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내게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19년을 살아온 내 삶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겠다. 좀 더 크게 보면 우리 가족 전체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원래 살던 우리 집에서 30분 거리밖에 안 되는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었지만 평범한 이사는 아니었다. 이사는 구사일생의 안도감과 시작이라는 벅찬 기대...... 이 두 가지 모두를 선물했다.
보증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가족은 엄청난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집마저 잃게 되었다. 쉽게 말해 길거리에 나앉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이건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부모님은 너무 힘들어 하셨다. 이사할 곳을 알아보시는 어머니의 입에선 한숨만이 흘러나왔다. 뜨거운 태양 볕에 타버린 살 껍질을 벗기시며 일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무거워 보였다. 올 여름 태양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가족의 숨통을 조여오는 듯 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가족에게 한 여름 가뭄을 씻어줄 구원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친구 분들과 주위의 이웃 분들의 도움으로 우리 가족은 한줄기 희망을 붙잡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눈물 흘리시며 아픔을 같이 해주셨던 분, 집을 마련해주신 분, 이사 갈 집의 수리를 도와주신 분까지......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말 힘들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 가족에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우리 가족에게 떠맡겨진 빚이 없어진 건 아니었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하나가 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시간이었고 더불어 사는 인생사를 느낄 수 있는 계기였다. 또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었다.
여름이 다 끝나 가는 지금에서야 조금씩 새집에 적응되어가고 있다. 예전에 살던 곳보다 산골이어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심적으로는 지금 살고있는 곳이 더 마음에 들었다.
우리 가족은 지치고, 쓰러져 가는 나그네였다.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에서 쉴만한 물가를 찾아 헤매 이는 나그네...... 어렵게, 어렵게 생명수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하는 나그네가 되었다.
이제 우리 집엔 한숨이 아닌, 웃음이 넘쳐나고 잇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걸까? 예전에 내가 아닌 느낌이다. 예전에 나는 힘든 일이 생기면 쉽게 포기하곤 했다. 하지만 이젠 어떤 일이 있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19살...... 그리고 여름...... 난 정말 좋은 경험을 했다. 우리 가족은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되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난 포기하려고만 했었다. 하지만 올 여름 내 가슴속에 심은 그 굳은 다짐이 떠올랐다. 우리 가족을 일으켜 세운 그 여름 기억이....... 그리고 그 다짐이 지금의 무너져 내리는 내 의지마저 일으켜 세우고 있다. 앞으로도 평생 올 여름을 기억하고 산다면 내 앞에 어떤 장애도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내 인생에 포기란 없다!
장원 시 <한국문화예술단체연합회장 상>
무궁화를 바라보며
홍천여고 윤지연
흔들린다 흔들린다
버드나무 바람에 몸을 떨 듯이
그 떨림을 멈추기 위해
강인한 마음으로 너에게 간다
가서 내 마음을 너에게 넣어본다
이슬을 머금은
너의 구슬 같은 얼굴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대한민국을 두 눈에 담고 있다
일개미들이 여왕개미를 보호하듯이
너에겐 녹색 옷을 입은 파수꾼이 있다
편안해 보이는 너의 얼굴
주름이 가득하다.
떨린다 떨린다
나의 손이 너를 어루만지려 한다
가을바람 구름을 스쳐가듯이
너의 정신을 어루만져 본다
장원 (산문) 한국문화예술단체연합회장상
홍천여고 김정은
올 여름
여름이라기엔 너무 잔인한 하루가 이제 또 지나간다. 제대로 된 햇빛 한번 받아보지 못한, 태풍이 지나간 자리엔 제법 가을을 흉내낸 바람이 불어 마음까지 서늘하게 한다. 내 마음에 분 태풍도 이제 좀 가라앉은 듯 하다.
올 여름은 특이나 지루하고 길었다.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가는 할아버지를 보면 그래도 시간이 가긴 하나보다
4개월 전 할아버지께서는 폐암선고를 받으셨다. 그리고 이제 남은 4개월이 할아버지께 주어졌다.
처음 할아버지께서 폐암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난 '그런가보다'했다.
동생들은 방에 들어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지만 난 솔직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냥, '할아버지 몸살 나셨다'그런 말을 들은 것 같다고 해야하나.... 내 머릿속은 심각하다 는걸 느꼈지만 마음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할아버지 편찮으시다는데 손녀라는 게 눈도 깜짝 안 하네 저런 게 뭐가 예쁘다고 아버님은..."
