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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깊이
김동원 시인 '평론가
무릇 한 편의 서정시에는 아름다움과 깊이가 있다. 그 아름다움과 진리의 다른 말로서 깊이는 모리스 메를로-퐁티의『눈과 마음』에 의하면, 높이의 차원과 너비의 차원에서 파생된 제3의 차원이며, 모종의 큰 존재에 참여하는 것이다. 제3의 영역이자 큰 존재인 시의 깊이는 검은 빛의 사유 이미지로서 한 편의 시에 밀도와 강도를 더한다. 딴은, 우리의 내면을 건드리고 생각을 자극하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새삼 다르게 보게 하는(이종건,『깊은 이미지』) 깊이는 J.P.리사르의 경우 하나의 품사로 기능하기도 한다. “명사, 형용사, 동사 등 이 언어의 원형의 위대한 삼위일체는 그때 또다른 삼위일체-깊이, 투명함, 움직임-를 표현한다. 이는 또한 보들레르적 존재 그 자체의 삼위일체이기도 하다. 명사는 깊이를 채운다. 심연의 허공에 실체의 뜨거운 충만함을 대치함으로 해서 그것에 두께와 농도를 준다. 심연으로부터 명사는 심연의 마력과 신성한 수직성, 그리고 심연의 현기증과 울림의 능력을 유지시키면서 그러나 심연을 두려움으로부터 배운다. 그것은 명사 그 자신이 의미의 표면과 정확하고 매우 인간적인 의미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장 폴 리샤르, 윤영애 역,『시와 깊이』)에서 보듯이, 명사와 명사의 깊이는 심연의 현기(玄機)와 울림, 수직의 언어, 그리고 인간적인 현상과 의미마저 지니고 있어 넓이의 시와 높이의 시에 비해, 깊이의 서정시에는 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Sehnsucht과 시혼과 음영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이 있다.
몸은 구체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며, 마침내 마음이 드러난 현상을 말한다. 나는 나의 몸이다. 혹자(김주환)에 의하면, 그 몸은 인간 본성과 인간관계의 근원이며, 모든 문명의 근원인 것이다. 모든 매체는 결국 몸의 확장에 다름아니다. 정화열 교수는 자신의 몸철학에서 공간, 시간 등 근본 개념의 밑바닥에는 인간의 몸이 있다. 세계를 지각하고 경험하는 것은 이 몸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세계는 하나의 몸이며, 몸의 말이다. 세계의 언어 또한 안과 바깥이 몸으로 이루어져 고통을 느끼는 건 매한가지다. 시의 말과 행간은 소리가 형상으로 드러나는 과정이어서 멀고 아득하다. 언어 이전이 있으면 이후가 있고, 언어 이전이 없으면 이후도 없는 법이다. 시는 시가 아닌 곳에서 태어나 자라며, 사물과 언어 사이는 본래가 구멍이다. 그곳엔 어두워 오래 머물 수가 없다. 어둠의 부재인 빛의 언어는 이미지망을 뚫고 극한까지 밀고 나간다. 그림자는 대상을 공격하고, 이간하며 끝없이 흔든다. 시간은 사물의 위치와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르게 흐른다. 최소한의 말로 최대한의 삶과 울림을 드러내는 게 시라면, 칼의 언어일수록 시의 피는 더욱 깊게 스민다.
시의 언어는 중첩의 상태로 존재한다. 은폐된 것들의 비은폐와 무의식이 시의 심층 언어라면, 이는 모호와 난해, 압화와 음영, 사물에 투영된 알레고리로 점철되어 있다. 사물을 인간화하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이 시의 언어다. 상극의 언어, 상생의 언어인 시어는 경우에 따라 변형과 굴절을 가져오며,흔적을 지우고, 주체를 지우고, 사물의 안팎을 지우기도 한다. 딴은, 혼돈과 유무를 지우고, 형(形)과 상(想)을 지우고, 사라지는 방식으로 나타나며 불가능의 가능성을 추구한다. 현대시의 언어는 물질이자 파편화된 몸이며, 어떤 비명이다. 반/역을 도모하는 시는 존재의 공동(空洞)이며, 형극(荊棘)을 만나게 되면 가면을 벗는다. 시의 말은 버려진 것들을 대신하는 삶이며 곡비(哭婢)라는 목소리의 현상이자, 몸을 놓친 것들의 불안이다. 욕망의 현대시와 언어는, 죽음과 부조리에 대한 강렬한 저항과 반동, 모순의 극지다. 아름다운 것이 위험한 거라면, 바람은 흐느낌의 언어다. 직관을 통해 기미와 기척을 엿듣는다면, 보이는 세계를 통해 허공의 깊이를 가늠한다. 깊은 이미지는 행간에 바장이는 사물의 기(氣)다. 기의 흐름이다. 바람의 풍화에도 언어는 지문을 남기는 법. 시는 언어의 끌로, 사물의 내면을 각인하는 작업이다. 구체적 추상으로, 추상적 구체의 세계로 이행한다. 하여, 새로운 시와 언어는 언제나 구체와 추상의 접점에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사이 존재가 시의 말이라면, 그것은‘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떨림과 울림이다. 언어는 끌어안는 공(空)의 방식과 밀어내는 색(色)의 방식으로 인연 생기한다.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그 언어의 전복(顚覆)이 시다. 살아남은 시대의 혼돈이 언어의 빛과 그림자이다.시가 사물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장자 내편 ‘대종사’의 말처럼, “若夫藏天下於天下而不得所遯 천하를 천하에 감추면 (훔쳐서) 도주할 곳이 없다.” 즉 천하의 모든 존재를 천하 속에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한다. 천하를 천하에 감춘다는 이 말은 얼마나 장자다운 것인가. 하여, 궁하면 변하고(窮則變), 변하면 통하고(變則通), 통하면 오래간다(通則久)(주역)는, 그 미완성이 시의 깊이다. 결국 시는, 말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깊이와 시선, 방법으로서의 이미지다. 시를 감상해 보자.
