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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풍
글/리태근
너무나도 기막힌 일이였다. 30호도 안되는 동네에서 하루 아침에 여섯호가 집단이사를 떠난단다. 일본놈들의 등쌀에 못이겨서 쪽바가지 차고 두만강을 넘어온 하얀부대가 한밤중에 또다시 이사짐을 싣고 안쪽(관내)으로 떠난다..온 동네가 포격맞은 전쟁터라할가 벼짚이 흣날리고 짐승들이 울부짖는다. 밤중이면 달구지에 이사짐을 싣고 팔가자기차역으로 떠난단다. 반세기를 함께 살아온 끈끈한 정을 버리고 어딜 가느냐? 전국인민들이 대채를 따라배워서 고향을 억쎄게 건설하는 때에 집단이사를 떠나는건 사회주의를 반대하는것과 뭐가 다른가? 하필이면 내가 대장을 맡은 첫해에 여섯호나 갑자기 무리를 지어서 떠나는건 나를 엿먹이는것과 똑같다. 나는 누구든지 <락호증>(落户证)을 떼주지 말라고 <명령>을 하였다. 그때는 전국적으로 <락호증>(落户证)이 호구증명이 없으면 이사를 못한다고 규정하였다. 밤이면 밤마다 모주석어록을 암송하고 인민일보 사론을 학습시키면서 어떻게하나 이사풍을 막아보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해마다 뼈빠지 일해봤댓자 해방된지 반세기가 넘도록 한공수에 마이나스 (ㅡ) 8전이요 우표한장값도 안되였다. <우표생산대>라고 소문났다. 해마다 반쇼량( )에 의거하고 부표가 없어서 헐벗고 굶주리던 사원들이 더는 참지못하고 밤중이면 이삿짐을 걷어싣고 도망친다. 씨비라아바람처럼 몰아치는 이사풍을 뭐라고 교육하면 막을수있을가 나는 그만 억이 막혀서 잠이오지 않았다. 그것도 내가 정간 (精简) 맞고 고향에 돌아와서 정치대장을 맡은 첫해에 이런 비극이 일어났으니 귀신이 곡할 일이였다. 내가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난모습을 보여주자면 천방백계로 이사풍을 막아야 한다. 이사가는 고장은 료녕성 영구인데 새로 수전농사를 개척하는 고장이란다. 땅이넓고 사람이 작아서 먹을게 흔하단다. 조선사람들을 수전농사기술자로 채용하는데 먹을게 흔해빠졌단다. 료동벌에는 목재가 귀하단다. 이사가는 사람의 눈에는 찌푸라기도 재산으로 보이였던가 밤새 마구잡이로 달려들어 생산대창고까지 허물어서 이사짐을 만든다. 정작 고향을 떠난다고 하니 두고가는게 아까웠던가 눈에 보이는게 없었다. 끌끌한 로력이 20여명이나 빠진다는게 장난이 아니였다.
나는 천방백계로 이사풍을 막아 보려고 젖먹던 힘을 다하였다. 밤마다 대채를 따라배우라는 <인민일보사론>을 통달시키였다. <로삼편>을 목이 빠지게 앍어주면서 선전하였지만 소귀에 경읽기였다. 그옛날 대채를 버리고 떠나던 사람들이 대채가 가난해서 돌아서서 오좀도 싸지않겠다고 맹세하고 떠났다. 하지만 몇년후 대채가 몰라보게 변하자 너도나도 되돌아 오겠다고 울며불며 받아달라고 애걸복걸 했단다. 생동한기사를 읽어주면서 와룡8대도 언젠가 대채처럼 공산주의락원으로 변한다고 억설하였다. 류언비어에 들먹이는 이사호들을 안착하느라 젖먹던 기운을 다해서 선전공세를 들이댔다.
내가 이사풍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데는 또다른 속셈이 있었던것이다. 소학교 동창이자 부녀대장인 애자만은 견결히 보내고 싶지않았다. 애자가 없는 고향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입당신청서까지 쓰고 열정분자로 활약하던 그녀가 이사풍에 휩쓸리는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얌전하고 일달하는 그녀는 맏며느리감이였다. 애자와 함께 청장년들을 똘똘뭉쳐서 소근장처럼 새로운 새농촌으로 건설하고 싶었다. 항상 나만 믿고 따르던 그녀가 고향을 버리고 떠난다는건 나의 사랑을 배반하는것과 똑 같았다. 그런데 사람이 나빠서 떠나는게 아니라 고장이 나빠서 떠난다는데 떠난다는데 어떻게 막는담? 먹을게 흔한가 뭣이던지 보상해줄게 있어야 막아보지 사태는 점점 악하되였다. 할수 없이 촌당지부에 반영하였다.