그랬다. 엄마의 말처럼 할아버지께선 유독 나를 귀여워 하셨다. 어렸을 땐 내가 할아버지 뒤만 졸졸 따라 다녔다 고한다. 이웃집 할아버지가 신은 흰 고무신을 잡아당기며 "우리 할버지꺼, 우리 할버지꺼..."하며 뺏어 왔더라 는 엄마의 이야기에 지금은 좀 멀어진 듯한 할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젠 좀 컸다고 말도 잘 안 하는 손녀딸에게 서운한 마음도 계셨을 텐데...
지난 추석에 할아버지 댁에 가니 할아버지께선 난을 한분 주셨다. 중학교 때 내가 생일선물로 드린 것이었다.
"와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네요 난 꽃피우기 힘들다던데, 대단해요. 할아버지"할아버진 그냥 웃으시며 이젠 나보고 길러보라고 하셨다.
"왜요, 할아버지가 계속 기르세요 전 이런 거 잘 못해요." 그리곤 돌아오는 차안에서 난 화분을 안고 있었다.
뚝, 뚝... 눈물이 꽃에 떨어졌다.
이상했다. 난 아무렇지 않은데...
눈물샘이 고장났나... 뭐라고 말로 표현 할 수 없지만 뭔가 후회의 감정이 남았다. 좀 나긋나긋하게 할 껄... 멋대가리 없이... 할아버지가 나에게 다시 주신 화분을 보니 갑자기 두려워 졌다.
죽음이라는 것... 한번도 생각해 본적 없는 나에겐 매우 어색하고 불편했다.
나도 내 동생들처럼 다른 생각 없이 그냥 슬프게 울고싶다. 하지만 그러기에 내 마음과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다.
사랑하는 가족이 떠난다는 것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까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건 당연하지만, 난 아직 잘 모르겠다.
항상 보던 사람이 없다는 것... 그때가 되야 실감이 날것 같다. 할아버지께선 지금 어떤 심정이실까.
"전날엔 또 농약 뿌리는 기계까지 사왔지 뭐냐... 저렇게 계속 사들여 놓고 어쩌려고 그러는지, 원 그냥 암말 말란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할아버지께서도 나와 비슷한 마음인 것 같다.
"정은아, 그 화분은 뭐냐?"
"응 할아버지가 주신 거, 내가 전에 할아버지 생신 때 사드렸잖아 이제 내가 키우라고... 꽃까지 피우셨네. "
"어? 그거니 할아버지가 못 키우시겠다고, 다 말랐다고 하시던데? 할아버지가 언제 그런 거 키워보셨어야지 그래도 손녀 생각해서 하나 사셨나 보네..."
"......"
차상 (시)한국문인협회 이사장상
서석고교 이은희
무궁화를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비 하나가 하얀 꽃 더미
속으로 들어간다.
화려하지도 않은 단아한
그 모습에 반하였는지
계속해서 꽃 더미 속으로 들어간다.
붉은 꽃이라 하기엔 지나치고
흰 꽃이라 하기엔 부족한 그 꽃에
나비를 바라던 나의 눈은
어느새 하얀 꽃 더미 속으로 향한다.
고운 꽃가루가 내려앉은 꽃잎은
붉은 뿌리가 내려앉고
세세하게 뻗은 수많은
가지가지 마다
푸른 잎이 자리를 잡고 앉아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꽃봉오리를
마주 하고 있다.
어느덧 꽃잎에 내려앉은
맑은 빗방울까지도
내 맘속을 하나 둘씩 채워가고
서서히 저무는 해 너울 속에
무궁화 한 무더기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차상 (시) 한국문인협회이사장상
강원고교 장일호
올 여름
매미는 무섭게 울어댔다
영호와 함께 사는 할머니께선
지난해 루사,
내가 즐겨보던 마감뉴스에 나오셨다
올 여름 매미의 고집스런 울음에
나는 영오네 집까지
개울물처럼 내리 달렸다
복구 공사가 중단된 다리 밑을
떠내려가는 양동이는
훨씬 더 빨랐다
살아있는 걸까?
괜히 걱정이 되어버렸다.
역시 물은 반 이상 차 올랐고
영호의 눈 속은 홍수였다
괜찮았다. 아니,
다행이었다.
