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가산책1
인문적 기풍이 살아 있는 성찰적인 영화 『묵공』
<묵공(墨攻)>은 묵자의 사상을 피부에 닿게 이해하도록 만드는 영화다. 전쟁을 다루는 영화이지만 폭력과 피를 보여주기보다 전쟁의 속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격조 높은 영화다. 10여 년 전 개봉됐다가 얼마 안 돼 개봉관에서 사라진 아쉬운 작품이다. 이 영화를 중고상을 검색해 배송까지 포함해 5,500원에 구입해 보았다. 연말에 새해 독서계획을 세우면서 2019년은 묵자를 읽는 해로 정했다. 1천 쪽에 달하는 기세춘 선생의 책을 기본으로 하고 인터넷 상에서 묵자를 다룬 글과 논문을 수집해서 읽기로 했다. 책과 논문으로 접근하기에 앞서 묵가사상을 다룬 영화를 보는 게 훨씬 재미있고 관심을 지속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묵공(墨攻)>은 내 생각에 딱 맞는 그런 성찰적인 영화였다.
홍콩 영화를 두고 어떤 분은 ‘문장무서(文張武徐)’라고 한다. “인문적 영화는 장즈량(張之亮), 무협영화는 쉬커(徐克)”라는 뜻이란다. 영화의 문외한인 내가 봐도 장즈량의 이 영화에는 인문적 기풍과 소양이 충분하다. 묵자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현실적인 고민을 잘 다루었다. 원작은 일본의 소설가 사케미 겐이치(酒見賢一)의 소설과 그것을 만화화한 모리 히데키(森秀樹)의 같은 이름의 작품이다. 그것을 홍콩 감독 장즈량이 영화로 만들었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에는 한국의 유명한 배우 안성기가 전쟁 영웅 항엄중으로 출연한다. 일본, 중국, 홍콩, 한국이 이 영화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동아시아 반전평화 영화라고 할만하다. 만화를 좋아하는 분은 우리나라에도 11권으로 나와 있다고 하니 구해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묵자는 한때 유묵(儒墨)이라고 불릴 정도로 춘추전국 시대 유가와 함께 중국을 휩쓸던 사상이다. 그러나 한(漢)나라가 제국을 이루면서 유교체제를 앞세워 묵자를 잔혹하게 탄압하면서 중국사상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유가나 묵가는 성현을 똑같이 공경하고 따랐지만 묵자는 공자를 실용적인 면에서 날카롭게 비판한다. 묵자의 주된 사상은 겸애(兼愛)와 비공(非攻)이었다. 겸애는 종족 내의 사랑을 강조한 유가의 사랑을 차별적 사랑(別愛)이라고 비판한다. 별애(別愛)를 뛰어넘어 사랑의 대상을 넓히는 것이 겸애다. 비공은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공격을 반대한다는 말이다. 다만, 모든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묵자는 강자의 약자에 대한 공격에는 확실하게 대항한다. 그래서 묵자는 성을 방어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수성(守城)의 전문가 집단이 되었다. 제 의견이나 생각, 또는 옛날 습관 따위를 굳게 지킴을 이르는 말로 중국 춘추전국 시대 송나라의 묵자(墨子)가 성을 잘 지켜 초나라의 공격을 아홉 번이나 물리쳤다는 데서 유래한 말 묵수(墨守)는 여기서 유래한다.
묵공은 묵가사상의 두 축인 겸애와 비공의 딜레마를 그리고 있다. 묵자인 혁리(류덕화 분)는 겸애를 주장하지만 정작 아름다운 일열(판빙빙 분)의 사랑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비공을 주장하면서도 도리어 영화 제목처럼 조나라 군대에 점령된 양성을 구하기 위해 공격을 펼친다. ‘묵수(墨守)’가 아니라 ‘묵공(墨攻)’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은연중에 사랑했던 일열을 물에 빠져 죽게 만든다. 수렁에 빠져 나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빠져드는 형국이다. 딜레마다. 한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가? 그리고 고생은 혁리를 비롯하여 백성이 하였음에도 승리의 열매는 탐욕스럽고 교활한 권력자 양왕이 따먹고 있다.
묵자는 예수와 마르크스의 합체와 같다. 예수는 종교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사회복지에 그 자리를 내 주고 문화행사의 하나로 남았다. 교회는 텅텅 비고 사람들은 성탄절, 부활절, 세례식을 추석과 설날처럼 명절로 여기며 즐길 뿐이다. 공산주의는 역설적으로 공직자의 부패로 몰락했다. 영화 <묵공>은 이런 아이러니를 잘 그리고 있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묵자’를 부른다. 자본주의의 과도한 생산과 소비는 환경을 파괴하고 지구의 멸망을 재촉하고 있다. 한편으로 빈부의 격차는 날로 심해가고 있다. 공성 대신에 착취와 구조적인 빈부의 대물림이 횡행한다. 21세기의 묵자는 어떻게 비공과 겸애를 펼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