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구스타브 스페스, “무자비한 현대 자본주의의 실패를 넘어서야만 한다.”
옮긴 곳-<당당뉴스> 2011년 7월 14일치 (원 출처 기독교사상 2011년 8월호)
김준우 한국 기독교연구소 소장
1. 성서, 그 저항과 돌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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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우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
“인류의 위대한 영적 전통들은 공포(terror)와의 대결 속에서 태어났다”는 토마스 베리 신부의 통찰은 성서 전통에 대한 해석에서도 매우 엄중한 진실이다. 그 말은 역사의 어둠을 뚫고 나갈 지혜와 원동력은 인류의 위대한 영적 전통들 속에 있다는 뜻이다. 리처드 호슬리가 편집한 『제국의 그늘 속에서』(In the Shadow of Empire, 2008) 역시 그 부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성서를 신실한 저항의 역사로 새로 읽기”(Reclaiming the Bible as a History of Faithful Resistance)이다. 계속되는 제국들의 정복과 학살로 인해 종종 피바다를 이룬 역사의 현장에서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었던 끔찍한 참상에 몸서리쳤던 사람들이 그 학살자들에 대한 공포에 질려 영혼이 마비되지 않고 오히려 두 눈 똑바로 부릅뜨고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새로운 미래를 기다리며 목숨을 걸고 지배자들에게 저항했던 역사가 바로 성서라는 주장이다. 또한 성서 기자들의 기록과 성서 해석의 역사는 카렌 암스트롱이 『성서: 한 전기』(The Bible: A Biography, 2007)에서 명쾌하게 분석한 것처럼, 약소민족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 역사의 현장에서 그 어둠과 절망과 체념을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신앙적 돌파구를 끈질기게 뚫어나간 역사였다. 특히 예언서들과 복음서들만이 아니라 미슈나와 미드라쉬, 탈무드 모두 제국들에 대한 하나님 신앙의 승리를 고백한 것이다. 문화사가와 성서학자들과 종교학자의 이런 통찰들은 성서에 대한 해석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과제가 무엇인지도 깨닫게 해준다.
성서 안에서 가장 큰 공포와 절망의 사건들 가운데 하나가 대홍수 사건일 것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대홍수는 단순히 고대 근동지방 공통의 설화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거의 언제 어디서나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이다. 제국들과 지배계급의 정복과 착취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떼죽음 당하는 사건들이 대홍수 사건이기 때문이다. 성서는 에른스트 블로흐 역시 지적한 것처럼, “억압하는 존재에 저항하는 반대작용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유대-기독교가 권력자의 권력유지를 위한 지배이데올로기로 둔갑되어, 권력자의 물질적인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난을 “하나님의 저주”로, 또한 “죄”를 계급지배에 의한 구조적인 억압과 착취가 아니라 심리적이며 성적인 요소로 사사화(私事化) 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신적인 재가를 정당화하며, 또한 “저항과 반역”이 아니라 “순종”을 강조하기 위해 지배계급의 정복과 착취에 의한 떼죽음이라는 대홍수조차도 신의 뜻으로 합리화시킨 것은 생명과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었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처럼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시장전체주의 사회에서 “구조조정”이라는 이름 아래 집단적으로 해고되어 생존권을 박탈당한 노동자들, 산업재해로 인해 죽어가면서도 대부분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 실업자들과 철거민들, 그리고 가파른 전세금 상승으로 인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세입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 세상은 대홍수 당시의 무자비한 현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늘의 대홍수는 특히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파업사태, 4대강 사업과 뉴타운사업, 그리고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노동자 백혈병 사건 등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그 희생자들은 “자본의 욕망”이라는 제단 앞에 제물로 바쳐지고 있다. 그들은 자본의 독재와 이윤 극대화를 위해 희생되고 있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자본의 계급착취의 희생자들이다. 오늘도 계속되는 이런 대홍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떼죽음 당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시장자본주의 체제의 어둠과 절망을 창조적으로 돌파할 것인가?
2. “사람의 아들” 김진숙의 저항과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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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40년 가까이 이처럼 무자비한 자본의 착취를 온몸으로 경험한 김진숙은 <소금꽃나무>에서 “자본이 주인인 나라, 자본의 천국인 나라”(121쪽)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뼈가 쌓여갈수록 자본의 아성이 점점 높아지는” 현실을 단적으로 이렇게 고발한다.
