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25. 병인박해(1866년)의 발발
서울대교구 절두산 순교성지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전경.
종교의 자유 허락 약속했던 흥선대원군
병인박해는 고종 3년(1866)에 일어났다. 이 시기는 세도정치(순조·헌종·철종)의 끝 무렵으로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던 시대였다. 먼저 기존 연구를 토대로 박해의 원인을 되짚어 보자.
1864년 고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할 때, 그의 아버지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대원군으로 봉해지면서 조 대비로부터 섭정권, 곧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의 전권을 잡게 되었다. 이때에는 중국에서 제2차 아편 전쟁으로 북경 함락 소식이 전해지면서, 외세에 대한 위기 의식이 높았던 시기였다.
이 무렵 일부 관리들은 갑작스러운 변란에 대비해 천주교 성물을 일부러 지니고 있었고, 천주교에 큰 박해를 가하지 않고 있었다. 또 1864년 이후 러시아가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책으로 ‘러시아를 막자’고 하는 방아책(防俄策)이 논의되고 있었다. 교회 기록에 의하면, 이때 흥선대원군과 천주교 신자들의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교구 절두산 순교성지에 설치된 남종삼 성인상.
“작년 가을 신부님께 ⋯머지않아 조선에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희망이 보인다는 소식을 전하였는데, 이 희망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흥선대원군)는 내가 만일 러시아인들의 문제를 처리해 주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겠노라고 그 관리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 관리를 통해서 그 군(흥선대원군)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임금께 유익한 일로 돕고자 간절히 바라지만, 러시아인들과 나라가 다르고 종교가 다른 저로서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저의 이 답변이 그(대원군)에게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임금의 모친은 천주교를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교리를 이루 배웠고 매일 몇 가지 기도문을 외웁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한 감사 미사를 드려 달라고 제게 청했습니다. ⋯왕의 유모(박 마르타)는 궁에 계속 머물고 있는데, 그녀는 교우입니다.⋯”(베르뇌 주교의 1864년 8월 18일 자 서한)
베르뇌 주교는 철종에서 고종으로 바뀌는 시기에 큰 박해 없이 잘 넘어간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한편, 조선 정부와 잘 협상이 된다면 그토록 원하던 종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개입하기를 원치 않았던 베르뇌 주교는 이 협상의 기회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했다.
이후 신자들 가운데 김계호(김면호, 토마스)·홍봉주·이유일 등은 방아책을 위해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건의하였고, 다시 승지 남종삼을 통해 재차 이러한 방안을 대원군에게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논의를 위해 2명의 주교와 면담하기로 했다.
탁희성 작 ‘남종삼·홍봉주 서소문밖 형장 행렬’.
베르뇌 주교·홍봉주 체포되면서 박해 시작
주교들이 도착하자 병인년 1월 31일 남종삼은 대원군을 찾아가 주교들이 서울에 있음을 알렸다. 그러나 대원군은 약속과는 달리 주교들과의 면담을 미루었다. 이에 다블뤼 주교는 내포로 돌아가고, 베르뇌 주교도 부평과 인천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러 가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의 기대와는 달리 2월 19일(음력 1월 5일) 최형 등이 체포되었고, 2월 23일 베르뇌 주교와 그 집 주인 홍봉주가 체포되면서 병인박해는 시작되었다.
병인박해의 원인에 대해서는 기존 연구들이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러시아인들의 위협이 사라졌고, 더는 방아책을 위해 서양 주교에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둘째, 1866년 1월에 도착한 조선 사신의 보고에 의하면, 중국에서 서양인들을 처형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대원군은 대신들로부터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보고는 매우 과장된 것이었고, 조정 대신들의 판단 역시 잘못된 것이었다.
한편, 1866년 당시 북경 프랑스 공사관의 전속 의사였던 마르탱은 「1866년의 조선 원정」이라는 기록에서 선교사들이 조정 내의 권력 정치에 개입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그의 논리에 따르면 조선에는 대외 개방을 원하지 않는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당’과 ‘조선이 외국에 개방되는 것을 바라고 또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당’이 있는데, 대원군은 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조선의 양반관료제를 지키려는 이들의 척사사상은 계속 이어져 왔고, 이 시기 대원군의 권력과 함께 위정척사의 힘이 강력하게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 박해는 당시 사회 상황과 맞물리기도 하는데, 전 해에 일어난 흉작·민란·경복궁 재건 및 서원 철폐에 따른 여러 가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그 화살을 천주교로 돌리면서 갑작스러운 박해령이 일어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사진. 대구대학교 중앙박물관 제공
병인양요·신미양요로 1873년까지 박해 지속
이제 병인박해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병인박해는 1866년 1년에만 그치지 않고 흥선대원군 집권기 내내 이어진 장기간이고 전국적인 박해였다.
홍봉주의 집을 수색하면서 시작된 병인박해는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9명의 선교사와 지도급 신자들이 순교하고, 9월경 「척사윤음」이 반포되면서 박해가 일단락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서강·양화진까지 진입하였고, 다시 강화부를 점령하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프랑스군의 섣부른 판단으로 조선에 충분한 경고가 되지도 못한 채,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한 뒤 백성들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돌아가게 되었다.
프랑스 군대가 물러가면서 천주교 박해는 더욱 심해졌고, 양화진(절두산)이 새로운 사형 터가 되었다. 이 사건 외에도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 했던 덕산의 굴총사건이 1868년 5월에 일어났고, 1871년 미국 함대가 조선을 침공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조정이 천주교를 더욱 박해하고 백성들에게 척화사상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절두산 성지에 가보면, 신미년에 세워진 척화비를 볼 수 있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즉 ‘서양 오랑캐가 침범한 때에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경계하였다.
1873년 12월 24일,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게 되었다. 이로써 긴 병인박해가 끝을 맺게 되었는데, 1866년부터 시작된 이 박해로 전국에서 5000~8000명의 신자들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성직자와 평신도를 합쳐 모두 24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