젖는다는 것 – 이성복,「또 비가 오면」
문제는〈그것〉이 앎의 대상이 되는 즉시 ‘불가능’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우리는〈그것〉을 알 수 없고, 단지〈그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된다는 말은 맞지 않다. 그러나 이미 되어 있는 것을 안다는 것 또한 어폐가 있다. 그 또한 앎이며, 따라서 ‘긁어 부스럼’이고 ‘평지풍파平地風波’이다. 그렇다고 알지 않으면 ‘되어 있’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되어 있는 것 또한 앎이기 때문이다 // 르네 샤르에 의해 ‘영원한 바깥의 흐름’, 혹은 ‘죽음의 유골함’과 가깝지만 ‘혼례 가능한 저 너머’로 명명되는〈그것〉의 자리는 우리가 한 번도 머문 적 없고, 머물 수 없는 곳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찾아지는 곳이다. 이 자리를 기억/보존하고 모험/실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언어이다. // 예술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실패하는 형식이다.” (이성복,「불가능의 시론」에서)
그렇다. 예술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실패하는 형식이다. 그 바깥의 영역과 흐름에 시가 있다. 언어가 있다. 언어는 거대한 있음(il y a)의 공간이란 푸코의 말도 그런 맥락과 징후에서 읽혀진다. 시의 에스프리는 그것 자체(It-self)에 있다. 이는 너머와 여기를 잇는 다리로서, 비장소로서 아토포스(Atopos)를 알고 아토포스가 되는 것이다. 이성복(1952년~ 경북 상주 출생)의 첫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문학과지성사)는, “철저히 카프카적이고 철저히 니체적이며 철저히 보들레르적”이다. 기존의 시 문법을 파괴하는 낯선 비유와 의식의 초현실적 해체를 통해 시대의 상처를 조명한다. 원초적인 부조리와의 치열한 싸움은, 병든 사회에 대한 경고음이다. 이성복은 시대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대해’ ‘STOP’이라고 외치고 분노할 줄 안다. 권력의 폭압에 대해, 전시대의 우상에 대해, 누이의 유린에 대해, 조국의 병(病)듦에 대해, 죽어가는 ‘나의 별’에 대해, 무수한 부조리에 대해 소리친다. 한편, 1984년 프랑스에 다녀온 이후, 그는 사상의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 그리고 논어와 주역에 심취한다.『남해금산』(문학과지성사, 1986)은 그 동양정신에 대한 탐색이자, 어느모로 회귀다. 개인적, 사회적 상처가 정제된 언어로 형상화된 이 시집에서 그는 깊고 따뜻하며, 보다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시의 진경을 보여준다. 서정과 서사의 적절한 직조는 조각난 삶과 서러움을 바닥에 깔고, 슬픔의 근원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이 심오한 비극으로의 바라봄-드러냄의 변증은, 80년대 우리 시단의 가장 탁월한 성취다. 때로는 환상소설의 한 장면처럼 납득하기 힘든 상황 묘사, 이유가 선명하지 않은 절규 등을 담아냈다는 비판도 받았다.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발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이성복,「또 비가 오면」전문
이성복의「또 비가 오면」(2시집『남해 금산』, 문학과지성사, 1896)은 애절한 사모곡이다. “물”과 “비”는 어머니를 젖게 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기능해 있다. 어머니는 현실이자 “동시에 세계 내의 삶의 원리, 아니 여건으로 존재하는 대지모신으로서의 어머니이다.”(김현) 자식을 위해선 하늘이 무너져도 “미동도 않는 것이 어머니다. 설령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물에 잠겨도, 그 자식을 구할 수만 있다면 뛰어드는 것이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던가!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몸으로 환생해도, 자식을 구하러 이승에 올 사람은 어머니뿐이다. 태반에 연결된 그 질긴 인연이 모성이라면 “아카시아 뿌리가 / 입속에 뻗어도 어머니”는, 그 “뜨거운” 사랑의 “입김”을 자식의 심장에 불어넣는다. 마침내 시인은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 앞에, 불효를 뉘우치며 “비에 젖”는다, “물에 잠”긴다. 이성복의 시에 나타난 “여성적 편향성은 여성과 성(性)에 대한 필요 이상의 관심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하나의 여성은 그에게 서로 다른 세계로 여겨졌으며 그 다른 세계들로 이어지는 통로가 ‘성(性)’으로 생각되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언제나 생각으로서만 머물러 있었을 뿐, 그가 그 다른 세계로의 ‘통과제의’를 실천했다는 뜻은 아니다. 한때 그가 연애시야말로 세상의 본질을 파헤치는 가장 유효한 문학 형식이 되리라 믿었던 것도, 그리고 그가 동물이나 식물의 생태학 가운데에서도 특히 ‘짝짓기’에 관한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도, ‘성’이 만남과 헤어짐, 있음과 없음, 삶과 죽음이라는 ‘무시무종’의 순환의 기본 고리로 작용한다.”(김현) 이 시의 궁극적인 지점은 젖고 잠기는 물의 속성과 불의 이미지(“뜨거운 어머니 입김”)가 겹쳐진 데 있다. 하여 또 비가 오면, 또 당신의 따스한 기운이 바람처럼 내게로 불어온다는 사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이란, 고요란 나의 어머니다.