‘조선강국’을 위해 한 해 수십 명의 노동자가 골반 압착으로, 두부 협착으로 죽어 가는 나라, ‘물류강국’을 위해 또 수십 명의 화물 노동자가 길바닥에 사자밥을 깔아야 하는 나라. 섬유 도시 대구, 전자 도시 구미, 자동차 도시 울산, 화학 도시 여수, 온산. 그 허황한 이름들을 위해 노동자의 목숨이 바쳐지고 그들의 뼈가 쌓여 갈수록 자본의 아성이 점점 높아지는 나라.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122-123쪽)
김진숙은 열다섯 살 이후 생존하려고 몸부림치는 동안, “우리도 물도 먹어가며 일하고, 풀밭에 배를 깔고 쉴 짬도 있는 소가 참 부럽다고 생각”(38쪽)했을 정도로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견디어야 했으며, “뺨이 붓도록 얻어터지고 ‘엄마, 회사가 무섭다.’ 밤새 눈물로 편지를 써 놓고는 부치지도 못한 채 그 무서운 곳으로 날마다 향하던 어린”(43쪽) 노동자들의 악몽과 공포와 무력감에 함께 몸서리쳤다. 그러나 1981년 7월 한진중공업의 첫 여성 용접공으로 입사하여 조선소 노동자들의 땀에 절은 작업복 위에서 “소금꽃나무”로 피어난 김진숙은 야학을 통해 <전태일 평전>을 읽고 “인간이 참 고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48쪽)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벌레가 아니라 인간”이며, “인간이 당연히 품어야 하는 희망,” “세상을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을 품은 인간이라는 존재.”(49쪽)임을 깨닫고 자신의 존엄성과 희망에 근거한 새로운 정체성과 자유에 감격한다. 이런 자기 정체성의 감격에 사로잡히게 됨으로써 그는 노동자들을 짐승보다 못하게 대우하는 노동현실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현장에서 죽어가는 여러 동료들의 가족들에게 “보상이라도 제대로 받게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262쪽)으로 5년 만에 노조 대의원에 출마하여 노조운동에 참여한 것 때문에 그는 1986년 7월, “노조 간부들을 싸그리 잡아다 삼청교육대에서 병신 만들어 내보내던” 시절에 해고되었다. 노동자들이 “벌레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동운동을 계속한 결과 “수천 대도 더 맞았고, 수백 번도 더 짓밟혔다. 매일 아침마다. 배나 허벅지처럼 표면적이 넓은 부위엔 발자국이 그대로 멍 자국으로 찍혀 있는 날도 있었다”(17쪽)고 말하는 그 고난의 길을 용기 있게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참 고귀한 존재”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인간이 당연히 품어야 하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죽은 동료들의 목숨값을 제대로 받도록 해주고 싶다는 희망을 안고 노조운동을 시작하고, 그 자신이 해고 당사자로서 복직을 주장한 것 때문에 “제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되고, 대공분실에 세 번씩 끌려가 고초를 겪고, 해고된 동료 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해 지금도 35미터 높이의 타워크레인에서 여섯 달이 넘도록 목숨을 걸고 있는 김진숙은 “자본이 주인인 나라, 자본의 천국인 나라”에 보내진 “사람의 아들”이다.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 7장에 나오듯이 역사적으로 계속 이어진 “짐승들의 제국”―역사학자 최상천의 용어대로 한국 역사의 “짐승시대”를 끝장낼 “하늘의 뜻”을 이 어두운 세상에 비추도록 보내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늘의 뜻”(“하나님의 영” 혹은 “하나님의 속성”)―“한 분”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형제자매이며 만물이 하나되는 기쁨, 거룩함, 정의, 자비, 능력, 창조, 구원, 평화, 온전함 등―을 뼈저리게 체득하고 더 나아가 그 하늘의 뜻을 세상에 구현하는 “참 사람의 길”을 몸소 걸어감으로써, 역사의 어둠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의 돌파구를 뚫도록 보내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짐승들의 세상” 속에서 하늘이 내려준 생명 본연의 축복과 “더욱 풍성한 생명”을 누릴 천부적인 기본권을 수호하도록, 그래서 강자들의 착취와 억압, 약자들의 체념과 냉소를 극복하고, 존엄성과 우애와 나눔과 돌봄의 세상을 위한 평등과 연대의 관계를 넓히도록 보내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의 아들” 김진숙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 이 나라와 이 시대가 사람들의 세상이 아니라 “짐승들의 세상”이 되고, “생명과 축복의 세상”(창 1-2장)이 아니라 “죽임과 저주의 세상”(창 3-11장)이 된 근본 이유는 “자본이 주인인 나라, 자본의 천국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상천의 지적처럼, 두목주의와 패거리주의와 사익주의가 횡행하는 “조폭국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고 “자본의 천국이 아니라 사람들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가시밭길을 헤쳐왔으며 지금도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는 김진숙이 온몸으로 역사의 고난을 대신 짊어짐으로써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의 비정함이 폭로되고 있으며 우리가 양심의 찔림을 받고 있다. 그가 자신의 투쟁과 고난을 통해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는 쉽게 예상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당당하게 “참 사람의 길”을 걸어가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이유는 그 길이 고귀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자유와 존엄성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미 목숨을 바쳐 그 길을 걸어간 여러 동지들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럽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3. 오늘의 대홍수와 아비규환의 세계
