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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사에 관한 글이 계속 올라오니 떡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어느새 입춘이 지나고 개강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시루떡 이야기 한번 올려봅니다.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요즘에 비해 먹을 것이 참 귀했습니다. 그래서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뿐만 아니라 떡이며 과일 같은 평소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음식을 맛보고 구경할 수 있는 제사까지 몹시 기다려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엄마와 숙모 등 집안의 안식구들이 부산하게 오가며 온 부엌에서 지지고 볶는 냄새와 함께 김이 꽉 찬 광경은 지금껏 생각만 해도 아련한 추억에 남모를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얼마 전에 경주에 놀러 갔다가 최부자집에서 참으로 정겨운 기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요즘 세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모르긴 해도 이름은 물론 이 물건이 무엇을 하는 건지조차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어! 뭐야?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잖아. 어디에 쓰는 거지?" 아마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요? 요즘 세대는 짐작도 못하리만큼 지금은 이미 일상생활에서 쓰인 지가 오랜 듯 장독대의 한쪽 구석에, 그것도 손잡이가 떨어진 채 엎어져 있었지만 어릴 때의 추억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루였습니다. 지금은 집에서 떡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요즈음 세대들을 위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요즘은 송편 같이 손으로 하는 떡조차도 집에서 직접 하는 일이 없으니 시루떡 같은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시루떡을 만드는 순서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시루를 바르게 세워서 삼베로 된 보자기를 밑에 깝니다. 그리고 먼저 콩가루(팥떡의 경우는 팥)를 얇게 깔고 다음에는 쌀가루를 깝니다. 콩고물은 떡을 쉽게 분리하기 위한 막 역할을 하므로 얇게 깔아야 합니다. 이렇게 시루의 아래부터 끝까지 차곡차곡 채워서 마지막으로는 콩가루로 마무리를 해서 삼베 보자기를 여미고 뚜껑을 덮습니다. 시루의 뚜껑은 별도로 없고 가마솥의 뚜껑을 쓰게 됩니다. 다음에는 위의 사진처럼 찝니다. 시루를 물을 부어놓은 가마솥에 얹고 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가마솥과 시루 사이를 밀가루 반죽으로 막습니다. 다음에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의 물을 끓이면 증기가 위로 올라가면서 콩가루와 떡가루 층을 익히는데 그게 바로 시루떡입니다. 사진을 보면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이 다음 과정을 생각만 해도 침이 넘어갑니다. 실로 대단한 공력이 들어가는 과정인데, 옛날에 의성 김씨 종택에서는 불천위 제사 때 시루떡이 잘 안 되어 종부가 모두 자기의 정성이 부족해서라고 자책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는 그야말로 고난의 길이었겠지만 우리들에겐 정말 잔치였습니다. 보자기째 다 익은 떡을 들어내면 시루의 모양대로 둥그런 형태를 띠는데, 그 모양 그대로 제사에 쓰지 않고 네모나게 잘라서 썼습니다. 그러면 잘라낸 모서리 부분은 아이들 차지였습니다. 심지어는 삼베 보자기에 달라붙은 떡을 숟가락으로 긁어먹기도 하고, 시루와 솥의 틈을 막은 밀가루까지 떼어서 먹기도 하였습니다. 과자가 없던 시절에는 그것도 별미였죠. 이런 시루의 모양을 본딴 글자가 바로 '증(曾)'자입니다. 일찍 증(曾) 갑골문-금문1-금문2-소전-해서 갑골문의 자형은 시루의 구멍으로 김이 새어나가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금문은 두 가지 형태가 보이는데 기본적으로는 모양이 같습니다. 시루에 김을 공급하는 솥의 형상까지 표현하였습니다. 위 두 번째 사진의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시루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김을 쐬어서 익으면 벌써 이는 과거의 일이 되기 때문에 나중에는 이 글자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나타내는 부사어로 쓰이게 되었지요. '일찍이 없었던' 일이랄 때의 '미증유(未曾有)' 같은 경우가 바로 그런 용례입니다. 