촌당지부에서는 절때로 락호증을 떼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촌지부서기가 직접 내려와서 전문회의까지 불러놓고 누구든지 촌의 비준이 없이는 절때로 이사를 가지못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당지부 결정은 명령이였다. 미자도 당원들의 눈치를 살피는것같았다. 련며칠 드세게 불어치던 이사풍이 누구러들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영구에다 집까지 마련하고 돌아온 세련하집 원칠이가 밤중에 도망이사계획을 세우고 이사짐을 꾸리기 시작한단다. 나는 즉시 대무위원회를 여러번 열고 또다시 애자를 설복하기 시작하였다. 다른사람은 몰라도 입당신청서까지 바친 적극분자가 이사간다는것은 당을 배반하고 사회주의를 반대하는것과 똑 같다고 엄포를 놓았다. 고운눈을 살며시 내리깔고 뜨개질에 여념없던 애자는 은은한 눈길로 나를 쳐다본다. 말없는 그 눈길속에서 나는 그녀가 십자로에서 갈팡질팡하는 심정을 엿볼수있었다. 정치를 내세우고 눈먼사랑을 구걸하는 눈치를 언녕 알고있지만 페병으로 앓고있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하여 뷰득불 이사갈수밖에 없단다. 입당못해도 상관없고 빈하중농의 추천받지못해도 상관없단다. 당장 죽는사람부터 구해놓고 시집가던지 락교가던지 해야할게 아닌가? 정치로 자기앞길을 막지말란다. 사랑으로 아버지목숨을 바꿀수 없단다. 당장 락호증을 떼달라고 달려드는 애자를 말려내는 재간이 없었다.
나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 애자를 바라보며 입을 딱 벌렸다. 몇년간 입당신청서도 여러번 쓰고 <무쇠처녀>라고 칭찬이 자자하던 그녀가 정말 이렇게 중도하차하리라고 생각도 못했다. 비록 고향에서 살다보면 고생도 막심하겠지만 그래도 몇년만 고생하면 추천받아서 대학도 갈수있다고. 하다못해 대학을 못가면 공사간부로 승진할수도 있겠는데 왜서 아글타글 샇아놓은 공든탑을 기어코 허물려고 하는가 인생과 전도와 관계되는 문제이니 제발 다시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라고 진심으로 권고하였다. 그래도 들었는지 말았는지 이사짐을 싼단다. 나는 마지막 카드를 뽑아들었다. 그녀가 고향에 안착하면 당장 결혼하겠다고 최후의 신성한 사랑까지 내걸었다. 그날밤 하현달이 훔쳐보는 생산대 회의실에서 우리는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치앞도 알수없는 인생길을 하소연하면서 새하얗게 날을 밝혔다.
애자네 집에서 주춤하는것 같았다. 나는 애자아버지 사상공작을 잘하라고 로당원 손포수까지 동원해서 술잔도 함께 나누며 속심을 나누라고 사상공작을 짜고들었다. 내가 하도 애쓰는 꼴을 지켜보다 못해 어머니는 쌀독을 긁어서 옥수수죽을 해들고 애자 \어머니를 설복했을가 자그만치 오십년 같이살아온 고장인데 가긴 어디로 간다고 아무데를 가도 이고장만한 인품좋은 고장은 없다고 래년에는 캐황도 마음대로 하게 한다는데 먹을게 없어서 굶어죽기야 하겠는가 제발 함께 살아보자고 설복하였다. 어머니는 애자를 언녕 며누리감으로 정해놓았다고 진심으로 설복하였다.
관건은 사람은 도망이사를 갈수있는데 락호증(落户证)이 문제였다. 내가 동의해도 촌지부에서 칼로 두부모 베듯 에누리 없이 잘랐는데 누가 감히 번경할수도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궁리해도 당장 굶어죽기 일보직전인데 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누가 막는다더냐 해마다 찰곡이 끝나기 바뿌게 떵떵 얼어튀는 탈곡장에 나않자 북데기를 들추면서 햇 세월에는 좀 낮겠지 하고 뒤가 나오는줄 모르고 일해 봤댔자 그새 장새였다. 고기는 큰물에서 놀아야 한단다. 영구는 땅이 넓어서 캐황도 마음대로 할수있단다. 더구나 한족들이 수전농사를 할줄 몰라서 량식까지 푼푼하게 준비하고 집까지 공짜로 주겠다는데 그까짖 락호증이 밥을 먹여준다더냐 가자! 살길을 찾아가여한다!