김진숙은 노조운동 때문에 세 번씩이나 대공분실에 끌려가고 두 차례 투옥되어 인간에 대해, 그리고 공권력조차 자본을 위한 폭력적 도구라는 절벽 앞에서 또 다시 절망하지만, 그는 인간 본연의 배려와 “동지애”의 기쁨을 철저히 신뢰하는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대공분실에서 만난 인간들, “매질을 운동이라고 표현”하는 그들, “껌도 씹었고, 자기 딸 얘기도 하는 ... 같은 인간끼리니까 어쩌면 통할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저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간이 인간한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그 몸서리쳐지는 사실이, 무엇보다 내가 여기에 온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는 절망이었다. ...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 죽고, 내 시체가 바다에 던져지고, 바다에 가라앉아 수백 년이고 수천 년이고 혼자...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 있고... 그런 생각만 수천 번도 넘게 들었다”(30쪽)는 절망과 공포였다. 이것은 대학 졸업 후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를 겪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 드러난 인간의 잔인성과 악의 평범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김진숙은 노조운동을 하면서 “기름 범벅 손으로 제 등을 두드려 주시던 조합원들의 손길”(262쪽)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으며, 감옥의 징벌방에서 “묶여 있으니 혓바닥으로 죽 그릇을 핥고, 입은 채로 싸는 주접스러운 상황에서도... (같은 감방 동료가) 내 이름을 부르며 며칠을 울었단 얘기”(248쪽)를 풀려난 다음에 들으며 그가 확인한 인간 본연의 배려와 동지애의 기쁨은 그 온몸 가득 켜켜이 쌓인 상처들을 어느 정도 치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공권력과 불의한 법질서를 온몸으로 겪은 김진숙이 여전히 “참 사람의 길”을 지금도 걷고 있는 이유는 “참 고귀한 존재”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희망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우애와 동지애를 경험할수록, 지배체제의 착취와 폭력에 대한 의로운 분노 역시 더욱 깊어진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가의 공권력과 법조차 “지배계급의 도구”로 사용되는 “조폭국가”는 역사학자 최상천의 주장처럼 1987년에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조국 교수의 말처럼 “부자에게 세금을 줄여주는 대신 서민에게서 돈을 긁어 보충하겠다는 현대판 가렴주구(苛斂誅求)”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한국 사회의 법치(法治)는 “지배계급과 당파의 이익만을 수호하는 법치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되는 당파적 법치로서 “법의 치욕이라는 의미의 법치(法恥)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배체제의 착취와 억압으로 인한 대홍수의 무자비한 현실에 맞서서 저항하는 것은 김진숙만이 아니다. 자신들의 생존권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망루 위로 올라간 철거민들이 다섯 명씩이나 경찰 특공대와 용역깡패들의 진압작전에 의해 불에 타 죽어도 “도시 게릴라들”에 대한 “정당한 공무 집행”일 따름이며, 노조원들이 법적으로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벌이는 노동쟁의조차도 “불법파업”으로 판결이 나고 수백 억 원의 손해배상과 가압류를 선고하는 사법부 앞에서, “더는 밟힐 수가 없어, 도대체가 더는 당할 것도 없어, 마지막 일어서는 일이, 몸부림치며 일어서는 일이, 일어서 외마디 소리 친다는 일이, 제 몸뚱아리, 말라비틀어진 몸뚱아리 장작개비 삼는 일밖에 없었던” 해고노동자들에게,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품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권을 지키는 유일한 몸부림이며 세상을 뒤덮는 대홍수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으려는 마지막 저항이기 때문이다.
20대 80의 세계가 현재 10대 90의 세계로 바뀌는 과정에서 이런 대홍수의 희생자들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대홍수의 희생자는 가난한 사람들만이 아니다. 더군다나 온갖 불법과 탈법으로 파괴되는 4대강, 경주 방사능폐기장, 강정마을은 법치국가가 아니라 토건자본을 중심으로 한 자본이 권력의 실세로 군림하는 나라에서 힘없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연이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자연적인 멸종 속도보다 1000배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대멸종의 현실이 대홍수의 현실을 증명한다. 예를 들어, 대형 어류의 90%가 이미 멸종했으며, 1980년 이후 122종의 양서류가 멸종했고, 태평양에 서식하는 장수거북의 약 95%가 지난 20년 동안 사라졌다. 오늘도 여전히 대홍수에 휩쓸려 무고하게 죽어 가는 생명체들의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세상 천지사방을 뒤덮고 있는 아비규환의 현실이다.
