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시인 이재호 詩碑를 찾아서.
십 몇 년 전만 해도 문단의 불문율처럼 문학비를 건립하는 것은 시인 사후에나 세우는 걸로 여겨져 왔었다. 근자에는 이 불문율이 깨져 생존해 계신 분들의 문학비가 많이 세워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율을 떠나서 시대가 그러면 그렇게 흐르는 것이다.
생전에 나를 문단에 들여놓게 하신 故 조병화 시인은 '미래시' 동인을 이끌고 필자가 사무국장을 할 때 충주에서 지금은 사라진 목화예식장에서 거창한 시낭송회를 가졌다. 명망 있는 무려 시인 삼십 여분을 이끌고 오셨다. 그 뒤풀이에서 조병화 시인은 故 이재호 시인을 '한강시인'이라 부르시며 사후에 한강변에 이재호 시인의 출세작인 '다시 한가을 바라보며'란 명시를 詩碑로 세워서 기념할만하다 하셨다.
고인은 전공에 따라 일생 거친 공사장에서 보내면서 시에 대해서 따듯한 천성의 감성을 갖고 시를 쓰기가 쉽지는 않았을 게다. 시는 주변상황과 삶의 엔솔리지 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 년 초에는 신춘문예 시를 어김없이 만나게 된다, 신춘문예 당선작의 시와는 거리가 먼 감성의 시인이다. 지금은 수많은 창작 교실을 통해서 해서 시 쓰는 기술자가 된 무감각의 정서로 시를 배우고 시인으로 등단하는 현실이다. 천성의 감성시인이 신춘문예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을 테고 결국 또 한분의 천성의 감성시인 조병화 시인이 심사를 맡은 '제 1회 한강 백일장'에서 만남은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그때도 그는 우리나라 최고를 자랑하는 '현대건설' 현장 직원이었으니 시와는 영판 거리가 먼 현실이었다. 그런 그가 조병화의 눈에 띄었고 그의 시는 은사를 쫒아 일취월장 감성의 시세로 빠져들었다. 그때 '삐삐통신'이란 실제 핸드폰이 나오기 전 삐삐란 통신기구가 잠시 등장해서 유행일 때 가정을 떠나 삭막하고 거친 공사현장에서 마치 시의 삐삐가 울리듯 시를 쓰기 시작했다.
고인이 공사현장에 망치를 놓았을 때 그가 이룩해 놓은 수많은 건축물. 도로 등등. 또한 부친의 (故 이종근 국회의원6선)성찬만 있고 당신에게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아버지가 하사 받으셨다는 초라한 집 한 채만 있었다.
천성 시인이신 당신에게는 당연한 삶의 결과물이었을 테고 오히려 가슴에는 천길만길 알 수 없는 시의 옹달샘만 깊어 있었던 것이다. 퇴사 후 충주로 돌아와 생전 펼치지 못한 시의 열정을 쏟으며 제자들과 함께 만든 단체가 '뉘들 문학''이다.
오늘 정기 뉘들 문학 단체의 문학기행에 꼽사리로 동석하게 됐다. 늘 가슴 한편에 아쉬움이 크게 남아 있는 이재호 시인. 고인의 詩碑가 있다는 강화도 육필 문학관이라니 당연히 찾아가 보아야 할 곳 아닌가. 강화도하면 떠 오른 것이 있다면. 섬. 고려시대의 몽고항쟁, 화문석. 마니산. 연산군. 철종 등이 떠오른다.
서울시에 진입하여 한강변을 따라 김포를 향하여 가는 강변로를 달리고 있다. 시야에 우뚝한 언덕 난지도가 보인다. 군대시절을 그곳에서 보낼 그 당시 쓰레기 매립으로 점점 둑이 높아지더니 큰 둑으로 지금은 서울공원이 된 곳이다. 차창 밖에는 초라하게 행주산성을 건너는 행주대교를 지나고 있다.
1979년 대통령이 졸지에 서거하고 나라는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요동쳐 갈 때 운명의 그 날 12월12일을 맞은 저녁이었다. 나는 30사단 92연대 3대대 소속이었고 떨어지는 가랑잎도 피하라는 말년 병장이었다.
내일은 군에서 마지막으로 하게 되는 연대 R.C.T를 떠나기 위해 출동준비로 완전군장을 꾸리고 느긋하게 출동준비를 마치고 있을 때 갑자기 다급하게 중대장이 전원출동 준비로 비상! 을 외치고 출동을 위한 트럭이 요란하게 도착하고 무작정 차에 올라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사회의 불안함을 막연히 들으며 이젠 정말 전쟁한번 하는구나. 하는 긴장감 등 만감이 교차했다 . 그때 마침 해병대로 아우가 지원입대한지 두 달 됐을 때였으니 정말 전쟁 터져 우리 형제가 잘 못된다면 등등 온간 불길함 속에 갑자기 차가 멈추고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이다.