비극의 명랑성 – 정호승,「맹인부부가수」
정호승(1950~, 경남 하동 출생)의 시와 세계는, 사회적 소외계층의 어려운 삶에 대한 연민과 지극한 사랑에 방점이 주어져 있다. 비극적인 세계 인식과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을 정제된 언어로 노래한다. 그의 언어의 숨결은 언제나 슬픔과 눈물로 직조(織造)되어 있다. 아픔이 배였는가 하면, 기쁨과 희망의 밧줄도 있다. 그의 언어는 세상 밖의 차가움을 말하지만, 더 깊이 내려가 더듬어보면, 시의 아랫목에는 언제나 곡진한 사랑과 온기가 있다. 시「맹인부부가수」(2시집『서울의 예수』, 민음사, 1982)는 그의 시적 감성을 연민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맹인 부부의 노래하는 모습을 통해서 힘들고 어려운 조건에서도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열망과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의 자세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정호승,「맹인부부가수」전문
「맹인부부가수」는 당대 소외계층의 슬픈 자화상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시각 청각 촉각의 복합감각은, 이 시의 어두운 그늘을 더욱 심화시킨다. 맹인 부부와 아이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제3의 화자가 등장한다. 아이를 업은 장님 엄마, 울음 우는 아이, 노래하는 장님 아버지가 처한 참담한 상황은, 눈 내리는 세상과 대비되어 독자를 가슴 뭉클하게 한다. 특히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희망찬 삶에 대한 갈망을 밀도 있게 그려낸 점은 탁월하다. 나는 15년 전쯤 대구 약전 골목 앞 ‘제일서점’ 육교 위에서 함박눈이 퍼붓는 겨울밤,「맹인부부가수」속에 나오는 똑같은 슬픈 장면을 오래 지켜본 적이 있다. 거리에는 눈이 내리고 맹인 아버지는 기타를 치고, 아이를 업은 엄마는 금전통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등 뒤의 포대기에 싸인 아이가 이따금 뒤척이던 장면은, 내 붉은 눈시울에 화인(火印)처럼 찍혀 있다. 시「맹인부부가수」속의 ‘눈사람’은 빛과 희망의 상징이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의 외로움을 맹인부부는 노래를 통해 치유해 준다. 한편 이 시는, 소외된 민중들의 아픔을 무관심한 표정으로 스쳐 지나가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비판하고 있다. ‘눈사람’을 통해 “봄이 와도 녹지 않을” 현실의 어두운 삶을 역설적으로 되묻는다. 이 시의 백미는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의, 그 깊은 행간의의미다. 그렇다. 맹인 부부는, 현실은 참담하지만 끝까지 자신들의 희망인 ‘눈사람’을 기다린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그들을 둘러싼 무관심한 세상을 결코 원망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역설이다. 그 역설은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는” 따뜻한 긍정의 세계로 승화된다. 긍정이야말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숭고한 영혼의 샘물이자 사랑의 울림이다. 하여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는 맹인 부부와 울음 우는 아이의 모습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비정한 인간 세계의 비극적 인식을 가리킨다.맹인가수의 노래는 어둠 속에 내리는 함박눈이자 절망 속의 희망이다. 비극의 ‘명랑성’이다.