4. “한국판 스턴 보고서”(2011년)의 엄청난 피해 경고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생명체들 전체가 대홍수에 휩쓸려 떼죽음당하는 것은 기후변화 때문이다. 인류가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숲을 대규모로 파괴함으로써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2011년 현재 391ppm(전체 온실가스 농도의 이산화탄소 등가량은 430ppm CO2-e)에 도달한 것은 지구 역사상 적어도 지난 65만 년 동안 최고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기후변화의 영향을 사회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영국의 니콜라스 스턴의 보고서 <기후변화의 경제학>(2007)에 따라 국책기관인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이 “한국판 스턴 보고서”를 위해 지난 5월에 “우리나라 기후변화의 경제학적 분석”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최근 신문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온실가스 감축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이번 세기말 한반도의 연평균 온도는 지금보다 섭씨 4도가 오른 15.71도가 될 것이며, 연간 강수량도 1465㎜로 지금보다 21% 늘어날 것이며, 해수면은 지금보다 35㎝ 상승해서 해안가 240㎢가 침수되고 15만 명이 침수피해를 볼 것이며, 여름철 이상고온으로 인해 지금과 견줘 8715명이 초과 사망하며, 쌀 생산량도 15% 줄어들 것이며, 컴퓨터 모델로 분석한 결과 21세기말 한반도의 누적 피해 비용은 2800조원으로 추정되지만, 많게는 2경7791조원까지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2100년까지 300조원을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대책에 투자하면 누적 피해 비용을 800조원 이상 줄일 수 있으며, 전 세계가 온실가스 배출을 적극적으로 줄여 추가 상승온도를 2도로 묶어둘 경우 한반도 피해 비용은 580조원으로 추정된다”는 분석이다. 결론적으로, 비용 300조원보다 편익 800조원이 훨씬 크기 때문에 서둘러 관련 대책을 추진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주장이다.
5. “다음 세대들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인가?”
그러나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의 홈페이지에 실린 이 보고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가지 유념할 사항들이 있다. 첫째로, 이 보고서가 “모델 분석을 위해 채택한 시나리오는 IPCC의 온실가스 배출 시나리오(SRES) 중 A1B 시나리오 및 적극적 온실가스 감축 시나리오인 450ppm 안정화 시나리오”에 맞추어 한반도 기후전망을 모델링한 것이라는 점이다. A1B 시나리오는 화석연료 의존형(A1F1), 비화석연료 에너지원(A1T)과 달리, “모든 에너지원간의 균형을 가정한 시나리오”다. 즉 유사한 개선비율이 모든 에너지 공급 및 최종 사용 기술에 적용된다는 가정 위에 하나의 특정 에너지에 너무 편중되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예상이다. 따라서 에너지 균형을 가정한 이 보고서는 신문에 보도된 것처럼 “온실가스 감축 노력을 하지 않으면” 발생할 것으로 예측되는 것이 아니라, 감축 노력을 매우 열심히 하여 화석연료와 핵에너지, 재생에너지 등 “모든 에너지원 간의 균형을 가정한 시나리오”다.
둘째로,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연간 증가율은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최악의 시나리오(A1F1)가 2030년까지 연간 2.5%씩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악화되어 2000년 이후 매년 3.2%씩 증가하고 있는 현실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보고서가 채택한 시나리오처럼 에너지원간의 균형을 맞출 정도로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을 높이는 것만이 아니라, 점차 비화석연료 에너지원에 더욱 많이 의존하도록 총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한반도 기후전망은 이 보고서가 채택한 A1B 시나리오보다 훨씬 더 악화될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발전소의 경우, 현재 한국의 화력발전 비중은 44.29%, 원자력 발전 35.57%, 수력발전 1.24%, 기타 재생에너지는 0.11%에 불과하다. 한전주요통계지표에 따르면, 국민 1인당 전력 소비량은 1961년에 46kw였으나, 2000년에는 5067kw, 2009년에는 8092kw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에너지 절약과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만이 아니라, 늦어도 2020년까지는 석탄화력발전소를 단계적으로 모두 폐쇄하고 풍력과 태양열, 태양광, 열병합 등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제가 매우 시급한 현실이다.
셋째로, 이 보고서가 스턴 보고서처럼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 안정화 한계 목표치를 450ppm(전체 온실가스 등가량 550ppm CO2-e)로 잡는 위험성에 대한 기후학자들의 비판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턴의 목표처럼 이산화탄소 농도가 450ppm이 될 경우에는 지구 평균온도가 섭씨 3도 상승하게 되며, 그 목표를 제임스 핸슨이나 클라이브 해밀턴처럼 350ppm으로 삼을 경우보다 전 세계에서 굶주리는 인구가 25%에서 60%로 높아지며, 아마존 열대우림의 생태학적 붕괴가 매우 낮을 가능성에서 매우 높을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스턴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 자체가 이처럼 매우 위험한 목표인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위험한 감축 목표를 기준으로 삼아 2100년의 한반도 기후변화를 예측하는 것은 그 위험성을 훨씬 더 높이는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넷째로, 이 보고서에서 “지금보다 섭씨 4도 상승”이라는 표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보고서를 위한 연구는 2009년 3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된 것이며 북한은 연구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또한 이 보고서가 기온상승 예측의 기준을 삼은 것은 세계 과학자들이 흔히 기준점으로 삼는 것처럼 산업혁명 이전의 평균온도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 아니며, 지난 10년간의 평균온도를 기준으로 삼은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에 20세기말(1971-2000년) 대비 21세기말(2071-2100년)에 “섭씨 4도 상승”할 것으로 예상한 것이기 때문에, 최근 몇 년 동안의 연평균 기온과는 차이가 있다. 즉 기상청이 매년 발행하는 『기상연감』에 따르면, 전국의 연평균 기온은 2007년 13.3도, 2008년 13.1도, 2009년 13.1도이며, 2010년에는 12.7도이다. 따라서 2007-2010년 평균온도(13.25도) 대비 섭씨 4도가 오르면, 섭씨 15.7도가 아니라 섭씨 17.25도가 된다는 뜻이다.
