수제의 원자이고 어머니는 아이부인(阿이夫人)이다. 9월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晉)에서 와 불법(佛法)을 설하였다. 2년 불사를 한산에 창건하고 도승 10명을 두었다. 11월 임금이 승하하였다.
15대 진사제(辰斯帝) 1년(7582-AD385) 근구수제의 둘째아들로 침류제의 태자가 아직 어려 숙부 진사가 대신 제위에 올랐다. 2년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는데 청목령(靑木嶺)에서 북으로 팔곤성(八坤城), 서(西)로 바다까지 이르렀다. 6년 7월 달솔(達率) 진가모(眞嘉謀)를 보내어 고구려 도곤성(都坤城)을 빼앗고 포로 2백을 잡았다. 7년 4월 말갈군이 북변 적현성(赤峴城)을 쳐서 빼앗았다. 8년 7월 고구려왕 담덕(談德)이 군사 4만으로 북변을 침입하여 석현(石峴)등 10성을 빼앗았다. 10월 고구려에게 관미성(關彌城)이 함락 당했다. 11월 임금이 구원(狗原)으로 사냥나갔다 승하하였다.
16대 아신제(阿莘帝) 1년(7589-AD392) 혹은 아방(阿芳)이라고 하며 침류제의 원자이다. 2년 왕이 진무(眞武)로 하여금 관미성(關彌城)을 되찾으라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4년 8월 좌장군 진무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고구려왕 담덕이 친히 군사 7천으로 패수(浿水)에서 맞으니 패하고 말았다. 6년 5월 왜국(倭國)과 수교를 맺고 태자 전지(전支)를 인질로 보냈다. 12년 왜국에서 사신이 왔다. 7월 신라의 변경을 침입하였다. 14년 임금이 승하하였다.
17대 전지제(전支帝) 1년(7602-AD405) 혹은 직지(直支)라고 하고 아신제의 원자이다. 임금이 승하하자 둘째 아우 훈해(訓解)가 태자의 환국(還國)을 기다리며 섭정하자 막내 설례가 훈해(訓解)를 죽이고 제위에 오르자 나라 사람이 설례를 죽이고 태자 전지를 맞아 제위에 즉위케 하였다. 16년 임금이 승하하였다.
18대 구이신제(久爾辛帝) 1년(7617-AD420) 전지제의 장자이다. 8년 12월 임금이 승하하였다.
19대 비유제(毗有帝) 1년(7624-AD427) 구이신제의 장자이다.(전지제의 서자라고도 한다.) 2년 왜국에서 사신이 왔는데 시중이 50명에 달했다. 21년(7644-AD447) 7월 가뭄이 들어 백성이 신라도 도망가는 자가 많았다. 29년 임금이 승하하였다.
20대 개로제(蓋鹵帝) 1년(7652-AD455) 혹은 근개루제(近蓋婁帝)이라고 하고 이름은 경사(慶司)로서 비유제의 장자이다. 15년 8월 고구려 남부를 침범하고 10월 쌍현성(雙峴城)을 수축하였다. 21년 고구려왕 거련(巨連)이 군사 3만으로 한성(漢城)을 침공하였다. 고구려 대로인 제루(齊婁),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이萬年)이 도망하는 임금을 추격하여 살해하였다. (해설)
21대 문주제(文周帝) 1년(7672-AD475) 개로제의 아들이다. 고구려가 침입하여 개로제가 전사하자 왕자 문주가 신라로 도망하여 원병 1만을 거느리고 왔으나 임금은 이미 죽고 성은 무너졌으니 개로제를 이어 즉위하였다. 10월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2년 4월 탐라국(耽羅國)에서 방물을 바쳤다. 4년 좌평(佐平) 해구(解仇)가 임금이 사냥하는 틈을 타 도적을 시켜 임금을 시해하였다.
22대 삼근제(三斤帝) 1년(7674-AD477) 혹은 임걸(壬乞)이라고 하고 문주제의 장자이다. 제의 나이가 13세라 해구가 군국사를 일임했다. 2년 좌평(佐平) 해구(解仇)가 은솔(恩率) 연신(燕信)과 함께 대두성(大豆城)에 의지하여 모반하자, 좌평 진남(眞男)에게 토벌케 하였으나 패하고, 다시 덕솔(德率) 진로(眞老)가 나아가 해구를 학살하자, 연신이 고구려로 도망했다. 3년 11월 임금이 승하하였다.
23대 동성제(東城帝) 1년(7676-AD479) 이름은 모대(牟大) 혹은 마모(摩牟)며 문주제의 아우 곤지(昆支)의 아들이다. 8년 궁성을 수축하고 우두성(牛頭城)을 축조하였다. 10년 위(魏)군이 침입하였으나 격퇴하였다. 15년 왕이 사신을 보내어 신라에 혼인을 청하자 신라 소지왕이 이찬 비지(比智)의 딸을 보내 왔다. 16년 고구려가 신라의 견아성(犬牙城)을 포위하자 군사 3천의 원병을 보내어 포위를 풀게 하였다. 17년 고구려가 치양성(雉壤城)을 침입하자 신라 소지왕이 장군 덕지(德智)를 보내와 고구려군이 퇴각하였다. 20년(7695-AD498) 탐라(耽羅)가 공물을 바치지 않자 왕이 친히 이를 정벌하자 탐라가 사죄하였다. 23년 가림성(加林城)을 새로 축조하고 임금이 백가에게 가림성을 지키라 명하자 가고 싶지 않았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를 원망하여 사람을 시켜 왕을 죽이게 하니 12월 임금이 승하하였다.