그날 밤 그러기를 영문도 모르고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때 우리 부대의 임무는 난지도와 행주산성을 통과하는 행주대교를 방어하는 임무였다.
그날 밤은 몰랐지만 후일 전두환 대통령 청문회 때와 후일 전두환 정권의 탄생의 발판이 된 12.12사태에 관한 드라마를 보면서 '만약'이란 말을 수없이 되뇌게 했다 .
만약이란 역사는 후세 사람들의 이야기로 만 진행되는 것이나 그날 우리의 연대장이 전두환의 반대편에 서서 지금 보이는 행주대교를 우리가 차단했다면 만약이란 역사가 전개됐을 것이다.
신군부 그들은 서울에 입성하지 못했을 것이고 실패한 쿠데타로 5.18과 전두환 정권의 탄생은 만약이란 역사를 남겼을 테니까.
어느새 차는 한강의 이름으로 며칠 전 다녀온 태백산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기나긴 여정으로 임진강과 합류하여 바다에서 이제 한강이란 이름을 버리고 평범한 무의 세계로 이루는 만남의 끝 바다에 이르렀다. 바다를 건너 강화도에 도착하는 강화대교를 건너고 있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드는 사람만이 이룰 수 있는 곳. 바다는 모든 삶을 받아 드린다는 의미의 '받아'가 바다로 변형 된 말이 아닌가 한다.
강화도는 삶이 넉넉한 섬이다. 한해 농사를 수확하면 강화도 인구 3년을 먹고 살 수 있다한다, 그런 이유로 고려 왕실이 몽고의 난을 피해 강화도에서 70년을 버티게 한 것이다. 강화도 읍에 들어서 유턴한 차는 바다를 끼고 달리는 도로에 영산홍 꽃길이다.
차는 야트막한 산모퉁이를 내려 강화도 넓은 뜰을 안고 있는 아담한 집에 멈춘다. '육필 문학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첫 눈에 아담한 정자가 맞이하고 정자의 당호 '思人堂' 글씨가 한껏 멋을 부렸다. 육필 문학관 초입 언덕에 '다시 한강을 보며' 고인의 詩碑가 가다리고 있었다.
강화도 갯벌을 지나온 비릿한 냄새와 어제 내린 비로 넓은 들판 논에는 물이 가득하고 부는 바람에 쓸쓸함이 일어난다.
회장이신 김흥수 시인이 시를 낭독하니 고인을 생각하는 마음에 숙연하고 귓전을 핥고 가는 바람 속에 고인의 육성이 살아난다. 그의 짧은 시 ' 나도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대여, 지금 이 바림 속에 지나가시는가?
시를 낭독하는 회장님의 목소리가 자꾸 감정이 복받치는 듯 낮아진다. 뉘들 문학 화원들이 은사 시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느끼며 따스한 봄볕이 쏟아지는 강화도 벌판으로 눈길을 돌렸다.
충주의 한강 시인의 시비가 강화도 들녘을 지키고 있는가? 眞實不虛한 무상의 바람을 타고 있는가?
육필 문학관을 몸소 짓고 운영하는 분은 노희정 여류시인이었다.
한국시단에서 명망 있는 시인들의 육필을 보는 재미로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시인들의 흔적을 보니 그 시인들의 살아 있는 글씨를 통해 그 시인들에 대한 상상력을 키운다.
조병화 고은 신경림 이생진 김동리 등등…….
노 시인은 우연한 자리에서 고인을 만나 시인의 길 가게 됐다 한다. 고인이 이끌어 주신 시인으로 생전에 은사의 뜻을 안고 시인의 유품을 자제분들 한데 거의 기증받고 육필문학관에 전시하고 있다.
김성희 뉘들 문학 총무님의 진행으로 준비한 행사를 끝내고 강화 기행 길에 노시인이 길 안내를 한다.
강화의 별미라는 젓갈 불고기로 점심 만찬이다.
사람 만나는 재미는 뜻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같은 길을 동행하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즐기는 것이 최고다
'식도락'이라 하지 않는가. 강화도에 왔으니 강화 술부터 맛보자 재촉하고 나는 밥은 사양하고 도도한 술 맛으로 때웠다. 이래가면서 "요즘 염라대왕이 하도 바쁘단다. 일일이 심판을 할 시간이 없어서 기발한 생각을 했단다. 지구에는 수많은 축생과 사람이 죽으니 일일이 사람을 구별할 시간이 없어 묘안을 냈단다. 지구상 술을 먹는 종자는 사람밖에 없으니 일차 관문에서 술 냄새가 안 나면 무조건 축생으로 알고 탈락시켜라. 했다 한다. 술 먹는 핑계의 실없는 농일 테다.
정겨운 식사를 마치고 제일 먼저 찾은 곳 역시 사람이다.
충주가 낳은 시인 '함민복' 시인을 만나러 그의 의식처인 인삼매장을 들렀다.