다섯째로, 대부분의 기후과학자들은 지구평균온도가 산업혁명 이전보다 섭씨 4도 상승하는 것이 2070년대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IPCC는 2100년에 섭씨 6.4도까지 상승할 수 있으며, 온실가스 배출량이 계속 증가할 경우 2030년에 700ppm에 도달하여 섭씨 4도 상승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석탄화력발전소가 2009-2019년까지 483개, 2020년부터 2030년까지 710개가 더 세워질 계획인데 그 중의 1/3이 중국에 세워질 예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북반구의 육지는 남반구 평균온도와 바다의 평균온도보다 높기 때문에, 북반구 육지는 지구평균 온도보다 훨씬 빠르게 상승한다는 점에서, 한반도가 지금보다 섭씨 4도 상승하는 것은 이 보고서가 예상한 것처럼 2100년보다 그 이전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그리고 대도시는 열섬효과 때문에 지구 평균온도보다 2.5~3배 빠르게 상승하기 때문에, 인구의 절반이 밀집해 있는 수도권이 섭씨 4도 상승하는 것이 2100년보다 훨씬 먼저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이번 세기말까지 누적 피해 비용은 이 보고서의 예상 최소값(2800조원)보다는 최대값(2경7701조원)에 가까울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판단된다.
여섯째로, 기후변화 문제는 이 보고서가 분석한 것처럼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들에게 단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경제적 피해만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기후와 생물군을 파괴함으로써 다음 세대들의 생존의 터전 전체를 폐허로 만들어놓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 세대들의 생존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스턴 보고서가 기후 안정화를 위해 세계 기후학자들 사이에 합의된 목표치로서 온실가스 “연간 배출량을 현재 수준보다 80% 이상 줄여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으며, 국책기관이 이처럼 기후붕괴의 엄중한 위기 현실을 사회경제학적으로 분석하고 정책을 제안했다 하더라도, 정부와 기업 그리고 온 국민이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들을 기다리는 것은 종말”일 따름이라는 사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정부가 최근 확정 발표한 “온실가스 부문별 업종별 감축 목표안”은 2020년 배출 전망치(8억1300만 CO2-e톤)의 30%(6천8백만 톤)를 감축한다는 목표로서, 이 “감축 노력이 차질 없이 추진되면 우리나라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은 2014년 최고치를 기록한 뒤 점차 감소할 전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감축 과정에서 기업들의 순익 감소와 물가상승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정권의 재창출을 위해 경제성장과 물가상승 억제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는 정부로서는 기업들의 이익과 유권자들의 희망을 거스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온실가스를 일정량 이상 배출하는 471개 업체만이 아니라 수송과 건물 부분 등 모든 부문과 업종에 대해 강력한 규제조치를 통해 그 목표를 차질 없이 추진하는 것은 국민 대다수의 합의와 자발적인 노력이 없으면 결코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대재앙이 점차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생명권이 최우선이 아니라 핵산업체들의 이익을 위해 핵에너지 정책을 전혀 바꾸려 하지 않는 현 정권의 태도, 또한 “물 부족 국가”와 “홍수 예방” “수질 개선” 등 온갖 거짓말로 4대강 죽이기 사업을 벌이면서 수십조 원의 세금을 토건카르텔끼리 나누어 먹는 정책, 그리고 2018년 동계올림픽을 위해 또 다시 수십조 원의 예산을 투입할 계획에 분주한 모습을 보면, 정책의 우선순위만이 아니라 패거리주의와 근시안적 태도가 드러난다. 지금은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복합적인 위기 현실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 냉정하게 성찰하고 전문가들의 지혜를 모아서 그 상생의 미래를 위해 총력을 기울일 때지만, 현재와 같은 천민자본주의와 패거리주의와 근시안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다음 세대들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일에 열중할 뿐이다.
6. “지금은 미래를 결정할 역사적 순간이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이처럼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환경을 계속 파괴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체제 분석의 대가인 임마누엘 월러스틴을 비롯해서 여러 학자들은 지금이 자본주의 체제의 마지막 위기에 봉착한 “선택의 순간”이라고 지적한다. 그만큼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 현실들, 즉 전 지구적 차원의 기후붕괴, 석유 에너지 고갈, 식량난과 식수난, 대멸종, 양극화, 금융위기, 기후 난민과 기후 전쟁 등 복합적이며 구조적인 위기 현실들이며 점차 더욱 악화되는 현실들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지구의 날”이 선포된 후 지난 40년 동안 환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지만, 인류 전체가 종말을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서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구 헌장” 서문의 첫마디, 즉 “인류는 현재 우리의 미래를 결정해야 할 역사적 순간에 서 있다”는 말은 우리 세대의 가장 절박한 진실이다.