그로테스크, 혹은 유리의 도시– 김혜순,「서울」
김혜순(1955~, 경북 울진 출생)의 시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비틀어 만든 기괴한 이미지들과 속도감 있는 언어 감각으로 자신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다. 김혜순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다. 그는 겹침의 시학을 즐겨 구사한다. 시간과 공간을 확장 시키는가 하면 수축시키고, 감각과 시점을 겹쳐 놓는가 하면 뚝 떨어뜨려 놓는다. 여성의 환상적 내면을 몸의 감각과 경험으로 그려냄으로써 일견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떠올린다. (이런) 그를 최근 유행하는 ‘환상시’의 대모(大母)라 불러도 무방하리라.”(정끝별) 한편 그녀의 “시 세계를 뒤덮고 있는 어둠과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은 삶의 의미를 붙잡아보려는 어떤 노력도 허망한 것이라는 섬뜩한 인식론적 깨달음에서 흘러나온다. 삶의 신비와 가치에 대한 기대, 동경의 심연이 깊으면 깊을수록 목적이 없는 이 세계에서의 삶은 견디기 힘들어진다. 김혜순의 시적 자아들은 그때 난폭하게 세계를 향해 자신을 벌려 스스로 찢어버린 ‘몸―자의식’을 드러낸다. 이는 자신의 현존을 위협하는 세계에 대한 공격적인 방어의 한 방법인데, 그 드러냄의 극단에 식육적 상상력과 시체 애호증이 자리잡고 있다.”(장석주) 그런 측면에서 보면,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와 부정, 부조리에 대한 폭로, “유리벽” 으로 상징된 어두운 도시 뒷골목의 가면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는「서울」은, 마치 거대 도시 ‘서울’의 지옥도를 연상케 한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또 유리문이 나온다. 유리문 안쪽엔 출구라고 씌어 있고, 바깥쪽엔 입구라고 씌어 있지만 그러나 나가든 들어가든 언제나 너는 어떤 몸의 내부에 속해 있다. 마치, 난자를 만난 정자가 그녀의 집에 영원히 체포되듯 너는 거기에 속해 있다. 내부의 사람이면 누구나 유리문을 밀고 나가 또 하나의 유리문을 향해 걸어가야 하며, 그곳을 나와서도 또 하나의 유리문을 열어야 한다. 밤이 오면 어떤 유리문들은 네온사인을 달고 여기가 정말 출구예요 말하는 듯하지만 그러나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어떤 유리문을 열면 거기 매맞은 얼굴들이 한 방 가득 들어 있고, 어떤 유리문을 열면 죽은 네 어머니가 웬일이냐 돌아앉으신다. 어떤 유리문을 열면 길 잃은 파리가 윙윙거리는 방안에 허벅지를 드러낸 여자들이 뒤엉켜 누워 있고, 어떤 방문을 열면 네 시신 위로 구더기들이 한없이 쏟아져나온다. 어떤 유리문은 빗속을 맹렬히 달려 너는 젖은 머리칼을 흔들며 죽어라 그 문을 향해 뛰기도 해야 하고, 어떤 유리문은 지하 깊숙이 미로를 개설하기도 한다. 지하 미로의 매달린 문들의 이름을 믿지 마라. 어떤 문엔 친절하게도 오류역이라 적혀 있기도 하고, 혹은 어떤 문엔 십리를 더 가라고 적혀 있기도 하지만, 그 말을 믿지 마라. 이곳의 사람은 아무도 출구를 모른다. 설탕병에 빠진 개미처럼, 일생의 시간을 다 풀어내어 만든 실뭉치 속에 숨어든 파리처럼. 이곳 가슴의 미궁은 그리 넓지 않아 새벽 네시경, 두 시간이면 동족 끝에서 서쪽 끝까지 주파할 수 있지만 몸 밖으로 출구를 찾은 사람은 아직 없다. 가슴속 투명한 미궁의 주인은 오늘 또 세간살이를 몽땅 싣고 정읍에서 올라온 다섯 식구를 접수한다. 그들도 이제 들어왔으므로 출구를 모르리라. 미궁의 유리문들이 점점 늘어난다. 길 위에 길이 세워지고, 물길 아래 물길이 세워진다. 너는 늘 떠나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로 돌아온다. 새로운 길을 개척해보려 하지만, 늘 역시 그 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 벙어리 네 그림자는 말하리라. 이 길로 가서는 안 돼요. 그림자 언제나 길은 틀렸어요 말한다. 날마다 복선이 증가한다. 유리벽에 뭘 새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너는 유리벽에 매달려 뭔가 새기려 하고 있구나. 꿈속에 있으면서 꿈속에 전령을 보내려고, 헛되이 허공중에 고운 얼굴을 새기고 있구나. 미로는 날마다 골목 끝에 유리문을 세운다. 이 몸을 깨뜨리고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내 몸 밖에서 누가 나를 아직 부르고 있는데……
―이혜순,「서울」전문