그래서 원래의 뜻을 보존하기 위해 형체소에 해당하는 글자를 덧붙이기 되었는데, 그 글자가 바로 '기와 와(瓦)'자입니다. 한때는 대가집 지붕을 멋지게 장식하였을 법한 기왓장이 수리 때문에 그런 것인지 한쪽으로 치워져 포개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기와는 이런 모양으로만 이루어져서는 곤란합니다. 기와와 기와의 골 사이를 덮어주어야 비가 새지 않게 됩니다. 위와 같은 기와를 암기와라 하고 암기와와 암기와를 덮어서 물이 새지 않도록 덮어주는 기와를 숫기와라고 합니다. 예쁜 한옥집과 멋진 돌담길이 있는 대구 달성군에 소재한 인흥마을의 전통가옥입니다. 담 두 개 너머로 기와지붕이 보이는데, 담도 그렇고 지붕도 모두 암기와와 수키와를 잘 포개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암기와와 수키와가 서로 맞물리도록 배열한 모양을 본딴 글자가 바로 '기와 와(瓦)'자입니다. 원래는 옆으로 누워야 하는데 가로로 길어보였기 때문에 필기도구인 간독(簡牘)에 쓰기 편하게끔 맞추어 세워서 쓰게 된 것입니다. 이 글자는 언뜻 보면 동물의 이가 서로 꽉 물린 형태를 나타내는 '아(牙: 『이미지로 읽는 한자』 89쪽 참조)'자와 어딘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와 와(瓦) 금문대전-소전-해서 요즘은 기와집 같은 전통가옥은 민속촌 같은 곳이 아니면 잘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기왓집을 지을 때 기와를 다른 곳에서 실어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웬만한 규모의 기왓집인 경우라도 집을 지을 때는 현장에다 기와를 굽는 가마를 설치했습니다. 퇴계의 「도산잡영 서문」 같은 글에 보면 집을 짓기 위해 기와 가마터를 설치히였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궁궐 같은 아주 지체가 높은 사람이 거처하는 건물의 경우에는 유약을 입혀서 굽기도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습니다. 중국의 북경에 가면 꼭 들르게 되는 자금성의 지붕은 유약을 발라 구운 기와를 쓰는데 이런 기와를 유리(琉璃) 기와라 합니다. 그리고 인사동 같이 골동품을 파는 골목인 유리창은 바로 그런 유리 기와를 구워 생산 납품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궁궐의 경우도 거의 유리 기와를 쓰지 않았는데 이렇게 구워낸 기물을 도기(陶器)라고 합니다. 반면에 유약을 입힌 것은 자기(瓷器)라고 합니다. 둘 다 통틀어서 도자기라고 하지요. 요즘도 다구(茶具)의 경우는 도기가 많이 보입니다. 나중에는 기와처럼 구워서 만드는 도구를 나타내는 글자에는 도기를 대표하는 글자인 와(瓦)자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루의 경우는 원래 시루라는 뜻의 증(曾)자와 도기임을 나타내는 와(瓦)자가 붙게 된 것이지요. 시루 증(甑) 금문대전-소전-해서 지금 쓰이는 '시루 증(甑)'자는 증(曾)이 원래의 뜻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지만 음소의 역할도 합니다. 그리고 와(瓦)자의 경우는 완연한 형체소가 되는 것이지요. 증(曾)자는 옛날에 많은 경우 '더할 증(增)'자나 '층 층(層)'자와도 통용해서 쓰이기도 하였는데, 제 생각에는 위의 시루떡을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떡 고물을 한 층 '더' 깔면 '증(增)'이 되고 이게 여러 '겹'이면 '층(層)'을 이루게 되니까요. 나중에 증(曾)자는 증(增)이나 층(層)자 외에도 수많은 한자의 음소가 됩니다. 비교적 많이 쓰이는 글자만 예를 들어도 '드릴 증(贈)', '미워할 증(憎)', '비단 증(繒)' 등이 있습니다. 요리를 할 때는 시루처럼 증기를 쏘여서 익히는 방법 외에 솥 같은 기물에 넣어서 가열하여 음식을 익히는 방법도 있습니다. 솥에 대해서는 이미 정(鼎: 『이미지로 읽는 한자』 37쪽 참조)에서 말한 바가 있습니다. 세 발 솥인 정(鼎)은 종묘의 제례에 쓰이는 기물이라고 하였고, 실제 요리를 해먹는 솥은 과(鍋)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 발 솥 가운데서도 실제 음식을 해 먹는 솥이 있습니다. 정(鼎)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도기(陶器)입니다. 물론 금속으로 된 것도 있습니다. 청동(금속)으로 되어 있고 솥의 둘레와 주둥이 안쪽에 무늬와 글자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위의 솥은 귀족 같은 지체가 높은 사람이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모양의 솥을 격(鬲)이라고 하는데 정과 다른 점은 발 부분입니다. 종묘의 제사 같은 큰 제례 때 희생을 담는 예기(禮器)인 정의 발은 단순히 몸통을 지탱해주는 역할만 합니다만 솥인 격의 발은 속이 비어서 물이나 음식물 등 조리를 해야 할 물건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마 발을 이렇게 처리한 것은 열전도율을 높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고대인들의 과학적 지식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 글자는 갑골문부터 보입니다. 