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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5:31-46 복 받을 자여 본문은 종말에 대한 일반적 설명이 아닌 믿는자를 위한 설명이라는 것을 주지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언급되고 부각되어 지는 관점에서 종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조된 것이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내용으로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은 외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의 참다움이 없었습니다. 종교적인 형식은 있지만 종교적인 참 내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이 회칠한 무덤아 라는 식으로 책망하셨고 오늘 본문의 종말에 대한 비유도 그 외식하는 사람들과의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백성 다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듭니다. 양과 염소 우리나라는 쉽게 구별이 됩니다마는 그러나 팔레스틴의 양과 염소는 썩여 있으면 전문가가 아니면 분별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낮 시간에는 한데 썩여 풀을 뜯게 하지만 밤이 되면 양과 염소는 따로 분리되어 우리에 넣습니다. 이런 팔레스틴의 풍습을 근거로 예수님은 종말에 양과 염소를 외편과 오른편으로 나누듯 악인과 의인을 분리하여
영벌과 영생으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심판의 근거는 긍휼을 베푼 삶에 있습니다. 본문에 양이나 염소가 똑같이 반문합니다. 37절을 봅시다. = 언제 였는지 모른다. 악인들의 대답도 봅시다. =44절 자신들은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서로 당황하고 있습니다. 양은 감사함으로 당황하고 악인은 절망으로 당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시간에 저나 여러분이나 놀라야 할 텐데 감사함으로 당황하게 되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34 절에 있는 말씀처럼 “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배된 나라를 상속하라 ” 이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복받으라는 소리를 일년에 두 번합니다. 신정과 구정에 이런 인사는 많이 할수록 좋은 인사입니다. 그러나 이 소리는 우리의 마지막 시간에 주님으로부터 들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이 이런 복 받을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정말 올 한해가 행복한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디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여러분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사람이라면 정말 행복할 게야' 하고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사람도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환경이 아닌 내가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어떠한 환경에 들어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가난할 때에 부하기를 바라며 부자가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당장 행복해질 것만 같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만 하면 아무 소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처럼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행복이 내게로 다가와 주기를 바라며 기다립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적인 풍요, 사업의 성공, 건강, 장수, 혹은 명예, 지위 등이 있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여건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행복의 조건은 환경이나 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요사이 인기 연예인들의 자살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뛰어난 미모에 돈과 인기를 거머쥔 그들이 왜 자살을 택해야 만 하는가 ?
그들이 인기 연예인으로서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 같으나, 실제로 그들의 영혼은 찢기고 상처 입어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음이 틀림 없습니다 .
결국 좋은 환경과 여건속에 행복이 없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지요 내 자신이 복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환경이 채워져도 인생은 불행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 까지 불만족 스럽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 밖에 채워질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복받은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데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간에 자살한 연예인들 3 명이 전부 기독교인입니다. 그것도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생사화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았을 것이고 기도를 알았을 것입니다.
분명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사실도 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라 배웠을 텐데 왜 목숨을 끊었을까요 ?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십니다. 영접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세례도 받았습니다. 교회도 다닙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 신앙의 참 다움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을 고백한 것과 고백한 데로 사는 신앙 생활하고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아는 믿음과 예수 그리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삶이 없는 신앙은 인생을 괴롭게 합니다. 인생을 허망하게 합니다.
이화여대를 나와 인기 탈렌트로 전도유망한 젊은이와 결혼하여 1 층은 거실 겸 도서관으로 쓰고 2 층은 침실로
쓸 정도의 넓은 집에서 살며 인기와 명예를 한몸에 받으며 살던 조건적으로 완벽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파라다이스가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하루 아침에 죽습니다. 그 절망이 얼마나 컸을까요 ? 38의 나이에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 월드비전이라는 어린이 선교 단체 홍보 대사가 됩니다.
그리고 소말리아 , 인도 , 북한 , 방글라데시를 다니며 굶어 죽어가는 뼈만 남은 아이들을 붙잡고 웁니다.
그 넓은 집도 팔아 1000 명의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방송 출연료의 상당 부분을 부모 없는 아이들의 교육비로 드립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너무 너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 환한 얼굴의 주인공을 여러분 텔레비전에서 보셨을 겁니다.
전원일기에서 최불암의 아내 역을 맡았던 국민배우 김혜자 권사님입니다.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잃어 버린 여자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만 보여지는 참된 복을 봅니다. 앞서 자살한 믿는 연예인들과 비교했을 때 죽어야 할 조건이 더 있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더 행복한 삶을 삽니다.
행복은 나의 이기심과 개인적 만족을 비우고 예수님의 마음 ,바로 긍휼의 마음을 실천할 때 시작됩니다..
행복해질 수 있는 여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바로 되면 행복해집니다.
고독하면 자유를 누리게 되어 감사하고, 일이 생기면 기회가 주어져서 감사하고 건강하면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 병들면 조용히 기도할 수 있었서 감사하고.