미래를 결정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성이지만, 오늘날 경제성장과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려는 자본주의체제와 이를 적극 뒷받침하는 정치체제와 공권력, 그리고 소비주의에 사로잡힌 대다수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방식이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이처럼 자기 파괴적인 정치경제 시스템과 문화 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자본주의체제와 정치체제의 모순들과 문화적 결함들을 포괄적으로 분석하고, 새로운 정치경제 시스템을 만들어나갈 정신적 자원을 찾아내는 과제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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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es Gustave Speth |
이런 포괄적인 과제를 수행해온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이 제임스 구스타브 스페스(James Gustave Speth, 1942- )이다. 그는 사우스 캐롤라니아 주 오린지버그에서 태어나 예일대학교를 졸업했으며(1964년), 예일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변호사로서 40년 동안 환경운동을 하면서, “천연자원보호협회”(NRDC)를 공동으로 창설하여 1970년부터 77년까지 그 선임변호사로 일했다. 지미 카터 행정부의 백악관 환경문제 보좌관(1977-81년)을 역임하면서, “글로벌 2000 리포트”(1980)를 발간하는 등 기후변화와 대규모 환경재앙에 대해 경고했다. 조지타운 대학교(1981-82년)에서 환경법과 헌법을 가르쳤으며, 1982년에 워싱턴에 환경 두뇌집단 “세계자원연구소”(WRI)를 창설하여 1993년까지 그 소장을 맡았고, 빌 클린턴 대통령의 환경 및 에너지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유엔 산하 국제개발기구(UNDP) 사무총장(1993-99년)을 역임하면서 세계의 개발과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했다. 그리고 1999년에 예일대학교 삼림학과 환경학부 학장이 되어 2009년 퇴임했다. 그는 자신의 오랜 환경운동과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이 글에서 중심적으로 다룰『미래를 위한 경제학: 자본주의를 넘어선 상상』(The Bridge at the Edge of the World: Capitalism, the Environment, and Crossing from Crisis to Sustainability, 2008) 이외에도『지구화와 환경』(Globalization and Environment, 2003), 『아침의 붉은 하늘』(Red Sky at Morning: America and the Global Environment, 2004)을 발표했다.
7. “현대의 자본주의는 지속가능성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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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구스타브 스페스는 세계 경제규모가 급속도로 팽창하는 추세와 그로 인해 더욱 급속도로 파괴될 환경의 문제부터 지적한다.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후 1950년대까지 이룩한 경제 규모는 7조 달러였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의 경제 규모가 10년마다 7조 달러씩 증가하고 있다. 이 정도 속도라면 14년 후 지구의 경제 규모는 지금의 2배가 될 것”(11쪽)이라는 엄중한 전망을 갖고 환경 문제에 접근한다. 더군다나 지난 40년 동안 그가 열정을 쏟았던 환경운동이 결국에는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는 지고 있다”(13쪽)는 반성이다. 즉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은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며, 탐욕스런 기업들과 기업 이익과 성장 목표에 놀아나는 정부 그리고 소비주의에 중독된 시민들은 여전히 기후문제에 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그 주요 원인은 환경운동가들이 대부분 정치경제체제 내에서 활동했는데 그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그는 그 근본 원인이 현대 세계가 개인주의, 소비주의, 세계화에 대한 집착, 사회와 공공복지의 부족 등 “극단적인 자본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18쪽)는 사실에 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현대의 자본주의는 기후혼란, 삼림 감소, 토양 유실, 담수 감소, 해양 수산자원 감소, 유독성 오염물질, 생물 다양성 훼손, 질소로 인한 과영양화 등 서로 연관된 결과들을 초래해서 지구를 점차 인류가 살 수 없는 폐허로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그는 현대의 자본주의 정치경제 시스템의 특징을 분석하고, 이어서 환경운동이 실패한 원인들을 찾는다. 첫째로,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이윤 축적과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성장숭배주의”에 사로잡힌 “무자비한 경제”(85쪽)로서 천연자원을 소비하고 공해물질을 배출하면서도 그 환경파괴 비용을 “외부 비용”으로 처리한 채(90쪽)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장의 실패”를 드러낸다. 더군다나 “정부는 시장의 실패를 바로잡으려 하지도 않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관행으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91쪽)고 비판한다. 또한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미래보다 현재를, 공공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101쪽) 성향을 갖고 있어서, 지속가능성 즉 “미래 세대에 대한 공평함”을 부정한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란 “금융 이익에 좌우되며 경제 성장에 집착하는 대표적인 이익집단 정치”(104쪽)라고 비판한 정치학자 존 드라이젝에 동의한다. 이런 점에서 현대의 정치경제 시스템은 “지속가능성의 적”(96쪽)이라고 비판한다.