세발솥 격(鬲) 갑골문-갑골문-금문-소전-해서 갑골문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정과는 가장 다른 점인 발의 모양만 강조한 것(앞의 것)과 솥 전체의 모양을 나타낸 것(뒤의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 갑골문의 윗 부분은 정(鼎)자의 윗 부분과 똑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격(鬲)자는 실제의 솥을 나타내는 글자로는 많이 쓰이지 않고 주로 형성자에서 소리를 나타내는 부분인 음소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뜰 격(隔)', '흉격 격(膈)' 같은 글자들이 대표적인 글자입니다. 위에서는 흙을 구워 만든 오지 기물과 금속을 이용하여 만든 청동기물 등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물들을 위에 예로 든 재료만을 가지고 만드는 것은 아니지요. 나무로 만드는 것도 있고 또 돌로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위에서 솥[鬲]의 경우에는 같은 기물인데도 청동으로 만든 것과 흙을 구워 만든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같은 기물인데도 나무로 만든 것도 있고 돌로 만든 경우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절구입니다.
ⓒ 국립민속박물관 위의 사진은 요즘은 민속박물관이나 아니면 조경업소에서나 볼 수 있는 골동품이 되어버린 돌절구와 나무절구입니다. 물론 금속으로 만든 쇠절구도 있지요. 어릴 적 우리 집에서는 쇠절구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무절구는 내구성 문제와 부패 등으로 오래 쓰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반면에 돌 절구는 수명이 거의 반영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이는 나무절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을 썼습니다. 그럼 저 두 절구의 차이점이 아닌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공이로 쳤을 때 힘을 이겨낼 최소한의 두께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나무는 얇게 깎으면 정도에 따라 반은 빛을 투과시키는 간접 조명용 전등갓으로도 쓰일 수 있을 정도까지 깎을 수가 있겠죠. 그러나 돌의 경우는 그렇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얇게 깎아낸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두께는 불가피한 상황이 될 것입니다. 이런 두께가 있는 돌 절구 같은 기물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 바로 '두터울 후(厚)'자입니다. 두터울 후(厚) 갑골문-금문-금문대전-소전-해서 위의 시대별 자형을 보면 금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랫 부분이 뾰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해서에도 반영이 되어 뽀족한 부분이 '아들 자(子)'자의 형태로 변형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엄호(厂: 기슭 엄)에 대해서는 보통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절구 같은 돌을 깎아 만든 아래가 평평하지 않은 기물을 한쪽이 터진 복도 같은 곳에 기대어 세워놓은 것이라는 설입니다. 금문을 제외한 글자의 형태에서 설득력이 느껴지는 설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설은 바로 절구 같은 기구를 만들기 위하여 큰 돌을 떼어낸 벼랑이나 돌 기슭이라는 설입니다. 그러니까 돌벼락에서 떼어내어 만든 절구 같은 기물임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금문을 보면 설득력이 느껴지는 설입니다. 그러나 '두터울 후(厚)'자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요소이고 주된 요소는 돌을 깎아 만든 두꺼운 기물이라는 것이지요. |
첫댓글 감사합니다.
이젠 집에서 떡시루에 떡을 쪄서 차례를 모시는 집은 없지만,
선생님 덕분에 추억 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설 잘 쇠시길 빕니다.
한자가 뜻글자인게 이리도 흥미로운 게 많네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厚'자에 대해서 항상 궁금했는데, 이제야 제대로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