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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요한복음 16 : 33
제목: 세상을 거스리는 용기
일시: 2009. 3. 1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지난 주 키르세하임에서 “Shalom of Jesus, Courage against the world! 예수의 평화, 세상을 거스리는 용기”라는 주제로 코스타학생수련회가 열렸다. 약 850명의 젊은이들이 참석하였고 23분의 강사들이 특강이나 세미나를 인도하였다. 남서울 은혜교회의 홍정길목사님, 한때 가수로 활약했지만 지금은 LA 코너스톤교회에서 사역하는 이종용목사님, 미국 나사 우주선의 외부 얼음 방지하는 기술을 가진 우주개발사사장 정재훈박사, 옥수수박사로 알려진 김순권교수님, 그리고 여러 음악가, 선교사님들과 다른 여러 목사님들이 우리에게 도전을 주었다. 그들의 공통의 주제는 세상을 거스리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다.
II. 세상을 거스리라.
“세상”이라는 단어는 이미 그 안에 네거티브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뭔가 잘못되고 정상이 아닌 곳이 세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진실이 없고 거짓이 있고, 정의가 없고 부정이 있으며, 공평하지 못하고 억울한 일이 있고, 법을 지키고 제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바보같고 요령껏 살면서 가끔 법도 피해가면서 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평안함이라기보다는 쾌락과 혼돈이 있는 곳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이렇게 생긴 것이다. 이런 세상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을 거스리라!!! 이런 세상은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갈 곳이 아니요 거스리면서 살아야 할 세상이다. 주님은 성경 안에서 세상을 거스리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계시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말을 하지만, 주님은 낮아지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지혜를 거스리라는 것이다. 세상은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으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을 거스리는 것이다. 세상은 소유하려고 애쓰지만, 주님은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은 강해지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약할 때 우리의 강함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부자가 되려고 하지만 주님은 가난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왜 그리 성경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못살게 굴까라는 생각이 든다. 왜 역설적으로만 말씀을 하시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세상이 거꾸로 되었기 때문이다. 비진리가 진리의 자리에 떡하니 앉아서 진리를 내어 쫓은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거스리라고 요구하고 있다.
요한복음 15장 6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우리는 세상 속에서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함을 알아야 한다. 세상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는 것이 힘이 들어야 정상이다. 세상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이 불편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늘의 원리를 세상에 적용시키려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예)한국에 있을 때 고향을 방문하기 위해 차를 몰고 가다가 한적한 국도 내리막길에서 교통경찰에게 걸렸다. 경찰이 손을 들고 차를 세울 때처럼 심장이 뛰는 때가 없다. 얼마짜리냐? 봐달라고 할까?(Look at me) 어떻게 이 위기를 넘길 것인가? 좀 억울하다. 쫙 뚤린 길, 그것도 내려가는 길, 그런 길에서 보통 80 이상은 달릴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60킬로가 제한속도라고 하면서 면허증을 내어 놓으라는 것이다. 이제 딱지를 떼면 5만원 이상의 벌금을 내야하고 은행에 그 돈을 내러 가야하고... 얼마나 골치가 아픈가? 항의를 해도, 불쌍한 표정을 지어도 결국 버팅길 수가 없어서 면허증을 줄 수 밖에 없었다. 보통 어떻게 하는가? 면허증을 줄 때 돈을 건네는 것이다. 제가 어떻게 했겠는가? 주었다. 그는 받았고 그렇게 헤어졌다. 계속 차를 몰면서 마음에는 여전히 흥분이 되어 있었다. 경찰이 비겁하게 그렇게 숨어서 기다렸다는 것이 속이 상했고 빼앗긴 돈 5천원이 속이 상했다. 문제는 그 당시 경찰에게 주지 말아야 할 돈을 주었다는 것에 어떠한 윤리적인 죄책의식을 못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오늘날까지 내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것은 숨어 나를 적발한 그 경찰에 대한 분노도, 빼앗긴 돈도 아니다. 거스리지 못한 양심이 계속 찌르고 있다. 세상을 거스려 살 때 얼마나 불편한가? 세상의 관습대로 살면 편할텐데 말이다.
