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6.5.14 종(種)에 관한 방대한 책을 집필을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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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 |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그랬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였다.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친히 복을 내려 주신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불과 두 세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이런 특별한 지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생각은 기독교 전통에 선 서양인들에게 국한된 것이었지만, 다른 생물에 비해 인간이 뭔가 특별한 혹은 우월한 존재라는 생각은 다른 전통에 선 사람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런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찰스 다윈이란 잉글랜드의 아마추어 자연학자가 있었다. 그가 1859년에 세상에 내놓은 <종의 기원>이란 책은 서구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책의 영향은 서양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전기를 쓴 어떤 이들의 말대로 이 구세계의 자연학자는 “우리가 이 행성 위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을 변혁했다” | |
어린 시절 다윈은 공부보다 딱정벌레 수집에 더 기쁨을 느꼈다
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의사 로버트 웨어링 다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인 이래즈머스 다윈은 이름난 과학자이자 철학자였으며,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도자기 제조업자인 조사이어 웨지우드였다. 어린 시절, 다윈은 식물이나 새알, 광물 등을 수집하는 ‘하찮은 소일거리’에 푹 빠져 있었다. 그에게 그것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아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타고난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기 위해 에든버러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처음 생각과는 달리 의학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특히 해부학은 “따분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목사의 길을 권했다. 다윈은 아버지의 권유대로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신학 공부보다는 딱정벌레를 수집하는 일에 더 기쁨을 느꼈다. | |
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뒤인 1831년, 다윈은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제의를 받았다. 해군 측량선 비글 호에 자연학자로 승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완강하게 반대했지만, 곧 아들의 고집에 손을 들고 허락했다.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이 청년은 아직은 학자로서의 훈련을 받지 못했었다. 그해 12월, 다윈은 비글 호를 타고 남아메리카로 향했다. 그 후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오기까지 5년여 동안 그는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 섬 등을 둘러보았다. 비록 뱃멀미에 시달리기도 하고, 그물침대에서 자다가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향수병에 걸리기도 했다. 그리고 브라질에서는 노예 소년이 주인에게 채찍질을 당하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노예 제도를 혐오하는 가정 분위기에서 자랐던 그는 브라질을 떠나면서 “내가 또다시 노예 국가를 방문할 일이 없음을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썼다.
하지만 다윈에게 이 항해는 대단한 지적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이 항해에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론> 첫 권을 가지고 갔다. 지구에서 일어난 변화는 바람이나 물 같은 힘들이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었다. 훗날 다윈은 “내 생각은 반은 라이엘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썼다. 한편 그는 동식물을 수집하면서 지질학이나 생물학과 관련된 것들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는 “열성적인 노력과 집중적인 관심을 쏟은 결과 많은 것들을 습득할 수 있었다. (……) 이런 훈련이야말로 내가 과학사에 업적을 남길 수 있도록 가장 근본적인 도움을 준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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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 1839년 훌륭한 조수이자 외사촌인 엠마 웨지우드와 결혼 후 탐구여행 보고서를 출판하는 등 활발한 학문활동을 벌였다. 도자기 공장을 운영하는 엠마 의 집안과 다윈의 집안 모두 부유했기 때문에 다윈은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 |
갈라파고스 제도를 항해한 후 '종의 변화'에 대해 착안하다
1835년에 도착한 갈라파고스 제도는 다윈에게는 아주 특별한 곳이 되었다. 약 4주 동안 머문 그곳에서 그는 작은 새들을 표본으로 만들어 가져왔다. 항해가 끝나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그 작은 새들 중 십여 마리가 모두 핀치류라는 존 굴드의 말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 새들은 부리의 모양이 모두 달랐던 것이다. 어떤 녀석은 짧고 두터운 부리가 있어 씨를 깨서 먹기에 용이했고, 또 어떤 녀석은 날카롭고 뾰족한 부리가 있어 곤충을 잡기에 용이했다. | |
다윈이 1837년 생물의 종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고민하며 비밀노트에 그린 '진화의 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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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는 이 새들의 표본을 채집하면서 정확히 어느 섬에서 잡은 것인지를 표시해 두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자연학자로서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마추어다운 실수였다. 하지만 그 새들을 서로 다른 섬에서 잡은 것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새들이 모두 한 종류에 속하고, 게다가 섬마다 서로 다른 형태의 새들이 살고 있다니! 그는 이 사실들이 “종의 안정성을 손상시킬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설명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종이 다른 종으로 변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과정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 (아직까지 그는 ‘진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과연 인간도 ‘변화’해 온 것인가? 하지만 그는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노트에 이런 말들을 적어놓았다. “인간은, 경이로운 인간은 예외다.” “인간은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하기도 했다. “찰스여,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라. 신중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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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838년 9월, 다윈은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 6판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얻었다. 맬서스는 그 책에서 ‘과밀과 생존 수단에 대한 간섭’이 개체의 수를 제한한다고 했다. 다윈은 ‘종들의 싸움을 맬서스의 이론에서 추론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는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20년이 넘게 흐른 1856년 5월 14일, 마침내 다윈은 종에 관한 방대한 저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원고 작업이 3분의 2쯤 진행되었던 1858년 앨프리드 월리스라는 자연학자가 말레이 군도에서 그에게 원고를 보냈다. 발표 전에 다윈의 조언을 얻기 위해서였다.