시「서울」(시집『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은, 몸을 한없이 확장 시켜 세계를 몸의 보자기로 싸안거나, 몸을 샅샅이 뒤져 세계의 흔적을 발견해내는 특이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자신의 몸의 경계를 허물고 싶다는 욕망과 관련된, 수평적 번짐의 상상력이다. 그런 그녀에게 서울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또 유리문”이 나오는 출구가 없는 문이다. 밖에서는 보이지만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은폐의 문이다. 우리는 그의 ‘문’을 통해 이미지가 “몸의 내부”와 연결된 은유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런 숨겨진 세계는 “밤이 오면” “네온사인”을 달고 여기가 출구라고 외친다. 매음과 마약과 환락의 서울은 입구만 존재할 뿐 출구는 없는 비정한 세상이다. “매맞은 얼굴들이 한 방 가득 들어 있고,”, “시신 위로 구더기들이 한없이 쏟아져”나오는 지옥도이다. 서울은 폭력과 살인의 공간이자 ‘오류(역)’의 공간이기도 하다. 하여 서울의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아무도 출구를” 모른 채 죽어간다. “설탕 병에 빠진 개미처럼, 일생의 시간을 다 풀어내어 만든 실뭉치 속에 숨어든 파리처럼.” 미궁 속에서 버둥거린다. 하여 서울로 기어든 인간들은 혼돈과 우울 속에서, 음습한 지하 방에 갇혀 어둠처럼 사라진다. “길 위에서 길이 세워지고, 물기 아래 물길”이 세워져도 까마득히 그 진실을 모른 채, 인간들은 자신의 유리 벽에 매달려 뭔가 새기려고 허탕을 친다. 아무리 서울을 벗어나려고 해도 언제나 “그 자리로” 돌아가는 악순환의 고리가 서울이다. 하여 시인은 자괴감 속에 중얼거린다. “이 몸을 깨뜨리고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내 몸 밖에서 누가 나를 아직 부르고 있는데……”. 그렇다. 아무리 밖에서 누가 불러도 서울은 대답하지 않는, 자본의 가면을 쓴 관념의 몸뚱어리다. 마약과 사이비 종교들, 지식의 잡탕아들이,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는 허상의 공간 속에서 유령처럼 떠돈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뜯어먹는 아귀들의 아우성처럼 서울은 밤마다 살려달라고 절규한다. 하여 김혜순은 이 시집을 이렇게 규정한다. “나는 그 전경화된 마음의 참혹한 풍경화들에 폭풍처럼 구멍의 길을 낼 언술을 꿈꾸었다. 나는 방법의 다름으로도 말하고 싶었다. 나는 장르 속에 뛰어들어 그 장르를 폭파하고 싶었다. 나는 언술의 방법적 차이로 수많은 전언들의 획일주의에 항거하고 싶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욕망밖에 없으므로 나는 내 욕망을 칼처럼 벼르고 별러 타인(그대)들의 욕망의 구멍을 내보고 싶었다. 아, 욕망의 총체 서울의 콘크리트 심장에 나의 언술의 길을 내보고 싶었다.” 결국「서울」은 성적 욕망이 뒤엉킨 메타포(metaphor)이자, 극사실적 이미지와 환상의 수법으로 채색한 한 장의 그로테스크화(畵)인 셈이다. 그녀에게 서울은 몸을 깨뜨리는 방식으로 다시 세우는 우파니샤드에 이르는 길이자, 유리에서 유리로 이어지는 미궁이다.
물질적 상상력― 이하석,「뒤쪽 풍경 1」
이하석(1948~, 경북 고령 출생)의 첫 시집『투명한 속』(문학과지성사, 1980)은, 당시 한국의 문학적 현실에서 매우 특이하면서도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문명사회로부터 버려져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무기물들에 대한 그의 시적 인식은 매우 이채를 띤다. 극사실주의적인 묘사를 통해 물질문명 세계가 지닌 비인간적이고 황폐한 현실을 섬뜩하리 만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음이 그것이다. 당시 시를 쓰거나 시에 뜻을 두었던 문청에게 그의 작업은,“그래, 이렇게 시를 쓰는 일도 가능하구나”라는 반향과 충격을 불러왔다. 이른바‘물질적(광물적) 상상력’이란 방법론적 접근이다.「뒤쪽 풍경 1」에 주목해 보자.
폐차장 뒷길, 석양은 내던져진 유리 조각
속에서 부서지고, 풀들은 유리를 통해 살기를 느낀다.
밤이 오고 공기 중에 떠도는 물방울들
차가운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인다.
어둠 속으로 투명한 속을 열어 놓으며,
일부는 제 무게에 못이겨 흘러내리고
흙 속에 스며들어 풀 뿌리에 닿는다.
붉은 녹과 함께 흥건한 녹물이 되어,
일부는 어둠 속으로 증발해 버린다.
땅 속에 깃든 쇠조각들 풀 뿌리의 길을 막고,
어느덧 풀 뿌리에 엉켜 혼곤해진다.
신문지 위 몇 개의 사건들을 덮는 풀. 쇠의 곁을 돌아서
아늑하게, 차차 완강하게 쇠를 잠재우며
풀들은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 나간다.