이내 매미 울음은 잠잠해졌다
오늘밤 우리가족과 영호는
올 여름이 지나가는 마감뉴스를 보며
늘 반복해 듣는 복구공사 총력 하란
대통령의 말을 또 들어야 했다
차상 (산문) 홍천군수상
화성고교 배수경
서울 가는 길
나에게는 아빠의 삼촌뻘 되시는 친척이 계신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따라 자주자주 강원도에 가곤 했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비교적 수도권 변두리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강원도에 가는 것은 신나는 일 이기도 하지만 또한, 오래 잊혀지지 않는 나의 뇌리에 새겨진 일종의 새콤한 기억이기도 하다. 방학 동안이면 으레 이 아빠를 따라 대관령을 넘어서 강원도 속초로 가곤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에 중학교 다닐 때에, 또한 고등학교 시절의 수학 여행의 기억, 이렇게 나의 강원도 여행은 일정 시간이 지날 대 마다 거의 정해진 행사 마냥 이루어졌다. 그 기억이 새로운 모습을 지니면서 나의 뇌리에 있는 것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기도 하다.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강원도로 갔을 때의 일이다. 그 때 아빠는 트럭을 운행 하셨다. 우선 원주를 지나고 대관령을 올라갔을 때의 기억이 새롭다 (물론 그 때는 산 이름도 몰랐지만) 아빠의 트럭은 자꾸만 몇 번이나 멈추어 섰다. 굽이굽이 몇 번을 돌아가는지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어린 나이에 나는 정말 고개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때에도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나 보다. 나는 아빠 옆에 있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운전석 바로 옆에 앉아 차창 앞으로 보이는 경치를 감상했다. 그런데 큰 2개 정상에 올라갔을 때에 나는 그만 울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하염없이 내려다보이는 그 무서운 고개 아래의 언덕이 너무나 새까맣게 멀고 무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의 아빠 차와 관련된 속초 가는 곳의 기억은 새까만 언덕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동해로 갈 대 큰산이 가로막혀 있고 그 산 아래에는 무시무시한 언덕이 있다는 기억이다. 갈 때만큼이나 선명한 기억은 강릉에서 돌아올 때의 기억이다. 아빠 차는 하염없이 고갯길을 휘휘 돈다. 아빠 트럭은 힘겨워 하는 듯 오른쪽으로 붙어 천천히 올라갔다. 아빠가 내뱉던 불평 섞인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아휴! 서울 가는 길 정말로 힘들다. 웬 오르막이 이렇게 심하니..."
차가 힘들어하는 길만큼이나, 나도 아빠 운전석 옆에 앉아 두 손을 불끈 쥐며 애를 써 본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와 아빠는,
"어휴, 이제 내리막이겠지...이제 좀 달려볼까?"하신다.
우리 차로 이제부터는 다른 차에 뒤지지 않고 속도를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서울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강릉으로 가는 길에는 큰 고개가 있고, 고개 정상에 서면 아슬아슬 하게 보이는 절벽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동해안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은 정말 어렵고 힘들다는 느낌이었다. 우리 낡은 트럭이 거의 엉금엉금 기다 시피 하여 대관령이라는 큰 고개를 넘는 것만큼이나, 해변에서 출발하여 우리 나라의 중심지인 서울 쪽으로 입성하는 것은 하나의 큰 일이요 무슨 대단한 목표를 이루는 것 같았다. 차를 운전하는 아빠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았다. 엄마와 함께 우리 가족은 속초에 출발하여 대관령이나 또 다른 2개(미시령)를 넘을 때까지는 안절부절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힘겹게 회전하는 아빠의 엔진 광음은 고개를 지나 서울로 들어가겠다는 아빠의 열망의 강렬함인 것같이 들렸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서 부터는 그 대관령을 넘나드는 나의 기억에 일대의 혁신이 일어났다. 이제 아빠 차도 새로워졌고, 한 층 속도도 빨라졌다. 그 날로 역시 운전석 옆자리는 내가 차지했다. 나는 역시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갯길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별로 차가 요동을 치지 않았다. 