III. 세상을 거스릴 때 에너지가 발산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거스릴 때 고난과 핍박을 맞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만일 우리가 세상을 거스리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함께 보조를 맞추어 간다면 세상은 우리를 핍박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환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거스려야 하기 때문에 고난이 있는 것이다.
고난이라는 단어가 비록 두려워 보이는 단어이지만, 그 단어 자체는 아주 포지티브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고난은 받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살인마 강호순이 포박 당하고 옥에 갇히고 자유를 박탈당할 때, 그 누구도 강호순이 고난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여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가 받는 것들은 고난이 아니고 벌이다. 하지만, 고난은 안 받아도 될 것을 받는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거스리며 세상을 거스리기에 고난을 받는다. 거스린다는 것은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 차별성이 있다는 것이다. 차별성이 있음으로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을 수도 있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차별성이 사라져 간다는 것이다. 교회 밖이나 교회 안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고 했는데(교회가 사회를 리드했다), 조금 지나니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안다니는 사람이나 똑 같아(교회의 차별성이 없어졌다)라고 하였다. 이제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더해 혹은 내 그럴 줄 알았다(교회에 대한 비난과 핍박)고까지 한다.
우리는 거스리는 삶을 살아서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도 그것이 큰 에너지임을 알아야 한다. 바람개비를 아는가? 초등학교 시절 공작시간에 바람개비를 만들어 본 적이 있다. 수수깡에다가 색종이를 날개식으로 만들어서 수수깡 끝에 실핀침을 박아 돌리는 놀이물이다. 그것을 걸어놓으면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를 측정할 수 있다. 우리는 바람개비를 만들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부지런히 돌리며 놀았다. 바람개비가 언제 잘 돌아가는가?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서 함께 가면 바람개비는 돌지 않는다. 바람개비는 바람을 안고 부딪히면서 나갈 때 돌게 된다. 바람은 고난과 같다. 부딪히는 것이다. 나가려면 힘을 써야 한다. 그런데 이 바람을 맞을 때 바람개비는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가는 바람개비는 에너지이다.
거스리지 않는 사람은 고난이 없다. 바람을 거스리는 고난 속에서 에너지가 발생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별 문제없이 살고 고난도 없으면 거기에는 에너지가 없다. 세상을 거스릴 때 거기서 에너지가 분출되는 것이다. 영향력이 있게 되는 것이다. 독일 들판에 보면 풍력발전이 있다. 그것을 세우는 곳은 바람이 가장 많은 곳이리라. 바람을 등지고 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바람이 없는 곳에 세우지 않는다. 바람이 정면으로 강하게 불어오는 곳일수록 최적의 설치 장소가 될 것이다. 풍력발전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그 밑에 가서 보았는데 20층 빌딩은 족히 되는 것 같다. 날개가 휙휙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바람을 맞은 풍력발전기는 에너지를 모은다.
거스르는 삶을 살라. 좀 불편할 수 있다. 똑똑한 사람들의 눈에는 요령이 없어 보이고 미련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 에너지가 있다. 기독교역사를 보라. 그들이 세상과 타협하고 함께 보조를 맞추어 정치와 함께 하고 재물과 함께 했을 때는 세상보다 더 했고 썩었다. 하지만, 핍박을 받고 피의 순교를 했을 때 진리는 더욱 빛을 발했고 성장했다. 세상을 거스리는 것은 진리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IV.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고난으로 우리가 넘어져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주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니 코드가 맞지 않는 세상에서는 안 통하는 것 같다. 요령껏 세상의 방법대로 하는 사람이 더 잘되는 것 같다. 인내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이 더 편안하게 사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어느 정도 버티다가 힘이 떨어지면 포기한다. 믿음으로 살다가 지치면 과거로 돌아간다. 그때는 더욱 억울하다. 지금까지 참은 것이 억울하다. 끝까지 하라. 담대하게 회의에 젖지 말고 감당하라. 용기를 갖고 포기하지 말고 담대히 부딪혀라. 마음을 굳게 하라. Take courage! Seid getrost! 바람개비를 다시 보라. 바람이 전혀 불지 않을 때, 어떻게 사는가? 바람개비는 돌아야 하는데 돌지 않으면 랑바일리쉬 하기에 달려간다. 달려야 바람개비는 돈다. 용기를 갖고 마주쳐야 한다. 너 이리 와 보라. 함께 한판 붙자라고 해야 한다.