―이하석,「뒤쪽 풍경·1」전문
「뒤쪽 풍경·1」은 산업화의 그늘이 막 드러나기 시작할 때의 작품이다. 자연과 문명을 대립적으로 설정하여 우울한 전망을 보여주고 있는 이 시의 표면은“쇠 조각”과 “풀뿌리”와의 대결이다. 하지만, 그 이면엔 개발 독재와 정신의 황폐화를 경고하고 있다. 근대화라는 미명으로 이루어진 산업화의 심각한 폐해는, 사회 전반의 불균형을 초래하였다. 환경과 생태의 파괴는, 이후 문명의 파괴로 전이된다.「뒤쪽 풍경·1」의 묘사는 냉정하고 예리하다. 김현의 지적처럼, 70년대 산업화 시대의 뒷 그늘을 환경 생태학적으로 온전히 접근한 시선은, 이하석의 시가 유일하다. 광물성의 소재에 대한 그의 관심과 탐색은 집요하다. 버려진‘비닐, 휴지, 껌종이, 못, 깡통, 병, 깨진 유리, 타이어 조각들’을 사진으로 찍어 현상 인화한다. 그렇게 모여진 자료들을 분석하고, 그 분석된 자료 사진을 하이퍼리얼리즘 방식으로 시를 제작한다. 주관적 감정을 극도로 배제한 채, 광물적 이미지를 식물성에 접목해 시대의 문명과 현실을 고발한다. 붉은 녹물이 풀 속에 스며든 풍경은, 그늘진 세계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폐차장 뒷길의 유리 조각을‘풀’들이 살기를 느낀다는 인식은 예각적인 데가 있다.“유리 조각”을 폭력 집단으로,“차가운 쇠”는 사회의 부조리로,“풀”은 힘없는 민초로 다층적으로 그렸다. 그리고 시제에서 뒤쪽의‘뒤’는 어둠과 세속-현실의 공간을, 풍경은 상처의 이면을 표상한다. 뒤쪽 풍경은 어둡고 깊다.
견인주의자의 노래― 이기철,「열하를 향하여」
천 개의 시가 있으면 천 개의 물음과 대답이 있다. 그의 서정시는 규정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큰 그릇과도 같다. 낡은 존재를 지우고, 새로운 집을 지으려는 이기철(1943~, 경남 거창 출생)의 시와 몸짓은 치열하다.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사소한 것에서 장엄함을 찾아내는 그의 시안은 깊다. 시집『열하를 향하여』(민음사, 1995)에서 인간 박지원의 내면적 갈등과 당대 선비의 지조는 엄혹하다. 이 시는「一夜九渡河記 일야구도하기(하룻밤에 한 강물을 아홉 번이나 건너다)」속의 ‘사물을 인식할 때, 외물에 영향을 받지 말아야 진정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연암의 철학을 바탕으로 형상화되었다. 여기서 시인이 다다르고 싶은 정신의 극점과 이상향은 격렬하게 구가된다. 한편, 그의 시집『유리의 나날』(문학과지성사, 1998)은 90년대 가장 낯선 ‘문학적 사건’으로 꼽힌다. 이 시집은 현대시사의 정신적 국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며, 견인주의자의 노래로 평가된다. 언어의 절차탁마를 가감 없이 보여준 진경이자, 정신주의 시의 묘처를 얻었다. 그의 고백처럼「유리에 닿는 길 2」은, 폴 발레리(프랑스, Paul Valery, 1871~1945)의 순수시(Pure poem)에 기대어 있다. 언어의 명징성과 순수성, 객관성과 극한성이 그것이다.
형틀의 사내처럼 내 가슴에 가시를 박고
내 손과 발에 못을 쳐라
그러면 나는 지면서 아름다운 꽃잎처럼
온몸의 피를 흘려 내 발을 적시리라
내 발을 적신 피 흐르고 흘러
십리 마른 땅 모래밭을 물들이리라
바위여, 천근 무게로 내게로 와서 내 몸의 욕망을 압살하라
나는 바위에 눌려 마침내 가지를 버린 마른 잎으로 남으리라
그러면 나는 투명한 한 장 유리가 되어
천의 살을 불태우는 고압의 전류를
내 뼈로 막으리라
그때가 되면 모든 잠, 모든 끼니 벗어던진 철사 인간으로 나는 서서
산 것들이 두려워하는 주림과 목마름을 떨쳐버리리라
폐도 간도 위도 항문도 버린 철사 인간으로 나는 남아
영욕과 휴식을 떠나 지상의 어디에도