그만 나는 잠이 들어 버렸던 것이었다. 내가 눈을 뜨는 순간, 아빠 차는 벌써 바다 냄새가 풍기는 평지를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머릿속에는 굽이굽이 돌아가던 대관령 고개가 아른거렸다. 돌아오는 길에도 나는 그냥 조금은 이상하다 싶을 느낌을 받으면서 대관령을 넘어 와 버렸다.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를 만큼 뻥 뚫어버린 고속도로만이 눈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도 안보이고 고개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평탄한 4차선 고속도로만이 있을 뿐! 나는 한편으로 시원하다고 느꼈지만 한편으로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또 한 번의 기회가 나에게 찾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어느 봄날이었다. 우리학교는 수학여행을 설악산으로 간 것이었다. 반 아이들은 여행의 스케줄에 관심이 있었고 신나게 설악산에 대해 수다를 떨었지만 나에게 정작 관심이 있었던 것은 그 아른거리는 대관령 고개에 대한 기억이었다. 3일의 수학여행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서울행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 가는 길이 시작 된 것이다. 나의 기억은 온통 대관령 고갯길에 있었다. 나는 특별히 친구들에게 부탁을 하여 운전석 옆자리를 잡았다. 아빠의 옆자리에서 고갯길을 구경했던 나의 기억을 되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드디어 차는 속도를 내었고 엔진의 속도가 빨라졌다. 나의 머릿속에는(도대체 그 굽이굽이 돌아서던 고개는 어디로 갔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나를 꼬시던 졸음도 달아났다. 나는 무슨 형사라도 되는 듯 주위에 산과 계곡을 탐색했다. 문제는 도로 옆에 새워진 방패 막이었다. 승용차로 갔을 때에는 방패막 때문에 도로만 모였지만 관광버스는 높아서 주위의 경치가 훤히 보이는 것이었다. 산과 계곡을 뚫고 힘차게 4차선 고속도로는 거대한 몽둥이를 누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의문이 뚫렸다. 이렇게 산과 계곡위로 유유히 동맥처럼, 서울 가는 욕망이 뻗어있다는 사실! 나의 머리 속에는 어떤 힘이랄까, 북받쳐 오는 충만함이 일어났다. 거대한 힘으로 거대한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새로운 숨바꼭질이 있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개 대신, 직선으로 연결된 뻥 터진 욕망의 도로는 연속되는 터널의 돌 다리었다. 터널의 7개의 교차함이 있었다. 터널 중간에는 산허리에 걸쳐진 매미채를 닮은 풍향ㄱ계가 달려있었다. 그 것이 거의 수평이 되어 있는 것으로 그 것이 거의 수평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바람이 세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터널을 통과 할 때면 차안은 수은등 빛에 젖어 환상의 세계가 된다 그늘과 음영이 교차하며 나의 의식은 마치 먼 옛날의 동화속 바다궁전을 여행하는 듯 착각에 사로잡혔다. 몽롱한 의식이 지났다 싶으면 다시 낮은 찾아오는 것이다. 청춘한 산을 굽이돌던 욕망의 회전이 이제는 밤과 낮이 교차하는 여행 이야기로 바뀌어 있는 것이었다.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더불어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던 황혼 빛 교차 이야기도 끝이 나는 듯, 이제 더 이상 터널은 눈에 띄지 않았다. 터널의 숨바꼭질이 끝날 때쯤 나의 의식도 잠에서 깨어난 듯 선명해졌다. 어린 시절의 서울가던 모습과 오늘날 서울로 가는 모습이 선명히 대조된다.
내가 어릴 때의 서울가던 길은 굽이굽이 돌아가는 미로 찾기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모습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기억으로의 숨바꼭질인 것 같다. 미어지는 터널은 과거와 현재를 말해주는 꿈과 욕망의 이음매인 것 같다.
나의 마음속에는 깊이 간직되어 있는 서울로 가는 꿈이 있다. 활짝 펼쳐진 인생의 무대, 피어난 꿈, 넒은 세상에서의 뛰놀음! 언제인가 배운 적이 있는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 생각난다. 나에게 그 말은 '서울로 향하는 꿈으로'처럼 들린다. 아빠 차의 엔진 굉음의 굳센 만큼이나 어린 시절부터 가슴속에 숨어있던 꿈들도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새로운 빛으로 가슴의 충격을 주며 다가온다.