둘째로, 그는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성장이 갖는 특징들을 분류하여 (1) 고용 없는 성장, (2) 무자비한 성장, 즉 경제성장의 열매를 대부분 부자들이 독점한다, (3) 무언(voiceless)의 성장, 즉 경제성장이 민주주의로 이어지지 않는다, (4) 뿌리 없는 성장, 즉 경제성장으로 사람들이 고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한다, (5) 미래 없는 성장, 즉 현재의 세대가 후손들이 쓸 자원까지 모두 낭비해버리는 성장으로 분류하고(161쪽), 대부분의 국가들은 성장숭배에 빠져 지속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셋째로, 그는 환경운동이 실패한 이유가 이런 정치경제 시스템이 주도하는 경제성장주의와 기업 이익 우선주의, 주주 중심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강력한 기업들은 “투명성도 통찰력도 없고 오로지 이익과 성장에만 눈이 멀었”(128쪽)으며, “합법적인 뇌물인 선거 자금”을 통해 수많은 정치인들을 압박하며, 환경법을 집행하는 기관들조차 기업체들의 끝없는 소송과 정치적 반격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환경운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판단이다.
8. 자본주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이처럼 자기 파멸적인 현대 자본주의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그는 우선 현대의 자본주의 정치경제 시스템과 문화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판단에서, 현재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개인과 공동체, 지구를 파괴하는 이유들을 자세하게 분석한다. 첫째로, 그는 여러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해서, 소득이 1만 달러를 넘게 되면 경제성장이나 소득이 늘어나는 것이 더 이상 개인의 삶의 만족도와 심리적인 행복을 크게 증진시키지 않으며 소폭 떨어지기까지 한다는 사실(189쪽)에 주목한다. 소득이 늘어남으로써 오히려 불안 정도가 심해지며 사회적 소속감도 희미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항상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한다”(192쪽)는 사실 때문이다. 결국 정신과 의사 피터 와이브로우가 『미국의 조울증』에서 지적한 것처럼, “유토피아적인 사회질서에 대한 미국의 꿈은 물질적 성공을 개인적인 만족과 동일시하는 믿음과 사회적 진보의 핵심이 기술발전으로 커진 조증의 욕망과 울증의 불안이 마구 뒤섞인 수렁에 빠졌다”(197쪽)는 진단이다. 한 마디로, 현대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부가 증가하면서 정신이 사라지는 현상”과 “먹고사는 데 급급해서 인생을 사는 데는 실패”(198쪽)하는 “물질적 풍요 속의 정신적 기갈”을 초래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불안할수록 그에 대한 보상심리로 더욱 물질에 집착하고 더욱 많이 소유하려 드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초래하는 병리현상일(223쪽) 따름이다.
둘째로, GDP의 성장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가 직면한 위기들, 즉 과잉생산과 전 세계적인 양극화, 국가의 적법성과 정치적 권위의 위기 그리고 지속가능성의 위기는 서로 연관된 위기들로서,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해질수록 계급과 인종 간의 증오와 폭력이 점차 만연하고 있는 현실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세계 공동체의 유대관계를 파괴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에너지의 고갈과 경제의 붕괴, 생태계의 파괴로 인해 경제상황이 악화됨으로써 권위주의 체제나 기득권층의 게이트 커뮤니티(gate community)와 같은 “요새 사회”가 등장하는 현실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서로를 의심하고 적대시하거나 타자에 대해 무관심한 불행한 현실이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실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310쪽)이기 때문에, 환경 문제만이 아니라 불평등을 완화시킬 사회정의를 시급히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로, 오늘의 자본주의 정치경제 시스템은 그 팽창주의 때문에 광고를 통해 소비를 자극하고 과잉생산에 몰입함으로써 생산의 성장으로 인한 폐기물의 증가와 더불어 자원고갈과 남획으로 인해 생태계를 파괴하여 황무지로 만드는 시스템이다. 단적인 예로, “산업경제로 투입되는 연간 자원량의 1/2에서 3/4은 1년 안에 폐기물로 처리되는”(94쪽) 시스템이다. 따라서 이런 시스템은 더 이상 지속가능한 시스템이 아닐뿐더러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의 행복을 파괴하는 시스템일 뿐이다.
