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기억들을 반추하며 생의 의미와 보람을 찾아가는 과정은 이성을 지닌 인간만의 특권이요, 행복 추구의 원천이다. 동시에 인간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잊고 상처를 극복함으로써 다시금 삶의 궤도에 복귀할 수 있게 하는 망각의 기능 또한 부여돼 있다. 망각을 통해 우리는 생의 숱한 시련을 치유하고 재기할 수 있는 심리적 기반을 찾게 된다.
그러나 망각의 편리함 속에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조국과 수많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낸 이들의 존재는 결코 망각돼서는 안 될 것이다.
2002년 서해 교전으로 산화한 6인의 전우를 조국의 푸른 바다에 묻은 지 어느덧 3년이 지났다. 이들의 헌신이 축구 경기장의 열기 가득한 함성에 묻히지 않고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은 망각을 이겨 내며 소중한 것을 품어 내려는 ‘기억’의 힘이 아닐 수 없다.
매년 6월29일 해군2함대 충무동산의 서해 교전 전적비 앞에서는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국립현충원 서해 교전 전사자 묘역에는 참배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또 해군 인터넷 홈페이지의 추모 코너를 비롯한 추모 관련 홈페이지에는 이들을 기억하려는 네티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해군은 해군본부를 비롯한 각급 부대별로 장병들이 접근하기 쉬운 장소에 6·29 서해 교전 관련 기록물 전시를 추진 중이다. 이는 영해 사수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이들의 희생을 결코 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서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결핍이 아쉬움을 가져다 주듯 그들의 희생은 일상에서 안보의 중요성을 일깨워 줬고,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정부와 군 당국은 그동안 서해 교전을 평범한 기억에 머무르지 않도록 힘써 왔다. 이제 이들을 단순히 기억하고 추모하는 단계를 넘어 영령들의 넋이 국가 보훈 곳곳에 스밀 수 있도록 기록하고 제도 속에 반영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1999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적진에 추락한 미군 스텔스기의 조종사는 항공모함까지 동원한 미국 측의 구출 작전에 의해 극적으로 생환했다. 복귀 후 조종사는 인터뷰에서 장시간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생존 의지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은 가슴속에 품은 성조기와 구출 작전을 위해 노력하는 조국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단 한 명의 생존자, 단 한 구의 유해를 찾기 위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밀림이나 적진 깊숙이 뛰어드는 미국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국가의 부름을 받은 이들이 헌신을 마다 않고 숭고한 대의를 지켜 내도록 하는 원동력은 돌아올 때까지 자신들을 결코 잊지 않는 조국이 있다는 신뢰에서 비롯된다.
서해 교전 3주기를 맞아 고귀한 희생을 빛나게 하는 진정한 호국보훈은 망각을 넘어 기억에서 기록으로 아로새기는 과정 속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 김성찬 소장·해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
< 출처 : 국방일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