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공고가 청주권 4.19혁명의 진원지로 밝혀진 가운데 부정부패와 독재정권을 타도하기위해 분연히 일어서려 했던
청주지역 학생 의거가 묻힐 처지에 놓여있어 이의 재 조명과 함께 전국 3대 4.19학생 혁명지로 부각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4.19의거는 마산에서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를 하다가 행방불명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1960년 4월 11일 바다에서 떠오른데 광분한 학생과 시민들이 18~19일 전국에서 총궐기한 최초의 민주혁명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청주권 학생시위는 이 보다 앞선 4월 3일 청주시 수동 213번지 (새주소 : 교동로 45-1)
김연웅(70. 당시공고 기계과 2년) 김연옥(73)자취방에서 공고 친구들이 모여 '3.15부정 선거' 규탄 시위를 모의한 뒤
4월 13일 청주역 광장에서 최초로 학생시위를 벌였다는 것이다.
이때 청주공고 1학년 일부와 2학년 다수가 참여한 가운데 준비했던 벽보를 붙이고 시위를 하던중 경찰의 저지로 해산했다.
이어 16일 청주공고 운동장에서 입영자들이 집결한다는 연락을 받고
500여명의 공고학생들이 청주역전을 지나 북문로 방향으로 달려 나갔으나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해산하면서 30여명이 연행되었다가
2시간여만에 훈방 조치됐다.(한국일보 17일자 보도)
17일 청주시 장날 시민과 함께 시위를 할 계획을 세웠으나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경찰이 청주공고를 사전봉쇄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앞서 청주공고 2학년 학생들은 시내 각 학교 3학년 학생회장단을 만나 학생 궐기의 당위성을 역설하였으나
3.15부정선거가 민주당에 의해 법원에 소송중이니 무효 판결이 나면 데모를 할 필요가 없다는 등 미온적인 답변만 들었다는 것이다.
2학년 학생들의 세력이 미흡한 나머지 3학년 홍광치 회장(공고)에게 앞장서줄 것을 제의했으나
"형님이 경찰관으로 재직하여 앞장설수 없고 뒤에서 적극 지원하겠다"는 언질만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김원웅,곽한소, 이영일, 김영한,강건원등이 나서 청주고,청주세광고, 청주상고,청주농고,청주여고 학생들에게 연락을 취해
18일 청주상고 운동장에 집결하여 시위를 하던중 이를 진압하는 기마경찰대에 항거하는 투석전을 벌이며 도청 방향으로 노도와 같이
달려나갔다가 100여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훈방되었다..
그러나 서울 수유리 국립 4.19민주 묘지내 4.19혁명 기념관 기록의 충청편을 보면 17일 청주고교와 청주상고 학생들이
시위중 경찰과 유혈 충돌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날은 시위가 없었다고 증언한다.
또 4월 18일 청주고교와 청주상고가 앞장서서 시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청주공고 핵생들이 주도하여
상고생들이 참여한 것이다. 영상자료에도 19일 청주공고학생들 500명이 데모를 했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18일 1000여명이 시위를 한 것으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충북 4.19학생혁명기념탑도 청주가 전국 4.19의거 3대 진원지로 꿈틀댔던 젊은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부르짓고
정의에 불탓던 정신이 묘사되지 않은채 전국적인 사안을 갖고 건립 취지문에 남겨 놓아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
연옥씨는 4월 20일 연웅으로 착각한 경찰 3명에 의해 청주경찰서로 연행되어 심한 욕설과 구타를 당하면서 구금되었으나
유도를 같이했던 한 경찰이 알아보고 " 이 학생은 데모를 할 학생이 아니다"라고 해 풀어줬다고 증언한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경찰국 사찰과 형사로 재직했던 오봉구(79), 공고 교사 최종대(84),김선회(78),
김현수 충북 4.19혁명기념사업회장 (76)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개명한 김태형(연웅)씨(70, 보은군 산외면 중티리 185-2)는 " 청주공고가 청주지역 4.19 혁명 진원지로 표석을 세웠으나
4월 3일부터 모의를 하고 13일 3학년들이 호응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2학년 위주로 독재정권 타도를 외친 '민주학생 의거' 사실이
묻혀지는게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