땀을 흘리며 고개를 넘든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새로운 결심을 다지든지, 나의 서울로 가는 길은 항상 새로운 감동과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빠 차의 힘들어하던 모습과 아빠의 긴장하던 모습이 새삼 생생하다. 밤과 낮 속으로 숨바꼭질하는 수은등의 마술이 깊이 숨어있는 한 소녀의 꿈을 의식 밖으로 생생히 떠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차상(산문) 홍천군수상
홍천여고 지혜란
올 여름
올해 여름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 해보기가 가뭄에 콩 나듯 힘들었죠. 그날은 유난히 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햇살에 모두들 반가워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했습니다. 아버진 논배미에 들어찬 물을 빼기 위 해 좁다란 도랑을 내고 계셨고, 어머닌 지난 밤 비를 맞아 줄기가 꺾인 고추를 일구느라 바쁜 한 때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태양은 지구를 불태워 버리기라도 한 듯 지글지글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바람에 짜증이 밀려들기도 했지만, 녹음이 짙어진 들녘을 바라볼 때의 화사함이란 더위를 식혀주는 삼들 바람과도 같았습니다. 가족들 모두 태양의 고마움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보냈던 부산한 하루였습니다.
궂은 날엔 금방 눅는 김의 특성 때문에 장마철 상에 오를 수 없었던 것이 오늘 저녁상에 오른 것을 보니 얼굴 가득히 팽팽한 생기가 감돌았습니다.
"자고로 여름엔 더워야 제멋이지."
봉당에서 등멱을 하고 들어오신 아버지께서 달뜬 마음을 가라앉지 못하시고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이셨습니다. 마실 나가셨던 할머니까지 가족 모두가 저녁상을 가운데 두고 이제 막 수저를 들려던 참이었습니다.
"얘, 아범아 밖에 비오는 거 아니야?"
"비는 무슨... 어머님이 잘못들..."
하시던 말씀을 다 못 끝내시고 아버진 마루로 나가셨습니다. 방문을 여는 동시에 끼쳐온 바람의 세기가 피부에와 닿았고, 곧이어 빗방울 소리가 후드득 귓전을 울렸습니다. 몇 리 콩자반을 집어먹다 말고 아버지 곁으로가 마루 위에 섰을 때 빗방울 소리는 잠들어 있던 공포심을 깨웠습니다. 큰 물난리가 날 것만 같아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아버진 한동안 말없이 비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연신 한숨을 쏟아 내셨습니다. 분말처럼 흩어져 내리는 알갱이들아, 부디 큰 물난리는 만들지 말아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지요 담배를 꺼내 물고 아버지는 비옷을 챙겨 입으셨습니다. 며칠 전 장마로 내려앉은 논둑에 가봐야 갰다며 질펀한 봉당을 지나 대문으로 뛰어 나가시는 아버지.
흐릿하게 드리운 희뿌연 연막사이로 아버지는 조심스레 들어서고 계셨습니다. 관자놀이께는 엄습하는 뭔지 모를 두려움으로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는 습기로 축축한 마루에 나와 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밭은기침을 뱉어 내시는 할머니께 "하늘도 무심하시지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는 것이냐"고, 푸념을 풀어 놓으셨습니다. 태풍 '매미'가 북상했다는 뉴스속보가 흘러 나왔고, TV속 화사하게 웃고 있는 아나운서를 응시하시던 어머니는 우산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 대문 밖으로 멀어 지셨습니다. 조악하게 울어대던 우리 집 고양이 나비 녀석도 천둥 번개소리에 무서웠는지 알칼진 발톱을 숨기고 내 옆으로와 엎드렸습니다. 명치끝에 체증처럼 괴어있는 근심, 걱정에 내 눈동자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새벽 1시를 알리고 조금 지나서 였습니다. 빗속을 뚫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들어오셨습니다. 물에 흠뻑 젖은 아버지는 울먹이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말로는 논배미가 반쯤 개울물에 휩쓸려 갔다는 겁니다. 동그란 눈알을 비집고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아버지 눈물에 동요된 우리 가족은 짭짜름한 눈물에 절어 모두들 고개를 숙였습니다.
생생함을 잃은 소금뿌린 배추 잎사귀처럼 한참을 울고만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안방으로 들어가시고, 어깨를 달싹거리며 우는 아버지를 부축해 어머니도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나는 내 옆을 떠나지 못하지 고양이를 쓰다듬다 나비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삼일 연이어 비가 내렸고 비온 뒤 개인 하늘은 얄궂게도 날 비웃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 뉴스를 보고 나서 아버진 피해 받은 수재민의 마음을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겠느냐며 한숨을 흘리셨습니다. 어제의 기억은 깨끗이 지워버린 듯한 들녘으로 아버지는 괭이를 들고 수해 입은 자리를 찾아 보듬어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손길을 기다리는 누런 벼이삭 사이사이로 희망이 들어차도록 우리들은 애써 하늘을 향해 웃어 보였습니다.