2~3년 전인가 함민복 시인 장가간다는 기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당시 이미 오십대이고 전혀 연고가 없는 강화도 촌부락에 시만 쓴다는 함민복 시인은 강화도에 머물지 십년 만에 일이니 문단에 화제가 됐다.
그가 충주 노은 출신이니 대 선배 시인이신 신경림 선생님과 同鄕인이다.
아내와 인삼 매장을 운영하며 순박한 시인은 장사가 영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눈물은 왜 짠가.' 라는 그의 명시가 떠오른다. 어머니와 국밥을 말아 드시면서 터무니없게 낯선 섬 강화도에서 혼자 사는 아들을 만나서 국밥을 먹는 정경이 눈에 잡히는 시다.
늦장가로 얻은 부인도 노은고개 넘어 감곡이며 동문이라 하니 천생연분인 듯하다.
착한 시인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다음은 행선지는 그래도 바다다운 바다를 보자하며 가는 강화도의 유일한 동막 해수욕장이다.
차창 박으로 물이 빠져나간 광활한 갯벌 . 시가 이제 온 몸으로 왔을 때 언제부터인가 망막하고 아득한 것이 좋다. 그리움이 가슴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시를 잉태하고 있다. 그리움이 낳은 시는 아득하고 망막하다. 저 갯벌처럼 . 그러나 그 삶 속에 갖는 희망으로 오롯하게 가슴에 앉은 시 하나로 일생을 살기도 한다.
해변의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니 뜻밖에 푸른 바다다.
우리를 반기듯 갈매기도 낮게 손에 잡힐 듯 머리 위를 맴돈다. 생전 처음으로 낮게 나는 갈매기와 눈을 맞추어본다.
삼십년 전 충주로 이사와 음악다방을 하며 가끔 D. J를 겸할 때가 있었다.
아침 일찍 문을 열고나는 오프닝 송으로 '닐 다이아몬드'의 노래 ' Be'를 틀어 놓고 하루를 시작했다.
낮게 머리 위를 맴도는 갈매기와 눈을 마주치는 신기한 경험을 하며 느낄 때 문득 이 노래가 잔잔하나 장엄하게 가슴으로 울려 백사장에서 그 노래를 끝까지 읊조려진다.
"잃어버린 채색이 된 하늘 위 .구름 걸친 곳. 시인의 시각이 있어야 그를 찾을 수 있지요 당신은 아마 그를 찾게 될지도 몰라요, 당신이 그를 찾게 된다면 말이죠." …….이하 생략…….
조나 던 리빙스턴 시걸의 작품 '갈매기의 꿈'이 영화 속의 음악은 일 년에 걸쳐 닐 다이아몬드가 작사 작곡하여 그해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을 수상했던 명곡이다.
책 속에 '높이 나는 갈매기가 멀리 본다.‘는 명구를 낳은 소설 갈매기의 꿈
오늘 강화도 먼 길을 찾아온 우리 머리 위를 맴도는 조나단이란 갈매기처럼.
천성의 시인이시여! 그리움과 망막함과 아득함으로 그대 환생한 갈매기로 날아와 뭐라 말을 거시는 것인가? 영혼의 시를 낭송하고 계신 것인가?
나는 미훈의 경지에서 저렇게 낳게 머리 위를 맴도는 갈매기와 無情說로 동막 해수욕장에서 환영에 젖어보는 석양이었다.
해안을 일주하다 어느새 저물은 강화도 이맘때만 나운다는 '밴댕이:'회를 먹는 저녁시간이다.
나는 점점 도도해졌다.
허나 아득하고 망막하다. 마치 자식을 떼어놓고 .그 손을 뿌리치고 도망 나오듯 한강시인을 강화도에 남겨 두니 홀로 寂寂하게 강화도 갯바람에 입술을 다시고 있을테니…….
2016년 5월
첫댓글 정말 뭐라고 답글은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문학사에 남길 만한 훌륭한 문학기행문 너무 고맙습니다.
임연규 시인님.
뉘들문학 밴드에 복사해서 올리겠습니다.
마치 자식을 떼어놓고 .그 손을 뿌리치고 도망 나오듯
한강시인을 강화도에 남겨 두니...
우리 충주 시인이신 이재호 선생님,
저도 마음이 애잔하네요...
덕분에 잘 읽고 공감합니다.
충분한 감동이 전해오는 글입니다. 늘 임시인님의 글을 빠지지 않고 읽는 중입니다. 지나간 일들이 마치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만 같아 수필쓰는 사람으로서 귀감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한강 시인 이재호 시비를 찾아서 강화도를 다녀가셨네요.
문학기행문을 읽으니 마치 저도 동행을 한 느낌입니다.
이재호 시인의 시를 찾아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김기자 선생님 반갑습니다.
혹시 기차역 앞에 '보성녹돈 삼겹살' 운영하시는 것 맞는가요?
마음에 맞는 사람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삼겹살에 소주를 세상에 젤 행복한 시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