24대 무령대제(武寧大帝) 1년(7698-AD501) 이름은 사마(斯摩)이며 모대제의 둘째 아들이다. 정월 좌평 백가가 가림성에 의거 모반하자 이를토벌하였다. 11월 달솔(達率) 우영(優永)에게 군사 5천을 주어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게 하였다. 7년 고구려 장군 고로(高老)가 말갈과 더불어 한성을 공략하려고 횡악산(橫岳山) 밑에 진주하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싸워 물리쳤다. 12년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에 침입하자 왕이 기병을 내어 위천(葦川)에서 이를 물리쳤다. 23년 쌍현성(雙峴城)을 축조하였다. 5월 임금이 승하하였다.
25대 성대제(聖大帝) 1년(7720-AD523) 이름은 명농(明농)이며 무녕제의 장자이다. 고구려 군사가 패수(浿水)에 이르자 좌장군 지충(志忠)이 1만 병사로 이를 물리쳤다. 4년 10월 웅진성(熊津城)을 수축하였다. 7년 고구려왕 흥안(興安)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혈성(穴城)을 빼았자 좌평 연모(燕謨)에게 3만으로 맞서 싸웠으나 오곡원(五谷原)에서 패하였다. 16년 도읍을 사비(泗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 하였다. 26년(7745-AD548) 고구려왕 평성(平成)이 예국(濊國)과 함께 독산성(獨山城)을 침공하자, 신라 진흥왕이 장군 주진(朱珍)을 보내와서 이를 물리쳤다. 28년 장군 달사(達巳)에게 1만을 주어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1년 왕녀를 신라로 시집보냈다. 32년 7월 신라를 기습하려고 친히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러 복병을 만나 패하고 임금은 승하하였다.
26대 위덕제(威德帝) 1년(7751-AD554) 이름은 창(昌)이며 성제의 원자이다. 고구려가 웅천성을 침공하였으나 패하였다. 24년(7774-AD577) 10월 신라 서변을 침공하였으나 신라 이찬 세종(世宗)에게 패하였다. 45년 수(隨)가 고구려를 침범한다는 말을 듣고 군사의 길잡이를 자처하였다. 이 사실을 고구려가 알고 번번이 국경을 침략하였다. 12월 임금이 승하하였다.
27대 혜제(惠帝) 1년(7795-AD598) 이름은 계(季)이며 성제의 둘째 아들이다 2년 임금이 승하하였다.
28대 법제(法帝) 1년(7796-AD599) 이름은 선(宣) 혹은 효순(孝順)이며 혜제의 장자이다. 2년 정월 왕흥사(王興寺)를 창설하였다. 5월 임금이 승하하였다.
29대 무태제(武太帝) 1년(7797-AD600) 이름은 장(璋)이며 법제의 아들이다. 3년 신라가 소타성(小타城), 외석성(畏石城), 천산성(泉山城), 옹잠성(甕岑城)을 축조하고 우리 땅을 침략하니 임금이 좌평 해수에게 4만을 주어 성을 침공하게 하였으나 장군 무은(武殷)과 그의 아들이 항전하니 패하여 돌아왔다. 12년 신라 가잠성(가岑城)을 쳐 성주를 살해하고 성을 빼앗았다. 13년 수(隨)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임금이 수를 돕겠다고 서명하였지만 국경만 수비하였다. 17년(7813-AD616) 달솔(達率) 백기가 군사 8천으로 신라 모산성(母山城)을 빼앗았다. 19년 신라 장군 변품(邊品)이 가잠성(가岑城)을 쳐서 회복하였다. 25년 신라의 여섯 성을 쳐서 빼앗았다. 33년(7829-AD632) 원자 의자(義慈)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2월 마천성(馬川城)을 개축하였다. 42년 3월 임금이 승하하였다.
30대 의자대제(義慈大帝) 1년(7838-AD641) 무태제의 원자이다. 2년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쳐 하미후성등 40여 성을 빼앗았다. 3년 11월 고구려와 화친하였다. 8년 3월 의직(義直)이 신라 서변의 요거성(腰車城)등 10여성을 공취하였다. 4월 옥문곡에서 신라 김유신에게 패하였다. 15년(7852-AD655) 8월 왕이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성을 공취하자 신라왕 김춘추가 당에 사신을 보내어 이 사실을 고했다. 16년 왕이 궁인과 더불어 음란하고 향락에 취하자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극간하자 왕이 노하여 하옥하였다. 20년 당나라 고종이 좌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 유백영(劉佰英) 풍사귀(馮士貴) 방효공(龐孝公) 등과 더불어 13만으로 침입하고 신라왕은 장군 김유신(金庾信)에게 5만 정예군으로 나가게 하였다. 이에 백제 장군 계백이 황산(黃山)에세 5천군사로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고, 웅진강(熊津江) 어구에서 소정방에게 대패하니 임금의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에 왕이 모든 성을 들어 항복하니 왕을 비롯 태자 효(孝), 왕자 태(泰), 융(隆), 연(演)과 대신, 장사 88명과 백성 1만 2천 8백 7명이 당나라로 보내졌다. 임금이 승하하자 손호(孫皓) 진숙보(陣叔寶)의 무덤 옆에 장사 하였다. 무태제(武太帝)의 조카 복신(福信)이 중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 의지하여 왜국에 나가있던 왕자 부여풍(夫餘豊)을 맞아 왕으로 세우자 서북부의 백성들이 모두 이에 호응하였다. 복신과 부여풍이 서로 미워하여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고, 왜국의 구원병이 백강(白江) 어구에서 멸하니 부여풍은 피하여 도망하니 그 간곳을 알지 못하였다. 당고종이 융(隆)을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귀국케 하였으나 당군과 헤어짐이 무서워 당으로 돌아가 신라가 강성함에 감히 본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 땅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