차하(시) 한서문화제위원장
홍천여고 남궁선
무궁화를 바라보며
너와 마주하고 있으면
내가 눈물짓는 것은
너의 설움의 한 때문이더냐.
울분의 날에
끝내 널 빼앗겼어도 뿌리만은 지켜
겨레의 가슴 가슴에
꽃을 피웠던 너였는데...
다시 너를 되찾은 지금
너는 자유로이 길가에 무수히 피었지만
우리 민족의 가슴에서는
왜 너를 찾지 못하는 것이냐.
너의 한이
그저 의미 없이 길가에 피기 위함이었던가.
민족의 꽃이여
너의 뿌리 하나를 나에게도 나누어주렴
나의 가슴에도 꽃봉오리가 지게
차하(시) 한서문화제위원장상
홍천여고 김한숲
서울가는 길
샛노랗게 익은 햇빛을
온 몸으로 받으며 달리면
짙푸른 산들이 다가왔다가 멀어지고,
다가왔다가 멀어지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시냇물은
은빛물고기와 춤을 추며 노닌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그네 사람들은,
풍경에 묻혀 산의 일부가 된다.
물의 일부가 된다.
자연의 일부가 된다.
내 마음은 평화로워
따뜻한 모습 싣고 달린다.
차하(산문) 한서문화제위원장상
강원고 윤병철
서울 가는 길
기차 특유의 리듬을 느끼며, 서울 삼경의 꿈에 부푼 김세현은 한 몫 단단히 벌어보겠다는 생각에 벅찬 가슴을 부여잡았다. 춘천의 별 볼일 없는 대학을 나온 그는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돈천만원을 마련해 무작정 서울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집에는 연세도 많이 드시고 자신의 뒷바라지 때문에 몸은 몸대로 쇠약해지신 어머니가 계신다. 그는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기차에 몸을 실은 지도 꽤 되었다고 느꼈을 때, 세현의 앞으로 두명의 사내가 다가왔다. 한 명은 왜소한 체구에 조금은 찢어진 눈이 흡사 뱀을 닮은 듯 싶었고 다른 한 사내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달린 듯한 키와 못지 않게 떡 벌어진 몸을 지녀 바위와도 같은 신상을 주었다.
"여, 안녕하시오? 나는 조귀율 이라고 하오."
뱀같은 인상을 주는 자가 자신을 조귀울이라고 소개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동자만 대굴거리는 세현에게 조귀율이 하하 웃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딱 보니 서울에 한 몫 잡아보려고 가는 것 같은데 우리 역시 그렇다오. 게다가 혼자 보단 셋이 심심하지도 않고 좋지 않겠소?"
말을 마친 귀율은 다시 한번 하하 웃었다. 뱀같은 자가 웃으니 이상할 것도 같았지만 의외로 순박한 인상을 주었다. 그 웃음에 마음이 편해진 세현은 바위 같은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동행이 있으면 나야 기쁘지요. 헌데 성함이......?"
세현이 자신에게 묻자 바위 같은 사내는 김태산이라고 단 세 글자만 내뱉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귀율이 태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볍게 치며 세현에게 말했다.
"허허, 미안하네, 이 친구가 워낙 말이 없어서......"
세현은 자신이 보기에도 그런 것 같다며 귀율과 태산이 자신의 앞좌석에 앉고 셋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셋은 마치 오랜 친구인 듯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다. 처음엔 말이 없던 태산도 중간중간 말문을 열곤 했다.
"우리는 서로 돈을 모았지. 고생고생해서 어떻게 천만원이란 거금을 모았고 자네 같은 친구도 만났으니 성공할게 틀림없네."
말을 듣던 세현은 두 사람이 다 꽤나 불우한 과거를 겪었고 서울을 간다는데 에서 동병상련의 정과도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서 왠지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고 긴장으로 의식하지 못한 피로가 시커먼 손으로 변해 자신을 덮쳐옴을 느꼈다.
"하아암......."
본인도 모르게 찢어질 듯 하품이 나왔고 순간 귀율가 태산은 눈을 빛냈다.
"이보게 세현, 너무 피곤해 보여 눈 좀 붙이는 것이 어떤가? 물론 동업자의 돈은 우리가 잘 지키겠네."