사활적인 로선투쟁이 벌어졌다. 반사회주의 이사풍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수 없단다. 상급에서는 절때로 이사짐을 싫으라고 집체소를 내주지 말란다. 이사호를 오류분자들과 똑같이 대하고 계선을 똑똑히 나누란다. 상급의 결정은 붇는불에 키질했다. 선불맞은 노루처럼 마구 날뛰는 세려하집 원칠이와 그가 인솔하는 이사호들은 야장간 모루우에서 두둘겨 맞는 무쇠처럼 때리면 때릴수록 퍼렇게 살아났다. 그 옛날 피눈물 뿌리며 두만강을 건너올때도 상급에서 지시했는가 잘살겠다고 좋은고장으로 떠난다는데 왜서 막는가 우리가 반혁명분지인가! 기를 쓰고 떠난단다. 헌이불리며 헌이사짐을 싸들고 이고 지고 나섰다. 사원들은 눈물머금고 지켜았다. 반세기를 고락을 합께해온 틴인들을 그대로 보낼수 없었던가 너도나도 생산대 소를 내서 이사짐을 싣고 팔가자로 떠난단다. 하느님도 보다못해 눈물이 났는지 어느세 눈곷을 날린다. 끝내 올것이 오고말았다. 나는 갑자기 장님이 된 기분이다. 큰길에서는 차마 눈뜨고 볼수없는 눈물겨운 장면이 펼쳐 진다. 좋은나 궂으나 함께 생사고락하던 사원들이 <생리별>하는 장면은 하늘땅을 울리였다.
나는 눈물 없이는 볼수없는 력사적인 이 장면을 보고 그만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아서 저도몰래 이사짐 수레를 따라나섰다. 눈보라 몰아치는 두만강을 넘어오던 새하얀 사람들이 또다시 쇠가마를 뽑아들고 헌 이불짐을 싸들고 눈보라 몰아치는 만주벌로 찾아가는데 누가 그들을 막을소냐
과연 무었이 그들을 또다시 삭막한 만주벌로 내 몰았는가? 모두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내가 당장 벼락이라도 칠것같아서 손에다 식은땀을 쥐고 비껴선다. 내가 아무말 없이 묵묵히 앞장서서 소를 몰고 팔가자 쪽으로 처벅처벅 걸어 나서자 그제야 모두들 눈물을 뿌리며 따라 나섰다…기차바곤 맨끝에 매달린 애자는 무슨말을 하다말고 자꾸만 노울 비낀 고향의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멀어져 가는 기타와 더불어 빨간 채갑수건을 쓴 그녀가 한점의 초불처럼 내눈에서 영원토록 불타고 있었다.
이사풍이 몰아치던 그해에 생각밖에 고향을 사랑하는 나와 사원들이 충성심이 하느님을 감동 시켰는지 농사가 잘되였다. 사원들은 처음으로 분홍을 (分红)타보았고 도막불에 이밥을 먹는 고장이라던 텅빈소문이 현실로 되였다 생산대 총결날에 돼지를 잡고 떡을쳐놓고 술을 마시는데 누군가 이사간 사람들을 외우는 것이였다. 소문에 의하면 모든게 생각대로 되지않아서 모두들 뿔뿔히 헤여졌단다. 내가 짐작한대로 세련하집 원칠이 속임에 들어서 신세를 망치고 말았단다. 원칠이는 조선족 벼농사 기술인재들을 모셔온 대가로 엉뚱한 돈을 떼먹고 달아났단다. 잘살겠다고 따라갔던 사원들이 거이다 사망되였다. 박수일이와 춘세네는 할수없이 고향에 돌아왔는데 몇해 못살고 사망되였다 애자네는 돌아올 차비가 없어서 그럭저럭 참고 살다가 아버지가 사망되자 연변으로 나왔는데 차마 고향에 올수없어서 다른고장에 안착했다. 애자는 자존심 때문에 돌아오지 않은것이 불보듯 뻔하다.
나는 사원들의 추천을 받아서 길림 공농병대학으로 가게되였다. 어찌보면 그번 이사풍이 나의 앞길에 찬란한 활주로를 활짝 열어놓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에 가서도 은근히 그번 이사풍에 휘말려간 사원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행여나 하고 애자를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지못했다. 대채를 따라배울때 공산주의가 실현되면 집집마다 새가구가 갖춰져서 이사갈때면 이사짐을 따로 쌀필요가 없다고 하였을 때 속으로는 믿지않았다. 그런데 요즘 세월에 새집에 모든 살림살이 구조를 빈틈없이 갖춰놓고 사람만 달랑 이사는 풍경에 환성이 터진다. 전화 한통이면 모든것을 날라다 주는 풍요로운 샹활향수를 맘껏 누리는 사람들이 그 옛날 <대식품세월 <이사풍>을 상상도 못하리라 해빛이 넘치는 아빠트에서 행복에 넘쳐서 싱글벙글 웃는 사람들을 바라볼때마다 내 고향 와룡8대 에 몰아치던 <이사풍>이 생각난다.
아! 내 인생에 한없는 후회와 희노애락을 안겨주었던 이사풍을 나는 영원히 잊을수 없다… ….
2012년 12월 23일 수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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