그림자 남기지 않는 유리가 되리라
귀가 구하는 노래, 눈이 부르는 고혹, 코가 찾는 향기, 입이 누리는 감미로움
다 던져버리고 나면
내 지상에서 남긴 말은 한 점 잉크로 남아
마침내 내 정신이 걸어간 금결의 흔적이 되리라
내 경배하는 유리, 몸을 찔러 마음을 서게 하는
가시여
내 정신의 채찍인 못과 바늘이여
―이기철,「유리에 닿는 길 2」전문
사물 이미지로서 유리(琉璃)는 구도와 초월을 지향한다. 그는 고도로 단련된 정신과 극한의 경지를 파고든다. 이기철이 사용한 ‘추위와 더위, 차가움과 뜨거움, 인내와 극기, 염열(炎熱)과 금욕, 인종(忍從)과 수정(水晶), 명징과 이녕(泥濘), 진창과 염량(炎涼), 한서(寒暑)와 천축(天竺) ’ 은, 궁극적으로 유리에 닿는 은유이다. 시「유리(琉璃)에 닿는 길 2」은, 견자(見者)의 시이자, 선시일여(禪詩一如)의 세계를 보여준다. 격물치지한 놀라운 관(觀)은, 실로 한국 정신주의시의 극단을 추체험케 한다. 그의 시는 정신과 도(道)의 칼날 위에 서 있다. 시적인 것과 비시적인 것을 구분하고, 비시적인 불순물이 제거된 상태를 통해, 그의 언어는 마침내 ‘유리’에 닿는다. 언어의 절대 순수란 존재하지 않지만, 그는 끝없이 순수를 향해 직진한다. 언어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의 감정과 조작을 통해 욕망을 드러내 왔다. 이기철은 언어를 통해 언어의 극한을 넘어서려고 시도한다. 죽음을 통해 부활한 예수가 그랬듯, 그는 “가슴에 가시를 박고”,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을” 친다. “지면서 아름다운 꽃잎처럼”, “온몸의 피를 흘”리며, “발을 적”신다. 이런 고행이야말로, 관념을 뚫어 ‘유리에 닿는 길’이며, “내 몸의 욕망을 압살하”는 성스런 행위다. 유리에 닿는 길은 곧 시에 이르는 길이다. 아무리 “천의 살을 불태우는 고압의 전류”가 “뼈”를 녹일지라도, 그는 “철사 인간으로” 서서, “산 것들이 두려워하는 주림과 목마름을 떨쳐버리”겠다고 염원한다. 하여, 궁극엔 “못과 바늘”로 제 “몸을 찔러 마음을 서게 하”는 정신의 구도자가 된다. 차가운 유리의 투명함/명징함 속에는 얼마나 많은 열망과 절망, 오래 참음과 뜨거운 피가 스며있는 것인가. 그런 정신의 깊이에서 마침내 “지상의 어디에도/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는 유리”가 된다. 산야스(Sanyās, 구도자)가 된다.
고뇌, 그리고 탐미― 고은,「사치奢侈」
키에르 케고르(덴마크 철학자, 1813~1855)는 시인은 “심장에 깊은 고뇌를 감추고 있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갈파하였다. 어떤 측면에서 고은(1933~ 전북 군산 출생)의 삶은 참혹한 시대를 관통한 역사의 목격자였다. 그의 초기 시는 불안한 무의식의 흔들림을 통해 병적 탐미주의를 추구 한다.「폐결핵」(시집『피안감성』, 청우, 1960)과「사치奢侈」(시집『해변의 운문집』, 신구문화사, 1964)는 젊은 날의 고은을 가장 잘 보여준다. 한국 전쟁의 트라우마는 그의 삶 전체를 허무와 정신 분열로 몰아갔다. 그의 시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누님, 형, 형수’의 근친 간음의 시적 허구는, 그런 상처에 연유한다. 파계하기 전엔 당대 선승 효봉(1888~1966)의 제자이기도 하였다. 언어를 통해 언어를 뛰어넘는 고은 특유의 번뜩이는 시 정신은 불교와 내통한다. “「폐결핵」이 금기로 여겨지는 가족 사이의 비밀스런 성애와 질병에 대한 몽상을 버무려 빚은 낭만적 탐미주의와 삶에 대한 깊은 허무주의를 오롯하게 보여준 시”(장석주『현대시학』12월호, 2012)라면,「사치奢侈」는 천부적인 언어의 감수성과 병적 탐미를 극한으로 치고 나간 작품이다.