9. “새로운 의식에서 출발하는 문화적 변혁”
제임스 구스타브 스페스는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정치경제 시스템의 실패를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개발을 통해 대다수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대안적 시스템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학자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자본주의와 새로운 정치 시스템에 대해 광범위하게 모색한다. 그는 이런 거대한 시스템의 변화를 정치권이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대신에 종업원 소유제 기업이나 소비자 신용조합과 같은 새로운 풀뿌리 조직의 성장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와 더불어 새로운 의식과 가치관의 변화에 입각한 “거대한 문화적 변혁”이 정치권에 영향을 주고 체제변화를 추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결국 환경의 위기는 “정신의 위기”(277쪽)이기 때문에, “새로운 지속가능성 세계관”(New Sustainability worldview)이 현재의 시스템을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의 씨앗(278쪽)이며, 이런 씨앗은 이미 뿌려져서 자라나고 있다고 본다. 이 새로운 의식은 기존의 지배적인 의식인 인간중심주의, 물질만능주의, 소비주의, 개인주의, 자연의 지배가 아니라 “삶의 질, 인류의 연대와 생태학적 감수성”(283쪽)을 핵심으로 하는 의식이다. 특히 시장을 환경 보호를 위한 강력한 도구로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오염자 부담 원칙”(151쪽)에 따라 기업들이 환경파괴 비용을 “외부 비용”으로 처리해왔던 것에 대해 “가격을 바로 잡는” 과제를 수행해야 하며, 또한 “미래 세대를 위해 자원을 비축하고 시장이 침해할 수 있는 영역을 제한해야”(157쪽) 하는데, 이런 과제 모두 기업과 소비자들에게 매우 불리한 것들이기 때문에 창조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우선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해서 유럽에서는 시장과 국가가 파트너 관계에 있는 사회민주주의자본주의가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이미 기업들 중에 친환경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희망을 건다. 즉 예전의 기업들의 목표는 규모, 성장, 이윤 극대화였지만, 새로운 기업들, 즉 공익, 지속가능성, 평등, 인간의 권익을 존중하는 미래형 기업들(254쪽)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세계경제포럼에 대항하는 세계사회포럼과 같은 전 지구적인 시민운동과 저항운동도 더욱 힘을 얻고 있으며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특히 그는 환경 문제를 인권 보호 차원에서 접근할 것을 주장한다. 즉 “깨끗한 물에 대한 권리,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권리, 문화적 생존에 대한 권리, 기후혼란과 파멸을 겪지 않을 권리, 유독물질이 없는 환경에서 살 자유, 미래 세대의 권리”(309쪽)는 인권의 연장이라는 판단이다.
10. “심연 위에 걸린 다리를 향해서”
결론적으로 그는 우리 앞에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제까지 걸어왔던 길의 끝은 “끝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파멸의 길이다. 지금과 같은 경제성장이 계속될 경우에는 21세기 중반에 생태 자산이 고갈되고 대규모 생태계 붕괴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의 길은 “심연 위에 걸린 다리로 향하는 길”(324쪽)로서, 그 길은 “소유가 아닌 존재하기, 욕심내지 말고 필요한 것만, 부가 아닌 행복, 개인이 아닌 공동체, 내가 아닌 남, 따로따로가 아닌 함께, 경제가 아닌 생태, 자연과 별개가 아닌 자연의 일부, 초월한 존재가 아닌 서로 기대야 할 존재, 오늘이 아니라 내일”(323-24)을 중심적인 가치로 삼는 생활방식의 길이며, 정치경제 시스템의 중심 원리가 되는 길이다. 특히 소수의 대기업들이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고를 통해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언론은 “진정한 보도의 기능을 잊은 채 독자와 광고를 늘이기 위해 유명 인사들의 가십, 자기계발 기사와 시시한 의료 기사들을 전면에 싣고 있는”(123쪽)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의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설교자, 철학자, 심리학자와 시인들의”(322쪽) 창조적인 리더십이 절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오늘날 개인과 사회와 지구를 파괴하고 대홍수를 만들어내는 자본주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넘어서는 일이 결국에는 가치관의 문제이며 종교적이며 영적인 문제라는 그의 지적 앞에서, 일차적으로 이토록 엄중한 위기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들(75쪽)을 극복하기 위해 교회가 담당할 과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선 이런 총체적인 지구 파멸의 위기 현실에 대해 부정하거나 체념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의 뜻에 맡겨야지”라고 말하는 섭리론은 창세기의 대홍수에 대한 해석에서 정복자들과 지배체제에 의한 학살과 착취에 의한 떼죽음조차 신의 뜻으로 합리화했던 신성모독을 되풀이 하는 것일 따름이다. 또한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교회가 무엇보다 자기 영혼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자기중심적(egological) 의식을 극복하고 생명의 고귀함과 아름다움, 공동체의 우애와 돌봄에 대한 체험적 인식을 통해 생태학적(ecological) 의식이라는 새로운 의식, 그와 더불어 전근대적 미신을 극복하고 합리적인 성찰과 연대성이라는 복음에 입각한 반문화적 저항과 돌파의 삶에 더욱 힘을 쏟을 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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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고맙게 다 읽었습니다. 새벽강님 강건하소서.
이 긴 글을 다 보셨어요? 고맙습니다. 향강 박사님도 김준우 박사님을 아시겠지요. 김 박사님은 "예수포럼"(서울 청파 감리교회)에서 몇 번 만나 뵜어요. 주로 기독교 서적 출판과 교육 사업을 하시는데 말 수가 적으시더군요. 그래서일까요^^, 글은 이를 만회하려는 듯이 항상 길다는 느낌^^. 윗글도 조금 줄일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봤습니다. 사실 겹치는 부분도 있어 보입니다. / 이 건 중요하지 않고요. 글에서도 나타나듯이 생태 위기와 이에 대해 기독교인들의 경각심을 높이는 글을 요즘 많이 쓰십니다.
향강 신부님과 새벽강 선생님을 한곳에서 뵙게 되네요.
김치경 시인님께서 향강 신부님 칭송이 대단하고, 김경일 신부님께서 새벽강 선생님의 격려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더군요.
두분 모두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이틀 전, 김 신부님의 목소리도 들을 겸 통화.
전화기 너머 진심이 뚝뚝 흐르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