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5조원... 퇴출 모면해도 한국의 D램 독주 계속될 듯
엘피다의 벼랑끝 전술
파산 가능성 발표함으로써
채권단을 압박하고 있다는 분석
파산 땐 실업자 6000명
日정부 정치적 부담 커
삼성전자 등 한국 업체는 수혜
점유율 13.5% 엘피다 퇴출 땐
국내기업이 시장 나눠갖게 돼
업계 4위 기업이 인수할 경우엔
강력한 3위 업체 등장할 수도
세계 3위의 D램업체인 일본 엘피다의 진로를 둘러싸고 세계 반도체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누적 적자에 허덕이는 엘피다가 파산할 경우 한국 업체들이 D램 시장에서 절대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채권단이 자금 수혈을 할 경우 반도체 업계의 '치킨게임'이 더 길어진다. 치킨게임이란 2대의 자동차가 서로 마주 보며 달리다 먼저 핸들을 꺾는 쪽이 지는 게임이다. 치킨에는 겁쟁이란 뜻이 포함돼 있다. 반도체 업계는 엘피다가 이번 위기를 넘기더라도 결국 한국 업체들에게 D램 시장을 내놓게 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엘피다의 벼랑 끝 전술
엘피다는 지난 15일 "채권단과 채무조정 협상이 잘 되지 않아, 사업 지속이 여부가 불투명하다"고 밝혔다. 아직 채무 협상 만료기한이 한 달 넘게 남은 시점에서 회사 측이 공식적으로 파산 가능성을 발표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주가 폭락과 대출금 회수 등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엘피다가 실제로 문을 닫기보다는 채권단을 압박하기 위해 '벼랑 끝 전술'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빚을 줄여 주거나 돈을 더 빌려 주지 않으면 "다 같이 망하게 될 것"이란 압박 작전을 편다는 것이다.
엘피다는 현재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총 차입금은 3581억엔(약5조2000억원)이나 된다. 이 가운데 올 상반기에 갚아야 하는 금액이 920억엔(1조3000억원)에 이른다. 반면 현금화할 수 잇는 자산은 500억엔 안팎에 불과하다.
5분기 연속 이어지는 적자도 벗어나지 못했다. 3월 말까지 채무 연장이나 부채 조정 협상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파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채권단이 엘피다를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디미 2009년 엘피다에 대규모로 자금을 투입한 데다, 불경기 속에 엘피다 근로자 6000명을 실업자로 만들어버릴 경우 정치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TV, 휴대폰, LCD 등 전 세계 모든 IT시장을 한국 업체에 내준 마당에 D램 시장의 마지막 보루인 엘피다가지 사라질 경우 일본 재계와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가 남을 것으로 일본 정부는 우려하고 있다.
엘피다는 바로 이런 점을 간파해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엘피다는 반도체 업황이 나빠진 작년부터 자금 확보를 위한 대외 홍보 전략에 공을 들이고 있다. 작년 5월에는 첨단 반도체 공정 기술인 20나노 기술을 세계 최초로 양산한다고 발표했지만 이 제품은 9개월이 지나도록 시장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일본 미즈호 투자증권의 이시다 유이치 애널리스트는 "엘피다는 마치 유럽의 그리스가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며 "엘피다가 망하면 모두 다 손해를 보게 된다는 점에서 일본 정부가 다시 한번 자금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국, 메모리 반도체 시장 독주
엘피다가 정부 지원을 받는 데 성공하더라도 이전 같은 경쟁력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업황이 여전히 안 좋은 데다 정부의 자금 지원 역시 제한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적기. 대규모 투자를 필요로 하는 반도체 시장에서 승부를 펼치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엘피다는 D램 시장점유율이 점진적으로 떨어지면서 퇴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동양증권 박현 애널리스트는 "엘피다가 차지하고 있는 D램 시장점유율 13.5%는 결국 삼성전자, 하이닉스, 마이크론(미국) 등 남은 3개 업체에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시장점유율이 미미한 마이크론보다는 막강한 자금력을 지닌 삼성전자와 SK그룹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은 하이닉스가 유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엘피다가 다른 업체에 인수될 경우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낸드플애시를 주로 생산하고 있는 일본 도시바가 엘피다를 인수할 경우 제품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할 수 있다. 낸드플래시는 휴대폰.디지털카메라 등 모바일 기기의 저장장치로 많이 쓰이는 메모리 반도체다.
D램업계 4위 마이크론이 인수할 경우 점유율을 높여 삼성전자.하이닉스를 위협할 수 있다. 우리투자증권 박영주 애널리스크는 "엘피다와 마이크론이 결합할 경우 강력한 3위 업체가 등장한다는 부정적 측면이 있다"면서도 "합병 과정에서의 부작용. 생산 손실 등을 감안하면 궁극적으로는 한국 D램 업체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엘피다 퇴출되면 국내 업체 견제 심해질 듯
엘피다가 시장에서 퇴출되더라도 국내 업체들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지금보다 파격적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D램 시장이 예전같은 호황을 누리지 못하는 데다. 엘피다는 요즘 인기가 높은 모바일용 D램 대신 수요가 침체된 PC용 D램에 집중해왔기 때문이다. 엘피다는 낸드 플래시 사업도 하지 않았다. 엘피다가 차지하던 시장을 가져오는 것만으로는 실질적인 이득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LCD(액정디스플레이).TV. 휴대폰에 이어 D램 반도체마저 한국업체들의 양강 구도가 강화될 경우 글로벌 IT업체들의 견제가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통신은 16일 엘피다에 대한 자금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D램업계는 소수(삼성. 하이닉스를 지칭)가 지배하는 과점 상태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글로벌 D램 시장조사업체인 D램익스체인지 역시 "엘피다가 이대로 퇴출당한다면 전 세계 PC및 D램 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