동업자란 말에 세현의 눈이 커졌다. 그 말이 너무도 고마워 세현은 앞의 두 사람을 평생 같이할 진정한 동지라 생각했다. 고개를 꾸벅하고 세현은 눈을 감았다.
잠깐 잤을까? 아니다. 꽤 오래 잔 것 같았다. 세현은 가뿐해진 몸상태를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없다. 자신의 앞에 있어야 할 두 사람이 없다. 그리고 허무함. 자신이 품에 꼭 껴안고 있던 돈 가방이 사라졌다. 그 막연한 허무함을 뚫고 서울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현은 느꼈다.
'아니야 서울은 아직 멀어 서울 가는 길은 많이 남았어.'
그리고 계속 되뇌었다.
차하 (산문) 한서문화제위원장상
홍천여고 윤영화
무궁화를 바라보며
새벽 이슬을 머금고 피어나서, 저녁이 되면 꼭지채 깨끗하게 떨어지는 무궁화. 높고 푸른 가을의 햇살을 받으며 더욱 의연해진 무궁화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지독한 일제치하 우리 민족을 말살시키려는 강력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중과 함께 숨쉬며 역사를 이끌어온 다함이 없는 꽃 무궁화!
사랑과 정열을 상징하는 장미,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튤립, 작고 하얀 모습을 뽐내는 에델바이스 등 세상에는 화려함과 예쁜 모습을 지닌 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한 번 피기 시작하면 늦가을까지 매일 새롭고 신선한 꽃을 피워내므로 부지런함과 의연한 자세, 은근과 끈기를 지닌 우리 민족성을 닮은 무궁화 만한 꽃이 없다. '무궁화 삼천리' 라는 말로 은연중에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꽃으로 인식하여, 겨레의 얼과 민족 정신을 상징하는 꽃으로 뚜렷이 부각되어, 일본이 주는 압력과 고통 속에서 꿈과 희망을 주기도 했다.
그 어떤 악조건을 극복하며 피고 지고 또 피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무궁화를 보면, 우리 민족과 닮은 점이 너무도 많다. 우리 민족만의 강한 의지와 꿋꿋한 기상, 부지런함과 의연한 자세 등 서로의 거울을 보는 듯 하다.
그러나 요즘 우리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나라꽃 무궁화에 대한 사랑이나 애착을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껏해야 초등학생들의 교과서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무궁화의 고장, 무궁화의 중심지라고 불리는 홍천, 큰 자부심 속에 살아가는 나로서는 너무나 마음이 아픈 일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무궁화공원이나 무궁화거리, 한서문화제 등으로 무궁화의 이름을 드높이게 된 것이다.
'어서오십시요, 무궁화의 고장 홍천입니다.' 이것은 홍천 어귀에 들어설 때쯤 커다란 돌에 새겨진 문구이다.
우리가 또다시 가져야할 무궁화에 대한 관심은 무궁화와 함께 홍천도 함께 알리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될 것이다.
우리의 역사와 함께 우리의 민중의 애환을 담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함께 숨쉬어온 무궁화, 생각할수록 깊은 뜻을 갖춘 강한 생명의 꽃 무궁화, 민족의 얼이 담겨있는 나라꽃 무궁화... 그만이 지니고 있는 강건함과 순수한 아름다움은 우리 모두가 닮아야 할 본보기를 제시해주고 있다.
요즘 공익광고에는 박세리가 등장해 한국인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우수한 민족성을 대변해준다. 몇 주 전 그녀의 신화를 직접 보았기 때문에 그 광고를 볼 때면 아직도 감동이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성을 대표하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 으뜸은 누가 뭐라 해도 무궁화일 것이다.
눈부신 아침햇살을 받고 새로 핀 무궁화가 웃고 있다. 유달리 맑고 푸른 하늘 아래 함초롬이 이슬을 머금은 무궁화! 우리는 나말다 무궁화 앞에 옷깃을 여미고 앉아, 그의 높은 뜻과 맑은 몸가짐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삭막한 도로 위를 쌩쌩 달리는 차들이 일으키는 먼지 바람 속에서도 의연하고 꿋꿋한 모습을 지닌 무궁화가 이제는 대견해 보이기까지 하다.
나라꽃 무궁화, 항상 그 모습으로 변치 않는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으며, 이제는 세계 속에서 빛나기를 기대한다.
첫댓글 석도익 지부장님! 큰 행사 치루시느라 정말 고생 하셨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