어린 시절 고향 바닷가에서 자주 초록빛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바다가 저에게 자꾸 달려오려고 애를 썼으나
저는 조금씩 물러날 뿐 마중 나가지도 못하고 바다는 바다일 뿐이었습니다
빨랫줄은 너무 무겁게 팽팽해지고 마른빨래는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저 세상의 깃발은 빨래와 이 세상인 바다로
제가 가지고 있던 오랜 병(病)은
착한 우단 저고리의 누님께 옮겨갔습니다
아주 그 오동꽃의 폐장(肺臟)에 묻혀 버리게 되었습니다
누님은 이름 부를 남자 하나가 없고
오직〈하느님!〉〈하느님!〉만을 부르고 때로는 아버지도 불렀습니다
저는 파리한 몸으로 누님의 혈맥에 흐르는 갈대밭의 애내를 들었습니다
이듬해 봄이 뒤뜰에서 머물다 떠나면
어쩌다 늦게 피는 꽃에 봄이 남아 있었습니다
백철쭉꽃이야말로 여름까지도 이어졌습니다
이윽고 여름 한동안 저는 흙을 파먹기도 하며 울기도 했습니다
비가 몹시 내리고 마을 뒤 넓은 간사 농지는 홍수에 잠겼습니다
집이 둥둥 떠내려가는 온종일의 물 세상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코 누님이야말로 가을이었습니다
찬 세면 물에 제 푸른 이마 잔주름이 떠오르고
세수를 하고 나면 가을은 마치 하늘이 서서 우는 듯했습니다
멀리 기적 소리는 확실하고 그 위에 가을은 한 번 더 깊었습니다
잎 진 나무에 겨우 몇 잎새만 붙어 있을 때도
그것은 사람에게 빈 나무이게 하고
누님은 그 잎새들과 더불어 이야기했습니다
기역자나 니은자 없이도 새소리 없이도 곧잘 말했습니다
그리고 맑은 뜰 그 땅 밑에서 뿌리들도 제대로 놀고 있었습니다
하늘 역시 이 세상인 듯 하늘나라임에 틀림없고
그 하늘이 소리치며 더 푸르기 때문에 제가 눈 빠는 버릇이 자고
어디서인지 제 행선지가 재삼재사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님께서 기침을 시작한 뒤 저는 급격하게 삭막하였습니다
차라리 제 턱을 치켜들어 삼라만상을 우러러보아도
다만 제 발등은 움쩍도 않고 노쇠로 복수 받았습니다
마침내 제가 참을 수 없게, 울 수도 없게 누님은 피를 쏟았습니다
한아름의 치마폭으로 그 피를 껴안았습니다 쓰러졌습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보았습니다 누님의 깊은 내부가 외부임을
그리고 그 동정(童貞) 안에 내재하는 조석(潮汐)의 고향 바다를
그 뒤로 저의 잠은 누님의 시든 잠이었습니다
누님의 방에는 산 자 죽은 자의 고막(鼓膜)으로 가득찼고
저는 문밖에서 숱한 밤을 한 발자국씩 새웠습니다
누님께서 우단 저고리를 갈아입던 날
저는 누님의 황홀한 시간을 더해서
겨울 간사지 개펄을 헤매다가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봄의 음력 안개 방울 달린 빈 빨랫줄을 가리키며
누님의 흰 손은 떨어지고 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저는 울지 않고 그의 흰 도자 베개 가까이 누워
얼마만큼 그의 죽음을 따라가다 돌아왔습니다
관 속은 누님인지 나인지 또는 어떤 기쁨인지 모르는 어둠이었습니다
―고은,「사치奢侈」전문
누이의 병과 죽음을 둘러싼 유년의 시간과 이미지를 그린 「사치(奢侈)」는 48행의 장시임에도 불구하고 운율의 아름다움이 슬픔 속에 깊이 스민다. ‘~바라보았습니다’, ‘~뿐이었습니다’, ‘~불렀습니다’, ‘~쏟았습니다’ 등에 보이는 종결형 어미의 반복은, 이렇다할 사건을 확인(각인)시키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는 시를 틀 속에 가두는 위험성도 내포하지만, 유려한 내재율의 리듬은, 도리어 「사치」를 추상과 모호함의 미학으로 끌어올린다.「사치」는 우주가 보낸 죽음의 충격을 받은 듯, 허공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그것은 ‘병(病)’이란 은유이다. 위급이 인간의 정신을 세우듯, 병은 삼라만상을 치명(致命)으로 물들인다. 만물 속에 내재한 병은, 어느모로 무의식을 불러내는 시다.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사치(奢侈)’라 한다면, 왜 시인은 병을 ‘사치’로 보고 이를 시제로 정했을까. 우울하고 고독한 혼자만의 생활을 어느 모로 즐겨서일까, 아니면 두렵고 섬뜩한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네 삶과는 거리가 있다고 느껴서일까. “누님의 혈맥에 흐르는 갈대밭의 애내”는 애조를 띤다.그리고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누님의 슬픈, 환청을 듣는다. 병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가장 고귀한 겸손이다. 신경의 떨림은 우주의 슬픈 화음이자, 황홀이 켜는 선율이다.
「사치」 속에는 죽음을 만져본 자만이 아는 크나큰 우울과 군산 앞바다의 물 우는 소리가 있다. 누님인 듯, 꽃인 듯, 피인 듯 그 우는 곡소리는 밤마다 몸부림치는 꿈속 슬픈 진혼곡이다. 생에서 죽음이 싹트는 엄혹한 사실 앞에서, 누님의 죽음을 통해 생이 열리는 혹독한 비애를 본다. 보들레르에 심취한 고은의 「사치」는 붉게 쏟은 피의 냄새가 진동한다. 암울한 형이상학의 미학은, 누님의 추상을 타고 서늘한 음기(陰氣)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리고 ‘누님과 나’, ‘바다와 달’을 빌어 지금껏 수만 생을 윤회한 고은의 또 다른 환생의 모습을 「사치」에서 그려낸다. 아무려면 어떤가. 우리는 지금 「사치」를 읽으며, 시 속의 누님이 고은이든 관(棺) 속의 고은이 누님이든 괘념치 않는다. 단지 저 피 속 애내의 서러운 뱃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며, 죽음 쪽으로 겸허하게 저마다의 생을 노 저어 가면 된다. 이제 “(누님의) 깊은 내부가 외부임을” 본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누님의 가을, 가을의 깊이는 어디서 오는가.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