하는 일이 순탄하면 만사를 형통케 해주심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역경에 처하면 자신을 단련시키고 정화시켜 주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길이 열리면 하나님의 일 하니 좋고, 다치고 고난 당하고 순교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처해 있는 환경, 여건과는 아무상관도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장 완벽한 조건 에덴 동산에서 범죄했습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오직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행복이 결정됩니다.
바울 사도와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고 예루살렘을 물질적으로 도왔던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초대교회의 선교의 중심이 된 교회로 이 교회가 없었다면 유럽 선교는 없었을 것이고 나아가 세계 선교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웠던 안디옥 교회의 흔적이 현재 터키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규모를 보면 모두 놀라고 만답니다.
20 평 정도의 지하 동굴에 예배 처소가 있고 강대 좌측으로 4,2 킬로미터나 연결된 피신 통로가 있답니다.
박해 가운데 불안과 공포속에서 예배를 드리며 피해 다녀야 하는 교회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또 그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예루살렘 교회를 구제 했다는 사실이 그 교회의 흔적을 보는 사람들은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무엇이 안디옥 교회로 하여금 지옥같은 현실 속에서도 거룩한 하나님의 사역에 모범적인 활동을 하게 했을까요 ? 그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무능한 자 같으나 결코 무능하지 않습니다. 버려진 자 같으나 결코 버려지지 않습니다. 죽은 자 같으나 영원히 삽니다.
참된 신앙은 참된 삶을 살게 합니다. 그 삶은 모든 환경과 조건을 극복하게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감격으로 죽음을 불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어 드립니다. 우리는 작지만 하나님은 크시며 우리의 하는 일은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의 일은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것을 , 우리의 작을 일을 사용하셔서 크고 위대한 복음의 일을 하시기 원하십니다.
그 일을 우리는 안디옥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감격을 아는 자는 지극히 작은 자라 할지라도 복받을 자의 참된 자리로 인생을 나아가게 합니다.
아무리 없는 분들에게도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것으로도 복받을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눌수 있고 베풀수 있고 섬길 수 있고 도와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1988 년 11 월 6 일 자 한겨레 신문 이영희 칼럼 난에 실린 글을 여러분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목은 “ 당산시를 위한 애도시 ”입니다. 중국의 당산시 무역 대표단이 다음 주 한국에 온다는 소식이다. 두 나라의 장사꾼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판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러나 당산시에서 온다니 유달리 반갑기도 하고 그럴수록 걱적스럽기도 하다. 당산시는 중국 유수의 대 철강 , 전자 공업도시이다. 당산시에 나의 마음이 끌리는 까닭은 이 도시가 1976년에 겪은 참변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듬해에 미국의 뉴욕시에서 일어난 작은 재난이 보여준 인간과 사회도덕의 극단적 대조를 지금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12 년전 인구 70 만의 당산시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지진으로 마치 핵폭탄을 맞은 것처럼 완전히 도시가 폐허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참변속에 놓인 시민들이 행동하는 모습을 세계의 보도진이 다투어 전한 뉴스는 진한 감동을 전 세계에 전했다. 현장을 찾아서 목격한 일본 대사의 후일담을 들어 보자
“땅은 흔들리고 건물은 계속 허물어 진다. 화재는 지옥같이 건물을 태워 나간다. 그런 속에서 중국인들은 질서정연하게 행동하고 난동을 부리거나 남을 해치는 일이 없다.
진동과 파괴와 화재가 계속되는 속에서 불행을 당한 이웃을 위해 달려 나가고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은 바로 자기 가족을 위한 것과 같아 보였다. 누구나가 공동체 속에서 자기 희생으로 남을 위하고 전체를 위해 행동했다. 나는 너무나 큰 감명과 충격을 받았다. ” 공교롭게도 몇 달 뒤에 뉴욕시에서 12 시간의 정전이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 나라의 대도시에서 전기불이 꺼진 속에서 인간들이 행동한 모습을 미국의 시민들은 한 마디로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남이 자기 얼굴을 확인 할 수 없다고는 생각이 든 순간 밖으로 뛰어 나와 혼란, 무질서, 약탈, 파괴, 방화, 강간, 난동, 살인을 일삼았다. “ 일천만 미국인인 일천만 가지의 행동을 했다. ”고 한다. 유명한 사건이다. 세계는 그 모습에 전율했다.
뉴욕시민과 당산 시민의 물질적 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기독교도가 없는 중국 도시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10 계명대로 행동했다. 기독교 사회임을 자랑하는 미국 도시의 시민들은 예수의 10 개명을 배반했다.
부자 나라의 시민들은 남의 것을 빼앗고 강간했다. 세계에서 어쩌면 제일 가난한 사회의 당산 시민들은 자기 것을 버리면서 이웃을 도왔다 그것은 너무나도 엄청난 인간 행동의 질적 차이였다.