우리가 용기를 가질 근거는 이미 주님이 승리를 쟁취하셨기 때문이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다윗과 골리앗을 보라. 다윗이 골리앗을 처음 본 것은 형들을 위문하러 갔다가 이스라엘 군대 앞에서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는 골리앗이다. 그는 270cm 의 키(최용만도 가슴에도 안 올 것이다. 농구를 하면서 양영광형제와 한결형제가 하는 셈이다) 에 베틀채 만한 창을 가지고 있었고 허리에는 칼을 찼으며 방패를 드는 자가 그를 호위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전사로 길러진 자였다. 그는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 보내라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사울과 이스라엘군대는 놀라 크게 두려워했다. 어찌할 줄 모른다. 이때 다윗이 나타난다. 데뷔무대인 것이다. 다윗이 저 불레셋 장수 골리앗을 넘어뜨린다고 했을 때 사울왕이 그를 인터뷰했다. 하지만, 보자마자 실망하고 만다.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이다. 하지만, 다윗은 아비의 양을 치던 시절을 말한다. 사자나 곰이 양을 해할 때 쫓아가서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다고 한다. “골리앗도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라고 한다. 다윗은 용기를 가졌다. 거스리는 용기를 가졌다. 골리앗의 말이 영 귀에 거슬렀던 것이다. 이미 승리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명에 따라 골리앗에게 담대하게 나아갔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47). 그는 시냇가에서 주은 조약돌 5개를 주머니에 넣고 단 하나를 가지고 그의 이미에 맞추어 쓰러지게 만든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그를 보고 모두들 놀랬다. 이스라엘과 불레셋 양 진영의 군사들은 숨을 죽였고 무슨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음을 알았다. 그리고 쓰러진 골리앗에게 가서 그의 칼을 가지고 목을 베었다.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정적이 돌았을 양 진영에서 소리가 난다. 한쪽은 승리의 함성이요 다른 한쪽은 두려움의 비명과 혼돈이었다.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지르며 불레셋 사람들을 쫓아”(삼상 17 :52) 죽였고 전리품을 거두었다. 이전에 그렇게 두려워하던 이스라엘군사들이 이제는 용기백배하여 달려드는 것이다. 이미 승리는 우리에게 왔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다윗이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았기에 담대했던 것처럼, 이스라엘백성이 골리앗의 죽음을 보고 이미 이긴 전쟁으로 확신한 것처럼, 담대하라. 이미 우리에게 승리가 있는 것이다.
실망이 우리를 찾아올 때 용기를 갖고 다시 일어나 보라. “실망”이란 녀석은 대단히 실망할 것이다. 좌절을 무릎 꿇여라. “좌절”이라는 놈은 우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소망을 잃어 버릴 때 미소를 짓겠지만, 좌절로 하여금 당황케 만들어 주라. 앙스트는 우리를 앙스트 갖게 만들지만, 그들로 하여금 앙스트를 갖게 하라. 두려움을 두렵게 만들어 주라. 확 놀래켜 주는데, 옆에서 뭐해라고 하면 두려움을 황당해 할 것이고 나를 두려워할 것이다.
V.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거스리는 분이셨다. 그가 십자가를 지신 것도 세상을 거스렸기 때문이다. 로마와 유대인들과 유대지도자들에게 거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을 거스리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 앞에 어떠한 골리앗이 있는가? 골리앗은 넘어지게 되어 있는 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승리를 주셨기에 담대하라.
이 한 주간도 세상을 거스리며 올라가는 용기를 갖고 살아가기 바란다. 나라가 어렵다고 하고 세계가 흔들거린다. 멀미가 날 지경이다. 환율이 높아 미국 카나다 일본 중국 그리고 유럽등지에서 유학하는 우리들이 힘이 들기도 하다. 건강과 시험과 여러 삶의 역경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담대하게 이 한 주간을 맞이하라. 그리고 한판 붙자고 하자. 바로 이 현장이 여러분의 데뷔무대가 되기를 바란다. 세상 속에서 거스리는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타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원한다.