다윈은 경악했다. 월리스가 보낸 원고가 다윈 자신이 집필하고 있는 내용과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20년 넘게 연구한 결과물이 다른 사람의 업적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과학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추잡한 우선권 논쟁이 또 벌어질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다윈 역시 신의와 이기심 사이에서 갈등했다. 하지만 나름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월리스와 다투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는 런던의 린네 학회에서 자신의 1844년 원고 일부와 월리스의 원고를 함께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날의 발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 |
초판 1250부가 당일로 매진되었고 '원숭이 다윈'만평이 쏟아져 나왔다
이듬해인 1859년 11월 22일 화요일,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란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 원래 쓰려고 계획했던 방대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었다. 초판 1250부가 당일로 매진된 이 책은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애서니엄>이란 학술지에 실린 서평에는 이런 문장까지 등장했다.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면, 무엇이든 인간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다윈의 책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다윈을 원숭이로 묘사한 만평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무수히 등장했다. | |
다윈을 원숭이의 모습으로 풍자한 캐리커쳐
그리고 1860년 6월 옥스퍼드의 주교 새뮤얼 윌버포스와 토머스 헉슬리 사이의 그 유명한 논전이 벌어진다. 옥스퍼드에서 열린 영국과학발전협회의 연례 회의장이었다. 윌버포스가 연설 도중에 헉슬리에게 그가 원숭이 자손이라면 할아버지 쪽인지 아니면 할머니 쪽인지를 물었다. 헉슬리는 중요한 과학 토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데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원숭이를 할아버지로 삼겠다고 답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정작 다윈 자신은 이런 싸움의 선봉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건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학설을 보완해 좀 더 명확하게 할 연구를 계속해나갔다. 그는 <사육에 의한 동식물의 변이>, <인간의 유래 및 성에 관한 선택>,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등의 책을 잇달아 내놓았다. 그는 한 종이 어떤 과정을 거쳐 더 강해지거나 더 빨라지거나 하는 지는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종이 어떻게 생겨나는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종이 변화한다는 생각을 한 이는 그가 최초는 아니었다. 이미 프랑스의 생물학자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가 설명한 바가 있었다. 그는 1809년 <동물철학>에서 종의 변화를 주장했다. 그리고 다윈의 할아버지인 이래즈머스 다윈도 있었다. 하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진화가 왜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확실하게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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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진화하고 있다는 이런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다윈은 1882년 4월 19일 세상을 떴다. 다윈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그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묘지에 묻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4월 26일 결국 그곳에 묻혔다. 물리학의 거인 아이작 뉴턴이 묻힌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뉴턴이 물리학에서 그랬듯, 다윈도 종의 변화라는 생물학의 일반 법칙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이 일에 성공했을까? <종의 기원>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원래 극소수 또는 하나의 형상에 몇 가지 능력과 함께 숨결이 불어 넣어졌고, 그 뒤 이 행성이 정해진 중력 법칙에 따라 계속 도는 동안에, 처음에 그토록 단순했던 것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이로운 무수한 형상들이 진화해 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는 이런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 |
1859년에 발행된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의 타이틀 페이지
다윈은 1872년 <종의 기원> 제6판에서 처음으로 ‘진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의 진화론은 뉴턴의 중력 법칙처럼 일반 법칙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장엄한 생명관은 생물학과 관련해서는 뉴턴이 물리학에 끼친 영향 이상으로 크나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컸다.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는 ‘적자생존’ 개념을 인간 사회에까지 적용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은 부적합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 선택에 의해 도태되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다윈주의는 자유경쟁을 지지하는 사업가들, 자신들이 인종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인종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한편 창조론과 진화론의 불화 역시 아직도 완전하게 봉합되지 않았다. 2004년 실시된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 중에 인간이 신의 인도 없이 다른 생명체로부터 발달했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의 수는 13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 |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다윈의 주저인 <종의 기원>은 우리말로도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완독에 도전하는 일은 그다지 성공 확률이 높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다면 <다윈의 비글 호 항해기>(장순근 역, 가람기획)이나 그의 자서전의 우리말 번역본인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 왔다>를 먼저 읽기를 권한다.
다윈의 생애를 다룬 책 중에서 가장 쉽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은 데이비드 쾀멘이 쓴 <신중한 다윈 씨>일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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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스테포프의 <진화론과 다윈>(바다출판사)도 다윈의 삶과 그의 이론 그리고 영향을 개략적으로 파악하는데 꽤 도움이 된다. 다윈 이후 진화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개괄하는 데는 <다윈의 식탁>(장대익/김영사)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갈라파고스 제도는 다윈이 진화론을 생각해내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장소이다. 이곳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핀치의 부리>(조너던 와이너 / 이끌리오)와 <갈라파고스 - 세상을 바꾼 섬>(고드프리 멀렌 외/궁리)를 보라. | |
- 글 장석봉 / 저술가, 번역가
- 장석봉 씨는 '인류의 문화를 바꾼 물건 이야기 100'등을 쓴 젊은 저술가다. 나라 안팎의 책을 맹렬하게 읽는 독서가이기도 하다. 특히 과학에 관심이 커서 수 십 권의 책을 번역, 소개했다. 위인들의 일생을 다룬 외국 원서들을 즐겨 읽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피카소, 에디슨 등의 평전을 번역,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