그로부터 십 수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미국식의 물질적 풍요를 이루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시민들은 코카콜라에 입맛을 들였고 지식인들은 보다 절묘한 노동자 관리를 위해서 MIT 대학 경영학 교과서를 들고 밤을 새운다.
자본원리와 물질주의의 신이 도덕주의와 평등사상을 추방했다. 지금 중국사회는 타락과 부패 , 사기의 횡령 , 범죄와 인간 소외의 깊은 늪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당산시의 무역 대표단이 한국 자본주의를 배우러 온다는 소식이다. , 나는 사랑하는 당산 시민을 위해서 애도시를 쓴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수준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것들과 좋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기대와 바람은 저버리고 주신 것들만 갖고 자기 혼자 교만히 즐기고, 세월아 내월아 하고 보낸다면,
어느 날 갑자기 닥칠 종말의 시간에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배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하는 전혀 생각지 못한 절망적인 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한 백성으로 안심하고 자랑하고 있다가 예루살렘이 망한 충격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삶을 도외시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것, 하마르티아,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수준이 있는데, 저 밑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머물러 있는 것, 죄입니다. 이제 그만큼 교회 다녔으면 스스로 설 수 있음에도 여전히 끌려 다니듯 다니는 것, 죄입니다! 그만큼 복 받고 산다면 이젠 봉사와 희생, 섬김의 삶이 뒤따라야 하는 데 여전히 자신과 가족 외에는 모르는 이, 죄입니다! 오늘 본문이 강력하게 고발하는 죄는 거짓말 했냐, 도둑질 했냐, 담배 피웠냐 술 먹었냐는 것을 묻지 않습니다.
윤리적, 도덕적, 규범적 그런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삶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고, 그런 영적 수준이 있는데, 게으름과 무관심으로 일관한 것 그것을 고발하고 았습니다. 바로 믿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이 참이라면 참다운 삶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요즘 사회가 기독교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고 문화는 탈 기독교적이요 정서는 반기독교 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교리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질책입니다. 전도의 열심 만큼이나 선교의 열정 만큼이나 아름다운 삶을 살며 나눌고 베풀고 양보하고 섬기는 삶의 모자람에 대한 지적입니다. 예수 믿어서 술 안먹고 담배 안피고 주일에 놀러 가지 않는다로 신앙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도와주고 더 섬겨주고 더 나눠주는 아름다운 모습의 참다운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앞에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허락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이기심을 만족시켜 주시고 욕망을 채워주는 분으로 끝나지 않고 이웃 사랑을 돌볼 뜻을 주셨습니다.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 그가 양이요 의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일이 보여야 합니다. 도와 줄 일이 보여야 하고 섬겨주어야 할 일이 보여야 합니다. 일거리가 보여야 합니다. 복 받을 일거리가 눈에 띠여야 합니다. 그게 예수 믿는 것입니다. 행복의 조건은 세가지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을 때에 행복하고, 일거리가 있을 때에 행복하고, 바라는 소망이 분명할 때에 행복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에서 진정한 사랑의 대상을 찾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 있는 일을 찾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참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은 쇠하거나 썩지 않고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말에 가까울 수록 더 확실한 소망입니다. 우리의 물질을 나누어야 하고 건강을 나누어야 하고 시간을 나누어야 합니다. 복 받을 자들이나 저주를 받게 될 자들이나 조건과 환경은 똑 같았습니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나그네되고 옷 없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같은 조건에서 만납니다.
하지만 외면과 긍휼의 차이가 그들의 인생을 갈라 놓았습니다. 인생은 원래 부터 복있는 사람과 복없는 사람으로 나누어진 일이 없습니다. 다만 많이 가지고 많이 못 가지고 건강이 있고 건강이 없고 더 배우고 못 배우고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복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으로 출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복있는 길을 가면 복있는 사람이 되고 복없는 길을 가면 복 없는 사람이 될 뿐입니다.
복있는 길을 가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자 하나부터 섬기고 돕고 세워주고 협력해 주는 훈련을 하십시오
그것을 하나님 떠나서 세상에서 할 수 있다고 착가하지 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 이 교회 안에서 하십시오 그 작은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저주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지극히 작은 훈련을 이 교회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럼 아버지께 복받을 자가 되시며 행복한 삶이 여러분의 것이 될 것을 믿습니다.
다른 곳에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신앙 태도에 복이 있고 말씀에 순종할 때 행복이 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실 작정입니까?
살살 피해 가며 기회주의자처럼 살 것입니까? 아니면 나는 원래부터 복없는 사람이라고 원망이나 하며 사시렵니까 ? 난 원체 복이 없어 하는 것 마다 실패하고 이렇게 재수 없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습니까 ? 그렇게 살았어도 이제는 복있는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인생의 구주로 모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처럼
먼저 작지만 친절을 베푸시고 도와 줄 수 있고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대하듯이 사십시요. 그럼 우리 인생은 아버지께 복받을 자가 될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부터 복받을 자들이여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나라를 상속하라 이 칭찬이 우리 것이 될 것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